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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도 Jan 08. 2022

나를 닮은 얼굴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

친구의 할머니가 얼마 전 서설이 소복이 내린 아침에 영면하셨다. 할머니는 백 년을 사셨다.  발인을 마치고 온 친구는 할머니로부터 사랑한다, 예쁘다는 말만 들었다고 회고했다. 친구에게 들었던 할머니의 애틋한 첫사랑 이야기 때문인지 한 번도 뵙지 못한 할머니의 얼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내 친구는 엄마를 많이 닮았다. 두 사람이 나란히 찍은 사진 속에 미래의 내 친구가 있다. 친구 엄마도 당신의 엄마를 닮았다고 하니 친구 모습에 할머니의 얼굴이 담겨 있을 것이다. 할머니도 내 친구처럼 곱고 다정한 분이었겠지.


중학교 1학년 때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생각났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언제나 백발이었고 쪽진 머리를 하고 있다. 한 뼘 크기의 뭉뚝한 은비녀를 꽂았고, 특별한 날에는 나비 무늬가 음각된 은비녀를 꽂았다. 할머니의 백발 유전자는 당신 딸들을 건너 손녀딸들에게 물려졌다. 할머니 덕분에 나는 일찍이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는데, 사촌 언니들은 나보다도 훨씬 더 빨리 머리가 희어졌다.


늦가을이면 싸리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수십 번씩 쓸던 우리 할머니. 감나무 잎들은 작은 바람에도 우수수 떨어졌다. 할아버지는 나뭇잎이 떨어질 때마다 마당을 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불평했지만 나는 빗살무늬 토기 같은 빗자루 자국이 생긴 깨끗한 마당이 언제나 좋았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강경 외갓집을 떠나 답십리 큰 아들 집으로 들어가셨다. 아픈 몸이 된 할머니는 고집하던 쪽머리를 자르고 관리하기 쉬운 커트 머리를 했다. 명절에 할머니를 보고 온 엄마의 긴 한숨이 기억난다.  할머니가 입고, 덮고 있던 것을  모두 벗겨 빨아 말려 놓고 왔다고 했다. 넷이나 되는 조카들의 침대보와 이불도 모두 걷어서 빨았다. 할머니 안부는 말해주지 않고 그렇게 빨래한 얘기만 했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그건 그냥 빨래 얘기가 아니었다. 아픈 엄마를 보는 슬픔, 오빠 부부에 대한 섭섭함, 딸 노릇 잘 못하는 자격지심을 빨아서 말리고 왔다는 말이었다. 엄마의 타서 시꺼메진 마음이 깨끗이 세탁될리는 없었겠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이었다. 일요일 조금 늦은 아침이었던 것 같다. 이상한 꿈을 꾸고 있었다. 언덕에서 사람들과 강강술래를 하는 꿈이었다. 동요에서 나오던 그 '쟁반 같이 둥근달'을 보며 사람들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달맞이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달빛만큼 환했다. 거기 모인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그러다 갑자이 어디선가 슬프고 슬픈 울음소리가 들렸다. 행복한 기운에 감싸여 있던 나는 걱정이 되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는데  우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울음소리는 점점 커졌고, 울음소리가 커지는 만큼 달도 따라 커지더니 어느 순간 언덕 전체를 삼켜 버렸다. 달에 빨려 들어가는 공포에 눈을 번쩍 떴는데, 아래층에서 엄마의 통곡소리가 들렸다. 외삼촌으로부터 할머니의 부고를 들은 엄마가 수화기를 붙잡고 오열하는 소리였다. 그 아침 꿈 얘기를 한 번도 엄마에게 한 적이 없다.  할머니가 달맞이를 하던 중에 달의 품으로 들어갔다고 엄마에게 말했다면 조금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엄마는 성격은 호탕한 할아버지를 닮았지만 얼굴은 할머니를 더 많이 닮았다. 나는 엄마를 닮았다. 내가 기억하는 중년의 엄마 모습을 이제 거울 속에서 만난다. 돌아가신 엄마가 나를 본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내 얼굴에서 할머니와 엄마의 모습이 찾아서 알아봐 주는 이들을 만난 지 참 오래되었다. 엄마 돌아가시니 외갓집 식구들 만날 일이 거의 없어졌다.


강경 외갓집은 내게 막연한 그리움의 장소이다. 막상 가보면 내 기억 속 그리움이 퇴색될까 봐 마음으로만 그리워하는 곳. 지난여름 논산 출장길에 일정을 맞춰 잠깐 강경에 갔었다. 아주 아주 오랜만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사던 터 위에 새로 지은 집에서 막내 외삼촌 부부가 살고 있을 뿐, 내 기억 속 동네는 신기할 정도로 그대로였다. 여전히 거실에 앉아 강경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볼 수 있는 곳. 거실에서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들면 승객 중 누군가는 반갑게 손을 흔들어 줄 것 같다.  중년이 된 나를 보고 외숙모는 몇 번이나 말했다 "나이 들수록 엄마를 더 닮아가네." 그 말을 듣는데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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