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 엄마 그리고 자전거
아주 어릴 적에, 무슨 연유로 엄마와 나는 강경의 외가에서 봄, 한 계절을 보낸 적이 있다. 기찻길 옆 언덕 위에 위치한 외갓집 툇마루에 엄마랑 나란히 앉아서 강경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구경하다 보면 한나절이 금세 지나가던 그런 날들이었다. 때때로 한 무리의 군인들을 태운 기차가 지나가곤 했는데, 우리가 손을 흔들면 군인들은 우리를 향해, 아니 엄마를 향해 환호성을 보냈다.
앞마당에 보라색 꽃들이 피기 시작할 무렵, 엄마는 마당가에 서있던 먼지 쌓인 자전거를 끌어내 바가지로 물을 뿌려 닦고, 봄볕에 말렸다. 엄마는 그 밤부터 외갓집 근처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자전거를 배우기 시작했다.
외갓집도 그랬지만, 외갓집 동네의 많은 집들이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짓던 때라서, 저녁이면 굴뚝에서 피어오른 연기와 볏짚 타는 냄새가 동네를 하얗게 감쌌다. 내가 중고 책방이나 다락방의 쾌쾌한 냄새를 좋아하는 것은 아마도 이 냄새들이 외갓집 마을의 저녁을 감싸던 그 훈향과 닮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냄새들 속에는 달빛 같은 얼굴을 한 엄마와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자전거를 끌며 나란히 걸어가는 저녁 풍경이 담겨있다.
엄마가 혼자서 자전거 타기에 성공했던 그 밤을 기억한다. 뒤에서 엄마의 자전거를 붙잡아 주던 사람이 자전거를 힘껏 밀며 손을 놓았을 때, 엄마가 탄 자전거는 한번 크게 휘청거리다가 천천히,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어린 나는 엄마가 넘어질까 걱정을 하며 자전거 뒤를 쫓아 달려간다. 뒤뚱거리던 자전거는 어느 순간 균형을 잡으며 날렵하게 운동장을 가로지른다. 쏴악 쏵, 자전거가 운동장을 가로지를 때, 자전거 위에서 자랑스러운 듯, 수줍은 듯 웃는 엄마가 나는 무작정 예쁘다. 자전거가 처음 출발점으로 되돌아와 멈춰 섰을 때, 엄마에게 저녁마다 자전거 타기를 가르쳐 주던 그분도 환하게 웃으며 달빛 아래 서있다.
엄마와 나는 그 봄이 끝날 무렵 아빠가 있는 서울로 갑자기 돌아왔다. 그 이후 나는 엄마가 자전거 타는 것을 더 이상 보지 못하였다.
토토가 검열당해 살아남은 필름을 영사기에 돌려 ‘시네마 천국’을 추억하듯, 나는 봄밤과 자전거, 달빛과 훈향의 기억을 불러 엄마의 아름다운 한 시절을 추억한다. 엄마는 왜 더 이상 자전거를 타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봄 내내 엄마에게 자전거를 가르쳐 주며 환하게 웃던 그 남자는 과연 누구였을까. 엄마는 그 봄밤의 운동장을 어떻게 추억하며 살았을까.
너무나 생생하고 아름다워 어쩌면 환상이 아닐까 싶은 기억들이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생생 해지는, 말을 걸면 대답할 듯, 손짓하면 다가올 듯, 그러나 그럴 수 없으니 더 그립고 애잔한 마음속 무늬들. 우리가 그리움이라고 부르는 그 무늬들이 요즘 내게 자꾸 말을 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