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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도 Jul 31. 2020

열대야

그 밤에 생긴 일

"오늘 망고나무를 심으면, 내일 망고를 딸 수 있을 것 같은 날씨야!”
  
누군가 내게 이런 시적인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망고나무를 심는 대신 카페에서 망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내 인생에서 가장 뜨거웠던 어떤 밤을 떠올렸다.
   
성희롱 사건 조사를 위해 혼자서 캄보디아의 한 도시로 출장을 간 적이 있다.  어찌어찌하여 사건 현장인 양철지붕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사람들은 네팔에 다녀와서 크다, 높다는 개념을 바꾼다고 하는데, 나는 그날 밤 이후 덥다는 개념을 바꿨다.   

성희롱 장소를 확인하고, 현지 기관 소속 직원들을 인터뷰하고 나니 해가 떨어졌다. 호텔로 가려고 택시를 부르려고 하니 현지인 직원들이 늦었다며 자고 가라고 붙잡았다. 사건 현장인 직원용 숙소는 낮에는 강당으로 사용되는 곳으로, 큰 방에 미닫이 격자문을 달아 공간을 구획하여 만든 ‘방’이었다. 그렇게 만든 방이니 창이 있을 리 없고, 시건장치도 없다.

한국인 남자 간부가 그 숙소에 있을 때, 샤워장이며 방문을 벌컥벌컥 열고 다녔고, 샤워를 마치면 옷도 입지 않고  돌아다녔다고 했다.   

직원들의 호의도 고맙고, 늦은 밤에 혼자서 택시 타는 것도 무섭고, 사건 파악에도 도움이 될 듯해서 선뜻 하룻밤 묵어 가기로 결정했다.  

내게 방을 안내해주던 실무자는 방이 조금 더울 수도 있다며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하룻밤 묵게 해 준 것도 고마운데, 무슨 소리냐.. 난 더위도 잘 안 탄다, 라며 “노 프로블럼. 돈 워리” 쿨하게 말하고 방으로 들어왔는데, 10초도 안돼서 그 밤의 모든 결정을, 나의 오지랖을 죽도록 후회했다.

그 밤 내내 다시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일에 "노 프로블럼" 같은 말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창문 하나 없는 작은 방에 선풍기로 보이는 기계는 온풍기보다 더 훈훈한 열풍을 만들어 냈고 양철지붕에서는 끈적한 열기가 솜이불처럼 내려 앉았다. 숯가마 사우나에서 담요를 둘러 쓰고  앉아 있는 느낌이랄까. 옥수수나 감자를 천장에서 떨어지는 열기로 맛있게 찔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덥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몸이 조금씩 찐 감자로 변하는 느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고르게 익어가도록 몸을 좌우로 뒤척이며, 숨을 헐떡이기. 그리고 벽시계를 바라보며 새벽이 오기만을 기다리기. 벽시계도 더위를 먹었는지, 시침도 분침도 갈수록 느리게 움직였다. 일순간 시계가 흐릿하게 보여, 마침내 내가 기절했나 싶었으나, 땀인지 눈물인지 눈 속으로 들어가 앞이 잘 안보이는 것이었다.

그 밤 이 지구별에서 나 만큼 절절히 새벽을 기다리던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다른 방에 사람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세상 조용했다. 나는 더 이상 예의고 매너고 생각할 여유가 없어, 샤워라도 하려고 미닫이 문을 드르륵드르륵 열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샤워기 아래서, 설레는 마음으로 수도 밸브를 돌리는데, 기대했던  찬물은커녕 비명을 지를 만큼 뜨거운 물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양철지붕 위에 있던 물탱크도  여전히 펄펄 끊고 있었던 거였다. 본의 아니게 사우나 끝에 핫 샤워를 하게 되었다. 이제 뜨끈한 미역국이라도 먹어야 하는 건가. 다 내려놓는 느낌이 어떤 건지 조금 배웠다. 해탈하면 그런 마음이 들겠지 싶었다.   

계획에도 없이 핫 샤워를 하고 마당으로 나오니, 생각보다 시원하게 느껴졌다.

더위와 사투를 벌이는 동안 어느덧 새벽이 온 것이다! 열대의 새들이 기지개를 켜며 아침을 알렸다. 눈물 나게 반가웠다.

멀리서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리도 들렸다. 그 오토바이를 불러 타고 호텔로 돌아가고 싶었다.

밤사이 망고나무가 한 뼘은 큰 것처럼 느껴졌다. 나의 일생일대의 진짜  '열대야'가 지나가고 있었다.

새벽에 아침 준비를 하러 나온 캄보디아 여성 직원들이 마당을 서성이는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굿모닝! 어젯밤에 잘 잤니?"

노 굿모닝, 정말, 정말, 더워서 죽는 줄 알았어,라고 말하려다가, 꿀떡 삼켰다.

그녀들이 매일 그 방에 열대야를 보낸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아무리 더위에 익숙한 그녀들이라고 해도, 창도 없는 그 방에서, 성희롱하는 한국인 간부가 무서워, 미닫이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얼마나 더웠을까? 그리고 얼마나 무서웠을까?         

나는 고작 하룻밤 보내고 미칠 것 같았던 것이 미안하고 머쓱해서,  그냥 전 날처럼

"노 프로블럼" 하며 웃었다.  (이 말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것을 금세 잊었다)

그녀들을 기뻐하며 말했다.

 " 베리 굿! 와이 돈 츄 스테이 히어 원 모어 나잇? "
 
 (그 밤 덕분에,는 아니겠지만, 나는 다행히 그 성희롱의 진실을 제대로 밝힐 수 있었다. 3천만 원의 손해배상의 권고가 내려졌고, 가해자는 나중에 법정에서 구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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