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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도 Jan 08. 2022

그 집에 남겨두고 온 것들

구기동 친구 , 아담한 발코니에서는 북한산 백운대가 보인다. 여름이면 저녁 8 무렵까지 북한산의 능선을 선명하게   있다. 오래된 양옥집을 개조해 새로 지은 친구 집을 처음 방문했을  여름 해는 천천히 서쪽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발코니 아래 올망졸망 박공지붕이 오렌지 빛으로 물들 무렵, 멀리 산기슭 어느  유리창이 지는 해를 통째로 끌어안은 것처럼 빛을 반사했다. 소설. 〈클라라의 태양〉에는 아픈 친구에게 필요한 활력을 태양이   있다고 믿는 소년이 등장한다. 그는 태양을 만나기 위해 마을  헛간으로 떨어지는 태양을 만나러 간다. 누군가  소년처럼 희망을 품고 구기동  집을 찾아 나설 것만 같다.


친구는 찬란하게 뜨는 해가 아니라 오렌지 빛으로 떨어지는 해를 품는 사람에 가깝다. 곁에 있으면 소란하던 마음이 은근해진다. 조촐한 저녁 만찬을 위해 낙지젓과 깻잎, 들깨가루를 곁들인 스파게티, 감자 버터 구이 같은 요리를 준비하고 화이트 와인을 차갑게 냉장해두었다 내놓았다. 치장 없고, 보여주려는 마음이 없이, 사는 모습 그대로 우아하고 다정하다. 남편을 바라보며 “나는 결혼할 때 얼굴만 봤잖아”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위트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친구 남편은 수백 번 들었을 그 농담에 여전히 황홀한 미소를 짓고, 우리는 배에 복근이 생길 정도로 크게 웃었다. 웃음소리는 박공지붕을 타고 북한산 자락으로 넘어가고, 산바람은 발코니를 넘어 8인용 식탁으로 불어왔다.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리는 비라고 했던가. 때를 알고 내리는 비처럼 넘치지 않는 우아함과 유머가 친구의 찐 매력이다. 친구 옆에 있으면 그녀처럼 좋은 비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진다. 친구 부부의 배웅을 받으며 구기동 골목을 내려오는데 서편에 초승달이 그림처럼 걸려있었다.


친구의 지난번 집이 팔렸을 때, 내 집도 아닌데 아깝고 아쉬웠다. 오래된 양옥집을 리모델링한 예쁜 이층 집. 마당에 오래된 목련 나무가 있던 집. 그 집이 팔렸다는 소식에 그 집 마당을 사랑했던 나는 친구만큼은 아니겠지만, 꽤나 섭섭했다. 그 집에서 이사 나오던 날, 막내 아이가 텅 빈 방에 혼자 앉아 있었다고 했다. 이사 가기 싫으냐고 묻자 멋쩍은 듯 방과 이별 중이라고 하더란다. 말없는 중학교 1학년 남자아이의 섭섭함이 그 한마디에 다 들어 있는 듯했다.


사람과의 이별처럼 표 나는 아픔은 아닐지라도 정든 집을 떠날 때 느껴지는 별리라는 것이 왜 없을까. 6년 넘게 전세 살던 아파트에서 이사한 뒤에 아홉 살이던 아들이 며칠 동안 울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는 아이가 공연히 심통을 부린다고만 생각했었다. 살던 집이 그리워 그런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이에게는 그런 마음이 없는 줄 알았다. 아이가 세 살 무렵부터 그 집에 살았으니까, 아이 인생의 많은 추억이 거기서 만들어졌다. 처음으로 갖게 된 자기 방, 그 방에서 혼자 자던 첫 밤, 친구들과의 생일 파티가 열리던 작은 거실, 자는 척하면서 이불 안에서 닌텐도를 즐기던 스릴, 아빠 등에 업혀 베란다에서 바라보던 보름달의 기억 같은 것이 잉태된 그곳. 아이의 많은 추억이 그 낡은 복도식 아파트와 연결되어 형성되었을 것이다. 지금 아는 것을 그때도 알았다면 어린 아들의 마음을 훨씬 잘 보듬어 줄 수 있었을까?


내게도 어쩔 수없이 이별해야 했던 애착의 장소들이 무수히 많았음을 깨닫는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살던 고향집을 아빠가 처분했을 때 유년기의 추억들이 삭제되는 기분이 들었다. 아빠가 마당 장독에서 꺼내 온 겨울 무를 갂아 먹던 겨울밤들, 주말의 명화를 몰래 보고 이상한 이야기를 지어내던 나의 방, 우리 삼 남매의 수영장이고, 아빠의 정원이 되어 준 그 집의 옥상, 자취하던 시절의 단칸방과 옥탑방, 책 냄새 가득하던 방들.. 더는 가볼 수 없는 나의 장소들.. 떠나며 남겨두고 온 추억들은 조용히 그곳에 스며들었겠지.


발코니의 풍경이 아름다운 친구 집에 다녀온 밤. 우리가 떠나온 곳에 남겨진 그 많은 추억들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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