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에 꾸는 꿈
겨울은 모름지기 동굴에서 보내야 한다. 동굴에는 모닥불이 있어야 하고, 두꺼운 타탄체크 커튼이 쳐져야 하고, 눈 내리는 풍경을 볼 수 있는 큰 창도 필요하다. 동굴의 겨울밤을 밝힐 노란색 스탠드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모과차 한 주전자. 올가 토카르 추크의 장편 소설이, 앤드루 포터의 단편 소설들이 놓인 널따란 책상도 필요하다. 어렵게 주파수를 맞춰 저음의 프랑스 여자 가수가 부르는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엔틱 라디오 한 대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나의 겨울 동굴은 검박한 것과 거리가 멀고, 꽤나 호사스럽다. 겨울밤은 깊고,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을 것이다.
동굴에서 맞는 겨울 아침은 매일의 기적이다. 창을 열어 신선한 햇빛과 공기를 동굴 가득 채운다. 잠자리를 천천히 정리하고, 기지개를 켜고 노래를 부르고, 머리를 빗고, 찻물을 올린다. 겨울 아침은 움직임 없는 움직임만 존재하는 순간. 공기와 함께 시간도 얼어붙었다. 움직임은 흰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긴다. 꿩 한 마리, 배고픈 토끼, 밤처럼 코등이 까만 노루, 그리고 여자. 나는 흰 눈길을 걸어 샘물을 길어 와서 아침을 끓인다. 나무 타는 냄새와 밥 끓는 소리, 뒷마당 감나무가 눈의 무게에 우지직 부러지는 소리, 입이 붉은 부지런한 새 한 마리가 동굴 창을 두드린다. 창밖이 아직 어둑한 때, 억지로 몸을 일으켜 일터를 향하던 기억은 오래전 잊었다. 나는 겨울밤이 좋고, 공기가 쨍하고 우는 겨울 아침도 좋다.
은퇴 후 겨울 출근을 달콤하게 추억할 테다. 호사스러운 동굴을 만들어 겨울을 보낼 거야. 그때는 정말 좋아하는 겨울을 가만히 좋아할 거야. 영하로 떨어진 이른 아침 밥벌이를 위해 일터로 향해야 하는 모든 이들과 같이 꾸고 싶은 꿈. 겨울잠을 자듯 겨울을 보내고, 나무에 물이 오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숲으로 나오는 시간들. 그런 천천한 삶에 대한 동경들. 찬 바람 부는 아침 억지로 침대 밖으로 몸을 빼내며 꿈을 꾼다. 5분만 더, 5분만 더.. 졸린 눈꺼풀 속에 꿈이 들어 있다. 꿈을 꾸는 겨울 아침은 조금 살만해진다. 아, 겨울 동굴로 가고 싶다.
* 사진은 미국 친구의 페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