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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도 Jun 24. 2020

훔친 시간에 쓰는 글

새털처럼 가볍게 시간을 훔쳐보도록 하겠습니다.

왜 쓰려고 하는가에 대해 며칠 동안 다시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아침에 세수하다가도 왜 쓰려고 할까,를 생각하고, 출근길 북적이는 지하철 안에서, 점심에 냄비우동 국물을 후루룩 마시다가도, 주말에 북한산을 걷다가도, 그 왜,를 생각했어요.
 

어제 새벽 눈뜨자마자, 문득 진짜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독후감을 써서 무슨 큰 상을 받았었어요. 선생님은 나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 아이들에게 박수를 치게 했지요. 학기 내내 교장실 앞에 전시되어 있던 ‘알프스 소녀 하이디’ 독후감, 그 내용은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글 덕분에 작은 마음에 뜨끈하게 차오르던 흥분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겁니다. 아마 그 후부터였던 것 같아요. 꽤나 잘난 척하면서 빨간 줄이 쳐진 원고지를 동네 문방구에서 사들이기 시작했던 것이요. 공연히 원고지를 찢어서 공처럼 구겨 어깨너머로 휙 하고 던질 때, 대작가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죠.
 

혹시 나의 글쓰기 동기가 그처럼 작은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요? ‘알프스 소녀 하이디’로 칭찬받던 그 아이처럼, 대견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어떤 순간을 찾으며 오랫동안 헤매고 있는 걸까요? 사실 왜 쓰려고 하는지, 심지어 무엇이 쓰고 싶은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다만, 내가 쓰고 싶어 한다, 는 사실만은 분명한 것 같아요. 나이 들수록 작아지는 이런저런 욕망과는 다르게 글쓰기 욕심만은 점점 커져가고 있으니까요. 가끔씩 에세이라도 한편씩 써서 바람을 빼주지 않으면 뻥 터지기라도 할 듯 부풀고 있어요. 더 읽고, 더 많이 쓰고 싶습니다. 글을 써서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저 '쓰기의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겁니다.
 
 연초에 직장 선배가 이메일을 보내 큰 누이가 모신문사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당선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줬어요. 누이는 어릴 때부터 글을 쓰고 싶어 했대요. 삶의 무게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은퇴 후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시작했는데, 이제 육십이 훌쩍 넘어 등단을 하게 된 거라고 했어요. 나는 마치 내가 상을 받은 것처럼 기뻤어요. 누이가 옆에 있다면 꽉 끌어안고 멋지다고 말해주고 싶었지요. 원하는 것을 향해 새털처럼 가볍게, 그러나 굳건하게 날아오르는 이들이 나는 눈물 나게 고맙고 사랑스러워요. 당장에 붙임 파일을 열어 누이의 동화를 읽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어요. 오롯한 내 시간에 기도하듯 조용히 읽으려고요.
 
 새로 만든 독서 노트에 이런 글귀를 써넣었어요. “책 읽는 시간은 언제나 훔친 시간이다”(다니엘 페나크)


생각해보니 글 쓰는 시간도 결국 훔친 시간이네요. 시간이 없다는 핑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간을 더 많이 훔쳐야 할 것 같아요. 새털처럼 가볍게 시간을 훔쳐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아침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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