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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도 Aug 20. 2020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쓰면서 알게 되는 것들

홍승은의 책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홍승은과 그녀의 엄마와 여동생,  여자는 아침마다 작은 식탁에 둘러앉아 15 동안 글을 쓴다. 엄마는 사각사각 연필로, 딸들은 자판기를 타닥타닥 치며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 내려가고, 15분 뒤 알람이 울리면 그때까지 쓴 글을 서로에게 들려준다.


홍승은의 엄마는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일주일 동안 매일 아침 두 번씩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쓰면서 한번, 자신이 쓴 글을 읽으면서 한번.


왜 글을 써야 하는지 이 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있을까? 글쓰기 책 백 권보다 이 한 장면이 글쓰기의 필요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된다. 홍승은의 엄마가 우는 장면에서 나도 눈물이 났다. 그러나 누군가 “그래? 엄마가 왜 울었다고 생각했는데?”라고 물으면, 나는 좀 당황할 것 같다. 사실 엄마가 왜 울었는지 내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냐마는 나 역시 쓰다가, 또 내가 쓴 글을 읽다가 여러 번 울었던 기억이 있으므로 나는 그저 그 마음을 알 것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내 안에 조금은 괜찮은 내가 있음을 발견하고 흘리는 안도의 눈물이기도 하고, 오래전 흘려야 했던 해묵은 울음이기도 하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다. 내가 그랬으니까...


새벽녘에 엄마 꿈을 꾸었다. 오랜만에 어릴 때 살던 동네를 방문했는데 마을이 완전히 새롭게 단장되어 있었다. 백화점 같은 번듯한 건물이 화려하게 서 있었고 우리 집 자리에도 새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상가 건물인데 상호가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아빠가 아주 작은 아기와 놀아주고 있었다. 과자 상자 같은 것이 쌓여 있는 곳에다 아기를 앉혀놓고 놀아주고 있는 모습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아빠는 주름 한 점 없고 팽팽한 얼굴을 한 아주 젊은 모습이었다. 오래된 앨범에서 본 그 아빠 모습이었던 것 같았다.
 
안쪽으로 들어갔더니 엄마가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나는 꿈에서 그것이 꿈인지 전혀 몰랐던 것 같다. 알았다면 엄마를 그렇게 그냥 무덤덤하게 마주하지는 않았을 텐데.. 남동생이 나를 반기며 집 구경을 시켜주었는데 예전에 창고가 있던 뒷마당 쪽으로 쇠락한 볼링장과 노래방과 가라오케 시설이 있었다. 동생들이 하는 말이 엄마가 누군가의 말을 듣고 그런 시설들을 설치했는데 손님이 없어 망했다고 한다. 나는 그 번쩍번쩍한 앰프와 오디오 시스템이 여전히 벽에 걸려있는 것을 보면서 엄마가 말도 안 되는 곳에 투자를 해서 망한 것 같아 불같이 짜증이 났다. 엄마는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가라오게 장비를 자랑하면서 대형 스크린을 켜더니 그 앞에서 신나게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며 좋아했다. 나는 그 모습에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꿈속에서 고래고래 엄마를 향해 소리를 지르다가 너무 놀라서 깨었다.

눈을 떴을 때도 아직 진정이 되지 않아 심장에서 쿵쾅 거리는 소리가 느껴질 정도였다. 아주아주 오랜만에 엄마를 꿈속에서 만났는데 나는 왜 소리나 질렀을까? 엄마는 아빠처럼 젊지는 않았지만 그냥 내가 늘 기억하던 건강한, 배도 좀 나오고 혈색도 좋은 엄마였다. 나한테 가라오케 장비와 시설을 자랑하는 모습이었는데 나는 왜 화를 냈을까?


며칠 전 엄마와 단식원에 갔던 글을 쓰면서 엄마에게 더욱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후회스러운 일들이 백가지도 넘는다. 내가 아주 조금만 더 엄마를 위해 내 시간을 썼더라면.. 나는 어떻게 그렇게 끝까지 이기적일 수 있었을까. 나의 무심함과 이기적인 태도는 나만 보는 글로도 차마 표현할 수 없었다. 내가 쓴 글 속의 나는 그렇게 나쁜 딸처럼 보이지 않는다. 엄마에 관한 글을 쓰면서  마음 깊숙이 숨겨놓은 엄마에 대한 죄스러움이 엄마를 꿈으로 불러낸  같다. 꿈에서도 엄마를 위로하고 따스하게 안아주기는커녕 소리를 지르며  화만 다스리는 . 내가 적지 못하는 나의 참모습을 꿈이 내게 보여주는  같다.


다음에 꿈속에서 엄마를 만나면 엄마와 나란히 서서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고 싶다.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을 좋아하고 농담하기를 좋아하던 엄마. 생각해 보니 나는 그런 엄마를 좀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암 투병으로 기운이 없고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바람 불면 날아갈 듯 마른 마지막 엄마의 모습으로 엄마를 기억했던 것 같다. 칠십일 년을 사신 엄마가 그런 모습이었던 것은 그녀의 마지막 1년이었을 뿐이다. 내가 엄마와 살았던 사십 년의 시간 속에서 내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엄마의 모습은 활기차고, 자존심 강하고, 화장이나 머리 손질을 하지 않고 외출한 적이 한 번도 없는 그런 엄마였다. 오늘 새벽 내 꿈에서 가라오케 장비를 켜서 당당하게 노래를 부르던 엄마와 같은 모습이다. 엄마는 며칠 전 내가 쓴 글 속의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내가 기억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라도 알려 주고 싶었던 걸까.


홍승은의 글 덕분에 나도 엄마에 대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엄마에 대한 글쓰기를 애써 피해왔다. 엄마에 대한 미안함 마음을 털어내려는 것 같아 글쓰기가 죄스럽고 미안했다. 그런데 홍승은의 책을 읽다 보니, 설령 그렇다 해도  쓰는 것보다 쓰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 대한 기억이 더 흐려지기 전에 써놓고 싶어 졌다. 그것이 진실이 아니더라도, 솔직하지 못하더라도, 왜곡되거나 미화된 기억이라고 하더라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의 좋은 기억만 쓰려고 하는 나, 그래도 괜찮다. 엄마의 여러 모습 중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은 엄마의 명랑하고 밝은 모습이고, 그것이 나의 애도의 방식이므로.


계속 써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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