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달밤
돌아가신 엄마를 떠올릴 때면 오래전 달밤의 기억 한 토막이 떠오르곤 한다.
아마도 일곱 살이나 여덟 살 때쯤, 한 밤 중이었는데 달빛에 비쳐 길이 환했던 기억이 난다. 행선지도 알려주지 않고 엄마는 화난 사람처럼 반걸음 앞장서서 뚜벅뚜벅 걸어갔고, 나는 무서움과 궁금함이 뒤섞인 상태로 뒤를 따라갔다.
개울 둑을 따라 걷는 중에 엄마와 어떤 대화를 했는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데 그때 들었던 여러 소리와 냄새들이 아주 생생하게 기억된다. 돌돌돌 울던 개울 물소리, 어린 벼들이 출렁이던 논에서 씩씩하게 울던 개구리 소리, 발에 밟히는 잡초들에서는 새콤한 풀 내가 났다. 달은 우리 모녀를 뒤 따르며 우유 빛으로 개울을 물들였다.
어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내게 잠깐 문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가 안 나오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었는데 엄마는 오래 지나지 않아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오던 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오랫동안 그날 일을 잊고 있다가, 불현듯 생각나 엄마에게 물었다. 아마도 중학생 무렵이었던 것 같다. “엄마 그 밤에 개울 건너 그 집에는 왜 간 거였어?” 엄마는 내가 그 일을 기억하는 것에 놀라면서 그때 빌려준 돈을 받으러 간 거라고 알려주었다. 어떤 사람에게 이자를 받고 꽤나 큰돈을 빌려 주고 있었는데, 우연히 그 집이 야반도주를 할 것 같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고 했다. 그냥 헛소문일 거라고 생각하다가 불현듯 그 밤에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길을 나선 것이라고 했다. 아빠에게는 말도 못 하고, 그렇다고 혼자 가기는 무서워 나를 데리고 갔다고.
그러니까 내가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던 그 달밤에 엄마가 그 집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 집 식구들은 보따리 보따리에 짐들을 다 싸놓고 막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했다.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부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울었다고 했다. 그 부부도 돈을 떼어먹고 야반도주를 할망정 본래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는지 엄마를 보자마자 미안하다고 하면서 빌려간 돈을 돌려주더라고 했다. 엄마가 돈을 돌려받고 온 그다음 날 우리 동네는 한바탕 소동을 벌어졌는데, 야반도주한 부부에게 크고 작은 돈들을 빌려 준 사람들이 괘나 많았다는 것이다.
엄마는 그때 내가 있어서 용기 내서 돈을 받으러 갈 수 있었다고, 꽤나 자랑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너는 어릴 때부터 어디든 데리고 다니면 항시 든든했거든.” 나는 그때, 낭만 충만한 사춘기 소녀여서 엄마의 말에 조금 실망했던 것 같다. 어떤 미스터리 한 서사가 숨겨져 있을 거라는 나의 상상과는 다르게, 떼일 뻔한 돈을 받으러 갔던, 지극히 현실적이고 조금은 비극적이기도 한 사건일 뿐이었던 것이다.
무슨 일인지 그 후로도 가끔 그 달밤을 떠올리곤 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미 그 속사정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 밤을 나만의 서사로 재구성을 하여 추억한다는 것이다. 순전히 달빛 때문인지 몰라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새콤한 풀 내음 같은 엄마의 미스터리하면서도, 낭만적인 서사가 그 밤마실에 숨겨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게 완벽하게 아름다운 밤이라면 마땅히 그런 서사쯤은 감추어 두어야 마땅하다는 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