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분홍색 케이크 상자를 든 남자
작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정류장에서 본 한 남자가 떠오른다. 막차를 기다리는 줄은 점점 길어지고 마을버스는 오래도록 오지 않았다. 찬바람이 몰아치더니 눈발까지 날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몸을 더 깊숙이 코트 속으로 밀어 넣고 핸드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핸드폰의 빛 때문에 손에 촛불을 하나씩 들고 서 있는 듯 보였다.
그때 어떤 남자가 횡단보도를 건너 마을 버스정류장 쪽으로 걸어왔다. 160센티미터가 조금 넘을 듯한 작은 키의 남자였다. 앞을 여미지 않는 검은색 잠바에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천천히 정류장 쪽으로 걸어왔다. 그때 내 눈길을 끈 것은 남자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케이크 상자였다. 남자의 허술한 옷차림 때문에 그 케이크 상자가 더 눈에 띄었던 것 같다. 흔한 베이커리 체인점의 포장과는 다른, 유치원생 색칠 공부의 도안 같은 그림이 인쇄된 진분홍의 케이크 상자는 남자의 옷차림, 진눈깨비 날리는 밤의 풍경과 대비되어 형광물질처럼 도드라졌다. 남자는 두리번거리며 버스 노선을 확인하더니 내게 햇빛마을 **단지 가는 버스를 타는 곳이냐고 물었다. 나는 이제 곧 막차가 도착할 거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막차는 오랫동안 오지 않았다. 그 사이 눈은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했고 정류소 처마 밖에 서있는 남자의 야구모자 위로 소복이 눈이 쌓이는 게 보였다.
자정이 가까워 오는 시간에 진분홍색 케이크 상자를 들고 남자는 어디를 방문하는 것일까? 길을 물어보는 것으로 보아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님은 분명했다. 오래전에 헤어진 가족이나 친구를 방문하는 것일까?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선물로 산 것일까? 자정 넘은 시간에 초라한 행색으로 찾아온 방문자를 그들이 반갑게 맞아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남자가 모자와 어깨에 쌓인 눈을 빨리 털어내기를 바랐던 것 같다.
마침내 마을버스가 도착했고 사람들은 서둘러 버스에 올라탔다. 내가 남자에게 눈짓으로 어서 타라고 말하려던 순간 일이 터졌다. 남자가 정류장 턱을 헛디뎌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진 것이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건이라 남자를 붙잡아 줄 수도 없었다. 남자를 불안하게 지켜본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던지 여러 사람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남자가 들고 있던 진분홍의 케이크 상자가 남자와 함께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순간에.. 남자는 벌떡 일어나더니 옷을 털기도 전에 케이크 상자부터 집어 들었다. 케이크는 상자 안에서 엉망이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야구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의 얼굴이 차라리 찡그리고 있었다면 덜 슬퍼 보였을까. 아무 표정이 드러나지 않은 남자의 검은 얼굴에서 먹먹한 한숨 같은 것이 흘러나와 거세진 눈발 사이로 날아가는 듯했다.
나는 누가되든 남자의 방문을 받는 그 사람이 남자를 따뜻하게 환대해 주기를, 남자의 손에 들려있는 케이크가 그 집의 아이들의 환호를 받기를 마음으로 조용히 빌었다. 그리고 오래전에 집을 떠난 나의 남동생을 생각했다. 겨울밤, 남동생이 불쑥 찾아온다면, 남자를 손님으로 맞이할 그들이 그러길 바라는 것처럼 나는 동생을 환대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