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은 엄마가 아니었다

감정의 강도를 가려내는 연습

by 틈 사이의 온기

이사 소식을 전했다.
가볍게 나누는 이야기였고, 자연스럽게 꺼낸 말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반응이 유난히 무미건조했다.
축하한다는 말은 없었고, 표정 없는 문자 한 줄이 전부였다.

그 순간,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서운했고, 억울했고, 속으로 화가 났다.
그리고 이내 나 자신에게 묻게 되었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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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무례한 건 사실이었다.
그 사람은 예전부터 늘 그랬다.
맞춰줄 때만 친절했고, 내가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이면
언제나 날 미묘하게 깎아내렸다.
그게 반복되자, 결국 나는 감정적으로 요동쳤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감정은 현실에 대한 타당한 반응이었다.
예민한 것도, 과민한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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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 작은 일에 내가 왜 이렇게까지 격하게 반응했는지가 떠올랐다.
그 사람의 반응은, 어릴 적 엄마에게서 받았던 감정과
어딘가 닮아 있었다.

인정받고 싶었지만 외면당했던 순간들,
기뻐서 전한 이야기 뒤에 따라왔던 차가운 말들,
한없이 맞춰주다가도 결국 부족하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
그 모든 게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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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나는 그 감정들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로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너무 아파서,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 감정들을 어쩔 줄 몰라 내 안에서 떼어놓고 살았다.
감정은 있었지만, 의식하지 못했다.
그게 해리였다.

그리고 그 해리된 감정은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덧씌워졌다.
마치 그 친구가 과거의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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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중요한 건,
그 사람은 엄마가 아니었다.

그가 나를 서운하게 하긴 했지만,
나의 가장 아픈 기억까지 책임질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그 감정의 강도는,
지금 눈앞의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과거의 감정을 현재에 겹쳐서 반응하고 있었다.

이걸 인식하고 나서야, 감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억울함과 분노, 그것을 느끼는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고,
동시에, 그 감정을 그대로 상대에게 쏟지 않아도 괜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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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알게 됐다.
현실에서 생긴 감정은 현실에서 표현하면 되고,
과거에서 묻은 감정은 따로 다뤄야 한다는 걸.

현실적인 서운함은
거리를 두거나, 필요한 말 한마디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
반면, 오래전부터 눌러두었던 감정들—
말하지 못한 억울함, 인정받고 싶었던 갈망 같은 것들은
조금 더 안전한 곳에서 다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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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언제나 진짜다.
하지만 그 감정이
“지금의 나”에게서 온 것인지,
“과거의 나”가 남긴 것인지를 분리해서 보는 연습은
관계를 훨씬 덜 왜곡시키고,
내 마음을 조금 더 평평하게 만들어 준다.

그건 엄마와 전혀 다른 삶이 아니라,
엄마와는 다른 방식으로 감정을 느끼고 반응하는 삶일 것이다.

아주 작고, 아주 조용한 변화지만
나는 지금 그 방향으로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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