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가버린 고베
5일, 아니 해넘이를 했으니 2년. 재밌게 놀고 좋은 기억을 담은 채로 오사카에서 고베로 넘어갑니다. 사실 고베는 아무런 계획없이, 단지 밀린 일을 처리하기 위해 가던 곳으로 간사이 지방에 왔으니 유명한 네 곳 (오사카, 고베, 나라, 교토)은 가봐야지 않겠냐라는 지극히 관광객스러운 마음으로 갔던 곳이었죠. 크게 관심도, 딱히 뭘 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고베규는 머릿 속에 가득했었지만.
미쿠니역에서 한큐선을 타고 주소역 (十三駅)에서 고베행 특급으로 갈아탑니다.
인생 맛있게. 맛나게 실컷 먹고 소화는 내게 맡기라는 소화제 광고. 그래 인생 맛나게 먹고 그런거지.
한 시간을 달려 신카이치역 (新開地駅)에 도착해 게스트하우스까지 걸어갑니다. 근처에 공원도 있고, 이 동네도 나름 주택가라서 조용하네요.
일본에서 불편했던 것 중 하나는, 큰 불편은 아니었지만, 영어를 잘 못한다는 것. 특히 글 써놓은 거 보면 이건 콩글리시보다, 싱글리시보다 더 말이 안 되고, 이해도 힘든 영어를 멋대로 적어놓는다는 것. 그러다보니 그냥 일본어로 읽는 게 나을 때가 있습니다. 그냥 속 편하게 일본어 공부 좀 더 하고 가는 게 백배 천배 나을 듯한. 일본도, 우리도 똑같네요. 매년 17만 마리의 반려견, 반려묘가 안락사를 당하고 있으니 샵에서 사지 말고 좀 기다렸다가 입양하시라고, 한 마리 안락사시키는데 고작 78엔. 78엔에 생명을 넘기시겠습니까? 그러지 말고 먹을 것도 주고, 보호해주자는 의미 되겠습니다.
걸어걸어 가다보니 게스트하우스가 딱하고 등장하네요. 이름은 호스텔 유메 노마드 (ホステルユメノマド).
방 느낌이 아무래도 오사카와는 많이 다릅니다. 8인실 침대에, 꽤 넓은 공간, 그리고 빈 백도 있는 큰 방이라 앉아서 한 잔 하기에도 나름 괜찮은 크기. 침대별로 콘센트가 있고, 작은 스탠드가 있고, 잘 때는 커튼을 쳐 놓으면 나름 프라이버시도 지킬 수 있지만 네코네코의 오붓한 분위기는 사실 없다고 봐도 될 듯. 구석에 있는 1층 침대에 짐을 풀어놓고 분위기가 어떤가 살펴보러 1층으로 내려갑니다.
1층의 공용공간. 다다미가 깔려 있는 전형적인 좌식 스타일로 오자마자 바로 일할 곳을 찾아봤지만 상이 작아서 애매한데다가 방석에 앉아서 일을 하다보면 꼬리뼈가 짓눌리는 느낌이 들어서 제대로 일을 못했다는.
겨우겨우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일본에서 산 기계식 키보드를 깔아봅니다. 일본 키보드를 샀다가 키 배열도 완전히 다르고, 스페이스바나 시프트키 사이즈가 달라서 고생. 게다가, 블루투스가 자주 끊겨서 짜증이 나던 차에 어쩔 수 없이 오사카에서 1만엔을 주고 기계식 키보드를 또 샀습니다. 이번엔 실수 안 해야지라고 영어 배열이 된 키보드를 사서 잘 썼더랬죠. 기계식치고는 싸서 그런가, 삐그덕 소리가 나서 결국 안 썼지만...
옆 공용공간. 뭔가 카페 분위기가 나는 곳입니다. 옆에 카운터가 있는데 체크인할 때 동전을 하나 줍니다. 웰컴 드링크 교환권인데, 맥주나 커피 중에 먹고 싶은 거 고르라고 해서 전 맥주를 골랐죠. 안에서 사 먹어도 되고, 밖에서 사갖고 와서 먹어도 됩니다. 디제잉 기계로 스탭이 음악도 틀어주고,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할 수 있는 뭔가 클럽 비스무리한 분위기지만 주택가다보니 11시 넘어선 조용합니다.
동네에 있는 히메지 오뎅집에 갔습니다. 사실 꼬치를 먹을까, 뭘 먹을까 고민도 엄청했고, 오사카처럼 동네 술집 괜찮은 곳 있으면 한 번 뚫어봐야지라는 마음에, 마침 크기도 작고, 조용히 마시면서 놀 수 있는 곳을 원했기 때문에 들어갔죠. 우선 가볍게 먹기 위해서 오스스메 부탁했더니 어묵에, 햄이 있는 간단한 안주부터 주더군요.
빵은 아니지만 카스테라같이 생긴 어묵. 앞에 있는 파인애플주나 마셔볼 걸. 그냥 구경만 했어요.
한 다섯 명 앉으면 꽉 차는 정말 작은 술집. 옆 자리에는 한 커플이 앉아서 주인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관광객에 외국인 티 풀풀 나는 저는 재털이를 달라고 해서 담배나 피울 준비를. 뭔가 붕 뜬 느낌이었습니다. 관심도 없고, 그냥 뜨내기 왔구나라는 느낌이었으니까. 동네 분위기가 뭔가 많이 다르달까.
야마자키 한 잔에 900엔, 옆에 있는 요이치도 비슷한 수준. 일본 사람들의 고양이 사랑은 남다른 듯해요. 마침 새로 방송하는 드라마 트레일러를 보여주는데 주인공이 고양이 사무라이. 얌전히 앉아있다가 촬영 들어가면 나름 연기도 하고, 그러다 저렇게 사람들이 안고, 놀아주고. 고양이가 주인공인 드라마라니. 이건 한국에선 상상도 못할 일인가 (라고 했는데 고양이띠 요리사라는 케이블 드라마가 나오더라는).
오뎅 한 접시 시켰습니다. 일본에서 오뎅 시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우리처럼 뜨거운 국물에 담겨나오는 건 거의 없습니다 (가마보코를 시켜야 하나). 어묵 두어 덩어리, 무 한 덩어리, 스지 (힘줄 - 엄청 먹습니다, 쇠심줄같은 인간들) 등. 짭짤하니 맛은 괜찮은데 혼자 쭈구리로 먹다보니 심심 그 자체.
게스트하우스 주변을 어슬렁 거려봅니다. 이런 식으로 클럽 (クラブ)도 많고, 뭔가 역 뒷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기분이랄까. 헬스 (ヘルス - 한국에서 말하는 헬스 아닙니다. 일본에서 한국처럼 운동하고 싶으면 피트니스를 가세요. 뭔가 야릇한 분위기라 한 번 들어가보고 싶었으나, 피곤하기도 하고 왠지 바가지 옴팡쓸 거 같아서 패스.
성인영화 상영관. 포스터도 영화따라 바뀌고, 나름 DVD를 틀어주는 듯한데. 옛날 동시상영관이 생각나더군요. 그 앞에서 그루밍하고 있는 냥이씨는 잘 지내려나 궁금합니다. 동네를 어슬렁대던데.
오츠마미 (おつまみ) 셀렉션이라는, 편의점에서 파는 안주인데 3종 세트입니다. 카망베르 치즈, 덴마크 돼지 햄, 치즈. 350엔 정도 하는데 와인 안주로 정말 좋아요. 맛을 보고 나서 그 뒤로도 와인이나 양주마실 때는 꼭 챙기는 안주가 됐더라는. 그런데 많이 짭니다. 특히 햄은 진짜 소태...
오사카때부터 마셔왔던 맥켈란을 마시면서, 바닥에 앉아 노트북 전원을 연결하고, 홀짝 대면서 일하다가 잤던, 고베에서의 첫 밤. 오사카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적응도 잘 안 됐지만 다르게 보면 익숙한 분위기에만 젖을 거면 뭐하러 여행왔나 싶어서 이대로 적응하기로 하면서 퍼졌더랬던 고베의 첫 날. 생각보다는 별로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