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맛보다 고베규
아침에 여유 있게 (사실 늦잠) 일어나서 편하게 앉아 일을 합니다. 책상이 없으니 허벅지에 올려놓고, 방에 아무도 없으니 뭔가 내 세상이구나라고 생각하던 순간, 커튼 너머로 자고 있던 코쟁이를 보고 어이쿠 소리소리.
4천 단어만 더 하면 우선은 한 파일 끝이구나.
게스트하우스 옆에 있는 마트에 가서 간단한 요기거리를 샀습니다. 198엔인데 세금 붙어서 213엔인 게살 샐러드와 술 먹고 난 아침 목 마를 때 마시면 좋은 레몬맛 스파클링. 조합은 거시기한데 그래도 한 끼 때우기엔 괜찮겠다고 샀지만 양은 터무니없이 모자라...중화풍이라길래 도전했는데 뭐 그냥저냥.
어디로가지라고 고민하다 스탭에게 물어보니 하버랜드 (ハーバーランド)가 근처니까 가보란 이야기를 듣고 털레털레 걸어갑니다. JR 고베역 바로 뒤라고 해서 구글맵을 켜고 역으로 이동. 역시 JR역 내부는 볼 게 많고, 꽤 크더군요. 하긴 거기서 나오는 수익도 클테니까. 한국과 마찬가지로 갓텐 (がってん) 많습니다. 더 웃긴 건, 캐릭터는 같은데 이름은 조금씩 다르고, 메뉴도 다르고. 이 집은 간코스시 (がんこ寿司)인데 회전초밥이 아니라 도시락이나 일품메뉴 위주로 파는 곳. 그래서 나베도 팔고, 스시 세트도 있고, 우동도 있고. 가성비가 꽤 괜찮다보니 사람들이 많습니다. 줄 서서 기다리려고 했다가 귀찮아서, 한국에도 있어서 그냥 패스.
JR 티켓 박스에 갔습니다. 인터넷 뒤져보니 교통카드 사서 충전해 다니면 편의점에서도, 지하철에서도 편하게 쓸 수 있다고 해서 바로 질렀는데요. 서일본은 이코카, 중일본은 토이카, 동일본은 스이카라고, 이름은 다르지만 기능은 똑같은 카드를 팔고 있더랬습니다. 이코카의 경우 최소 2천엔을 내고 카드를 사는데, 1,500엔이 충전된 카드를 줍니다. 500엔은 카드 보증금이죠. 플라스틱 카드가 아닌, 뭔가 알루미늄 재질이 느껴지는, 삐까삐까랄까. 때때로 충전만 잘 해주면 편하게 쓸 수 있는데 문제는 이 카드를 사려면 JR역에 가야 합니다. 다른 지하철 (한큐, 한신선 등)역에서는 안 팔지만 충전은 가능하구요. 편의점에서도 충전 가능하니 하나 챙겨두면 좋습니다. 나중에 한국 돌아올 때 반납해도 되지만 전 다시 올 생각에 반납 안 하고 그대로 가져왔어요.
하버랜드로 가는 길에 웬 놈의 세균맨 (ばいきんマン)이? 알고보니 근처에 호빵맨 (アンパンマン) 뮤지엄이 있다고 하더군요. 동네가 온통 호빵맨과 그 친구들.
앙팡맨 뮤지엄 옆에 있는 모자이크라는 쇼핑몰입니다. 파주 아울렛같은 분위기가 물씬. 안에 들어가니 식당에, 쇼핑몰에 이래저래 구경하기 딱 좋은 곳이더군요.
앙팡만 등장! 빵빵~
앙팡만뮤지엄. 멀리 보이는 노란색 앙팡만 머리통 주변에는 애들이 드글드글. 들어가는 입구가 두 개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기념품샵으로 가는 길 (무료), 다른 하나는 뮤지엄 들어가는 길 (유료). 물론 저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고 무료로 들어갔지만. 후배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기 딸래미는 여기만 오면 문 닫을 때까지 꿈쩍도 안 한다고...
뮤지엄 앞 대관람차. 헵파이브 생각이 나서 한 번 타볼랬는데, 남자 혼자 이거 타는 것도 청승이겠다 싶어서 그냥 패스했습니다. 다음엔 같이 타요.
가볼 곳이 또 어디냐 물었더니 산노미야 (三宮)역으로 가라 하더군요. 이쿠타신사 (生田神社)가 유명하니 구경하면 재밌을 거라고. 그리고 고베규 먹으려면 어차피 그 동네 가야한다고. 그래서 JR을 타고 고베역에서 산노미아역까지 갔습니다. JR 열차는 다른 사철 (민간 지하철)보다 요금도 좀 싸고, 열차 구조도 많이 다릅니다. 물론 도쿄의 야마노테센 (山手線)은 우리네 2호선과 똑같지만.
인파를 뚫고 뚫어 들어왔습니다. 정초라그런가 사람들이 엄청 많더군요. 게다가 정장입고 온 남녀도 꽤 많았고. 알고보니 회사에서 행사차 들른 거라고. 신사에 가보면 회사 푯말이 엄청 많습니다. 회사에서 신사에 기부를 하면 달아주는 거라더군요. 역시 돈이면 다 되는...
저 앞까지 뚫고 들어가서 참배를 하더랍니다. 가운데 서 있다가 옆으로 살짝 빠졌는데 운 좋게 그 쪽으로 줄을 만들어줘서 훅~하고 들어갔다는. 마침 예배 (의식?) 진행중이라 운 좋게 진행과정도 보고. 200엔 내고 소원도 빌어봤습니다 (소원은 비밀).
많이들 본 광경일텐데요. 에마 (絵馬)라고 합니다. 500엔 (그때그때 달라요) 정도에 하나 사서 소원을 적은 다음에 걸어놓죠. 신사마다 분위기도 다르고, 왠지 에마 구경하러 신사가는 재미도 쏠쏠할 듯.
본당 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봉납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사람들이 소원을 빌더군요. 도리가 줄지어 있다보니 사진 찍기에도 꽤 괜찮은 듯.
신사에 왔으니 싼 맛에 올 한 해 운세라도 점쳐볼까. 그래서 오미쿠지 (おみくじ)를 합니다. 200엔을 주면 오미쿠지 통을 하나 주는데 달달달 흔들다가 구멍을 아래로 내리면 꼬치가 툭~하고 떨어집니다. 꼬치에 적힌 번호를 알려주면 종이를 한 장 주는데요, 그 안에 올 한 해 운세가 적혀 있습니다.
제 번호는 50번. 슬슬 읽어보니 돈도 그닥, 연애도 그닥 뭐 잘 되는 건 하나 없는 인생인 듯.
그리고 오미쿠지를 고이고이 접어 걸어놓습니다. 튀어나온 곳은 어디든 다 걸려 있는데, 왜 이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름 소원을 비는 거랄까?
아무래도 정초다보니 이것저것 많이 팝니다. 특히 화살같은 경우 꽤 비싸기도 한데 (2,500엔) 왠지 올 한 해 힘 있게 난관을 관통할 수 있는 힘을 주십사 (그냥 추측일 뿐). 사고 싶었으나 괜히 짐만 되는 거 같아서 패스.
슬렁슬렁 내려오니 도큐핸즈 (東急ハンズ)가 딱! 여긴 꼭 들러야해. 내겐 휴대용재떨이가 필요하거든. 그래서 샀습니다. 근 1천 정도를 주고 산 휴대용재떨이. 문화시민이라면 꽁초를 길바닥에 버려선 안 되지라는 말도 안 되지만 나름 근사한 핑계를 대고 샀습니다. 그것도 빨간색으로. 빨갱이인가.
드디어 구경을 끝내고 스테이크 먹으러! 체인점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한 스테이크랜드 (ステーキランド)에 들어왔습니다. 아무래도 유명한 곳이다보니 사람 없을 때 얼른 오자고 해서 오후 네 시에 칼질하러. 꽤 비쌉니다. 가격은 제대로 안 나와 있지만 만족세트만 해도 기본적으로 5천엔 이상, 게다가 고베규로 주문하면 거기에서 1천엔 추가니까. 그래도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먹겠냐며 호사를 부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 까짓거 일하면서 다니는 거니까 한 번 먹어주는거야.
8, 90년대 경양식집 분위기가 물씬물씬. 이렇게 고풍스럽게 촌스러운 인테리어는 누구 머리에서 나온거지? 상당히 큽니다. 스테이크 바가 서너 개는 있으니까.
세트 메뉴. 왼쪽 두 개는 스테이크 소스, 가운데 샐러드, 야채수프, 단무지. 이미 맥주 일잔과 함께 시작.
문화인의 상징 휴대용재떨이 (携帯灰皿). 일본 내 대부분의 식당이나 술집에선 담배를 필 수 있기 때문에 담배가 피고 싶다면 하이자라 쿠다사이 (灰皿ください)라고 말씀하세요. 금연인 식당이면 안 된다고 말하고, 상관없는 곳이면 재떨이를 줍니다. 여기는 금연식당이라 그런 거 없음. 췟.
샐러드를 먹고 나면 마늘구이 (にんにく)를 줍니다. 바삭바삭한 것이 꽤 맛나는데, 쌓아놓고 있다가 손님에게 줄 때 버터를 철판에 녹인 후 살짝 구워서 줍니다. 맥주 안주로 먹기엔 딱.
버섯, 호박, 곤약이 지글지글, 그 위에 후추를 후추후추. 아오, 맛나겠다.
곤약 한 입 물었습니다. 소스에 찍어서 먹으니 맛도 좋고, 곤약이 탱글탱글.
마늘, 버섯, 호박. 이제 고기만 나오면 되는데. 고기 굽기를 뭘로 해줄까라고 물어보길래 레어로 해줍셔라고 했다가 또 오스스메라고 했더니 미디엄 레어면 될 겁니다라고 말해서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줏대 따윈 없다. 그냥 주는대로 받아먹을 뿐.
드디어 고기를 썹니다. 셰프인 스기모토 (杉本)상은 한국어도 곧잘 하셔서, 간단한 한국어로 이야기를 하더군요. 고기 나왔어요, 어떻게 드릴까요 정도는 한국어로. 슥슥슥 써는 칼질을 보니 아 사람 미치겠더라는.
드디어 올라왔습니다. 맛나게 드세요, 천천히 드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스기모토상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사진이 약간 흔들려 보이는 건 그만큼 얼른 먹고 싶은 마음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안 먹어봤으면 말을 마세요.
마늘구이에 싸서, 소스에 찍어 먹으면 딱이라고 하길래 시키는대로 했습니다. 역시 시키는대로 하는 게 가장 좋아요. 괜히 모험 이런 거 안 합니다.
숙주나물에 청경채까지 곁들여서. 이렇게 세트가 완성됐습니다. 완전체!
오 한 입 베어무니 겉은 익고 속은 시뻘건 레어. 미디엄 레어 맞네 맞아. 추릅.
고기를 다 먹고 나니 밥을 줍니다. 숙주나물에 청경채를 곁들여 밥을 후룩후룩.
마지막 남은 한 덩이는 그냥 먹기 아까우니까 히비키 더블샷과 함께 끝내기로 합니다. 일본에서 양주를 시키면 늘 물어보는 게 미즈와리야 로쿠 (水割りやロック)인데요. 미즈와리는 말 그대로 물과 섞어먹는 것이라면 로쿠는 온더록스. 양주, 소주, 다 물어봅니다. 전 술을 많이 먹으니까 로쿠. 낮도 밤도 아닌 애매한 시간이지만 맛나게 먹었으니까 끝.
만족세트에 후식은 아이스커피로 했고, 맥주 한 잔, 하이볼 한 잔, 히비키 한 잔 마셨더니 8천엔 언저리. 물론 비싸지만 먹는 거라도 제대로 먹어야지라고 사치를 부린 결과. 그래도 맛났으니까 패스.
입을 헹궈봅니다. 그런데 달아서 못 헹굼. 시럽을 부었나?
스테이크랜드 고베관입니다. 산노미아역 근처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어요.
밥을 먹었으니 이젠 어디로 가볼까 고민하던 중 근처에 난킨마치 (南京町)라는 차이나타운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리로 결정합니다. 산노미아역에서 지하철을 타도 되지만 걷기에도 충분한 거리라서 그냥 바람 쐬며 걷기로 결정하고 털레털레 걸어갔더니 홍등이 주루룩. 아 저기구나!
난킨마치 한 가운데에 있는 정자. 전형적인 중국풍의 거리. 그런데 생각보다 작습니다. 사방 1km도 안 되는 작은 공간에 음식점이 수두룩빽빽. 길거리 음식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가득.
아니 고베규가 이렇게 싸다고? 그럼 난 바가지를 쓴 것인가? 스테이크는 물론 햄버거도 파는데 엄청 쌉니다. 사람들도 무지 많고. 햄버거 먹고 싶었는데 그랬다간 정말 배 터질 거 같아서 구경만 하기로.
메인 도로는 이 집이 꽉 잡고 있고, 양옆으로는 중국 식당이 가득가득한 곳. 싸고 재밌게 먹기엔 딱인 듯해요. 단지 차이나타운이라기엔 먹을 거 말고는 딱히 구경할 것도 없는지라, 밤에 야식이나 밤거리 구경하며 이것저것 군것질할 요량이라면 강추.
다시 숙소로 돌아와서 근처에 뭐가 더 있나 구경다녔더니 역시나 야사시한. 아 한 번 가볼 걸 그랬나 싶다가도 가격표 보고 후덜덜해서 그냥 깔끔히 포기. 이 돈이면 술이나 먹고 말지. 뒤도 안 돌아보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1리터 맥켈란 다 마시고 오늘부터는 글랜모린지 뒤탁 1리터 시작. 아무리봐도 가성비로 칠 때 둘 다 최고인 듯. 1리터라니, 그런데 면세점에서 10만원도 안 한다니. 꼭 사야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세 병까지 살 수 있는데, 장기 여행이면 강추합니다.
프랑스 친구가 스탭들 챙겨준다고 음식하던 중에, 나도 좀 달라고 했더니 스탭들 다 주고 남으면 주겠다고.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남았다며 먹어보라던. 그래서 저도 양주 두어 잔 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더랬습니다. 역시 나눠먹는 게스트하우스.
프랑스인 크리스티앙. 여자친구랑 같이 일본 여행 다니는데, 내일부터 2주일간은 따로 다닌다고. 서로 보고 싶은 게 다를 수 있는데 굳이 모든 걸 함께할 필요가 있겠냐며, 쿨하게 2주간 따로 다니고 나중에 만나기로 했다고. 내일은 근처에 벽화 그리러 간다면서, 술 좀 마시고 잔다길래 같이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더랬습니다. 한두 달 여행중이라면서. 아 부럽다. 나도 어릴 때 저랬다면. 아, 이러면 꼰대가 되는거지?
그렇게 벌써 고베 일정도 반환점을 돌았습니다. 내일은 뭐하고 놀지, 일은 언제 마감할지 고민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