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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Sep 13. 2020

[번역] 연대 번호

Le Numéro du Régiment

방랑자는 오싹함을 두르고 있었고, 농촌은 아름다웠다.


그는 추수기에 자주 보이는 부랑자 중 하나였다. 상태가 심히 나빠 보이는 이유는 품을 팔고자 방문한 모든 농장에서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그를 지탱하는 물푸레나무 목발은 여행자의 지팡이라기 보단 살인마의 몽둥이 같았다. 그리고 땀과 먼지를 머금은 그의 린넨 외투 안감에는 틀림없이 불쾌한 번호가 인자되어 있을 것이다. 유성 잉크로 찍힌 도형수徒刑囚나 재소자의 번호가 말이다.


나이는 몇 살인가? 이 불행한 남자에겐 그것도 없었다. 큰 키와 마른 체구를 하고 젊은 사람과 같은 유연함으로 걷는 그의 그을린 얼굴을 가로지르는 거친 노란 콧수염은 이미 잿빛을 띠었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불행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태양빛에 익은 낡은 펠트 모자를 덮고 그는 당당하게 노숙했다. 가죽 빛 얼굴에 자리 잡은 선명한 파란색 눈은 대담함으로 빛났다. 그는 맨발로 다녔는데 당연히 이는 군용 륙색에 맨 한 켤레의 징이 박힌 커다란 신발을 아끼기 위해서다. 두 넓은 밀밭 사이 매우 좁은 길을 따라 걷는 그는 완강한 걸음걸이에 꼿꼿이 높게 든 고개를 포함해 전체적인 인상이 형용할 수 없는 번지르르함과 군인다움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긴 귀는 거의 어깨 위까지 닿았다.


그는 이 길이 어디로 자신을 이끄는지 모른다.


그의 주변에는 시야가 닿는 곳까지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들판은 6월의 땡볕 아래 텅 빈 채 움직임이 없었다.


오른쪽에는 옥수수, 호밀, 귀리, 왼쪽에는 귀리, 호밀, 밀이 자라고 있었다. 다만 까마귀가 날아가는 방향으로 포플러 나무 한 그루가 장막을 드리우고 있었다. 더 너머, 훨씬 더 너머에는 숲이 우거진 언덕, 그리고 지평선의 회색 안개 속 옅은 푸름이 있었다.


남자는 단조로운 길을 따라갔다. 여기엔 블루베리가 풍성하게 수확되고 있었고 저기선 개양귀비가 그랬다. 남자가 다가가자 근처에 있던 귀뚜라미가 화라도 났는지 동료보다 더욱 시끄럽게 울었다. 남자가 멈추었다. 귀뚜라미가 조용해졌다. 오후의 태양이 위용을 뽐내는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방랑자는 땀에 젖은 이마를 소매로 훔치고는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우울했다.


하루 전, 저녁에 도착한 큰 시골 마을에서 그는 모든 집을 찾아다니며 자신을 소개하며 공손하고 쉰 목소리로 물었다.


“일손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그가 문을 두드린 집 모두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촌사람의 불신 혹은 부녀자의 공포를 내비치며 똑같이 대답했다.


“아뇨… 필요 없어요.”


그의 수중에 남은 돈은 3수sous였다. 빵 한 조각을 사서는 먹으면서 걷다 보니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길옆으로 한 줄기 물이 흐르고 있었다. 배를 땅에 대고 남자는 물을 마셨다.


그리고 밤이 다가오자 ─ 6월의 밤은 커다란 별들이 요동치고 있었다 ─ 그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터를 잡고는 가방을 베개 삼아 누웠다. 피로에 찌든 몸을 눕히고 남자는 해가 뜰 때까지 잠을 잤다.

 

지극히 불행하던 사흘 간 남자가 가장 그리워한 건 담배였다.


축축한 풀 위에서 잠이 깨자 몸이 저려 일으키기 힘들었다. 해진 옷을 걸친 몸에 오한이 일어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제기랄!”


그리고는 다시 큰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숲을 가로지르는 길은 ‘왕의 길’이라 오랫동안 불려 왔다.


아침 길은 즐거웠다. 향기로운 서늘함이 녹음 깊숙한 곳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길가에는 텅 빈 목장의 풀이 창백할 정도로 이슬을 머금고 있었고 사이사이에 작은 야생 꽃들이 피어 있었다. 우윳빛 흰 꽃, 잿빛 분홍 꽃, 밝은 색 라일락 모두 풋풋했다. 저 위, 키 큰 나무들 꼭대기에는 떠오르는 해가 하루의 첫 햇살을 잎사귀에 비추고 있었다. 여행자의 스무 발자국 앞에 두 마리의 즐거운 토끼가 있었다. 나팔 같은 꼬리를 하고 하얀 등을 보이고는 몇 번 깡충거리더니 길을 건너 덤불숲 속으로 사라졌다. 새떼는 미친 듯이 지저귀고 있었다.


방랑자는 그의 끔찍한 과거를 떠올리고 있었다.


구빈원의 젖먹이… 농촌의 무미건조한 보모의 양육… 유년기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이 든 여인 앞에서 공포로 몸을 떨던 건 뇌리에 남아 있다. 체벌을 위해 여인의 손은 늘 올라가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남자는 굴강한 사내아이로 성장하여 그녀와 같이 이삭을 줍고 죽은 나무를 채집하게 되었다. 그녀는 모두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리며 돌아다녔고, 스스로 약간 이상한 미신을 믿고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자신의 닭장의 계란이 다른 집보다 덜 하얀 것을 발견하고는 신발로 깨 버리면서 ‘뱀의 알이 섞여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었다. 여인은 사내아이를 학교에 보냈고 그는 읽기, 쓰기, 그리고 셈을 배웠다. 그러나 그의 급우인, 붉은 볼에 수프와 심술로 가득 찬 농부의 자식들은 그를 개자식, 마녀의 종자라 불렀다. 그들에게 미움 받는 만큼 그도 그들을 미워했다. 셀 수 없는 주먹다짐이 오갔다. 운 좋게도 그는 거의 언제나 가장 강했다.


열네 살 때 ─ 그 해 늙은 보모가 숨을 거두었다 ─ 마을에서 그에게 일자리를 준 건 철도 교역을 막 시작하여 안정적인 업무를 위해 심부름꾼이 필요한 운송업자였다. 한 달에 3프랑을 임금으로 받았으며, 개밥을 먹고 짚더미에서 잤다. 그는 토박이 소년들에게 질시 받고 여자들에게 조롱을 당하며 멍청이 취급을 받았다. 그가 성질이 거칠고 결코 마을에서 3리lieues 이상 떨어져 있던 적이 없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그는 키 크고 활력 넘치는 청년이 되었고 징병관은 그를 차출해 75 연대로 파송했다.


연대에서의 첫날은 말하자면 그가 가진 유일한 좋은 기억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이 파리아 계급, 고통으로 얼룩진 사람은 정의 아래 평등한 감정을 알게 되었다. 제복은 여름엔 너무 두껍고 겨울엔 너무 얇았다. 그러나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병사들이 그것을 입었다. 일상의 ‘변변찮은 배식’이 매우 빈번하게 가슴을 울렸다. 그러나 다른 병사들도 그와 똑같이 먹었다. 침실에서 그의 아주 가까운 자리에는 몇 번의 말썽 끝에 전출된 자작 나리가 잤다. 둘은 서로 친구가 되었다. 놀라운 일이다! 여기서 남자는 사람의 대우를 받았다. 더 높은 위치로 진급하는 데에는 한 가지 덕목이면 충분했다. 복종. 그는 수월하게 그를 실천했다. 대부분의 사병보다 더 영리하고 덜 무식한 그는 복무 일 년 후 하사 견장을 달았고, 이 년째가 끝날 땐 중사 계급장을 달았다. 이제 주둔지의 거리에서 군인을 마주치면 상대방이 먼저 경례하게 되었다.


도취, 광기의 순간은 그를 파멸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새로운 출발 중이었다. 상사로 진급하고 얼마 안 됐을 때 일이었다. 어느 날 그는 부대의 돈을 주머니에 넣고 나가서는 압생트 술 석 잔을 연달아 들이켰다. 그리고는 술김에 변덕스럽게도 요물의 눈을 한 여자에게 허세를 부렸다. 그렇게 그는 절도범, 범죄자가 되었다… 그때부터 그의 삶의 모든 것은 다시 끔찍하게 되돌아갔다. 제정신을 차려 자신을 되돌아본 남자는 견장과 전후 회의에서 내린 십자 훈장 앞에서 수치심에 등을 구부렸다. 그리고 아프리카 전쟁으로 기나긴 세월이 흘렀다. 땡볕이 내리쬐는 길 위의 작업, 보관 창고의 열기… 그는 이 불가마 속에서 빠져나왔고 이후 이 치욕은 술에 대한 영원한 갈증과 부덕에 따른 타락으로 남자의 마음속에서 불타게 되었다.


운이 없었거니와, 좋은 기회도 생기지 않았다. 그의 전성기는 막을 내렸고 아무도 그에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다. 여기서 일을 하고 저기서 품을 팔며 그는 여정을 이어 왔다. 방랑자는 과거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 심한 굶주림에 시달렸을 때 그는 소소한 도둑질을 했다. 알제리에서 그렇게 ‘절도를 저질렀다.’ 지금까지 두 번 이상 그에게 가차 없는 정의의 철권이 내렸었다. 이 년 전에 그는 어디에 있었는가? 형무소에 있었다. 지난겨울에는? 여전히 형무소에 있었다. 지난 사흘 간 한창 추수 때인 이 낯선 지방을 떠돌며 그는 일을 구할 수 없었다. 마지막 여비를 썼고, 마지막 식량을 먹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뭘 하면 좋을까?


줄곧 큰길을 따라가던 남자는 네 갈래 길에 다다랐다.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 사명의 십자가였다. 나무로 투박하게 깎은 그리스도는 수차례 비에 페인트가 씻겨나가 있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왼쪽 길로 나아갔다.


갈래 길에서 이백 걸음을 걷자 그의 눈에는 아름답고 하얀 시골집이 들어왔다. 잔디와 널따란 도랑에 둘러싸인 집은 도로변에서 떨어져 있었다. 파란 목욕 가운을 입은 젊은 여인이 양산으로 몸을 가린 채 종종걸음으로 나타났다. 그리고는 잔디밭에서 커다란 뉴펀들랜드견과 놀고 있던 어린 소년을 불렀다.


“얘야! 얘야!”


소년은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개는 갑자기 분노를 띠더니 뜀뛰기 세 번에 도랑까지 뛰어와서는 음산한 여행자가 자리를 뜬 뒤에도 오랫동안 짖어댔다.


그는 이 부잣집에 주먹을 을러댔다. 아침 꽃은 행복을 발산하는 듯 했다. 고독에 따른 맹렬한 욕망에 사로잡힌 남자는 농촌 마을로 통하는 길을 향해 자신의 몸을 날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남자는 드넓은 초원 한가운데 높이 솟은 이삭들 사이에 있었다. 그는 다리가 부러진 데다, 피곤했고, 굶주린 위장은 울어댔고, 외로웠고, 갈 길을 잃었고, 절망적이었다.


갑자기 수탉이 경쾌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근처에 집이 있었다. 남자는 너무 배가 고팠다. 이젠 아무래도 좋다. 가서 훔치고 약탈하리라. 부득이하면 살인도 하리라. 그는 지팡이를 빙빙 돌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길 끝의 급하게 꺾인 곳을 지나자 눈앞에 작은 농장이 보였다. 대담하게 마당을 건너 닭에게 겁을 주고는 집으로 걸어갔다. 집은 낮고 짚에 덮여 있었다. 유리로 된 문손잡이를 손으로 쥐었는데 꿈쩍하지 않았다.


“이봐!” 그는 모든 용기를 쥐어짜내 소리 질렀다. 그리고 몇 초 간격을 두며 세 번 반복해서 외쳤다. “어이!”


대답이 없었다. 틀림없이 이 집 사람들은 들판으로 일하러 간 것이었다.


방랑자는 오른손에 낡은 펠트 모자를 감고는 주먹으로 타일을 쳤다. 잠겼다고 생각한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처음부터 잠긴 게 아니었다. 문을 밀어 열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천장은 낮았다. 방은 남자가 들어선 곳 하나뿐이었다. 방 안에는 침대, 벽난로, 궤짝, 옷장, 탁자가 있었다. 탁자 위에는 빵 한 덩이, 식칼, 그리고 포장을 찢은 담뱃갑이 있었다. 마침내 무거운 떡갈나무 찬장에 농부가 숨겨놓은 계란과 루이 금화와 에쿠 은화를 발견했다. 한 움큼 가득 쥐어 륙색이나 낡은 긴 양말에 털어 넣을 수 있으리라.


인생 처음으로 남자는 불법 침입을 저질렀다. 잡히면 형무소에 처넣어질 것이다. 뭐 아무래도 좋다! 어차피 갈 데까지 갈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는 빠르게 탁자 위의 칼을 집어 찬장에 다가가 억지로 열려고 했다. 그러나 수납장에 숨이 닿을 정도로 다가가자, 벽에 있는 검은 나무틀 액자에 끼워진 쪽지 한 장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기계적으로 응시하고는 곧바로 인쇄된 낱말들을 읽었다. 《75 보병 연대》


그는 죽은 듯이 멈춰 섰다.


알고 보니 그것은 드보아 쥴 마티유란 이름의 3대대 2중대 군악대 하사의 전역증서였다.


즉 남자는 옛 연대 출신 후배 기수에게 절도를 행하고 있던 것이다. 문제없다, 그가 현역일 때 후배가 아니다! 증서의 날짜는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건 문제될 게 없다!


이제 그의 마음은 움직였다. 하려던 짓을 하는 데 망설임을 느꼈다.


“이런 바보 자식 같으니!” 낮은 목소리로 남자가 말했다.


갑자기 그는 시선을 다시 탁자 위의 빵 덩어리와 담배로 돌렸다. 곧바로 불쌍한 악마의 잔치가 열렸다. 빵을 반으로 자르고는 주머니에서 담뱃대를 꺼내 잎을 구겨 넣었다. ─ 전우끼리 빌릴 수 있는 거 아닌가? ─ 그리고는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빵을 먹으며 원기를 회복하고는 밀이 무성한 길목과 갓길과 큰길을 걸어갔다. 다시 돌아가는 동안 담뱃대에 불을 붙였다. 이전의 네 갈래 길목에서 예의 그리스도를 마주쳤다. 남자는 그리스도에게 경의를 표하는 일 없이 입가를 즐겁게 찡그리며 과거 웃음을 준 아프리카 병사의 농담을 던졌다.


“이봐, 늙은이. 75 연대에서 복무하지 않았다니 수치스럽군! …아니면 오늘 밤 야영에서 내가 일자리를 찾게 해 주겠나?”



—— François Coppée 『Contes rapides』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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