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파랬다. 옛날 사람들은 하늘에 대해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했다. 그 중 하늘의 색은 개인의 정서나 사회적 분위기를 은유하는 상징적 의미를 가져 왔다. 그러나 그것은 대기의 성분이 가진 색상이 아니라 햇빛이 대기 중의 분자들을 통과하며 파란색과 보라색으로 산란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리학의 발전이 전통적인 운문을 해체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레일리가 1871년에 이론을 도입한 이후 하늘의 색과 연계되는 개인의 정서나 사회적 분위기가 새삼 개편된 것도 아니다. 여전히 난감한 상황에서 ‘하늘은 노랗고’, 절망적인 시대엔 ‘잿빛 하늘’이 우중충한 느낌을 준다. 그러한 표현의 이면에는 결국 입으로는 하늘을 말하면서 대상은 철저히 자신을 투영하는 대자對自적인 인간 중심의 의식이 있다.
지수는 창가 자리에 턱을 괴고 크리스마스 이브의 하늘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강의실에서는 이기선 Y대 물리학과 전임 교수의 전자기학Ⅱ 강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지 얼마 안 된 오후 1시 30분, 스팀이 빵빵하게 돌아가는 실내 온습도, 칠판에 그려진 몇 개의 직교좌표계와 양 옆의 빽빽한 풀이 그리고 노교수의 나긋나긋한 저음의 목소리는 환상의 시너지를 발휘하며 학생들을 졸음에 빠뜨리고 있었다.
지수는 문득 시야가 흐릿한 걸 깨달았다. 안경을 살짝 눈에서 떨어뜨리자 얼룩이 덕지덕지 끼어 있는 게 보였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지만 늘 그 자리에 있던 안경닦이가 잡히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가방을 책상에 올려놓고 뒤지기 시작했다.
반은 졸고 반은 생각 없이 칠판만 보고 있는 강의에 몰두하던 교수는 뒤돌아보며 말했다.
“자, 저번 시간에 이 부분에 대해 설명했죠? 이 직교좌표계를 이 극좌표계의 타원으로 적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전개해 볼 학생?”
교수가 강의실을 쭉 둘러보았다. 졸지 않고 칠판을 보고 있던 학생들은 일제히 눈을 책으로 돌렸다. 이런 무시와 회피에 익숙한 교수는 포기하지 않고 목표를 물색했다. 마침 창가 자리에 아는 학생이 안경을 다 닦고 다시 걸치고 있는 장면을 포착한 교수는 곧바로 방금 전까지의 강의 톤보다 세 배 정도 굵고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20학번 신지수 학생?”
화들짝 놀란 지수가 정면을 바라보자 곧바로 교수와 눈이 맞아버리고 말았다. 교수는 지수를 응시하며 방금 막 적은 예제를 분필 끝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교수는 다시 강의하던 톤으로 돌아와 말했다.
“문제 못 들었으면 다시 말해줄까요?”
“아닙니다.”
지수는 의자를 집어넣고 터덜터덜 칠판 앞으로 걸어 내려갔다. 교수에게서 분필을 받아든 지수는 5초 정도 생각하더니 야코비 행렬식을 차근차근 적기 시작했다. 교수는 뿌듯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지켜보다가 머리카락 밑으로 반쯤 드러난 귓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정말 대학원 안 올 거예요?”
“네, 이미 몇 번이나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밤까지 내 연구실에 있을 겁니다. 생각 바뀌면 언제든 연락하고 찾아와요.”
교수는 지수의 어깨를 토닥였다. 지수는 풀이를 다 적고는 분필을 내려놓고 무관심한 표정으로 교수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교수는 지수의 등을 바라보며 못내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지수는 교수가 듣지 못하는 거리까지 떨어져서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겨울학기는 아직 기말고사를 보는 한 주가 남았지만 이기선 교수를 보는 건 오늘로 마지막이다. 지난 일 년 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대학원 진학을 권유받았고 그때마다 늘 정중히 거절해 왔다.
애당초 대입 때 물리학과를 선택한 건 해당 학문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었다. 딱히 지망하는 진로도 없이 대입에 임하여 평소대로의 점수가 나왔고, 담임이 ‘중요한 건 간판’이라며 그의 점수로 갈 수 있는 가장 입결이 높은 대학의 비교적 입결이 낮은 학과를 추천했을 뿐이다.
사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지수는 어릴 때부터 소설을 읽는 것을 좋아했고, 그래서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도 자습 시간이면 그는 사전을 끼고 해외의 소설을 느긋이 읽거나 공책을 앞에 두고 자신만의 습작을 끼적거리곤 했다. 그러나 일찌감치 어른들의 세상 물정을 깨달은 지수는 자신의 ‘꿈’은 ‘꿈’일 뿐이라고 비교적 쉽게 내려놓았다.
대학교에 올라와서도 지수는 변한 게 없었다. 남들이 하는 대로 과목을 선택했고, 반쯤 흘려듣다시피 강의에 임하고, 시험 전에나 교과서를 한번 팔랑거리고는 3점대 후반의 성적을 유지했다.
그 외의 남아도는 시간을 지수는 끼니도 잊고 자취방 침대 위에서 소설을 읽곤 했다. 더 이상 습작 소설을 쓰지는 않았다. 대신 해외 사이트에 게재된 아마추어 기고가들의 단편을 번역해 포럼에 올리곤 했다. 외국어라는 진입장벽을 빼면 완전 창작에 비해 품도 덜 들고 성취감도 현시욕도 손쉽게 충족할 수 있었다.
2학년이 되기 전 겨울, 지수는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발신인은 자신을 전업 번역가 정시호라 소개하며 원고의 초벌 번역을 의뢰해 왔다. 페이는 풀타임 노동자와 비슷한 수준으로 주겠지만 정말 쉴 틈 없이 일감이 주어질 거라는 예고와 함께. 단지 좋은 경험이 되겠다고만 생각한 지수는 수락하는 답신을 보냈고 그날부터 지금까지의 지수의 인생에서 제일 바쁘면서도 충실한 나날이 시작되었다.
취미로 하는 번역과 일로 하는 번역은 무엇보다도 책임의 무게가 달랐다. 생소한 중세의 어휘라도 나오면 곧바로 작업 속도가 격감했고, 문장 하나를 위해 밤새 자료를 찾는 일도 수두룩했다. 그러다보니 학교 수업 시간에는 조는 일이 많았고, 때때로 도저히 힘들 땐 아예 엎드려 수면을 취했다. 교수와 강사들은 그런 지수를 좋게 보지 않았지만 질문이나 발표를 시키면 막힘없이 술술 나오니 성인 학생을 두고 대놓고 품성론을 들먹일 수도 없었다.
딱 한 사람, 이기선 교수만이 지수를 좋게 평가하며 뒤에서 그를 비호했다. 학문에 대한 동기와 집중할 여건만 만들어 주면 한국 물리학계를 빛낼 무서운 신예가 될 거라며. 지수도 그것을 알고 있어서 내심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흥미가 없는 학문에 억지로 투신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절 좋게 봐주신 건 잊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저는 아니지만…’
지수는 자리로 돌아가며 조용히 마음속으로 목례했다. 수업 시간이 십 분 정도 남자 교수는 칠판을 싹 지우고는 한가운데에 커다랗게 한 글자를 적었다.
‘꿈’.
“‘여러분의 꿈은 무엇입니까?’ 요즘 이런 질문을 하면 몰상식한 꼰대 소리 듣기 딱 좋다고 하죠?”
점잖은 노교수의 이미지와는 위화감이 큰 적나라한 표현이 나오자 몇몇 학생들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지수는 턱을 괴고 교수를 지켜보았다.
“그래요. 초등학생에게, 중학생에게, 고등학생에게 꿈이 뭐냐고 묻는 건 그런 소리를 들어도 쌉니다. 정작 ‘꿈’을 잃어버린 재미없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겐 마음 편히 ‘꿈’을 꿀 수도 없게 몰아세우며 자신들의 ‘꿈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세속적인 가치’를 주입해 왔으니까요.”
노교수의 이어지는 말에 이내 학생들은 다시 흥미를 잃은 눈치였다. 교수는 학생들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그것이 꿈을 꾸지 않아도 된다는 자기합리화는 되지 않습니다. 애초에 꿈은 용이하게 이룰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용이하게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용이하게 이해받을 수 있는 건 더더욱 아닙니다. 그래서 꿈을 좇는 사람들은 대개 고독합니다. 꿈을 잃어버린, 혹은 처음부터 없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다고 꿈을 좇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현명하고 실리적인 자신’을 애써 위로합니다. 아, 꿈이라고 하면 헷갈릴 수도 있겠군요.”
차분하게 이어가던 교수는 칠판에 쓴 ‘꿈’이란 글자를 지우고 대신 ‘理想’이라고 썼다. 학생들은 슬금슬금 교재를 가방에 집어넣고 있었다. 교수는 교탁을 손바닥으로 탁 치며 말했다.
“여러분 모두 자신만의 이상을 품고 사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저 역시 이상을 놓지 않겠습니다. 그럼 건투를 빕니다.”
교수의 목례에 답하는 학생은 지수를 포함해 채 열 명도 되지 않았다. 가방을 든 교수가 미처 문을 나서기도 전에 학생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지수는 천천히 책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공 수업이 있는 제3공학관에서 다음 교양 수업이 있는 과학관까지 십 분 안에 가려면 꽤나 서둘러야 했다.
이기선 교수는 다른 교수나 강사들처럼 중간 쉬는 시간을 생략하는 대신 이삼십 분 일찍 끝내 주는 융통성이 없었다. 그래서 타 전공이나 교양 수업이 다른 건물에 있는 학생은 이기선 교수의 수업이 끝나는 대로 뛰어가는 게 일상이었다.
지수는 익숙한 길을 경보로 걸으면서 보브컷을 찰랑거리며 다른 학생들을 쉭쉭 앞질러 갔다. 4학년 2학기가 끝나 가는 지수는 이제 와서 교양 수업에 지각 좀 한다고 큰일 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역시 사 년 동안 한 번도 안 한 지각을 이제 와서 하기는 아쉬웠다. 이 속도만 유지하면 딱 정각에 강의실에 들어갈 수 있다.
체육관과 스포츠과학관 사이를 지날 무렵이었다. 저 멀리서 거친 숨소리를 내며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지수가 살짝 돌아보자 장발을 뒤로 묶은 덩치 큰 삼십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계단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남자는 그대로 지수의 앞을 지나 과학관으로 앞서 뛰어갔다. 지수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뒤따라 과학관으로 들어갔다.
307호에는 이미 이십여 명의 학생들이 제각기 1인용 책상의자에 앉아 있었다. 지수는 늘 그렇듯 뒤쪽 창가의 빈자리에 앉았다. 정각이 되어도 강사가 들어오지 않자 지수는 스마트폰으로 메일을 확인했다.
발신인이 정시호인 새로운 메일이 1통 들어와 있었다. 동봉된 원본파일에 대한 간단한 지침, 지수가 번역한 문장에 대한 찬사, …그리고 ‘언제 한번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는 권유로 본문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삼 년 동안 시호는 몇 번인가 지수에게 직접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나 그때마다 지수는 다른 일 때문에 바쁘다며 정중하게 사양했다.
지수 역시 시호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온라인으로 알게 된 인연을 오프라인까지 끌고 간 끝에 관계가 파국에 이르는 경우를 지수는 일찍이 오랜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숱하게 보아 왔고, 그래서 온라인의 친분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약’이란 식으로 철저히 선을 그어 왔다.
‘…적당한 거리는 언제나 중요하니까.’
지수가 턱을 괴고 하릴없이 펜 돌리기나 하려는 찰나, 벌컥 하고 강의실 문이 열렸다. 방금 전 건물 앞에서 본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 들어왔다. 시계를 확인하자 정각에서 십 분이 지나 있었다. 307호는 중앙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맞은편에 있는데 이 정도로 헤매는 걸 보니 상당한 길치인 모양이었다.
남자는 교탁 앞에 서더니 ‘어흠, 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학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강의실을 휙 둘러보고는 뒤돌아선 남자는 칠판에 커다랗게 자신의 이름을 썼다. 지수는 펜을 툭 떨어뜨리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윽고 남자는 다시 돌아서서 말했다.
“…네, 저는 정시호라고 하고요. 일단은 여기 국문학 석사입니다. 황 선생님 대타로 왔고요… 보자, 강의계획서가…”
시호의 목소리는 그의 덩치로는 쉽게 연상하기 힘들 정도로 기어들어가는 하이톤이었다. 메고 온 배낭을 교탁에 올려놓고 뒤적이며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를 보며 몇몇 학생들은 입가에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지수는 아르바이트를 한 지 삼 년이 다 되어가서야 스마트폰으로 시호의 이력을 검색하고 있었다.
Y대 물리학과 및 동 대학원 국문학 석사 15년도 졸업. 저서로는 13년도에 ○출판사 공모전에 입선한 이후에는 줄곧 소설 번역을 해 오고 있었다. 최근에 낸 번역서들 중에는 지수가 작업한 작품도 몇몇 있었다. 메일을 통해서만 연락하던 상대를 강의실에서 직접 맞닥뜨리는 건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후우, ‘『행복한 우리들이 여기에』 문학 비평 및 토론’? 음? 토론인데 여러분 왜 다들 저를 향해 앉아 있나요? 자, 둥글게 앉아 봐요.”
겨우 파일을 찾아낸 시호가 교탁 앞으로 나오며 제안했지만 제각기 앞에 전공서를 펼쳐든 학생들은 뭉그적대며 좀처럼 엉덩이를 들지 않았다. ‘다음 주가 기말고사인데 교양 그것도 대타 수업 정도는 융통성 있게 시간만 때웠으면’ 하는 게 그들의 심리였다.
“시험공부는 집에 가서 하세요! 여기서 두 시간 책 들여다본다고 극적으로 점수가 잘 나오는 거 아니에요! 책 집어넣고 둥글게 앉아요!”
시호는 팔짱을 끼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내질렀다. 학생들은 싫은 표정을 지으며 시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엉덩이만 든 채 책상을 끌어대니 여기저기서 끽끽 하고 바닥을 긁는 굉음이 났다. 지수 역시 책상을 움직여 다른 학생들 옆에 붙어 원을 만들었다.
원 밖에 왼손으로 뒷짐을 지고 선 시호는 오른손에 파일을 들고는 천천히 학생들의 등 뒤를 걷기 시작했다.
“『행복한 우리들이 여기에』는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Y대 출신의 이서희 작가가 07년도에 일어난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집필한 장편 소설입니다. 이에 대해서 토론하는 시간을 가져 보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오늘 처음 보는 관계로, 발화할 때는 손을 들고 학번과 이름을 말씀해 주십시오.”
강의실에는 적막이 흘렀다. 학생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시호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슬슬 보다 못한 지수가 손을 들려는 순간 시호는 파일을 손으로 탁 치며 말했다.
“안되겠네요. 이렇게 하지요. 명색이 문학 토론 수업인데 이대로 여러분과 저의 시간을 허비할 순 없습니다. 지금부터 제일 먼저 손을 드는 한 명과 수업 시간이 끝날 때까지 토론을 하겠습니다. 대신 그 학생은 다음 주에 시험을 안 봐도 A+를 주라고 제가 황 선생님한테 얘기할 겁니다. 대학원 때 제 후배였으니까 걱정 말고요.”
상당히 파격적인 제안에 학생들의 눈이 일시에 빛나기 시작했다. ‘두 시간 동안 입씨름만 하면 다음 주엔 안 나와도 된다. 그 뒤에 수업이 없으면 바로 하교해 버리면 된다.’ 그리고 이럴 때 보통 제일 먼저 판단을 끝내는 유형은 졸업을 앞두고 학교 밖에서의 시간이 천금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지수 자리에서 시계 방향으로 네 자리 건너에 앉은 여학생이 손을 번쩍 들며 “20학번 김지영입니다.”라 외쳤다. 시호는 씩 웃으며 출석부를 보았다.
“네, 국문과 김지영 학생. 용기 있는 행동 고맙습니다. 학생은 이 작품에 대해서 어떻게 느꼈나요?”
“『행복한 우리들이 여기에』는 다분히 사회참여적인 작품입니다. 작가는 본작 외에도 여러 작품과 행보에서 독자에게 정의를 고민하고 행동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대학생으로서 또 국문과 후배로서 본받을 만한 여성상이라 생각합니다…”
단정한 단발을 한 여학생은 오전에 면접이라도 다녀온 듯 정장을 입고 있었다. 학생들은 별 관심이 없는 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시호는 팔짱을 낀 채 조용히 듣고 있었다. 몇 초간 검지로 팔꿈치를 툭툭 친 뒤 시호는 입을 열었다.
“어떤 면에서 『행복한 우리들이 여기에』가 사회참여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했나요?”
시호의 질문에 방금 전까지 팔을 책상에 기대고 있던 여학생이 허리를 펴고 정자세로 앉았다. 표정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건,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요. 인물들의 대비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어서…”
“그렇군요. 그렇다면 굳이 소설이 아닌 재연 프로그램용 각본으로 써도 되지 않았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시호의 반박에 여학생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안이하게 생각했다. 시험을 면제해 줄 정도의 조건인데 편안하고 화기애애하게 넘어가 줄 리가 만무했다. 불필요한 말을 하면 반박당할 여지만 늘어날 것이다. 잠시 숨을 가다듬고는 여학생은 입을 열었다.
“각본으로 쓸 수도 있겠지만 이서희 작가는 소설로 유명해진 사람이니 소설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익숙할 것입니다. 대중들도 마찬가지로 익숙하게 받아들일 거고요. 읽힐 보장이 있는 콘텐츠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에 시비를 가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호는 어디까지나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여학생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지수는 여학생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제 딴에는 아무리 공 들인 콘텐츠라 한들 소비하는 사람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일리 있는 이야기입니다. 시사적인 내용에, 직관적인 인간군상, 바로 수능 지문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도식화된 서사… 독자들이 그런 걸 원하면 그렇게 써야죠. 그래야 소비를 해 주고, 인세로 생계를 유지하고, 운 좋으면 방송도 타고 셀럽도 되고, 혹시 알아요? 잘만 하면 금배지 달아볼 기회도 얻을 수 있을지. 골방에 갇혀서 남들이 알아먹지도 못할 글이나 쓰며 혼자 자아도취 해봤자 그저 지적 허영, 지적 자위로밖에 안 보이죠.”
시호의 입에선 별안간 자조적이고 냉소적인 말들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순간 당황한 기색을 보이던 여학생은 점점 표정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학부생을 상대로 진지하게 토론하겠어’ 하는 생각에 다시 책상에 팔을 기대었다.
“저는 상업성과 작품성이 반비례하진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시사적인 내용이라든지 도식화된 서사라든지 하는 요소들이 작품성을 저해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분명한 건 그것이 독자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고 어떤 사고나 행동을 촉구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르트르가 앙가주망을 주창한 이래 현대 문학계에 그러한 참여문학 작품들이 숱하게 나온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일순 몇몇 학생들 사이에서 “오오~” 하는 감탄과 함께 조그마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학생은 이제 완전히 긴장이 풀린 표정으로 책상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시호는 웃음을 띠며 여학생의 말을 받았다.
“좋은 지적입니다. 역시 국문과는 다르군요. 그렇다면 여기 있는 학생들을 위해 참여문학 작품들을 추천해줄 수 있나요?”
“어… 저희가 수능 볼 때 다 한 번씩 봤던 작품들인데요. 『오적』도 있고,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도 있고, 『난쏘공』도 있고…, 그 외에도 찾아보면 많아요.”
“그럼 학생은 그 연장선상에 『행복한 우리들이 여기에』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봐도 될까요?”
“그렇습니다.”
“전 그렇지 않습니다. 아까 했던 말이지만 『행복한 우리들이 여기에』는 각본으로 써도 전혀 상관없는 소설, 아니 콘텐츠라고 생각합니다.”
지수는 순간 여학생이 눈살을 찌푸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여학생은 이제는 다시 자세를 고칠 시도도 안 하고 책상에 기댄 채 아까보다 상당히 날선 어조로 쏘아붙이듯 말했다.
“어째서죠? 적어도 앙가주망의 차원에서 참여 문학으로서의 의의를 부인할 요소는 없다고 보는데요?”
“앙가주망의 차원에선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학생이 사례로 든 작품들의 연장선상에 놓일 수 있다는 데엔 동의하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차이가 있거든요.”
“그게 뭐죠?”
“단순히 작품에 사회를 수용하느냐, 아니면 작품을 통해 능동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느냐의 여부입니다.”
시호는 한 박자 쉬고는 힘주어 말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학생들의 이목은 두 사람에게 쏠려 있었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형식에 대한 고민입니다. 『오적』은 군부 독재를 비판하는 내용과 별개로 전통 시가의 형식을 빌리고 있으며 끊임없는 언어유희를 이용한 풍자와 조소가 이어집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독재 권력에 대한 협력자, 저항자, 혹은 방관자로서 민중의 태도를 시골 학교의 한 교실이라는 설정에 빗대 풀어나갑니다. 『난쏘공』은 도시 재개발 때문에 삶의 터전에서 밀려난 하층민들의 생존 투쟁을 동화적인 분위기로 이야기합니다.”
“…”
“하지만 이서희는 어떻죠? 그저 현실에 산재한 사건들을 권선징악적으로 바라볼 뿐입니다. 얕은 수준의 대립을 통해 갑과 을을, 선과 악을 나누고 언더도그마를 자극하는 데 치중합니다. 거기에 사건을 재조명하고자 하는 작가 자신의 사색은 없습니다.”
“‘작가의 고유한 사색’, ‘글쓴이 자신의 생각’… 그런 원론적이면서도 애매모호한 이유보다 이서희가 참여문학 작가라는 더 확실한 증거가 있지 않나요? 그를 읽은 사람들의 분노와 슬픔이죠. 악에 대해 분노하고 언더독에 공감해 슬퍼하게 하는 촉매제로서 이서희의 작품이 앞선 예시보다 못한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서희는 각종 매체에서 오피니언 리더로서 자기 목소리를 내어 사회 변화를 촉구합니다. 그를 두고 ‘능동적으로 사회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순 없을 것입니다.”
여학생의 얼굴은 이미 짜증과 초조함에 잔뜩 물들어 있었다. 지수는 턱을 괴고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손바닥으로 가린 입은 웃고 있었다. 이번 주 수업은 예상보다 훨씬 흥미진진했다. 학부생 상대로 함정까지 파서 몰아붙인 걸 두고 누군가는 어른스럽지 않다고 지적할지 모르겠지만, 대학이란 곳은 결국 교수와 학생이라는 입장차가 있을 뿐인 성인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머리를 맞대고 진리를 추구하는 데 의의가 있지 않은가.
이미 여학생 쪽은 완전히 말렸다. 이제 시호가 한 마디만 하면 끝난다. 지수의 생각과 동시에 시호가 입을 열었다.
‘그럼 역시 굳이 소설이 아니어도 되네.’
“그럼 역시 굳이 소설이 아니어도 괜찮겠군요.”
성탄절의 밤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네온사인의 불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거리에는 온통 우산을 쓴 커플들로 가득한 가운데 장발을 뒤로 묶은 사내 하나가 그들을 가로질러 뛰어가고 있었다. 지하철 역 앞의 식당 골목에 들어서서야 그는 무릎에 손을 짚고 숨을 골랐다.
신촌역 근처의 K식당은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돈가스 전문점이다. 문을 들어서며 시호는 두꺼운 파카를 벗어 눈을 탈탈 털었다. 카운터에 있던 사장이 혀를 끌끌 차며 아는 체를 했다.
“정 선생님. 남자 쪽이 약속에 늦으면 어떡해요?”
“어휴, 죄송합니다. 요즘 정신이 없어서… 근데 남자 쪽이라뇨?”
“올해 크리스마스엔 그래도 한 명 꼬셨나보네. 저기 창가 자리. 삼십 분 전부터 앉아 있어요.”
사장이 턱으로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가며 시호는 고개를 빼고 내다보았다. 거리서 스쳐 지나가도 놓치지 않을 법한 외모의 여자가 턱을 괴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어깨 너머로 모아 늘어뜨린 머리칼은 허리까지 닿았고, 하얗고 오밀조밀하고 이국적인 이목구비는 한 마리의 페르시안 고양이를 연상케 했다.
“신지수 씨?”
시호의 목소리에 놀란 지수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블라우스 소매 밖으로 뻗은 손은 손가락 하나하나가 곱게 세공된 예술품 같았다. 적당히 부푼 가슴에서 잘록한 허리까지 내려오는 라인은 미끄러질 듯 가팔랐다. 미니스커트 아래로 드러난 육감적인 다리를 검은 스타킹이 감싸고 있었고 그 끝엔 새빨간 구두를 신은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대에 응해 줘서 제가 고맙죠. 반갑습니다, 정시호라고 합니다.”
파카를 의자에 대충 걸고 앉으면서 시호는 내심 의외라고 생각했다. 편견일수도 있지만, 자신도 그렇고 책상 앞에서 글과 씨름하는 게 일과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은 성향 상 규칙적인 운동과는 거리가 멀다 보니 체형이 극단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외모를 꾸미는 데에도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다 보니 본판이 좋아도 밖에서 만나면 후줄근한 외양이기 일쑤다.
한 마디로 눈앞의 사람이 지난 삼 년간 모니터 너머에서 그 어마어마한 분량의 작업을 꼬박꼬박 해 온 장본인이라 곧바로 믿기엔 위화감이 들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굳이 이 자리에서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시호는 메뉴판을 건넸다.
“자취방 근처 단골집이라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지각해 버려서 면목 없네요. 그래도 돈가스는 이 집만큼 하는 데가 드물어요. 파스타나 비후가스도 맛있고요.”
“잘 됐네요, 저 돈가스 좋아해요.”
지수는 메뉴판을 건네받으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역시 시호는 눈치를 못 챈 눈치였다. 전날 저녁 지수는 시호에게 초대에 응한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지수는 옷을 고르고, 가발을 맞추고, 화장을 고민하는 데 한나절을 썼다. 평소의 화장기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얼굴에 뿔테 안경, 체크무늬 남방이나 맨투맨에 청바지라는 털털한 패션을 시호에게 보일 수 없다는 생각에 지수는 필사적이었다.
“우리가 같이 근 삼 년을 일했는데, 이제야 만나게 되는군요.”
사장이 주문을 받고 사라지자 시호는 물컵을 홀짝거리고는 대화를 시도했다.
“덕분에 많은 공부가 되었어요. 돈도 꽤 모을 수 있었고요.”
“천만에요.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이전까진 초벌 번역자를 인맥을 통해서 어문 전공 학부생에게 시켰는데, 제대로 시간도 안 지키고 질도 형편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예 인터넷에서 직접 실력 있는 아마추어를 찾았더니 만난 게 신지수 씨입니다.”
어느새 컵을 다 비운 시호는 물주전자에 손을 뻗었다.
“사실 번역자에게 제일 중요한 건 모국어의 문해력입니다. 대략적인 뜻만 통하려면 차라리 번역기 한 번 돌리는 게 훨씬 빠르고 쌉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는 전달되지 않죠. 어디까지나 원어에서의 차이지만, 그를 어떻게 모국어로 치환하느냐 고민한 흔적은 분명 나타납니다. 저는 지수 씨가 작업한 글에서 늘 그런 흔적을 발견합니다.”
“과찬이세요. 전 그냥 열심히 했을 뿐인걸요.”
“그런 문해력은 일정 수준 이상의 독서는 물론 목적성이 있는 작문 경험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번역가가 자신의 역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습관적으로 글을 읽고 또 써야 합니다. 그러자면 자연스럽게 대부분의 시간을 글과 마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활동은 좀처럼 엄두를 낼 수 없습니다.”
“치즈돈가스 두 개 나왔습니다~”
시호가 직업의식인지 신세한탄인지 모를 열변을 토하는 사이 어느새 음식이 나와 두 사람 앞에 놓였다. 이야기의 흐름이 끊어진 것에 지수는 속으로 살짝 안도하며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시호는 고기는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수 씨에게 궁금한 게 있습니다. 혹시 번역가를 지망하는 학생인가요?… 아니면 달리 하고 있는 일이 있나요?”
“…”
지수는 아무 말 없이 고기를 써는 데 열중하는 듯 보였다. 자신이 내일모레면 졸업하는 물리학도고 취업 준비 같은 건 하나도 안 했으며 사실은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대리만족 차원에서 번역을 해 왔다는 사실을 굳이 밝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 말도 없이 넘겼다가는 신뢰를 잃을 것 같았다.
“…”
“…대답하기 곤란하시면 안 해도 되고요.”
지수의 대답이 늦어지자 시호는 명백히 방금 전보다 가라앉은 톤으로, 그러나 여전히 지수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저걸 정말 대답 안 해도 아무 상관없다고 받아들일 사람은 백 명 중 한 명 정도일 것이다. 지수는 살짝 지치려 하고 있었다. 딱히 데이트라 정한 건 아니지만 무슨 면접도 아니고 순전히 온라인상 파트너와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압박을 가하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번역은 어디까지나 ‘할 수 있어서’ 해왔을 뿐이고요… 지금은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있다고만 말씀드릴게요.”
지수는 잠시 동안 고민한 끝에 고른 적당한 대답과 함께 장난스럽게 혀를 빼꼼 내밀었다. “흠…” 시호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그제야 자기 몫의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진 지수는 식사 내내 시호에게 말을 걸었다.
“자취라면 혼자 사시는 거예요? 고생 많으시겠어요.”
“아뇨, 편해요.”
“…요즘 번스 작품들을 주로 작업했는데, 다음 작품도 번스로 생각하고 계세요?”
“결정되면 알려드릴게요.”
접시를 거의 다 비울 때까지 시호에게서는 무미건조한 단답밖에 들을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식사가 끝나는 대로 자리를 파하고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적어도 작업에 관해서는 클라이언트로서 매우 만족한 듯 보이니 일감이 끊길 일은 없겠지만 딱 거기까지일 것이다.
결국 그나마 그를 붙잡을 가능성은 오늘 지수가 그를 만나기로 결심한 근본적인 이유에 접근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지수도 어느 정도 진심을 내보여야 한다. 진심을 느끼지 못하면 시호는 여지없이 지수를 쳐낼 것이다.
아직 반이나 남은 지수와 달리 시호는 이미 접시를 다 비우고 입을 닦고 있었다. 처음에는 먹는 속도가 비슷했지만 대화가 끊어진 이후 시호의 먹는 속도가 거의 두 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수가 식사를 마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수는 포크와 나이프를 오른쪽으로 가지런히 놓고는 입을 열었다.
“…전 소설을 쓰고 싶었어요. 무척이나.”
지루한 듯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던 시호가 고개를 들고 지수를 바라보았다.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저는 번역 게시판에서 놀던 사람입니다.”
“…”
“‘아마추어 번역은 2차 창작이다’고 누가 주장하면 십중팔구 ‘저작권법을 무시한 현시욕을 보기 좋게 포장한다’는 공격을 받기 딱 좋죠. 네, 원작에 대한 팬심일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칭찬받고픈 현시욕일 수도 있어요. 굳이 부정하진 않아요.”
어느새 시호는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지수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원작의 인기에 무임승차해서 원작자와 정식 번역가가 받을 비평은 회피하고 마땅히 누려야 할 호평만 챙긴다는 건 아마추어 번역가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어요. 그런 그들에게 어떤 사람들은 ‘정작 자기가 창작해서 세상에 내놓고 평가받을 깜냥은 없는 족속들’이라고까지 말하죠.”
어느새 지수의 언성은 꽤 높아져 있었다. 시호는 근처 테이블에서 이쪽을 기웃거리는 게 느껴졌다. 아무리 성탄절이라 해도 음식점에서, 찻집에서, 술집에서 허용되는 텐션은 엄연히 달랐다.
“어… 저기…”
“예! 저도 잘한 건 없는데요, 적어도 그런 ‘비판을 위한 비판’밖에 못하는 족속들에게 물어보고 싶어요! 그렇게 원작이 소중하시면 왜 본인들이 라이선스를 받아서 번역하지 않느냐고, 오마주든 오리지널이든 왜 본인들이 창작을 하지 않느냐고 말이에요! 그들에게 법이란 건 그저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한─”
“자, 자, 자, 자…”
시호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지수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뒤를 돌아보니 카운터에 서 있는 사장이 궁금한 눈초리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틈에 지수는 혀를 빼꼼 내밀었다. 시호가 다른 테이블들을 신경 쓰며 천천히 앉자 지수는 조용히 쐐기를 박았다.
“창작이 얼마나 힘든지, 창작으로 먹고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정도는… 저도 잘 알고 있다고요. 그래도 아예 포기할 순 없으니까 번역이라도 하며 기웃거리는 거고요…”
시호는 어느새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지수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머지 한 손은 손가락을 테이블에 딱딱 튕기고 있었다. 지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 토한 열변에 적어도 거짓은 없었다. 전부 지수가 직접 보아 오고 또 겪어온 과정이었으니 말이다. 굳이 거짓이 있다면 비언어적 요소 전반이랄까. 이제 와서 그렇게 분해하고 한탄할 정도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집착이 강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내심 미련은 언제나 사고의 가장 깊은 곳에 마치 균처럼 남아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해소되지 못한 일말의 갈망은 초자아로 원숙하지 못한 채 늘 밖으로 터져 나올 기회를 엿본다. 다행히도 오래된 갈망은 그만큼 촘촘한 방어 기제를 갖추고 있어서 자신을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게 한다. 지수가 창작의 열망에 대한 대체재로 꾸준히 번역을 해온 것처럼, 시호 역시 창작의 열망에 대한 대체재로 강의 시간에 문학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인 것이라면 말이다.
어디까지나 지수의 추측에 불과했고, 그래서 승부수를 던져보기로 한 것이다. 만약 교집합이 거의 없는 로고스를 갈망하고 있다면 파토스를 살짝 내비친 것만으로도 상대는 불쾌해 할 뿐이다. 그러나 거의 비슷한 로고스라면 상대의 파토스에 꽤나 유효하게 호소할 것이다.
“지수 씨.”
이윽고 시호가 입을 열었다. 지수는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머지 이야기는 맥주라도 곁들이면서 해야 하지 않겠어요?”
“아, 잔 비었네요, 지수 씨.”
“아… 예, 여기.”
시호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맥주병을 든 손을 바르르 떨며 지수의 잔을 채웠다. 주량을 조절하려고 천천히 마시던 지수를 닦달하듯 아까 전만 해도 반쯤 빈 잔에 굳이 다시 채워주더니, 이제는 자기 잔을 스스로 채우면서 지수의 잔이 아까부터 빈 건 거의 신경 안 쓰고 있었다.
하긴 지금 시호에게 중요한 건 딱히 술 대결을 벌이는 게 아니었다. 쪼르르 지수의 잔을 채우는 와중에도 시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정말로… 창작자에게 가장 중요한 재능은 결국 어떤 기술도 지식도 경험도 아니고, 지속적인 열정이란 말이죠….”
“네…”
“까짓 거 사회적 성공? 안 할 수도 있어요! 그러지 않아도 어떻게든 먹고 살아요! 예술적 성취? 나만 좋으면 그게 마스터피스고 금자탑이에요! …근데 그것도, 도저히 이걸 안 하면 영혼이 죽을 것 같은 갈망이 없어지는 순간, 그저 생계 때문에, 미련 때문에 타성으로 끌고 가는 일신의 몸부림에 불과하다 이겁니다…”
지수의 기억이 맞으면 시호는 저런 맥락의 발언을 이미 앞서 세 번은 했다. 지수는 살짝 질린 표정으로 테이블에 쌓인 무수한 빈 병을 흘겨보았다. 시호는 어느새 새 병을 따서 잔을 채우고 있었다.
“…근데, 이 번역이라는 일이… 참 생떼 같아서, 온전한 창작도 아닌 주제에…, 창작에 버금갈 정도로 정신력을 소모한단 말이죠….”
지수는 슬쩍 시계를 보았다. 슬슬 자정이 넘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이쯤에서 끊지 않으면 오늘 시호가 자기 발로 집에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선생님, 많이 드셨어요. 이제 그만 일어나요.”
“참… 우리 지수 씨 덕분에… 제가 아주 큰 도움을…”
“그 이야기 십 분 전에도 하셨어요. 자, 부축해 드릴 테니까…”
지수는 시호의 손에서 잔을 뺏었다. 앞에 서서 팔을 붙잡고 일으키려 하자 시호는 비틀거리면서도 지수의 팔을 꽉 붙들고 두 발로 섰다. 시호를 부축한 채 카운터 앞까지 가자 여사장이 쯧 하고 혀를 차고는 전표를 북 찢어서 지수에게 건넸다.
“나중에 정신 차리면 계좌이체하라고 해.”
“감사합니다… 꼭 전달할게요.”
“흐응… 그나저나 이거 오랜만인데?”
여사장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위아래를 훑어보며 말하자 지수는 살짝 꺼림칙했다. 재학 내내 지수는 한 번도 학교 근처 주점을 이용한 적이 없었으니 저 인사는 말이 안 되었다. 전표를 챙긴 지수는 눈을 피하며 작게 말했다.
“…저 여기 처음이에요. 그럼 수고하세요.”
이미 술기운이 한계까지 올랐는지 시호는 아무 말도 없이 지수가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카운터를 지나쳐 문을 밀려고 하니 뒤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여사장의 목소리가 배웅했다.
“아하하하! 그래, 그래… 다음에 또 오면 서비스 해줄게!”
시호를 내던지다시피 침대에 눕히자 테엥 하고 스프링이 튀는 소리가 났다. “어휴, 이렇게 운동을 시켜 주네.” 지수는 이마에 줄줄 흐르는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역에서 꽤 떨어진 원룸촌, 그 중 가장 오래된 빌라의 4층에 시호의 자취방이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지수는 시호를 업고 계단을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 적당한 모텔에 던져 주는 방법도 있었지만 택시에서 완전히 뻗기 전 시호가 한사코 “집으로… 집으로… 홍실빌라 406호…” 라 중얼거려서 지수는 차마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 어차피 시호의 방에 관심이 있기도 했기에 지수는 “네, 네, 집으로 모셔다 드릴게요.”하며 그를 달래며 왔다.
요즘 세상에 번호키도 없이 재래식 열쇠로 따는 잠금장치가 되어 있는 걸 보고 지수는 혀를 끌끌 차며 시호의 주머니를 뒤졌다. 다행히도 바지 오른쪽 주머니에서 바로 나왔다.
지수는 이불을 시호의 가슴께까지 당겨 주고는 스탠드를 켜고 책상을 둘러보았다. 의자 위치에서 오른손을 적당히 뻗은 곳에 에쎄 아이스 담배와 일회용 라이터가 있었다. 이것저것 산만하게 쌓인 책상 위에서도 그곳이 지정석이라도 되는 양 반경 15cm 이내에 다른 잡동사니가 없이 둘이서 당당히 놓여 있었다. 여러 언어의 사전이 제멋대로 쌓여 있는 옆에는 군데군데 때가 탄 구형 노트북과 한 다발의 원고지가 있었다. 스탠드 바로 아래 재떨이 대용으로 쓰는 사기그릇에는 필터와 재만 남긴 꽁초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지수는 책상 앞에 앉아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기억에 없는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번역한 건 아니다. 등장인물과 전개도 완전히 생소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시호가 따로 번역 중인 작품이거나, …그의 창작일 것이다. 지수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역시 그는 아직 소설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음을 직접 확인하자 왠지 마음에 기쁨이 솟았다.
세간에 공개된 그의 작품은 이력에 있는 공모전 입선작이 유일했다. 전날 지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도서관으로 달려가 해당 작품을 찾아 읽어보았다. 그것을 읽은 소감을 한 마디로 축약하자면 ‘아름다움’이었다. 내용 자체가 아름다움의 개념이나 가치를 다룬 건 아니었다.. 다만 끝없이 번민하면서도 한 발짝씩 나아가는 주인공의 행보와 언동에서 아름다움을 느꼈을 뿐이다.
한 가지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내용이 전반적으로 점잔을 뺀다고 할까, 도처에서 스스로 리미터를 걸고 있는 게 느껴졌다. 지금 지수가 넘기고 있는 원고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독자를 의식하고 있었다. 원래 그런 방향성 혹은 한계를 가진 작가라면 애당초 느낌도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호의 문제는 명백했다. 그는 작품 세계에 틀어박히는 은둔형 외톨이의 성분이 부족하다. 자신의 심상에 대해 사교적인 게 꼭 모든 작가에게 결격 사유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시호에겐 애로 사항이었다.
‘말로는 작가의 자의식을 그렇게 역설해 놓고…’
지수는 전날 여학생을 있는 대로 농락하던 시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적어도 겉모습과 행동반경만 보면 그는 ‘골방 작가’의 스테레오타입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은둔형 외톨이가 된다는 인과관계는 없다.
한번 한숨을 후우 쉬고 지수는 팔짱을 끼고 집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입은 옷과 안 입은 옷이 명확히 구분이 안 된 채 옷장 근처에 널브러져 있었고, 싱크대에는 설거지거리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현관은 언제 마지막으로 쓸고 닦았는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먼지투성이였다.
“일단은 사람 사는 꼴 좀 갖추죠, 선생님.”
지수는 팔을 걷어붙였다. 자취 8년차의 솜씨를 발휘할 시간이다.
의식은 애저녁에 돌아왔지만 인간으로서의 실존의 무게에 짓눌려 눈을 뜰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아침은 빈번하게든 간헐적으로든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리고 이날 아침에는 시호에게 찾아오고 말았다.
산처럼 쌓인 설거지를 처리하지 않으면 더 이상 대용으로 밥을 덜어 먹을 용기가 없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페이가 높아서 지수와 일감을 나누지 않고 혼자 작업 중인 종교 서적 번역이 좀처럼 진척이 안 된 채 마감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집필 중인 원고에서 이전에 비해 전혀 발전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다소 컸지만 눈을 뜨고 직시하기도 힘들 정도로 치명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시호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은 남들보다 복잡하고 치열하게 산다는 착각을 한다’는 자기객관화가 빠른 편이었다. 이 역시 결국 다른 누군가가 주입해 준 것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는 시호에게 ‘아침에 일어나면 잔말 말고 운동부터 해’라며 끈질기게 독촉했었기에 시호는 앞구르기를 하듯 양팔로 침대를 탁 치며 허리와 다리의 반동으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트레이닝복이라면 어제 아침에 운동을 갔다 와서는 침대 옆에 대충 던져두었을 터였다. 그러나 있어야 할 트레이닝복이 침대 주변을 둘러봐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점은 그뿐이 아니었다. 오늘따라 방 안의 공기가 살짝 추우면서도 신선하게 느껴졌다. 실내 흡연을 하면서도 어쩌다 한 번 기분 전환용으로 창문을 여는 시호의 방 벽지는 이미 타르를 비롯한 발암물질들로 누렇게 절어 있었다. 하물며 이 계절에 창문을 열어놓고 자는 습관은 더더욱 없었다. 문득 담배 생각이 나 책상 위를 보니 어제 외출하기 전에 피울 때만 해도 수북이 쌓여 있던 재떨이가 깔끔하게 비워진 것도 모자라 없던 물티슈까지 깔려 있었다.
무엇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신의 모습에 시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살면서 한 번도 잠결에 옷을 벗은 적은 없었다. 환기까지 되어 있다 보니 추위가 온몸을 엄습했다.
머릿속에 물음표를 마구 띄우며 시호는 이불을 몸에 둘둘 말고 방 밖으로 나왔다. 싱크대에 담가 둔 설거지거리가 전부 건조대에 걸쳐져 있었다. 싱크대 가장자리는 거품 찌꺼기는 물론 물방울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방바닥은 방금 막 닦은 듯 뽀득뽀득했다. 낡은 세탁기가 요란하게 내는 소리에 베란다로 나가 보니 묶어 두기만 하고 버리는 걸 차일피일 미루던 쓰레기봉투들이 전부 사라져 있었다.
그 때였다. 잠금장치를 따는 소리와 함께 지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메이드 차림이었다. 까만 원피스에 하얀색 앞치마에 하얀색 카추샤까지 그야말로 빅토리아 시대에서 타임슬립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재현도였다. 시호는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어어 하고 입에서 소리를 내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지수는 까딱까딱 눈짓을 하며 시호에게 비키라는 눈치를 주었다. 시호가 순순히 방 안으로 들어가자 지수는 양손에 든 빵빵한 비닐봉지를 들고 따라 들어갔다.
시호가 어안이 벙벙한 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 건 안중에도 없는 듯 지수는 냉장고 앞에 비닐봉지를 털썩 내려놓았다. 파, 양파, 고춧가루, 된장, 마늘, 돼지고기, 고등어 등등 마치 어느 집 냉장고를 통째로 털어온 것처럼 기본적인 식재료가 따로따로 신문지나 랩으로 싸여 있었다.
“어… 지수 씨? 이건 대체…”
지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금 닦은 듯 물기가 스며있는 도마를 올려놓고는 봉지에서 파를 꺼내 씻어서 곧바로 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제 생각났다는 듯 “아!” 하고 작게 탄성을 지르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트레이닝복이라면 너무 냄새가 나서 빨았어요. 옷장 왼쪽 밑에서 두 번째 칸에 여벌 있더라고요.”
“아, 고마워요… 아니, 그게 아니고! 지금 남의 집에서…”
말을 마치기도 전에 지수가 식칼을 쥐고 돌아보았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지난밤과 달리 거기엔 어떠한 애교도 없이 그저 박력만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남의 집에 내 두 배는 되는 거구를 업고 4층까지 올라오게 한 건 어디의 누구죠?”
“…”
시호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식칼을 쥔 팔뚝은 얼핏 봐도 자신의 2/3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면 체감 무게는 훨씬 더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기어이 업어서 데려다 주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지수는 다시 몸을 돌려 마저 파를 썰고는, 곧바로 감자칼로 감자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계속 멍하니 서 있는 시호를 돌아보지도 않고 지수는 말했다.
“좀 걸리니까, 부담 말고 운동 다녀와요. 얘기는 식사하면서 해요.”
마주 앉은 식탁에서 시호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의 주방을 빌려 속성으로 만든 김치찌개가 어지간한 식당 메뉴보다 맛있는 것도 그렇지만 반찬 가짓수가 평소에 비해 확연히 많은 것도 놀라웠다. 평소 끼니를 채우기 위해 오 분만에 해치우는 식사와는 질이 달랐다. 당장 반찬이 담긴 그릇들부터 마지막으로 언제 꺼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눈앞의 지수의 식사 양상이 간밤에 돈가스를 깨작깨작 먹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당장 밥그릇부터 시호의 것의 두 배는 되었다. 거기에 고봉으로 푼 밥을 두 그릇째 다 비워가고 있었다. 적어도 내일 저녁까진 먹을 수 있겠다 싶던 양의 김치찌개는 지수가 벌써 2/3는 덜어가 먹어치웠다.
시호가 자기 밥공기를 반쯤 비울 무렵, 지수는 휴지로 입가를 닦으며 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집에서 누군가와 같이 식사를 하는 게 오랜만이라 그런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아침의 상황에 압도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시호는 한 마디도 입을 뗄 수 없었다. 그렇게 지수와 거의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수저를 뜨고 있었다.
“당분간 여기서 일할게요.”
푸우웁 하고 시호가 뿜은 이물질이 식탁은 물론이고 지수의 얼굴 언저리까지 튀었다. 지수는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자신에게 묻은 것들을 닦았다. 콧구멍에서 밥풀 한두 알이 튀어나온 채 입을 열고 뭐라 웅얼거리는 시호의 모습에 지수는 살짝 한숨을 쉬며 휴지를 건넸다.
코를 팽 풀고는 입가는 닦지도 않고 시호는 말문을 터뜨렸다.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예요? 나한테 원하는 거라도 있어요?”
“근무 내용의 변경과 보수 인상. 인상폭은 정확히 출판사 원고료의 7할.”
지수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품에서 종이 두 장을 내밀었다.
“근무내용은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초벌 번역. 여기에 더해서 조식, 중식, 석식 조리를 포함한 이 집의 가사일.”
지수는 팔짱을 끼고 담담하게 말했다. 시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관자놀이를 탁탁 치며 각성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지수의 말은 이것이 현실임을 가차 없이 선고했다.
“근무 시간은 조식 조리부터 석식 뒷정리까지. 그리고 혹여나 또 술 먹고 내 몸에 손끝 하나라도 대면 그때는 바로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시호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제야 눈치 챈 사실이 있다. 아까부터 지수는 1인칭을 ‘나’라고 하고 있었다. 지난밤에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자신을 업고 방까지 데려다 줄 정도의 호의가 있던 상대에게 얼마나 몹쓸 짓을 한 걸까 상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제와는 180도 달라진 저 태도가 그를 암시하고 있었다.
“…혹시, 제가 지난밤에 뭔가 잘못을 했나요…?”
“……쯧!”
지수는 대답 없이 혀를 한번 차고는 고개를 돌려 애꿎은 벽을 노려보았다. …이 이상 시호의 얼굴을 보고 있다간 속이고 있단 게 들통 날 것 같았다. 어제와 그저께의 당당하기 그지없던 모습과는 정반대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시호를 보며 지수는 웃음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을 억누르고 있었다.
“…아아… 아아아…!”
시호는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하룻밤의 잘못으로 자신의 지금까지의 그리고 앞으로의 커리어가 박살나는 게 보였다. 이대로 끝장날 순 없었다. 아직 쓰고 싶은 글이 너무나도 많았다… 인물 정시호가 꽃피기도 전에 인간 정시호에게 발목이 잡힐 순 없다…!
지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저렇게까지 당황하는 걸 보면 너무했나 싶으면서도, 이렇게라도 안 하면 그와 같이 있을 명분이 없었다. 시호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말려들었다. 주도권은 완전히 이쪽으로 넘어왔다.
“…내가 지금 그쪽을 신고해서 범죄자로 만든다고 득이 될 건 없죠. 나한테 지금 가장 필요한 건 돈이라고요. 그렇다고 손 하나 까딱 않고 받아내긴 싫어요. 난 창녀가 아니거든요.”
지수는 손끝으로 방금 전 꺼낸 계약서를 탁탁 튕겼다.
“하던 대로 하자고요. 단지 그쪽의 주머니가 더 가벼워지는 것뿐이에요. 아, 도장이랑 인주는 여기.”
어느새 자신의 도장까지 확보해 둔 지수의 치밀함에 시호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해버렸다. 떨리는 손으로 가까스로 도장 뚜껑을 열어 인주를 찍는 그를 보며 지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전문 번역가의 원고료가 어떻게 책정되는지 지수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까지도 시호는 자신의 몫의 절반 가까이를 지수에게 지급했을 것이다. 남은 절반을 빠듯하게 생활비로 쓰며 확보한 여유 시간을 소설 집필에 쏟아 부었을 테고.
그렇다면 조금 더 허리를 졸라맬지언정 아예 요리와 집안일에서 해방되는 게 그의 집필에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어차피 지수 자신도 이 집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이상 재료비는 반반 부담이고, 5~10분이면 조리와 취식까지 끝내는 레토르트나 냉동보단 돈도 덜 들고 영양도 챙길 수 있다.
초벌 번역 작업 면에서도 귀찮게 메일로 주고받을 것 없이 바로 피드백을 받을 수 있으니 훨씬 빠른 시간 안에 끝낼 수 있다. 어차피 종강도 한 마당에 시간에 쫓길 일도 더 이상 없다. 즉 가사 일을 빌미로 얼마든지 시호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었다.
‘…멋진 작품 기대할게요, 선생님.’
눈동자에서 요사스런 빛을 뿜으며 자신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지수의 얼굴을 시호는 눈치 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