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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Aug 31. 2024

피그마리온의 눈물 (2)

'Une telle fonction cognitive n'était pas son intention initiale. Le 'robot' essayait de séduire son créateur, car il calculait que Henriette manquait de réabsorption de sérotonine et était accro au toucher si bestial.'

“…그러한 인지 기능은… 그녀의 본래 의도가 아니었다… 그 ‘로봇’은 자신의 창조주를… 유혹하려 하고 있었다… 계산한 대로 말이다… 앙리에트는 재흡수가 부족했다… 세로토닌…의… 그리고 중독되어 있었다… 그러한 짐승 같은 손길에…”

지수는 식탁에 앉아 열심히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집 안에는 지수의 타자 소리와 중얼거리는 소리 그리고 베란다의 낡은 세탁기가 탈수를 하는 요란한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 페이지에서 앞으로 남은 문장은 두어 줄, 사 분 정도면 탈수가 끝날 것이다. 지수는 조금만 더 스퍼트를 내기로 했다.

‘시간을 쪼개서 하는데도 이렇게 바쁘다니…’

지수는 한숨을 쉬고 싶었지만 그럴 새도 없었다. 현재 시각은 오후 5시. 빨래를 널고 나면 저녁식사 준비를 해야 한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면 이곳에 남아 있을 명분이 없다. 자취방에 일감을 갖고 가느냐, 내일로 일감을 이월하느냐의 선택지는 애당초 없다. 이 일은 하루라도 미뤘다간 계속 일감이 밀려서 이윽고 십중팔구 일정이 펑크 나는 종류의 것이다.

이런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시호가 번역 수주를 기존의 1.5배로 늘려 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늘어난 분량은 전부 프랑스어, 독일어 같은 제2외국어권의 텍스트였다. 원고를 받아들고 아연실색하는 지수를 못 본 체하며 시호는 말했다.

“수입의 3할로 이전처럼 저금도 하려면 어쩔 수 없어요. 시간 되는 데까지만 하고 나한테 던져도 돼요.”

지수가 애당초 돈이 최우선 목적이었다면 상황을 이렇게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호의 시간을 확보해 주기 위해 돼도 않는 공갈까지 친 마당에 그에게 일을 던지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방아쇠를 당긴 사람이 끝까지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느새 세탁기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지수는 닫혀 있는 시호의 방문을 빼곰 하고 열어보았다. 창문만 연다면 딱히 이전처럼 문을 열고 피워도 상관없다고 했는데도 시호는 지수가 집에 있을 땐 굳이 문을 닫고 있다. 그래서 지수가 시호의 얼굴을 볼 기회는 같이 식사를 할 때나 청소를 빌미로 들어갈 때밖에 없었다. 하루에 한두 번씩 방문을 열고 시호의 모습을 훔쳐보는 건 이미 일과가 되었다.

마침 시호는 잠시 숨을 돌리고 끽연을 하는 모양이었다. 분명 점심 식사 전에 재떨이를 비웠는데 벌써 일곱 개비 정도가 필터만 남아 굴러다니고 있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늘도 시호의 노트북에서는 똑같은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호가 가사를 흥얼거릴 때마다 입에서 연기가 풀풀 날리는 모습은 꽤나 진풍경이었다.

저 중 두 개비 정도가 자신 때문임을 지수는 알고 있었다. 피해자 행세를 하며 이곳에 들러붙어 있지만 진실은 오히려 자신이 터무니없는 가해자란 사실도. 그러니 자신은 이 정도 거리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복에 겨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대신 그가 최대한 글만 생각할 수 있게 해주리라고 순간순간 다짐해 왔다.

지수는 소리가 나지 않게 방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도토리묵 재료와 깐밤을 가져왔었다. 도토리묵과 밤밥은 자취방에서는 혼자 곧잘 만들어 먹지만 시호에겐 처음 선보이는 메뉴였다. 과연 맛있어할지 기대되었다. 그 날 이후 한 번도 자신에게 사적인 말을 한 적은 없지만 말이다.     


시호는 지수가 방문을 닫는 기척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과 함께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 날 이후 지수는 시호를 경계하기라도 하듯 수시로 그의 동향을 살폈다. 때문에 시호는 자신의 집에서도 마음 편히 있을 수 없었다.

이럴 거였으면 오프라인에서 괜히 만났구나 하는 후회가 극심하게 몰려들었다. 서로에게 상처만 남은 결과가 되었다. 차라리 자신이 지수를 어떻게 탐했는지 기억이라도 남아 있다면 덜 억울하겠다는 찌질하고도 인간적인 생각도 들었다. 그 정도로 지수의 외모는 시호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런 사람이 메이드 차림으로 자신의 집에서 가사는 물론 원고 초벌 작업까지 하고 있는 건 원래라면 바라 마지않는 이상적인 상황이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점이라면 지수 덕분에 여유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는 것이다. 시호 자신도 자취 경력이 오래 됐지만 가사의 속도나 결과나 지수에게 미칠 수 없었다. 입지 않는 대부분의 옷들도 깔끔하게 다려져 있었고, 집안 어디든 마치 광택제를 바른 듯 반들반들했다. 거기에 원래부터 믿고 맡기던 초벌 번역까지 질과 양을 유지하고 있다. 시호가 조금만 덜 깐깐했다면 그냥 그대로 납기해 버려도 상관없을 정도였다. 수입의 7할은 고사하고 9할을 줘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시호는 그런 복잡한 심정조차 잊어버릴 기세로 소설 집필에 박차를 가했다. 애초에 그를 위해 많지 않은 수입임에도 온라인 아르바이트까지 고용한 것이었다. 소설을 완성하고 나서 제대로 지수에게 사과 겸 감사 인사를 하겠다고 다짐하며 시호는 재떨이에 필터만 남은 담배를 짓이겼다.     



      

밤 9시 정각을 눈앞에 둔 시각, 누군가 쾅쾅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시호의 집 대문을 두들겼다. 16평 남짓에 서재와는 겨우 나무문 하나 끼고 있어 방음이란 게 성립이 안 되는 공간의 주거인은 이런 예상외의 소음에 좀처럼 익숙해질 수 없었다.

시호는 욕지기를 중얼거리며 담배를 입에 문 채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저 횟수와 박자, 무엇보다 이 시간에 저렇게 문을 두드리는 몰상식함을 겸비한 사람은 자신이 아는 한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문 앞에 다다르자마자 또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시호는 오른손으로 문고리를 돌리며 전력으로 어깨를 문에 부딪쳤다.

그러나 문 너머에서는 어떠한 저항도 느껴지지 않았고, 시호는 그대로 문 밖으로 몸을 날린 꼴이 되었다. “어어…?” 시호는 의아하다는 듯 입에서 소리를 내며 앞으로 쏠려 넘어지기 직전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그가 예상한 헬멧에 바이크 슈트를 입은 장신에 육감적인 몸매의 미녀가 유유히 문으로 들어가며 시호를 향해 빼꼼 하고 혀를 내밀었다.

(덜컹! 찰칵!)

그리고 그대로 문이 닫힘과 동시에 잠겼다. 당황한 시호는 자기 집 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러나 안에선 아무 반응도 없었다. 시호는 얼굴을 문에 가까이 대고 안에서 간신히 들릴 정도의 크기로 중얼거렸다.

“황 박사 왔어…?”

“어!”

언성을 높인 목소리가 꽤 거리를 두고 들려왔다. 서재 아니면 부엌이렸다. 시호는 문에 귀를 바짝 대었지만 그 이상의 정보는 알 수 없었다. 시호는 대수롭지 않은 체하며 말을 이었다.

“저번에 대타로 뛴 수업 말이야, 혹시 강의평가 때 학생들한테서 말 나왔어?”

“나왔지! 어디서 석사 나부랭이가 와서는 잘난 체하며 까마득한 후배 짓밟기나 했다고! 왜?”

시호는 왠지 살짝 면목이 없어졌다. 무난하게만 해도 크게 클레임이 들어오지 않을 대리 수업을 토론을 빙자한 한풀이의 장으로 만들어 놨으니.

“…화났어?”

“내가 왜 화가 나! 말했잖아 선배한테 일임한다고! 거기서 오는 부정적인 피드백은 당연히 내가 감수하는 거고!”

여전히 들려오는 대답은 거리가 느껴졌다. 도대체 이 여자가 집 안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시호는 여전히 얼굴을 문에 찰싹 붙인 채 한껏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 황 박사? 그럼 나 이제 그만 들어가도 될까?”

“…”

“황 박사? 나 많이 추운데?”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자 시호는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1월 하순의 추위는 얇은 실내복 따위는 손쉽게 파고들었다. 물고 있던 담배도 이미 불이 꺼진 상태였다. 차가운 철문에 계속 붙어 있던 탓에 체온도 떨어져 있었다.

“…선배, 나한테 할 말 없어?”

시호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문을 두드리기 직전, 바로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보다 확연히 가라앉아 있었다.

“뭐, 뭐?” 시호는 살짝 어이가 없어 투덜거렸다. 태연하게 있을 수 있는 인내심이 이미 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다.

“…없나 보네, 그럼 밖에서 좋은 밤 보내.”

“야 황빛나!!!”

시호의 뱃속에서 터진 듯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계단 전체에 울려 퍼졌다. 뒤늦게 시호는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도 그렇게 큰 소리를 낼 줄은 몰랐다. 맞은편 집 대문이 살짝 열리더니 뿔테 안경에 카추샤를 한 여자아이가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내밀었다. 평소 얼굴 볼 기회도 없던 이웃과 이런 식으로 마주쳐버리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안녕하세요, 하하… 처음 뵙겠습니다, 여기 사는 사람이에요…”

시호가 가까스로 입에 담은 인사에 오히려 여자아이는 의심의 눈빛을 내비쳤다.

“하하… 오늘따라 이상하네요… 왜 내 집인데 문이 안 열리지… 하하…”

여자아이는 그대로 시호를 응시하며 문을 닫았다. 거의 동시에 다급히 문을 잠그는 소리가 났다. 시호는 한숨을 쉬며 자신의 집 대문을 노려보았다. 들리지는 않지만 분명 문구멍 너머로 전부 지켜보며 입을 틀어막고 웃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굳이 저 여자가 볼멘소리를 낼 사항이라면 아마 이것밖에 없을 것이다.

“…네가 우리 집 올 때 패션을 내가 몰라? 어차피 헬멧 쓰고 있어서 안 다치잖아.”

“안 다친다고 어떻게 보장해? 내가 사이보그야? 왜 오늘따라 그렇게 반응이 예민한데?”

‘역시 이거였군,’ 원인을 알았으니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대답은 정해져 있다. 그러나 쌍방이 알고 있는 세 글자 대신 시호의 입에서 나온 건 일말의 오기였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무식하게 자기표현하래? 열어준 것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그래, 그럼 잘 자.”

“미안해, 빛나야. 이 못난 선배를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겠니?”

“불가능해….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사과에 내 마음이 이 대문처럼 더욱 굳게 닫혔거든.”

“빛나야…! 변화를 포기하지 마! 넌 할 수 있어! 우리 좋았던 시절을 떠올려 봐…!”     


한 시간 후에야 시호는 빛나가 열어 준 문을 부리나케 통과해 이불에 몸을 꽁꽁 싸맬 수 있었다. 그새 샤워라도 했는지 시호의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빛나에게선 익숙한 샴푸와 바디워시 냄새가 났다. 빛나는 미리 탄 듯 곧바로 핫초코 한 잔을 들고 따라 들어왔다. 그리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시호의 의자에 앉았다.

“그래서, 이게 지금 쓰고 있는 신작이야?”

“일단은 그럴 예정이야. 이번엔 좀 더 진득하게 써 보려고.”

“질문.”

“뭔데? 스포일러라면 노 코멘트고.”

시호는 핫초코를 홀짝거리며 빛나의 트레이닝복 차림을 응시하고 있었다. 성인 남자 기준으로도 덩치가 큰 편인 시호의 트레이닝복을 입었음에도 감춰지지 않는 몸의 실루엣이 그의 상상력을 부풀렸다. 사실 더 이상 상상할 것도 없었지만 말이다.

“주인공을 목사의 아들이면서 점성술 연구가로 설정한 건 집안싸움이라도 벌이려는 밑밥이야?”

“스포일러는 안 된댔지? 내놔, 이 녀석아.”

시호는 빛나가 팔랑거리고 있던 자신의 원고를 뺏어들었다. 빛나는 의자에 거꾸로 앉아 등받이를 끌어안고 말했다.

“그럼 질문을 바꿔서, 갑자기 웬 점성술? 오컬트에 흥미라도 생겼어?”

시호는 자신의 눈앞에서 등받이를 가랑이 사이에 낀 채 120도는 될 법한 각도로 양껏 다리를 벌린 빛나를 응시하면서 남은 핫초코를 한 번에 들이키고는, 얼마 동안 한 곳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시호가 생각을 정리할 때의 모습임을 아는 빛나는 잠자코 지켜보았다. 

이윽고 시호는 침대에 발라당 누워서는 자신의 옆을 손으로 퉁퉁 쳤다. 빛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침대로 뛰어들었다. 시호는 자신의 옆에 누운 빛나의 머리를 왼손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황 박사. 현대 사회에서 학문과 종교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해?”

빛나는 고양이가 골골대듯 턱을 쭉 빼고 비음을 내며 시호의 손길을 즐길 뿐이었다. 시호가 손을 멈추자 잠시 눈을 감더니, 이내 눈을 천천히 뜨며 대답했다.

“혹자는 이성과 비이성의 대립과 긴장으로 볼 수도 있겠고, 또 헤게모니 쟁탈전에서의 승자와 패자로 볼 수도 있겠지. 변증법적으로 말하면 정과 반의 관계일지도 모르고.”

“그래, 그리고 약 오백 년 전 서양에서 종교와 점성술이 그런 관계성을 지녔었어.”

시호는 빛나의 상의 지퍼에 손을 뻗었다. 빛나는 시호의 손을 붙들고 저지했다. 손끼리는 지퍼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와중에 둘의 얼굴은 태연했다. 시호는 이어서 말했다.

“라틴어 성경을 읽은 몇 안 되는 교황과 성직자의 입을 통해서가 아닌, 모국어를 아는 모든 민중이 직접 성경을 읽고 신의 구원에 다가갈 수 있다는 믿음. 그 당시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텍스트를 매개로 한, 오히려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신봉하는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정신의 발로였어.”

어느새 두 사람은 양손을 동원해 힘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반대로 점성술은 고대부터 자신의 유한함을 뼈저리게 통감한 인간의 산물이었지. 그렇기에 지극히 높은 하늘의 별의 움직임을 보고 정책의 방향을 결정했고, 올림포스 12신이나 용과 같은 불멸의 존재를 만들어낸 거야. 고대의 벽화부터 조각상에 대한 우상 숭배까지 이어지는, 불멸의 존재의 이미지를 매개로 한 토테미즘의 발로였던 거야.”

“참 도식적인 대치에 웃음이 나오네. 결국 어느 쪽이든 너무나 인간적인 건 마찬가지잖아? …아아! 선배가 쓰고 싶은 건…!”

빛나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시호는 몸을 돌려 빛나의 몸을 타고 올라갔다. 빛나의 양 손목은 시호의 두 배는 되는 손에 잡혀 움직일 수 없었다. 시호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누운 상태에서도 풍만한 볼륨을 자랑하는 빛나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려 했다.

“나 오늘 그럴 기분 아냐.”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빛나의 발이 시호의 배를 밀쳐냈다. 시호는 고개를 들고 빛나의 얼굴을 보았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표정엔 일말의 수줍음이나 흥분의 기미도 없었다. 단지 오래 알고 지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한 줄기의 분노가 서려 있었다.

“어휴, 우리 황 박사님이 왜 또 튕기실까?”

시호는 입으로는 너스레를 떨면서도 못내 아쉬운 마음에 몸을 일으키지는 않고 있었다. 빛나는 곁눈질로 그런 시호를 스윽 보고는 한심한 듯 쯧쯧 혀를 찼다.

“두 번째 질문.”

“들어와.”

“언제부터 밥그릇 두 개 썼어? 싱크대랑 가스렌지도 물기나 기름기 하나 없이 말끔하네?”

빛나의 질문에 시호는 속으로 아차 하는 심정이었다. 사 년 전, 시호가 모든 걸 팽개치고 폐인처럼 살 때부터 빛나는 시호의 집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며 그를 보살펴 왔다. 집안일을 도맡아 해주는 건 물론, 틈나는 대로 시호를 억지로 끌고 나와 기분전환을 시켜 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을 계기로 서로의 욕구 해소를 위해 이따금 몸을 섞는 관계까지 되었다.

시호가 다시 일을 하고 최소한의 집안일을 하게 된 이후에도 빛나는 종종 밤에 불쑥 찾아와 집을 청소해 주고는 침대에서 몸을 겹치고, 아침에 시호가 깨기 전에 나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딱히 연인끼리의 달콤한 속삭임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들의 관계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친한 선후배이자 친구고, 단지 거기에 섹스를 곁들일 뿐이었다.

“어… 요즘은 좀 깔끔하게 관리하고 있어. 놀랐어?”

시호는 적당히 대답을 얼버무렸다. 번역을 도와주는 절세 미녀에게 치명적인 잘못을 하는 바람에 졸지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지붕 아래서 지내며 가사 전반의 돌봄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 봤자 좋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빛나는 거기에 대고 더 이상 뭐라 추궁할 수 없었다. 설령 자기가 짐작한 대로 다른 여자가 이 집에서 시호와 같이 식사까지 하며 안주인 행세를 한다고 해서, 그를 두고 자신을 배신했다고 하는 것도 이상했다. 한 번도 두 사람은 연인이었던 적이 없으니 말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십오 년 동안 시호에게 빛나는 그저 귀여운 후배일 뿐이었다. 빛나는 그저 그 중 상당 기간 동안 자신이 시호에게 가장 가까운 이성 친구라는 사실로 애써 마음을 달래 왔다.

“그래, 잘 됐네. 혼자 살수록 오히려 위생 관리는 더 철저해야지.”

빛나는 착잡한 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나는 걸 혹시라도 들킬까봐 시호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팍에 끌어안았다. 시호는 기다렸다는 듯 앞니로 트레이닝복의 지퍼를 물고는 서서히 내렸다.

‘그래, 어쨌든 지금 선배가 원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니까.’

빛나는 오른손으로 시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낮에 이 집에 있을지도 모를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그리고 또 한 명,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떠올리며, 왼주먹을 불끈 쥐었다.     




담배 냄새 나는 방 안은 딱히 숙면에 좋은 장소는 아니었다. 그것도 더블 사이즈의 침대에서 성인 남녀가 딱 붙어 잔다면 더더욱. 그러나 빛나가 깬 건 난방이 꺼졌는지 썰렁한 방 안 공기 때문이었다.

자신과 달리 태평하게 잠들어 있는 시호의 얼굴을 잠시 어루만지고는 빛나는 간밤에 시호에게 벗겨진 트레이닝복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방에서 나와 바로 눈앞에 보이는 난방 조절기를 맞추고, 냉장고를 열어 생수병에 거침없이 입을 대고 마셨다.

시호의 담뱃갑에서 슬쩍한 에쎄 아이스 한 개비를 입에 꼬나물고 빛나는 간밤에 체크해 둔 냉장고의 재료들로 두부 김치찌개를 만들기 시작했다. 시호와 달리 오랜 자취 경력에 걸맞은 가사 능력을 지닌 빛나는 몇 년 전까지 매일 쓰던 익숙한 부엌에서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빠르게 요리를 진행시켰다.

“건방지게… 선배는 내가 제일 먼저 좋아했단 말이야. …그 망할 여자보다 먼저!”

혹시라도 방에서 자고 있는 시호에게 들릴까봐 빛나는 야채를 썰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감정이 실린 칼질은 점점 빠르고 거칠어졌다. 얼굴은 모르지만 혹시라도 눈앞에 있다면 곱게 보내 주진 않으────

“으읏!”

스퍼트를 건 칼질 중 잡생각을 한 탓에 그만 왼손을 살짝 베고 말았다. 다급하게 흐르는 물에 손을 씻자 검지 관절 바깥쪽에서 피가 새어나왔다. 순간 빛나의 눈이 요사스런 빛을 뿜기 시작했다.

황빛나. 외모도 빼어나지만 학부 사 년과 대학원 오 년 동안 아무런 일탈도 없이 착실히 성적을 내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교수들에게도 칭찬이 자자하다. 이변이 없는 한 돌아오는 봄 학기, 늦어도 가을 학기에는 정식 교원이 될 것이다. 그런 빛나가 광기에 사로잡혀 일반적인 시선에서 엇나갔다고 할 만한 행위를 벌인다면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야기할 것이다. 예를 들면 일반적으로 식자재로 분류되지 않는 체액을 음식에 넣는다든지──

-취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쿠쿠!

피가 나는 손가락을 냄비 근처 10cm까지 가져갔을 무렵 울린 전기밥솥의 알림이 빛나의 이성을 되찾아주었다. 빛나는 익숙한 듯 찬장에서 구급상자를 꺼내 대충 지혈과 소독을 하고 반창고를 붙였다. 손가락에 난 상처는 이렇게 쉽게 치료할 수 있건만 짝사랑이 낸 마음의 상처는 어떻게 낫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식탁에 아침상을 차려 놓고 빛나는 바이크 슈트로 갈아입었다. 혹시라도 이 집에 드나드는 그 여자가 이 시간에 와서 시호의 식사를 만든다면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얼굴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은 9시부터 수업이 있다. 슬슬 집에 돌아가 샤워를 하고 몸단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게다가 이 복장을 학생이나 교원에게 보여서 좋을 게 없었다. 빛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옳지… 도망도 안 가고 참 착하구나, 요 녀석.”

지수는 방금 전부터 가던 길을 멈추고는 쇼핑 바구니를 내려놓고 담벼락에 있는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익숙한 건지, 쳐내기 귀찮은 건지 고양이는 처음 한번 눈길을 던진 이후로는 지수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웅크려 잠을 청하고 있었다.

입가에 살짝 남은 이물질을 보니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은 집사 예비군이 츄르라도 선사하고 간 모양이다. 이러니 집고양이가 아니라도 도심을 떠도는 고양이들에게서 점점 야생성을 찾을 수 없는 건 당연하다. 한번 사람 손을 타서 냄새가 밴 동물은 더 이상 자연의 동족에게 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이건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법칙이다.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고, 설령 그를 떠나더라도 존재의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순 없다.

그런 상념에 빠져 있자니 등 뒤에서 부르릉 하는 엔진 소리가 들렸다. 태평하게 있던 고양이가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담벼락을 타고 쏜살같이 도망가 버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에 지수가 등을 돌림과 동시에 새카만 물체가 잔상처럼 스쳐 지나갔다. 라이더의 복장부터 바이크의 도색까지 모노톤으로 마치 일체화된 1:1 사이즈의 피규어가 움직이는 착각이 들었다.

지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바구니를 들고 다시 갈 길을 재촉했다. 슬슬 시호가 일어나 아침 운동을 나갈 시간이었다. 혹시라도 지수가 도착하기 전에 시호가 집을 나설 경우 열쇠를 문 옆 소화전함에 넣어두기로 두 사람은 미리 정해놓았다. 그러나 원체 체형만 봐도 운동이랑은 거리가 있는 시호가 경보에 가까운 구보로 원룸촌 주위를 돌고 들어와 샤워까지 마치는 데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 시간 안에 제대로 국과 반찬이 갖춰진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야말로 지수의 가장 바쁜 일과였다.

딱히 씻고 나오자마자 눈앞에 식사가 차려져 있지 않다고 언짢아할 정도로 시호가 꽉 막힌 사람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시호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허투루 날리고 싶지 않은 지수의 강박에 가까운 마음 씀씀이였다. 

4층까지 올라온 지수는 습관처럼 소화전함을 열어보았지만 열쇠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직 시호가 집 안에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한 점이 있었다. 방금 전 계단을 올라올 때부터 나던 김치찌개 냄새가 여기 문 앞에서 가장 강하게 나고 있었다. 같이 식사를 하기로 해 놓고 굳이 운동도 거르고 먼저 배를 채울 시호도 아니거니와, 레토르트가 아닌 이상 직접 이 정도 조리를 할 능력조차 시호에게는 없었다.

지수는 문손잡이를 돌려 보았다. 아무런 저항 없이 스르르 문이 열렸다. 찌개 냄새와 더불어 미처 못 맡은 담배 냄새가 지수의 코를 찔렀다. 불은 꺼져 있었다. 서재 겸 침실 방문이 닫혀 있는 걸 보니 시호가 아직 자고 있는 게 분명했다.

부엌은 조리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듯 훈훈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식칼과 가위와 그릇 몇 개가 싱크대 대야에 잠겨 있었다. 식탁에는 두부김치찌개를 메인으로 한 1인분의 식사─지수 기준으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가는─가 밥상보에 덮여 있었다.

식탁에 다가가자 문득 무언가 하얀 게 지수의 눈에 띄었다. 밥상보 위에는 보란 듯이 냅킨 한 장이 부자연스럽게 올려져있었다. 립스틱을 바르고 찍은 입술 자국이었다. “흐응…” 지수는 냅킨을 코 푼 휴지라도 줍듯 엄지와 검지로 들어 곧바로 휴지통에 버렸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과 행동만 보면 그의 심박수가 올라가기 시작한 걸 눈치 챌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속이 타기 시작한 지수는 냉장고를 열어 물을 찾으려 했다. 그리고 생수병 위에는 아까와 똑같은 입술 자국이 찍힌 냅킨이 올려져있었다. 마치 지수의 반응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입술 자국의 주인은 보나마나 이 상을 차린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굳이 이렇게 해 놓은 건 지수의 존재를 알아채고는 경고를 남기는 의도가 틀림없었다. 그런데 찬찬히 생각해보니 지수로서는 경계심이나 위기감에 앞서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저런 남자에게 독점욕을 발휘하는 여자가 있다고…?’

문득 지수는 시호의 방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시호는 간밤에 피곤했는지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 침대 근처에는 뭔가 진득한 액체를 닦은 건지 딱딱하게 말라붙은 꾸깃꾸깃한 휴지 뭉치들이 굴러다녔다. 담배 냄새 속에서 은은하게 존재감을 발하는 밤꽃 냄새를 지수는 놓치지 않았다.

“하하하…”

눈앞의 적나라한 사후 광경에 잠시 어이없어하고는 지수는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물끄러미 밥상보가 덮인 식탁 위를 보았다. 기왕 만든 음식이니 먹어 주면 될 일이다. 딱히 그 사람에게 대항할 생각도 없고, 존재를 인식했다는 걸 굳이 시호에게 내색할 필요도 없다.

그저 단 한 가지만 지수는 바랄 뿐이었다.

‘…서로를 바보로 만들지나 말라고, 당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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