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여기서 쓰는 representation은 ‘이해된 것’으로서의 표상입니다. 아까 전 문단에서는 ‘상상력’으로서의 표상이고요.”
“예…”
점심 식사를 마치고 그대로 식탁에 앉아 시호는 지수에게 다음 작업에 대한 지침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불어인데다 푸코 용어를 사정없이 도입하고 있는 이번 작품은 아무리 초벌 번역이라 해도 지수가 사전에 숙지해야 할 게 많았다. 지수는 시호 옆에 앉아 열심히 다이어리에 메모를 적었다.
시호가 입을 열 때마다 치약 냄새와 담배 냄새가 섞인 형용할 수 없는 악취가 풍겨 왔다. 지수는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으려 애썼다. 주의를 최대한 시호의 지시사항을 경청하는 쪽으로 돌리고자 지수의 정신은 필사적이었다.
시호는 시호대로 며칠 전 일 이후 지수를 마주하기가 민망해졌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빛나는 어느새 나간 뒤였다. 그리고 지수가 부엌에서 반찬을 만들고 있었다. 식탁에는 익숙한 비주얼의 두부김치찌개가 1인분만 차려져 있었다.
‘설마 둘이 마주쳤나? 아냐… 그냥 엇갈렸을 수도 있어. 근데 그렇다고 해도 문이 안 잠겨 있고 음식이 차려져 있으면 충분히 의심스럽지!’
시호는 머릿속이 심란한 채 운동을 마치고 돌아와 아무 말 없이 식탁에 앉았다. 지수 역시 딱히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똑같이 행동했다. 그러자 오히려 불편해진 건 시호였다.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글쓰기가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그날 저녁에 지수를 배웅하고서야 시호는 책상을 탁 치며 중얼거렸다.
“아니, 있어 봐. 내가 내 방에서 빛나랑 뭘 하든 지수 씨랑은 상관없잖아?”
그렇다. 어디까지나 지수는 자신과 고용 관계로 맺어진 파트너다. 그것도 상당히 불편한 관계. 이제 와서 딱히 이미지를 개선할 것도 없다. 물론 계약상 식사를 같이 하기로 해 놓고 혼자 먹을 만큼의 음식만 차려놓는 건 매너가 없는 짓이긴 하지만, 그런 건 나중에 빛나에게 다른 적당한 이유를 둘러대서 제지하면 된다.
그러니 당당하게, 고용주로서 지수를 일로 대하면 된다. 마침 새로운 원고를 시작할 타이밍이었다. 하필 이 작품을 고른 건 그저 손에 잡혔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 결코 혼자 느끼는 어색함을 떨칠 겸 고용주이자 먹물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문단에서 주인공은 이미 ‘이해를 한’ 거군요?”
“그렇죠. 상대방의 태도를 비롯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부터 추론을 해냈으니까요.”
지수의 질문에 시호는 내심 놀랐다, 불편한 관계로 갱신된 이래 그의 목소리를 듣는 건 오랜만이었다.
“이상하네요, 전 몇 문단 앞에서 진작 상상의 단계를 넘어섰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건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재구축하는 데서 오는 인식의 오류예요. 그 시점에서 주어진 단서들만 보면 주인공은 기껏해야 상상밖에 할 수 없어요.”
시호는 말을 끝내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수에게서 등을 돌리며 시호는 소리 나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이렇게 넘어가려나 보다.
“그럼 잘 부탁해요.”
지수에게서 대답은 없었다. 시호는 자기도 모르게 도망치듯이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하고는 지수는 중얼거렸다.
“…그야, 둘 중 하나지요. 상대가 자신의 패를 숨기고 있거나, 스스로 상대가 이해하지 못했으면 하는 마음에 자기 눈을 가리고 있거나.”
지수는 다이어리 맨 뒷장을 넘겼다. 빽빽한 필기 내용과 함께 여러 장의 사진이 묶여 있었다. 맨 위에 있는 사진에는 대충 휘갈긴 손 글씨로 ‘황빛나(33)’라 적혀 있었다. 사진 속 빛나의 입술을 지수는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식탁에 올려놓았다. 며칠 전 냉장고 안에 들어 있던 립스틱 묻은 냅킨이었다. 무심한 듯 사진과 냅킨을 바라보는 지수의 심중은 그 자신만이 알 것이다.
“하루하루 나는 하늘과 가까워지는데~♪”
시호는 파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겨울밤의 냉기가 두꺼운 옷을 파고들었다. 한 발자국씩 뗄 때마다 녹지 않은 눈이 뽀득뽀득 밟혔다. 담배를 빼어 물고 싶은 생각이 가득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낮에 좀 확인해둘 걸 하는 후회가 다시금 들었다. 오늘 밤만 참고 내일 지수가 올 때 사다 달라고 할까 하는 생각도 해 봤지만, 오늘 밤조차 참기 힘들뿐더러 지수에게 담배 심부름까지 시키는 건 도의가 아닌 것 같았다.
“왜 너에게만은 가까워지지 않는 걸까~♬”
오래 전 즐겨 듣던 노래를 흥얼거리며 시호는 애써 기분을 환기하고자 했다. 그도 그럴 게 이 근방은 가로등도 드물게 있어서 이 시간이면 어둡다 못해 깜깜했다. 인적은 드물지만 고양이는 많이 있어서 어둠 속에서 야옹 소리를 내거나 옆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가거나 하면 심장이 철렁해진다.
시호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이것도 가스가 다 달아서 얼마 못 쓰지만 적어도 편의점까지는 몸도 녹이고 어둠도 밝혀 줄 것이다.
“그 시절의 새싹은 몰라보게 활짝 피었건만~♪”
불로 손을 쪼이니 그 열기에 안 돌던 피가 도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 그렇게 담뱃불을 붙여댈 땐 생각도 안 해 봤건만, 태초의 맨몸의 인간이 처음 불을 발견했을 때의 환희를 새삼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분 전환도 됐겠다, 시호는 발재간을 부리며 편의점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이어서 부르는 노랫소리는 다소 커져 있었다.
“이젠 결정의 순간이야 너와 나는~♬”
탁탁탁탁…
저 너머에서 무엇인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덩치 큰 고양이가 어딘가로 달려가는 것일 테다. 시호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걸었다.
“틀림없는 비익연리~(퍽) 으윽…!”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시호의 가슴팍으로 있는 힘껏 달려들었다. 시호는 넘어지려던 걸 가까스로 몸을 추슬렀다. 간신히 붙든 라이터를 켜서 눈앞의 물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왜 이렇게 늦었어! 데리러 온다고 했잖아!”
“…어?”
다음 순간 여자는 시호의 몸통을 와락 껴안았다. 작은 체구임에도 존재감을 발하는 부드러운 살덩이 두 개가 시호의 배를 짓눌렀다. 시호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천천히 얼굴을 확인했다. 카추샤에, 뿔테 안경에, 집 근처에서 종종 본 이목구비의 소녀. 정확히는 현관문 앞에서 본 지 일주일도 안 된 소녀가 이쪽을 올려다보지 않은 채 긴장이 역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뒤이어 소녀가 온 방향에서 저벅저벅 하고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머리까지 후드로 덮어서 얼굴을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지나치며 두 사람을 흘깃 보고는 다시 멀어져 갔다.
소녀는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는 듯 푸하 하고 숨을 쉬었다. 이어서 손을 들어 시호의 어깨를 팡팡 치며 말을 걸었다.
“아, 이거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가 볼까요?”
시호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 있다가 기가 막혔다는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으며 대답했다.
“예에, 조심히 들어가요.”
더 이상 관여하기 싫었던 시호는 곧바로 가던 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세 발짝도 못 가 뒤에서 파카 아랫단을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뒤돌아보니 소녀가 씩씩거리고 있었다.
“저기요, 지금 어딜 가는 거예요?”
“어디긴, 편의점에 담배 사러 가죠.”
“방금 전에 못 봤어요? 나 이대로 가면 위험하다고요! 집 앞까지 동행해요!”
“그거 자의식과잉이에요. 무서우면 눈 딱 감고 전력질주해요, 걱정하지 말고. 그럼 난 이만…”
슬슬 쿨타임이 넘어가서 금단 증상이 올 것 같았던 시호는 힘으로 소녀를 뿌리치고픈 충동을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막무가내였다.
“와, 팬이라서 믿었는데 이런 몰인정한 사람이란 말이야?”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예요? 슬슬 화나려고 하니까 그만 좀 놔요! 홍실빌라 바로 코앞인데 무슨 호들갑이 그렇게 심해요?”
순간 소녀는 손에서 파카를 스르르 놓았다. 이윽고 뒤로 몇 발자국 주춤거리며 물러나더니 웅얼거렸다.
“팬이 아니고… 스, 스토커…”
“아 진짜… 이웃사촌이 아니고 이웃 빌런이네.”
“…?”
시호는 몸을 숙여 의아해하는 소녀와 시선을 맞추고는 라이터를 켜서 얼굴을 비췄다. 소녀는 찬찬히 시호의 얼굴을 뜯어보고는 아무 망설임 없이 내뱉었다.
“아, 옆집 백수 아저씨.”
“아유 진짜!”
빌라촌 앞 공터는 인근에서 자취하는 Y대생들의 비공식 흡연장이 되어 있었다. 연중무휴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여기서 담배 냄새가 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인근에 거주하며 공터를 가로지르는 다수의 비흡연자들은 불만이 없지 않았지만, 별도의 흠연장이 없는데다가 여기서 못 피게 했다가는 바로 옆집, 윗집, 아랫집 등지에서 창문 열어놓고 피울 테니 대승적 차원에서 감수하고 있었다.
시호는 그런 와중에 뻔뻔하게도 창문을 열어놓고 달을 보며 줄담배를 피우고 살았고, ‘민원이 들어오면 그때부터 공터에 가서 피우든지 해야지.’ 라고 안일하게 생각해 왔다. 층간 흡연 문제로 폭행 사태까지 일어나는 세태를 생각하면 시호는 참 운이 좋은 셈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 운의 정체를 시호는 옆에 앉아 맛있게 담배를 빨아대는 소녀를 보며 파악했다.
“하으으… 몸이 녹는다…”
교복을 입고 있어야 할 것 같은 비주얼의 소녀의 흡연 장면을 보고 시호는 자기도 미처 깨닫지 못한 유교보이 마인드가 샘솟았지만 사실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우리 편의점이 좋은 점 중 하나가 왠지 에쎄 아이스만큼은 남아돈다는 거예요.”
설마 옆집에 사는 소녀가 시호의 단골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줄이야. 주로 낮에 밖에 나갈 일이 있을 때 겸사겸사 담배를 샀지, 밤에 사러 나가는 일은 거의 없다보니 마주친 적이 없던 모양이다.
한루나. Y대 작곡과로 올해 2학년이 되며, 한 달 전부터 편의점에서 인생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고 하지만, 시호는 이름만 듣고도 그가 누군지, 몇 살인지 알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습작 수준의 노래인데, 그걸 아직도, 심지어 밖에서 부르고 다니는 사람이 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루나는 아련한 눈빛으로 허공의 달을 쳐다보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육 년 전, 어느 세계적 규모의 음원 투고 서비스에 단일 길이 십오 분짜리 곡 하나가 올라왔다. ‘비익연리’. 보컬로이드를 포함해 총 일흔여섯 개의 가상 악기를 동원해 인생 전반에 걸친 연인의 사랑의 경과를 표현한 노래로, 당시 작곡가 한루나가 불과 열다섯 살의 중학생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인터넷 등지에서는 ‘천재가 등장했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내가 원래 노래 하나에 꽂히면 CRCFILE이 깨질 때까지 들어대는 편이거든요.”
시호는 겸연쩍어져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평소 음악을 찾아서 듣는 편은 아니었다. 그 당시 우연히 단골 돈가스 집에서 들은 노래가 마음에 들어 주인에게 제목을 알아내고, 원본 파일을 다운로드해 일 년 가까이 줄기차게 들었을 뿐이다.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그 뒤로도 계속 들었겠지만, 이후 오랫동안 시호의 삶에는 음악이 자리하지 않았었다.
“혹시 그 뒤로 신곡 만든 게 있어요? 내가 그런 물정은 많이 어두워서…”
시호의 질문에 루나는 “아…” 하고 내뱉고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짐짓 밝은 어조로 말했다.
“없어요! 악상이고 영감이고 하나도 안 떠오르더라고요! 전 비익연리가 원 히트 원더였나 봐요.”
“그렇군요. 원래 그런 건 억지로 떠오르는 게 아니죠. 하늘에서 내려 주거나, 어느 날 우연히 교통사고처럼 맞닥뜨리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루나는 시호의 말에 신묘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돌아보았다.
“뭐예요, 진상 백수 이웃인줄 알았더니 괜찮은 말씀을 해주시네요.”
“…글쎄 백수 아니라니까 자꾸 그러네.”
시호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루나는 살짝 경멸하는 눈초리를 보냈다.
“진상은 맞거든요. …이 건물 얼마나 방음 안 되는지 모르죠?”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잘 안 가네요…?”
“주로 새벽 시간에 남녀 한 쌍이 야기하는 소음 이슈라고 말해도 이해가 안 가나요?”
“…그런 건 이웃 간에 묵인해줘야 하는 사항인 거 모르죠?”
루나는 시호의 항변을 들은 체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탁탁 털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빌라 입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요즘 애들은 다들 저러나…?’ 시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그럼 되겠다!”
별안간 루나가 뒤돌아서서 시호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루나는 시호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좋아, 좋아…” 하고 중얼거리더니 대뜸 시호의 턱밑에서 척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저씨, 일단 신분증 좀 줘 볼래요?”
용기를 내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왜냐면 십중팔구 용기의 대상은 정체가 파악되지 않았거나 자신보다 확연히 상위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대상에게 부당하게 침범을 당하는 권리, 도덕, 정의 등을 사수하기 위해 맞설 때 우리는 그를 두고 용기가 있다고 한다.
개인차가 있지만 일정량 이상의 술은 그런 용기를 불러일으키고자 사용되곤 한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 보면 그를 위한 음주는 득보다 실이 더 크다. 첫째, 취기 때문에 혹시라도 부적절한 언행을 했다가는 상대의 원죄를 상쇄시킬 수 있고, 둘째, 스스로의 정당성에 대해 무슨 일이 있어도 굽히지 않는다는 신념이 오히려 부족한 것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용기를 내기 위해 술을 마신다는 것은 일이 잘못되었을 때 책임을 술에 전가하기 위한 합리화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기전을 고려할 때 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기껏해야 허세나 객기 정도이다. 특히 지금 이 신입생 청년처럼 고등학교 삼 년 내내 좋은 평판을 위해 억눌러 온 우월감과 보상 심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싶은 경우 ‘술 때문에 실수했다’는 변명은 상위 4% 이내의 입결과 갓 성인이 된 나이와 맞물려 사회적으로 정상 참작될 여지가 충분하다.
“아니, 뭐가 그렇게 딱딱해요? 앞으로 여기서 많이 팔아 준다니까요? 잔말 말고 맥주 네 병만 더 줘요!”
팔짱을 끼고 한심한 눈으로 청년을 보는 치킨호프집 『바쿠스』의 여사장 남주희는 부친의 가업을 물려받아 십육 년째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상대한 진상의 수만 해도 세 자릿수는 애저녁에 넘어갔다. 그 중 제일 수가 많은 유형이 이런 치기 어린 새내기들이었다.
“입구에 적혀 있는 문구 못 봤어? 폐점은 오전 1시 반에 주문마감은 오전 1시라니까? 지금 1시 5분이야. 이거 예외였던 적은 내가 사장 된 이래로 한 번도 없어.”
주희의 말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다. 청년의 옆에 있던 여자가 팔을 잡아당기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냥 다른 데 가자. 여기보다 늦게 마감하는 가게 찾으면 되지. 아니면 내 방에서 마저 마시든지.”
청년의 맞은편 자리의 두 명도 여자를 거들었다.
“그래, 임마. 아직 개강도 안 했는데 동네 상인들한테 밉보일 일 있냐?”
“어휴, 사장님 죄송합니다. 이 주정뱅이 자식 금방 데리고 나갈게요. 가서 일 보세요.”
“아 씨발 좀 가만히 있어 봐!”
청년이 여자의 팔을 뿌리치며 거친 욕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척 봐도 덩치는 주희의 두 배에 키는 머리 하나 이상으로 더 컸다. 그러나 청년을 올려다보는 주희의 눈빛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비치지 않았다.
“너희들이 내 기분을 알아?… 너희들처럼 중학생 때부터 한 자릿수 등수에서 놀던 애들이, 프로 선수로 밥벌이 못하게 되어서 꾸역꾸역 못하는 공부해서 여기까지 온 고충을 알아?…”
“야, 그 얘기 벌써 몇 번째야! 그래서 너 정말 대단하다고 우리가 입 아프게 말했잖아!”
어느새 다른 테이블들도 조용히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의 1할 정도가 걱정으로 나머지 9할은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저거 누가 좀 말려 봐요. 경찰에 신고라도 하든지.”
“그럴 필요 없어. 잠자코 보기나 해.”
얼핏 봐도 이런 상황에 익숙한 상급생이 하급생을 달래는 식의 대화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고, 조용한 점내에서 그것은 청년과 일행의 테이블에까지 들렸다. 청년은 묘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후훗.”
주희는 실소를 흘렸다. 거기엔 조금의 오기도 없이 그저 하대와 경멸만 느껴졌다.
“뭐야, 아줌마. 이게 지금 웃겨?”
순간 주희의 눈에 살기가 확 일었다. 청년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암, 웃기고말고. 겨우 사 년짜리 학위 가게 문턱 들어섰다고 대단한 업적이라도 일궜다고 허세나 부리는 게.”
“뭐, 뭐라고…?”
“프로가 못 된 건 네 운이자 실력, 공부를 해서 이 학교에 들어온 것도 네 운이자 실력, 프로가 돼서 하루하루 피 말리는 주전 경쟁을 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해야 하는 삶을 사는 건 네가 가지 못한 길을 간 사람들의 운이자 실력… 단지 그뿐이야. 더도 말고 덜도 아니라고.”
“흥, 말이야 쉽지. 닭이나 튀기고 술이나 따라 주는 아줌마 주제에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한 톨이나마 이해할 리가 없잖아! 머릿속에 유도밖에 없는 꼴통, 패배자 소리 듣기 싫어서! 내가 바보가 아니란 걸 이 샌님들한테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삼 년을 어떻게…!”
“…유도? 너 체교과야?”
“그래, 뭐 어쩔 건데? 투서라도 넣게?”
청년은 주희에게 한 발짝 다가가며 으르렁거렸다. 주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힘을 쓸 때와 안 쓸 때를 구분하지도 못하면서 무도인을 자부하다니. 정말 시대가 많이도 변했네.”
“닥쳐, 여자라고 봐줄 줄 알았으면 큰 오산이야.”
“애송아, 선배로서 세 가지만 가르쳐 주마. 첫째, 인생에는 내 뜻대로 안 되는 일이 훨씬 많다.”
“닥쳐!!!”
청년이 혼신의 힘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다. 동석하고 있던 여자가 꺄아아아악 하는 비명을 질렀다. 나머지 일행 둘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청년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청년이 예상하던 둔탁한 타격음과 신음과 바닥을 구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기세 좋게 휘두른 오른주먹이 옴짝달싹도 하지 않을 뿐이었다. 주희는 그것을 오른손만으로 붙들고 있었다. 다리는 여전히 차렷 자세를 유지한 채.
“둘째, 정말 창피한 건 미숙함 자체가 아니라 스스로의 미숙함을 깨닫지 못하거나 애써 모른 체 하는 것이다.”
“이 아줌마가…!”
청년이 남은 왼손을 휘두르자 주희는 그것을 피하고는 재빨리 자세를 낮춰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청년의 오른팔을 잡고 자신의 몸을 뒤로 홱 틀며 지렛대로 삼아 메쳤다. 오른손이 잡힌 상태에서 왼손으로 펀치를 날리느라 하단이 빈 채 앞으로 힘이 쏠려 있던 청년의 몸은 별다른 저항도 없이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고는 기세 좋게 쿵 소리를 내며 땅에 부딪쳤다.
“아아아아아아악!”
청년은 온몸을 엄습하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Y대 체육교육과 04학번, 그것도 전국체전 유도 여고부 금메달리스트 특기생 출신자의 깔끔한 업어치기 한판승이었다. 주희는 그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조용히 내뱉었다.
“셋째, 결혼도 안 한 처녀에게 아줌마라고 할 땐 목숨을 건다. …자, 그만들 구경하고 빨리 계산이나 하고 나가라! 오늘 장사 시마이! 너희 둘은 저 얼간이나 부축해서 빨리 꺼지고!”
주희의 엄포에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학생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계산대 앞에 제일 먼저 선 건 청년과 함께 마시던 남학생 두 명이었다. 주희는 그들이 앉아 있던 테이블을 내다보았다. 청년은 여자 옆에서 얼마 안 남은 술병을 제대로 올라가지도 않는 팔로 꾸역꾸역 들이키고 있었다. 여자는 그만 좀 마시라며 청년의 팔을 붙들고 만류하고 있었다.
“저대로 두고 가려고? 힘 조절은 했지만 쟤 오늘 혼자서는 집에 못 들어갈 텐데?”
주희는 카드기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자 한 명이 혀를 쯧 차며 대답했다.
“자리에 앉히는 것까진 해 줬어요. 뒤는 알아서 하라고 해요.”
“이 엄동설한에 여자애 혼자서 쟤를 부축하게 하려고?”
“경찰이라도 부르든지 하세요. 어차피 그 편이 사장님도 속 편하잖아요?”
“…너희들 쟤 친구인 줄 알았는데, 내가 착각한 건가?”
주희의 질책에 가까운 질문에 그는 대답하지 않고 가게를 나섰다. 일순 불어온 한기가 문 밖에서 불어온 것만은 아니리라.
“쟤도 생각이 있으면 남길 관계와 버릴 관계는 구분하겠죠. 잘 먹었습니다.”
나머지 한 명이 차갑게 내뱉으며 주희의 손에서 카드를 휙 낚아채고는 망설임 없이 가게를 따라나섰다. 주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이어서 계산대 앞에 선 남학생 두 명의 얼굴과 체격을 보자 주희는 그들을 각각 검지로 가리키며 말했다.
“화공과 21학번 김규민하고 송준호!”
“어우, 누나 왜 풀네임을 부르고 그래요 정 없이…”
“너희들은 오 분만 대기야. 좀 있다 저 녀석 부축해서 침대까지 눕혀 놔.”
두 사람의 눈이 동그래졌다.
“예에에? 아니 저 덩치를 저희가 어떻게 감당해요. 게다가 혹시라도 저희들에게 손찌검이라도 하면…”
“오늘 먹은 값 공짜.”
“침대에 눕히고 옷도 싹 갈아입힐게요!”
졸지에 술값이 굳어 희희낙락하는 두 사람을 내버려둔 채 주희는 나머지 손님들의 계산을 서둘러 끝내고는 문제의 테이블로 돌아갔다. 청년은 테이블에 얼굴을 처박고 곯아떨어져 있었다. 여자는 그런 청년의 어깨를 흔들며, 뺨을 때리며, 귀에 소리를 치며 깨우려고 애쓰고 있었다.
“얘네 집이 보통 대단한 게 아닌가 보네, 그 꼴을 다 보고도 매달려 있는 걸 보면.”
주희는 팔짱을 끼고 서서 비아냥거렸다. 여자는 깨우던 걸 멈추고, 그러나 이쪽을 돌아보지는 않은 채 말했다.
“보통 대단한 게 아니죠. 저였으면 자살했을 집구석이었으니까요.”
“…!”
“아빠는 애가 어릴 때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가 버리고, 엄마는 변변한 일도 안 하면서 매달 보내오는 얼마 안 되는 양육비의 대부분을 술로 탕진하고… 유도만이 이 애의 도피처였고, 성공할 수 있는 활로였어요. 중3 때 십자인대만 다치지 않았어도─”
“거 참 흔해 빠져서 눈물이 날 것 같은 언더독 신파극 클리셰네. 언젠가 저 주먹에 네가 맞게 되더라도 그저 녀석의 환경 탓, 운명 탓을 하며 나머지 한쪽 뺨을 대 주는 아가페적인 사랑을 기대할 수 있겠어. …아, 혹시 화났어?”
주희는 여자의 말을 중간에 자르며 독설을 내뱉었다. 여자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분풀이를 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하세요. 딱히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길 원한 적은 없으니까요.”
“얘, 이래봬도 널 걱정하고 있는 거거든? 경험상 말이다, 술 먹고 난폭해지는 건 그 사람의 기질이야, 기질. 갖고 태어나서 안 바뀌는 거라고. 실수니 뭐니 포장할 수 있는 게 아냐.”
“…”
여자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주희는 후우 하고 한숨을 쉬고는 계산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택시비 명목으로 주희가 건네는 돈을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청년을 부축한 두 학생을 뒤따라 나갔다. 문이 닫히자 주희는 후후후 하고 웃었다.
‘그놈 다른 건 몰라도 여자 복은 타고 났네.’
주희는 계산대 밑에서 담배와 재떨이를 꺼내고는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천천히 한 모금을 빨아들이고는 후우 하고 내뿜으며 짓는 만족스런 표정은 니코틴이 신경계에 주는 쾌락 때문만은 아니었다.
버리는 ‘용기’? 떠날 ‘각오’? 그런 건 대개는 자기보존 욕구를 합리화하기 위한 표현에 불과하다. 간직하고 남아서 공멸하는 것도, 버리고 떠나서 혼자 살아남는 것도 담백하게 말하면 가능한 선택의 범주에 나란히 있을 뿐이다. 애당초 버리거나 떠나는 게 불가능하다면 옹기고 각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여자는 간직하기를, 남기를 선택했다. 확률로만 따지면 공멸의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다. 반대급부로 공존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그러나 세대를 거듭하며 물려져 온 인간의 이타심이 확률을 전제하여 행해졌다면 모르긴 몰라도 과거 어느 시점에 인류는 틀림없이 지구의 지배자로서의 입지를 상실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여타 수많은 윤리적 이슈와 마찬가지로 옳고 그름의 영역이 아니라 선택의 영역이자 믿음의 영역이다. 그리고 생애 전반에 걸쳐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혹은 그 너머의 z축을 선택해야 하는 인간은 결코 중립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런 인간이 자신의 역량 아래 할 수 있는 최선은 자신의 선택을 힘껏 믿고 나아가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 이 연놈들아.’
닭뼈와 일반 쓰레기를 고무장갑 낀 손으로 휙휙 주워 담고, 재활용 봉투에 술병을 던져 놓고, 페이퍼 타올과 향균 물티슈로 테이블을 닦고 나니 어느새 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평소라면 삼십 분은 더 늦게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바닥과 주방 청소가 남아 있었다. 주희는 한숨을 푸욱 쉬며 양동이에 넣어 둔 대걸레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제일 안쪽부터 힘주어 밀려 할 때였다.
띵동 소리를 내며 가게 문이 열렸다. 문을 잠그는 걸 깜빡한 모양이었다. 주희는 돌아보지도 않고 “오늘 장사 끝났어요!” 하고 소리쳤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 대신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주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도 술 팔아 돈 버는 사람이지만, 술 때문에 자기 통제 못 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대걸레를 벽에 세워두고는 구두 소리가 들어온 쪽으로 다가가며 주희는 최대한 정중한 톤으로 말했다.
“손님, 다음에 오시면 서비스 많이 해 드릴테니까 오늘은…”
그러나 불청객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주희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제자리에 멈춰 섰다. 여자는 화려한 코트와 실크 드레스로 몸을 감싼 채 주희를 향해 빙긋 웃어보였다. 몇 초간 아무 말도 없이 있던 주희는 그대로 뒤돌아서서 청소하던 곳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오늘은 가. 나 바빠.”
“와, 언니 진짜 차갑다. 사 년 만에 얼굴 봤는데 첫 마디가 그거야?”
주희의 소박에 대한 여자의 대꾸는 항의보단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주희는 그에 대답하지 않고 청소에 열중했다. 여자는 주희가 상대해 줄 기색이 안 보이자 핸드백에서 조그마한 노트북을 꺼내 열고는 무언가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여자는 거기에 완전히 몰입했다. 어느새 바닥 청소를 다 끝낸 주희가 여자가 앉은 테이블 바로 앞에 있는 주방에서 청소를 시작했는데도 슬쩍 쳐다보지도 않을 정도였다.
주방에서 그 모습을 본 주희는 소리가 나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저 녀석은 옛날부터 저런 식이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과 행동만 일방적으로 하고, 피드백을 기다리는 일 없이 어느새 자기 자신의 세계에 몰두해 버린다. 주변을 실컷 꼬드겨 놓고는 어느새 혼자서 먼저 흥미를 잃고 다른 곳으로 가 버린다. 그리고 주변이 자기를 따라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이 상처받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자신이 외로울 때만 슬그머니 다시 다가온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청소를 다 끝낸 주희는 핸드타올로 손의 물기를 대충 닦으며 시계를 확인했다. 2시 30분. 여자 쪽을 돌아보니, 아까 전 자세 그대로 타이핑에 열중하고 있었다. 주희는 다가가 테이블을 똑똑 두드렸다.
“문 잠글 거야. 그만 일어나.”
“응…”
주희는 잠바를 입고 가방을 걸쳤다. 여자는 황급히 노트북을 끄지도 않은 채 닫고는 핸드백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서두르는 티를 팍팍 내며 가게 밖으로 나갔다. 주희는 입구 옆의 불을 끄고는 밖으로 나와 문을 잠갔다. 셔터를 끄집어 내리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여자가 장갑도 안 낀 손으로 차가운 철제 셔터를 같이 내리고 있었다.
주희는 무시하고는 자물쇠를 잠그고 보안 장치를 작동시켰다. 손을 탁탁 털고는 여자를 돌아보지도 않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세 발자국 뒤에서 여자가 따라오는 게 들렸다. 주희는 혀를 쯧 하고 찼다. 보나마나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가게 앞까지 왔을 테니, 염두에 둔 숙소 같은 건 없을 것이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모텔도 십오 분은 걸어가야 한다. 아무리 이 녀석이 이 학교 OG라 해도 이 시간에 재워줄 만큼 가까운 동문은 지금은 없다. 주희 자신을 제외하면 말이다.
“언니 집 진짜 오랜만이다. 금희는 아직 잘 있지? 나 가기 전에도 뚱냥이었는데 이젠 굴러다니는 거 아냐?”
‘염치없는 년.’
어차피 그를 힐난해 봤자 데미지가 하나도 안 들어간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가게에 죽치고 앉아 있을 때부터 이미 예상한 마당에 굳이 토를 달아 호의를 변질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물어보지 않으면 답답해서 오늘 잠을 잘 수 없을 것이다. 주희는 돌아서서 여자를 쏘아보며 말했다.
“서희야, 재워 주는 대신에 하나만 물어보자.”
“하나만? 백 가지고 천 가지고 대답해 줄게~ 머리맡에서!”
은근슬쩍 다가오려는 서희를 주희는 한 손을 들어 제지했다. “거실에서 재울 거니까 꿈도 꾸지 마. 장난치지 말고 지금 이 자리에서 대답해.”
서희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주희는 언성이 올라가려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너 귀국한 거 나만 알고 있는 거겠지?”
“어! 아직 아빠한테도 얘기 안 했거든~”
서희는 천진난만한 말투로 대답했다. 주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서희의 양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그럼 너 한국에 있는 동안엔 언니가 놀아 줄 테니까, 아무도 만나지 말고 얌전히 있어. 약속할 수 있지?”
“아니? 그럴 거면 왜 돌아왔겠어?”
서희는 조금도 표정을 흩트리지 않고 즉답했다. 주희의 언성이 살짝 올라갔다.
“이서희, 나 지금 참고 있어. 이 이상 허튼 소리하면 두 번 다시 네 얼굴 안 볼 거야.”
“언니가 그렇게 나와도 어쩔 수 없어. 내가 왜 굳이 거짓말 안 하고 솔직하게 밝히는지 알잖아?”
“아니, 모르겠다! 어떻게 염치없고 뻔뻔한 거랑 솔직한 걸 구분하지 못하는지 모르겠고, 작별인사도 없이 사라지고는 사 년 동안 연락 한 번 없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거라면 미안해. 하지만 악의는 없었어, 언니는 알잖아?”
주희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반면 서희의 얼굴은 웃음기만 사라졌을 뿐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됐다. 벽창호랑 무슨 얘길 하겠냐. 입 다물고 얌전히 잠이나 자고, 날 밝는 대로 나가라.”
주희는 서희를 내버려둔 채 씩씩거리며 빠른 발걸음으로 앞장서 갔다. 서희는 구둣발로 조심스럽게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