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빌라촌 옆 공터는 하늘에서 거침없이 쏟아지는 햇빛이 눈에 반사되어 하얀 세계를 구성하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러 나온 몇몇 주민들은 계단에 쭈그려 앉아 눈앞에서 벌어지는 경기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툭 하고 셔틀콕이 시호의 발치에 떨어졌다. “허억… 허억…” 시호는 라켓을 쥔 채 무릎 손을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15 대 19!” 반대쪽에 서 있던 트레이닝복 차림의 지수가 외쳤다.
“뭐하냐? 재밌는 거 보냐?”
담배를 피우러 내려온 사학과 복학생 ㅅ이 경기를 관람하던 불어학과 복학생 ㅇ 옆에 앉으며 말했다. ㅇ는 애저녁에 필터만 남은 담배를 손에 든 채 대답했다.
“재밌지. 이런 건 처음 본다.”
“뭐 대충 여자 쪽이 이기고 있는 거 아냐? 남자 쪽은 이미 체력 다 방전됐네.”
“아직은 아냐, 곧 그렇게 되겠지만.”
“그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게임 스코어 몇 대 몇인데?”
ㅅ은 담배 등을 톡톡 쳐 입에 물었다.
“1 대 0.”
“그럼 곧 끝나겠네. 여자 쪽이 2포인트만 더 따면.”
“아니, 남자 쪽이 게임스코어 1에 19포인트야. 여자 쪽은 앞 세트에선 3포인트밖에 못 땄는데 이번엔 19포인트 뒤진 시점부터 연속 15포인트 득점 중이고.”
“뭐?”
미처 불을 붙이지 못한 담배가 ㅅ의 입에서 떨어졌다. 시호는 셔틀콕을 쥐고 일어섰다.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분명 1게임에선 자신이 압도적으로 이겼건만 지금 이 처참한 역스윕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분명 삼십 분 전까지만 해도 어설프기 그지없던 지수의 폼이 지금은 왜 이렇게 절제되고 깔끔한가?
순간 지수의 입가에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마치 시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것처럼. 상황은 오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쪘다…”
그날 아침, 구보를 갔다 와 샤워를 하려던 시호는 무심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을 보았다. 원래부터 딱히 마른 체형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몸을 만드는 데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침마다 동네를 한 바퀴 돌고 과식을 하지만 않으면 현상유지가 되어 왔기에 체형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눈앞에 비친 거울에는 목과 턱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명치에서 고간까지의 최단거리가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몸뚱이가 숨을 쉴 때마다 잉여 지방을 역동적으로 과시하고 있었다. 시호는 목구멍까지 욕이 차올랐다가 부엌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지수를 떠올리며 간신히 가라앉혔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요즘 점점 더 빨리 숨이 차고 몸이 무거웠다. 의자에 조금만 오래 앉아 있어도 일어나려 하면 허리가 욱신거렸다. 지수가 밥을 차려주게 되면서 이렇게 된 건가? 아니다, 자극적이고 탄수화물 덩어리인 가공식품들에 비하면 지수의 식단은 언제 봐도 영양 균형을 신경 쓴 게 일목요연했고, 먹는 양은 지수가 훨씬 많기 때문에 살이 쪄도 지수가 쪄야 이상하지 않다.
그렇다면 결국 에이징 커브 때문에 신진 대사가 바뀌고 있다는 이유밖에 없다. 하물며 그렇게 담배를 피워 대는데 몸의 노화가 빨리 찾아오지 않는 게 이상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중학생 때부터 이십 년 가까이 피워 온 담배를 끊을 자신은 없었다. 입에 들어가는 걸 줄이지 않고 살을 빼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더 빡세게 운동해야겠지.’
샤워를 마친 시호가 식탁에 앉자 이미 2인분의 식사가 완벽하게 차려져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시호는 숟가락으로 밥을 푹 찍으며 창고에 있는 배드민턴 세트를 떠올렸다. 한때 참 부지런히도 라켓을 쥐고 뛰어다니던 시기가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타의적으로나마 운동을 열심히 하던 시기였다. 더 이상 라켓을 쥐지 않게 된 후 버리기도 귀찮아서 그냥 창고에 처박아 놨는데, 마침 눈앞에 있는 지수를 본 시호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지수는 최근에는 아예 냉면집에서 쓸 법한 큼지막한 철제 그릇을 전용 밥그릇으로 쓰고 있었다. 왼쪽으로는 오늘 아침 메인 메뉴인 카레를 비벼먹으며 오른쪽으로는 김에 밥을 싸 총각김치까지 야무지게 베어 먹고 있었다. 저렇게 세 끼를 먹어놓고 열량을 태우려면 자는 시간 빼고 매일같이 고강도 유산소 운동을 해도 부족할 터이다. 하지만 지수의 팔다리는 운동과 동떨어진 사람처럼 가늘고 곱기 그지없었다.
한 마디로 그냥 열량만 체질적으로 잘 태우는 몸치일 것이다. 이 사람의 인간적인 면모를 구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지수 씨, 오늘부터 점심 먹고 같이 배드민턴 어때요?”
시호의 제안에 지수는 그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좋아요.”라고 대답했다. 별 망설임도 없이 승낙이 돌아온 데에 시호는 내심 당황했다.
“어어, 배드민턴 칠 줄 알아요?”
“조금요.”
지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보통 저건 꽤 실력이 있는 사람이 겸양의 차원에서 하는 표현이겠다. 직접 해 보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시호는 많이 끌려나와 쳤던 것 치곤 한 번도 상대를 이긴 적 없었다. 하지만 아마추어 대회 입상자와 싸우는 게 아니라면 아무렴 눈앞의 양민에게 질까 싶었다. 시호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시호는 땀을 흘리거나 숨이 거칠어지는 건 고사하고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아까부터 점점 더 강하게 공격하는 지수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처음부터 날 갖고 논 거야! 정말 얕볼 수 없는 여자다!’
그러고 보면 1게임 때도 어설픈 폼으로 시호의 공격을 막아내며 한 합 한 합을 길게 끌었었다. 3포인트를 딴 건 시호가 봐준 것이었다. 이제 보니 송양지인이 따로 없는 추태였다.
“담배 한 대 피우고 마저 하실래요? 전 저기 마트에서 음료수 사 갖고 올게요.”
빌라촌 사람들이 옆집 가듯 다니는 편의점에서 십오 분은 더 가야 하는 마트가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지수는 생글생글 웃었다. 시호는 마치 지수가 ‘내가 지금보다 더 힘이 빠져도 너 같은 골초는 이긴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주민들도 보는 앞에서 이런 굴욕을 맛볼 줄은 몰랐다.
이대로 시합을 끝내버리면 이 이상 창피를 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지수가 지금 흐름을 끊은 것도 시호에게 그럴 기회를 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야 원래 계획대로 운동을 수행했다곤 말할 수 없다. 애당초 목적은 배드민턴으로 지수를 이기는 게 아니라 건강관리를 위한 운동이 아니었던가.
“아뇨! 빨리 끝내고 마저 일해야죠! 갑니다!”
전의를 불태우는 시호를 보며 지수는 미소를 지었다. 이걸 계기로 시호는 진지하게 자신의 몸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그러면 지금의 자신의 조건에서 건강을 증진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 절연節煙, 나아가 금연임을 깨달을 것이다.
오늘 배드민턴으로 시호를 농락했으니 다음엔 무슨 운동을 들고 와 지수를 이겨보려 할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지수는 조금도 걱정이 없었다. 무엇으로 겨루든 철저하게 이겨 줄 자신이 있었다. 그것이 조금이라도 더 시호를 바깥으로 이끌어내 몸을 움직이게 하는 계기가 된다면 말이다.
“그렇게 됐어요. 앞으로 담배는 안 줘도 돼요.”
시호의 말에 루나는 에쎄 아이스 한 갑을 내민 채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잠시 후 루나는 눈을 크게 뜨며 입을 열었다.
“아예 금연부터 하겠다고요? 피운 지 얼마나 됐는데요?”
“이십 년. 뭐 어릴 때야 아버지나 친한 형들 거 어쩌다 훔쳐 피우는 정도였지만.”
말로는 태연함을 가장했지만 사실 이미 아까 전부터 금단 현상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하루 네 갑을 피우던 걸 바로 끊으려 드는데 관성이 일지 않을 리가 없었다.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하고 주머니에 넣은 손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걱정 마요. 앞으로도 전화하면 산책 겸 마중 나올 테니까.”
시호 옆을 걷던 루나의 귀가 일순 쫑긋 선 느낌이 들었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루나는 대답했다.
“…아녜요, 내가 염치없는 사람인 줄 알아요?”
그렇게 말하는 루나의 표정은 누가 봐도 가라앉아 있었다. 이웃끼리 맞담을 한 그날 루나는 시호의 신원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전화번호를 알려주며 “앞으로 제가 알바 끝날 때마다 마중 나와 주면 담배 한 갑씩 줄게요.” 라고 제안했다. 어차피 담배를 사러 편의점을 왕래해야 하는 시호는 그를 흔쾌히 받아들였었다. 그런데 이제 그럴 필요도 없으니 루나가 일방적으로 신세 지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그럼 적당한 간식거리라도 사 줄게요! 뭐 혹시 못 먹는 거 있어요?”
“아니, 그런 건 없고 그냥 편의점류 군것질은 애저녁에 질려서…”
“(찌릿)못 먹는 건 없는 거죠?”
“…그래요. 기대할게요.”
시호는 루나의 험악한 기세에 더 이상 토를 달 수 없었다. 정확히는 될 대로 되라 싶은 심정이었다. 니코틴이 돌지 않아서 머리가 돌 것 같은 마당에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랴.
치익─ 파사사삭──
“흐음~”
루나는 담배를 한 모금 머금고는 기분 좋은 듯 콧소리를 내었다. 시호는 옆에 앉아 잠자코 그를 지켜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당장이라도 뺏어 피우고픈 욕구를 참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여러모로 시호에게 불리한 전개가 될 게 뻔했다.
“(뻐끔, 뻐끔, 뻐끔!)”
루나는 보란 듯이 평소엔 하지도 않던 구름도넛까지 만들어 보였다. 저건 백 프로 이쪽의 금단 증상을 알고 약을 올리는 것이다. ‘안되겠다.’ 시호는 벌떡 일어났다. 커피를 마시든 껌을 씹든 다른 거로 입을 달래지 않으면 오늘 밤을 못 넘길 것 같았다.
“맛있게 피워요. 난 먼저 들어갈게요.”
“아니, 어린 여자애를 한밤의 공터에 내버려두고 가려고요?”
“담배 사서 피울 수 있는 사람을 어린 여자애라고 하는 건 좀…”
“담배 피울 줄 안다고 여차할 때 내 몸을 지킬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그럼 방 안에서 피워요. 여태까지 벽 너머에서 편하게 피웠겠구만!”
“밖에서 맑은 공기 마시며 달 보며 피우는 게 맛도리거든요? 나보다 더 잘 알면서 이러기예요?”
“그럼 나처럼 끊든지. 담배가 얼마나 몸에 해로운지도 그쪽보다 잘 알거든요.”
“와, 꼰머 극혐! 담배 안 핀 지 일주일도 안 됐으면서!”
“꼰대 소리라고 치부할 거면 나도 더 할 말 없으니까 놔요.”
“와, 어떻게 팬이 그래? 어떻게 선배가 그래?”
“나 물리학과예요, 작곡과 한루나 양. 후속곡 기대하고 있고요, 내일 또 봅시다.”
“아!…”
돌아서는 시호의 이마에 희미하게 힘줄이 돋았다. 이건 단순히 금단 현상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루나는 시호의 잠바를 잡고 늘어졌다.
“아이, 그러지 말고 토킹 어바웃이나 해요! 원래 뭐 끊을 땐 다른 거 하며 주의를 돌리는 게 최고예요!”
“눈앞에서 담배 맛있게 빠는 사람이 있는데 퍽이나…!”
“글쎄 좀 앉아 봐요! 이거 태우는 데 얼마나 걸린다고!”
슬슬 커진 루나의 목청이 빌라 주민들에게 들릴 지경이 되자 시호는 어쩔 수 없이 원래 자리에 다시 앉았다. 루나는 옆에 앉아 기분 좋게 담배를 음미했다. 시호는 생각을 전환해, 기왕 이렇게 된 거 간접흡연이라도 실컷 즐겨주겠다는 심정으로 콧바람 소리를 내며 공기를 빨아들였다.
“아저씨는 요즘 어때요?”
“으, 응?”
처음 말을 튼 지 근 일주일 만에 들어온 신상 질문에 시호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그동안은 그저 루나에게서 전화가 오면 시호가 받자마자 툭 끊기고, 시호가 편의점에 도착하면 루나가 에쎄 아이스 한 갑을 건네고, 둘이서 말없이 맞담을 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단, 루나가 올라가고 일 분 후에 시호가 올라올 것.
인적 드문 밤길도 동행하는 주제에 새삼 경계가 심한 듯도 했지만, 문과 문이 채 3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는 이상 조심해서 나쁠 것도 없겠다 싶기도 했다. 루나의 태도가 그런 만큼 시호도 라포 형성 같은 건 애저녁에 포기하고 있었다.
“보다시피 담배를 끊었죠.”
“…그렇구나. 도움이 얼마나 될 진 몰라도 희망을 잃지 마세요.”
“딱히 죽을 병 걸려서 사후약방문 찾는 거 아니거든요?”
“아, 난 또 뭐라고.”
잊고 있었다. 이 여자는 입만 열면 평지풍파의 마이페이스였다.
“그런 거 말고. 하는 일이라든지, 연애사라든지… 그런 거요.”
“일감은 감사하게도 줄지 않고 들어오고 있고, 연애는… 이런 아저씨 연애가 궁금해요?”
“원래 남의 연애만큼 호불호 없는 소재도 드물잖아요. …아, 혹시 담배 끊은 거, 여자친구 클레임 때문에?”
“여자친구 아니에요. 그냥 소중한 동생이에요.”
순간 루나의 시선이 허공을 본 체 표정이 굳어 버렸다. 이윽고 그것은 경멸하는 표정으로 바뀌어 서서히 시호를 향했다. 시호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나 여자친구가 아닌 사람을 여자친구라 할 수도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시호에게 빛나는 여자친구 따위의 개념으로 대치할 존재는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무인도에서 평생 산다고 칠 때 단 한 사람만 옆에 남길 수 있다면 시호는 주저 없이 빛나를 선택할 거라 본인에게 직접 말한 적도 있다.
“그럼 여자친구도 아닌 사람과…”
“그 이상은 선 넘는 거 아무리 루나 양이라도 알죠?”
“…그래요. 방검복 업체라도 알아봐 줄게요. 일단 급한 대로 전화번호부라도 구해서 배에 단단히 차고 다녀요.”
“말이 청산유수인 걸 보니 요즘 작사 고민 많이 하나 봐요?”
“…”
뜨끔해진 시호가 굳이 비꼬아 말하자 루나는 대답이 없었다. 슬쩍 돌아보니 다 피운 담배를 땅에 떨어뜨려 발로 불씨를 끄고 있었다. 루나는 담뱃갑을 톡톡 쳐 다음 개비를 꺼내더니 불을 붙이지 않은 채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말하는 걸 보니 그래도 딱히 현 상황에 큰 애로 사항은 없나 봐요.”
루나는 어딘가 쓸쓸한 눈빛으로 허공을 보며 말했다.
“행복해요?”
시호는 ‘남에게 편하게 할 질문은 아닌데…’ 싶으면서도, 이내 ‘남이니까 편하게 하는 거겠지.’란 생각에 기탄없이 말을 꺼냈다.
“배부른 돼지이자 배고픈 소크라테스예요. 충분히 전달됐나요?”
“하하하핫! 정말 명쾌한 비유예요! 푸흐흐흐흡!”
여전히 담배를 그저 손에 들고 있는 루나가 이렇게 거리낌 없이 웃는 걸 시호는 처음 보았다. 루나는 살짝 숨을 돌리고는 입을 열었다.
“소크라테스란 거 있잖아요. 내 안에 있는 한 그것은 늘 배고플 거예요. 세상에 스스로 감히 ‘소크라테스를 배 불린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좋은 접근이에요. 내 학생이었다면 태도점수는 바로 A+을 줬을 거예요. …중요한 것은 결국 소크라테스가 내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예요. 그게 없는 사람은 불행한 거고요.”
“…후훗.”
루나는 묘한 웃음을 흘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시호는 루나와 이야기하고 있다 보니 어느새 흡연 충동이 꽤 누그러들었음을 깨달았다. “아저씨.” 루나는 시호를 돌아보았다.
“다음 주부터 개강이라 나 주말 오후로 근무 바뀌어요.”
“아, 그러고 보니 벌써 그럴 때가 됐네요?”
루나는 들고 있던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러더니 이내 입에서 떼어 손에 들고 시호에게 다가왔다.
“금요일 밤에, 나하고 홍대에 가요.”
루나의 얼굴이 앉아 있던 시호가 몸을 일으키면 입술이 부딪힐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달빛을 등진 루나의 모습은 신비하면서도 야릇했다.
“…소크라테스는 몰라도, 적어도 돼지는 배불릴 수 없는 걸 채워줄게요. 어때요?”
“…좋아요.”
거부할 수 없는 분위기 때문이었든,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 의지 때문이었든, 시호에게 ‘No’의 여지는 없었다. 루나는 장난스런 눈빛을 하고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무작정 시호에게 물렸다.
“읍!”
시호는 서둘러 입에 문 담배를 오른손으로 받쳤다. 루나는 이를 보이며 웃었다.
“잘 참았으니까 상 주는 거예요. 그거야말로 찐막이니까 천천히 음미해요. 금요일에 예쁘게 하고 와야 돼요!”
가방을 멘 루나는 몇 발짝 걸어가는가 싶더니 별안간 멈춰 섰다.
“…제일 불쌍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
“…?”
“처음부터 소크라테스가 없던 사람이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있다가 없어진 사람이에요. 내 안에 있던 소크라테스의 자취를 찾느라 정작 돼지조차도 배불려주지 못하니까요.”
말을 마친 루나는 탁탁탁 뛰어 빌라 안으로 사라졌다. ‘…참 이상한 아가씨야.’ 시호는 담배를 쭉 빨아들였다. 복숭아향 립밤을 곁들인 에쎄 아이스의 맛은 오아시스가 따로 없었다.
빛나는 1문과대학 복도를 꽝꽝 발소리를 울리며 걷고 있었다. 삼십 분 전, 학과장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은 빛나는 손발이 떨리는 걸 주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시간강사가 을이라 해도 한 주를 통째로 비워 달란 요구는 도를 넘어선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부탁을 하고 있잖아요, 황 박사?
말은 제대로 해야지. 학계의 생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저 부탁을 끝끝내 거절할 시 어떤 불이익을 받을지 예상하지 못할 리가 없다. 아무리 논문과 강의평가가 좋아도 학과장이 학교 측에 “글쎄요, 그 친구는 좀…” 하면 교수 자리는 그대로 물 건너가는 것이다. 그나마 정교수 가능성이 높은 모교에서 못 잡은 기회를 다른 학교에서 잡을 가능성은 요원했고, 박사 취득 후 줄곧 Y대에서만 강의한 빛나로서는 이제 와서 다른 학교로 출강하는 건 도저히 내키지 않았다.
하긴 더러운 꼴 보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니, 교수만 될 수 있다면 그냥저냥 참고 넘어갈 수 있었다. 폐인이 된 시호와 처음으로 몸을 겹쳤던 그날부터 빛나는 그것만을 바라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평가를 높이는 데 활용했다. 원로 시인이란 할아버지뻘 작자의 술시중에 밤시중까지 들었다. “남자와 운우의 정을 나누는 맛을 모르고서야 반쪽짜리 문학밖에 못하는 암컷 앵무새일 뿐이지.” 란 말과 함께 늙고 추레한 몸뚱이를 자신에게 비벼 대던 작자의 얼굴이 아직까지도 종종 꿈에 나와 한밤중에 벌떡 벌떡 깨곤 한다. 그래도 교수가 되어 시호를 지원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자만큼은 도저히 좋게 넘어갈 수만은 없었다. 대체 무슨 염치로 자신과 시호 앞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해 준 사람들을 하루아침에 헌신짝처럼 내팽개친 주제에 이제 와서, 그것도 이렇게 경우 없는 방식으로 말이다.
빛나는 어느새 연구동 3층의 학과장 연구실 앞에 와 있었다. 몇 번 심호흡을 하고는 똑똑 문을 두드렸다. 어쨌든 학과장 앞에서만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들어오세요.”
안에서 부르는 소리에 빛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회의용 테이블 상석에는 학과장이, 학과장을 기준으로 왼쪽에 그가 앉아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빛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와, 빛나야! 보고 싶었어! 어떻게 지냈어? 어쩜 이렇게 예뻐졌니? 전보다 가슴이 더 커진 거 아냐? 박사 따고 우리 학교에서 강의한다며? 어때? 재밌어?”
“…”
“허허허, 이 선생. 황 박사가 많이 놀란 것 같으니까 인사는 그쯤 해요.”
학과장 이문기 교수는 사람 좋아 보이는 너털웃음을 하며 서희를 만류했다. 그럼에도 서희는 일 분 동안 빛나의 손을 붙들고 재잘재잘 떠들었다. 간신히 해방된 빛나는 진이 쏙 빠져 있었다. 정신을 부여잡은 빛나가 오른쪽에 앉자 학과장은 차를 따라 앞에 놔 주었다.
“이거 참 그리운 장면이군요. 둘이 학부생 때 내 수업을 듣던 게 엊그제 같은데, 설마 이 학교에서 다시 이렇게 얼굴을 맞대는 날이 오다니요.”
‘그런 학생에게 몸로비나 시키는 주제에 꼴값은…’
빛나는 겉으로는 엷은 미소를 유지하면서 속으로는 천불이 끓고 있었다. 천진하게 자신을 보는 서희를 바라보자, 서희는 “아!” 하고 탄성을 지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일어날게요. 빛나야, 나 지금 주희 언니 집에서 지내고 있으니까 또 봐☆”
학과장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서희는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연구실을 나갔다. 빛나는 쓴물이 올라올 것 같았다. 지성의 상아탑이니 하는 이상을 안 믿은 지는 오래지만, 이런 위선과 가식에 몸부림칠 바에야 학계에 처음부터 발을 들이지 말 걸 하는, 이미 수십 수백 번 했던 생각이 다시금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니 적어도 노동자로서의 권리는 주장이라도 해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빛나는 별 기대 없이 입을 열었다.
“학과장님, 마지막 주차를 빼 주는 것 말인데요…”
“아, 그래요. 아직 강의계획서 정정할 수 있는 기간이니까, 어서 적어놔요. 그래도 이 선생이 강의한다고 하면 강의 평가도 더 좋아지지 않겠어요?”
“외람된 말씀 드리자면, 저는 어떤 과목이든 마지막 주차에는 첫 교시에 시험을 보고 이후에는 제 지출로 수강생들이 원하는 활동을 해 왔습니다. 강의계획서에는 굳이 남기지 않지만 그걸 기대하고 제 수업을 듣는 학생들도 많습니다.”
“그럼 문제없잖아요. 불만이 있으면 수강 정정 기간에 알아서 하겠고. 근데 그 인원으로 미녀 베스트셀러 작가와 두 시간이나 이야기할 기회를 쉽게 걷어찰까?”
“하지만…”
“그러니까 내가 ‘부탁’한다고 했잖아요. 내가 이런 부탁을 또 누구한테 할 수 있겠어요? 십 년, 이십 년을 강단에 서도 교수 할 깜냥이라곤 눈곱만큼도 안 보이는 학위뿐인 룸펜들한테 말해봤자 애먼 자존심만 세울 텐데. 황 박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요?”
‘개새끼가…’
빛나는 이를 뿌드득 갈고 싶은 걸 애써 눌러 참았다. 어차피 예상한 전개가 아니던가. 이 사람은 빛나의 목줄을 잡고 있다. 교수 임용이라는 먹잇감을 미끼로, 그저 희망고문을 되풀이하며.
학과장은 차를 마저 한 모금 마시고는 잠시 찻잔을 보더니, 이내 한 입도 손을 대지 않은 빛나의 찻잔을 보며 말했다.
“내가 너무 오래 젊은 사람 시간을 뺏었군요. 다 마셨으면 이만 가 보도록 하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빛나는 부르르 떨리는 손을 뒤로 숨긴 채 학과장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문고리를 잡고 돌리려던 찰나, 학과장은 빛나의 등에 대고 말했다.
“아, 그리고 이 선생한테 기왕 귀국했으면 집에서 지내는 게 어떠냐고 넌지시 말 좀 해줘요. 아무리 친했어도 그렇지, 무슨 닭집 주인하고 한 지붕 밑에서 먹고 자는 건지, 원…”
1문과대학 계단을 내려가던 빛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벽을 주먹으로 세게 쳤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혹시라도 학과장이 들을 수도 있었다. 그 분한 마음까지 전부 주먹에 담아서 몇 번이고 벽을 때렸다. 손마디 하나하나에 격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왼손에서 ‘뿌극’ 하는 심상찮은 소리가 났다.
큰일 났다, 이건 백 퍼센트 정형외과감이다. 그와 동시에 빛나는 ‘하… 뭐 어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헉… 헉…”
오른손까지 부러졌다간 강의에 지장이 생길 것이다. 빛나는 숨을 몰아쉬며 살가죽이 찢어진 양손을 내려놓았다. 아직 학생들이 학교에 없는 게 다행이었다.
“빛나야, 무슨 일이야!?”
어디서 나타났는지 서희가 어느새 빛나의 손을 붙잡고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빛나는 벌레를 보듯 서희를 노려보더니 있는 힘껏 손을 뿌리치고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서희는 허둥지둥 빛나의 뒤를 따랐다.
건물을 나와 주차해 둔 바이크에 다다를 때까지 서희는 아무 말 없이 빛나를 쫓아왔다. 내버려둔 채 빛나가 바이크에 다리를 걸치려 하자 서희는 소리쳤다.
“바보야, 그런 손으로 어떻게 몰려고 그래! 내가 병원까지 차로 데려다줄게!”
빛나는 말없이 우뚝 멈춰 섰다. 서희가 만면에 미소를 띠며 빛나에게 다가가 왼팔을 붙들었다. 찌리릿 하는 통증이 왼팔에서 척수를 타고 뇌까지 치달았다. 빛나는 비명을 지르는 걸 간신히 참고는 홱 하고 서희에게서 팔을 뺐다.
“아, 미안…”
“여전히 제멋대로네, 이서희 씨.”
빛나는 몸을 돌려 차가운 눈빛으로 서희를 쳐다보았다. 서희는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체 하며 호의를 베푸는 시늉을 하면, 아무 일도 없던 게 되나?”
“빛나야…”
“내가 길에서 사고가 나면 났지, 그쪽 애비 롤스로이스는 안 타.”
“그쪽 애비라니, 빛나야… 학과장님이잖…”
“그래! 다시 말해줄까!? 이서희가 모는 이문기 차 같은 건 안 탄다고!!”
벼르고 벼른 말이 드디어 폭발하기 시작했다.
“네 것처럼 타고 다니는 그 차, 너네 애비가 수없이 많은 대학원생과 박사들을 건전지처럼 쓰고 버려 가며 모은 부와 권력의 일환이야! …너네 고명하고 잘난 애비 때문에 내가 무슨 짓까지 했는지 알아?”
“…”
그 자리에 얼어붙어버린 서희를 내버려둔 채 빛나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허공을 보며 후우 하고 연기를 뱉고는 빛나는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좋겠어. 강단에 서보고 싶다고 하면 딸뻘되는 제자 시수도 뺏어다 주고. 학부 시절 인연으로 추억 팔이만 한 번 해주면 그저 팔불출 애비의 오지랖에 대한 내 아량의 문제로 유야무야 치환해버릴 수 있고. 안 그래?”
“…아니야, 오해야… 난 그런 말을 한 적…!”
“뭐, 모르는 사람이면 이번에도 아무 말 없이 참고 넘어갔겠지. 네가 작가 이서희든, 이문기의 딸이든 좆집이든.”
“…윽!”
적어도 빛나의 입에서 나오리라곤 믿을 수 없던 폭언에 서희는 순간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빛나는 슬슬 결정타를 준비하고 있었다.
“옛날에 한 소년과 그와 서로 사랑하는 소녀 A, 그리고 그를 남몰래 연모하는 또 다른 소녀 B가 있었습니다.”
“…”
“A는 소년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채 어느 날 홀연히 떠나버렸고, 소년은 A를 잊지 못해 방황합니다.”
“…”
“똑같이 소중한 사람을 잃은 B가 어떻게든 먼저 추스르고 소년을 일으키기도 전에, C가 나타나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
“소년이 겨우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되었을 때, C는 헌신짝처럼 그를 버리고 제멋대로 떠나버렸습니다. …물론, ‘이 사람이라면 양보할 수 있다’고 생각한 바보 같은 B의 기대마저도 저버리고.”
“…!”
“이후로 소년의 상처는 아무는 일 없이 더 이상 제대로 된 사랑을 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끝~”
어느새 빛나는 담배를 짓이겨 끄고는 서희의 바로 앞에 서서 노려보고 있었다. 서희는 백지장처럼 하얘진 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었다. 빛나는 서희의 얼굴까지 바짝 다가가서는 속삭였다.
“뭐, 늘 현재가 중요한 당신 입장에서야 지나간 일일 뿐이지. 그러니까 한 가지만 경고하겠어.”
“…!”
“선배한테 털끝만큼이라도 다가가면, 당신 눈앞에 당신 아버지의 시체가 나뒹굴게 될 거야.”
또박또박 한 치의 허세도 없이 빛나는 으르렁거리고는 바이크로 몸을 돌렸다. 몇 발자국이나 걸었을까, 갑자기 멈춰선 빛나는 홱 뒤돌아서는 뚜벅뚜벅 서희에게 걸어갔다.
짜악───
풀스윙으로 날린 빛나의 오른손 따귀를 뺨에 직격당한 서희는 기세 좋게 바닥에 쓰러졌다. 빛나는 바닥에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오랫동안 참아온 것을 아까 전 얼굴을 보자마자 안 한 것만 해도 용했다. 저대로 학과장에게 쪼르르 달려가 일러바치기라도 하면 그동안의 굴종과 치욕도 전부 무의미해지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오늘은 병원을 다녀오는 대로 밤에 시호에게 몸으로 실컷 위로를 받을 예정이기도 하고.
바이크에 타 헬멧을 쓴 빛나는, 왼손은 손잡이에 걸치다시피 하며 중심을 잡고 시동을 걸었다. 이윽고 부우웅 소리를 내며 빛나와 바이크는 서희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
서희는 뺨을 감싸고 주저앉은 채, 멀어져가는 빛나의 등을 바라보는 일 없이 오래도록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아… 아아아… 으아…”
“허억, 허어억…”
빛나는 왼팔의 석고 붕대를 제외하면 알몸으로 누워, 땀과 침과 정액 범벅이 되어 있었다. 단 한 어절조차 말소리를 만들어내지 못할 정도로,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진 정사의 쾌락에 온몸을 부들거리고 있었다.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빛나 대신 정상위로 두 시간 동안 허리를 흔든 시호는 탈진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자정 가까운 시간에 시호의 집 대문을 두드린 빛나는, 비몽사몽인 시호가 왼팔의 석고 붕대에 관해 물어볼 틈도 없이 입술을 덮치며 오른손으로 그의 하복부를 문질렀다. 늘 나던 타르 맛이 안 나는 것에 의아해 하면서도 빛나는 말없이 시호를 침대로 밀어붙였고, 지금에 이른다.
“…그래서, 도대체 어쩌다 다친 건데?”
어느 정도 서로 이완이 되자 시호는 페트병을 입에 대고 물을 벌컥대고는 빛나에게 건네며 물었다.
“…신경 쓸 거 없어.”
“그건 굉장히 섭섭한 말인데. 네가 날 신경 쓰는 건 되고 그 반대는 안 돼?”
“미안. 말하고 싶지 않아.”
빛나는 딱 잘라 대답했다. 시호는 잠시 뒷목을 긁고는 다시 물었다.
“그래서, 석고 자르는 건 언제?”
“개강 전 토요일. 그래도 붕대는 감아야 돼.”
빛나는 오른손을 들어 얼굴에 붙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분명 섹시한 동작일 텐데 이미 평소의 네 배는 허리를 혹사시킨 시호는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른팔을 받치며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난 빛나는 시호의 책상 스탠드를 켜서 늘 같은 자리에 있던 것들을 찾았다. 시호는 후후후 하고 웃었다.
“나 큰 결심 했다, 빛나야. 앞으로는 혼자 외롭게 피우거나, 나처럼 평생을 건 인내의 미학을 실천하려무나.”
빛나는 눈이 동그래졌다. 고등학교 때 처음 서로 알게 됐을 때 이미 시호는 흡연자였다. 어울리는 몇 안 되는 동년배들은 모두 비흡연자라 시호는 늘 혼자서 담배를 피웠다. 그들이 아무리 끊으라고 해도 결코 끊지 않던 담배를 이렇게 하루아침에 스스로 끊을 결심을 하다니,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다음 순간 빛나의 머릿속에는 얼굴을 모르는 시호의 반 동거인의 존재가 떠올랐다. 뚜렷한 근거 없이 연역적으로 인과를 설정할 순 없지만, 활동의 폭이 좁은 지 오래된 시호의 일상에서 그가 금연을 결심할 만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하, 그래. 한번 얼마나 오래 가나 보자. 기대할게?”
빛나는 복잡한 심경을 애써 숨기려는 듯 심술궂게 응수하며 다시 자리로 돌아와 누웠다. 시호는 온화한 눈빛으로 빛나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빛나는 잠시 동안 마음을 비우고 만족스럽게 시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시호가 다음 질문을 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