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 식사를 끝내고 지수와 시호는 싱크대 앞에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식사가 끝나면 시호는 곧바로 방에 들어가고 지수가 설거지까지 마치고 퇴근했었다. 시호가 도와주겠다고 나서도 굳이 지수가 만류했었다.
배드민턴으로 참교육을 당한 날 이후, 점심을 먹고 공터에서 셔틀콕을 치는 것은 어엿한 일과로 편입되었다. 이에 대해 시호가 “내가 시간을 뺏은 만큼 뭐로든 벌충을 해야죠.”하며 우긴 결과, 매 끼니 설거지는 둘이서 함께 하게 되었다.
시호는 오늘따라 뭐가 그렇게 흥겨운지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점심때까지만 해도 콧노래에 그쳤던 게 지금은 아예 입으로 가사를 외우고 있다.
“하루하루 나는 하늘과 가까워지는데~♪”
“…”
지수는 모른 체 하고 설거지에 집중했다. 지수가 수세미로 식기를 닦아 건네면 시호가 헹구어 건조대에 하나씩 끼웠다. 그러면서도 옆에 자신이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할 정도면 어지간히 기대하고 있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젠 담배도 안 피우겠다, 환기와 난방 순환을 위해 모든 방문을 열어둔 덕에 시호와 지수는 상시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낮에는 시호의 방문이 닫혀 있었다. 지수는 곧바로 시호의 방에 몰래 설치한 카메라를 스마트폰으로 켰다. 양복을 입은 시호가 모니터를 거울삼아 옷매무새를 확인하고 있는 걸 보고 지수는 순간적으로 웃음이 터질 뻔했다.
“이젠 결정의 순간이야 너와 나는~♬”
-♩♪~♬♪~
한창 시호의 노래가 절정부로 치달으려는 순간, 주머니에서 경쾌한 트랜스풍의 멜로디가 울렸다.
“…어, 벌써 8시네.”
시호는 앞치마에 대충 손을 닦고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지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지수 씨, 일정이 있어서 오늘은 먼저 좀 실례할게요.”
“그러세요.”
“고마워요, 끝나면 식탁 위에 있는 거 가져가요. 선물이에요.”
시호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미 욕실로 걸어가고 있었다. 머리를 헹구는 듯한 물소리가 날 때쯤 지수는 설거지를 마치고 의자에 앉아 앞치마 주머니에서 사진을 한 장 꺼냈다. 시호와 나란히 앉아 담배를 피우는 중학생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소녀의 사진이 찍혀 있었다.
“틀림없는 비익연리 거부할 수 없어~♬”
지수는 시호가 부르다 만 노래의 뒷부분을 이어 불러 보았다. 사진 속 소녀가 육 년 전에 만든 노래인 모양이다. 당시에는 꽤나 센세이션을 일으킨 모양이었지만 이후의 디스코그래피는 찾으래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추억의 노래의 원작자와 팬이 서로의 옆집에 산다는 것만으로 플래그가 설 요소는 충분하다. 나이 차이를 문제 삼기에는 자신도 소녀와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거 참 위험한 아저씨네…”
혀를 끌끌 차던 지수는 문득 식탁 위의 조그마한 선물박스에 눈길이 갔다. 마치 택배를 보낼 때 파손을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대책으로 활용될 법한, 아무 장식도 글자도 없는 하얀 박스의 뚜껑을 열어보니, 대충 구겨 넣은 휴지 뭉치들 사이에 50ml는 될까 말까한 병이 하나 있었다. 뚜껑 밑에 JIMMY CHOO라 쓰인 투명한 병. 뚜껑을 열어 코를 대자 미약하나마 익숙한 냄새가 났다. 매일 자신이 배드민턴을 칠 때 빌려 입는 트레이닝복에서 나는 냄새였다.
대충 시나리오가 예상이 갔다. 이 바보 같은 양반이 여자에게 줄 선물로 뭐가 좋을지 침대 맡에서 빛나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고, 빛나는 태연하게 자기가 쓰는 향수를 알려준 것이다. 분명 지수를 의식한 도발 행위였겠지만, 아쉽게도 빛나는 목표물을 잘못 파악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덤일 뿐 오늘 시호가 최우선으로 선물을 줄 상대는 따로 있을 테니 말이다.
루나는 익숙지 않은 이물감에 연신 눈을 깜빡였다. 처음으로 끼워 본 렌즈의 감각은 결코 기분 좋은 것이 아니었다. 늘 머리띠로 넘기던 앞머리도 오늘은 단정하게 빗어 고데기로 펴기까지 했다.
금요일 밤의 홍대입구역 9번 출구는 어딜 둘러봐도 차려 입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다음 주면 개강이니 마지막으로 신나게 놀아보자는 대학생들의 비율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아무리 많은들 동장군의 마지막 발악을 상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루나는 파카에 목도리에 장갑까지 둘렀지만 짧은 반바지와 스타킹으로 감싼 하의에 스며드는 냉기는 어찌할 수 없었다.
폰으로 시각을 확인해보니 21시 29분이었다. 약속시간은 9시 반, 정확히는 1분도 안 남았지만 보통은 이때쯤이면 도착하든 전화가 오든 해야 한다. 루나는 초조한 기분을 애써 억누르며 계속 출구 계단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우루루 몰려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 속에서 까만 양복 위에 잠바를 대충 걸친 시호가 허겁지겁 뛰어오는 게 보였다. 루나는 아차 싶었다. 차라리 깔끔하게만 입고 오라고 할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루나를 발견한 시호는 손을 흔들며 성큼성큼 계단을 두 개씩 뛰어 올라왔다.
“허억, 허억… 미안해요. 기다렸죠?”
직접 눈앞에서 본 시호의 모습은 그야말로 목불안견이었다. 치렁치렁한 장발을 그저 한데 모아 뒤로 묶기만 한 덕에 비비크림 같은 건 하나도 안 바른 잡티와 잔주름이 그대로 드러난 얼굴이 더욱 두드러졌다. 여기에 까만 양복, 까만 넥타이에 까만 구두까지 그야말로 장례식 내지 조폭 패션이었다. 나름 벌어진 떡대가 더더욱 위압감을 조성했다.
“아니, 딱히 기다리진 않았는데, 설마 치장하느라 지금 왔어요?”
“그렇다고 해 두죠. 이야, 강의 대타 뛸 때도 안 입는 양복을 얼마 만에 입는 건지 모르겠어요.”
“아…, 하하… 잘 어울리네요.”
루나는 어떻게든 웃는 표정을 유지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나저나 오늘 루나 양…” 시호의 말에 루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시호는 곧바로 무릎을 쭈그리고는 루나의 하반신을 보며 말했다.
“너무 춥게 입고 온 거 아니에요? 감기 걸리기 딱 좋겠네.”
루나는 기겁해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평소라면 절대 다리를 드러내는 코디를 하지 않는 루나가 조금이라도 예뻐 보이려고 쥐어짠 용기가 무의미해지는 순간이었다.
“…미안해요, 모든 게 내 잘못이에요.”
“?”
루나는 손을 뻗어 시호의 잠바 깃을 최대한 세우고는 턱밑까지 지퍼를 채워 올렸다. 영문을 모르는 시호의 얼굴을 안쓰럽게 바라보고는 잠바 밑단을 당기며 루나는 앞서 가기 시작했다. 날씨도 추운데 역 앞에서 한시라도 더 어물쩍거리고 있다간 이래저래 애로 사항이 생길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어요? 왜 그런 말을 해요?”
“오늘 추우니까 잠바 절대 벗지 말아요, 알겠죠?”
“실내는 따뜻할 텐데요, 뭐.”
“아녜요, 추워요! …여기서 놀 거면 현역 대학생 말 들어요! 알겠죠?”
“아…, 그래요. 고마워요.”
시호는 루나의 기세에 곧바로 쭈구리가 되어 수긍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한시도 나란히 걸으려 하지 않고 한 발짝 앞에서 자신을 이끄는 루나의 모습에, 평균을 아득히 밑도는 시호의 직관조차 ‘잠자코 따르라’고 명령했고, 시호는 이를 충실히 이행했다. 그러나 그것이 인과와 근거를 묻는 데 오랫동안 단련된 시호의 호기심마저 완전히 억누를 순 없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어디 가는데요?”
“말했잖아요, 돼지는 배불릴 순 없는 걸 채워주는 곳이라고.”
“아니, 그러니까 그게 어딘데요?”
“가 보면 알아요!”
루나의 확신에 찬 말투는 시호의 호기심에 더욱 불을 지폈다.
루나는 시호를 역에서 십 분 정도 떨어진 클럽가로 이끌었다. 이 추위에도 크롭티나 미니스커트로 몸매를 드러낸 여자들이 옆을 지날 때마다 루나는 시호의 잠바를 잡고 있는 손에 미묘한 저항을 느꼈다. 그럴 때마다 루나는 말없이 더 세게 시호를 잡아끌었다.
어느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가자 『Live House Milky Way』라는 글씨의 LED 조명 아래의 조그마한 쪽문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쪽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자 지하 라이브하우스로 통하는 철문 옆에 《오늘 밤 10시 패전트 시크릿 데뷔 콘서트》라고 쓰인 보드가 세워져 있었다. 입구 옆 카운터에서 루나가 입장료를 지불하자 점원이 루나와 시호의 손등에 스탬프를 찍어주었다.
시호는 점내를 둘러보았다. 개성적인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서서 자기가 좋아하는 밴드나 곡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물론 개중에는 한 마디도 얘길 꺼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거나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마 자신처럼 밴드 문화에 대해 하나도 모른 채 일행에게 끌려 온 부류일 것이다.
의아한 건 루나의 태도였다. 어느 쪽에서든 끊임없이 들려오는 밴드 관련 이야기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그저 시호 옆에서 시큰둥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말없이 나란히 서 있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침묵을 깬 건 시호였다.
“루나 양이 밴드 공연을 좋아할 줄은 몰랐네요.”
“딱히 좋아하진 않아요.”
“예에?” 예상외의 대답에 시호는 무심코 목소리가 뒤집어졌다. “아니 그럼 왜 온 거예요?”
“데뷔 무대니까요. 설령 불완전하고 허술한들 여기서밖에 들을 수 없는 곡이에요.”
순간 시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루나의 표정은 진지했다.
“…아직 들어보지도 않았는데 불완전하고 허술한지 어떻게 알아요?”
“애초에 완전한 곡 같은 건 없으니까요. 그 중에서도 눈앞에서 연주하는 신인의 곡만큼 서투르면서도 생생한 소리는 드물죠.”
“굳이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할 이유가 있어요?”
루나는 고개를 돌려 시호를 올려다보았다.
“아저씨, 뭐든 창작을 해 본 적 있어요?”
“예…?” 루나의 질문에 시호는 살짝 동요했다. 그가 신작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빛나를 제외하곤 아무에게도 밝힌 적 없다. 돌이켜보니 까마득히 오래된 공모전 입상작 이후 아무것도 발표하지 못한 스스로를 창작자라 내세울 엄두도 나지 않았다.
“아뇨, 없어요.”
“그럼 그냥 들어봐요. 내 경험에서 비추어볼 때, 작곡을 하는 방식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어요.”
루나는 손등을 이쪽으로 향하고 검지를 펴 보였다.
“첫 번째는 맨 땅에 헤딩하는 것. 음표 하나부터 전반적인 콘셉트까지 전부 직접 고민하면서 만드는 거예요. 이게 가능해야 스스로 창작자라고 떳떳이 말할 수 있겠죠.”
이어서 루나는 중지를 펴 보였다.
“두 번째는 이미 만들어진 곡을 철저히 따라서 만드는 것. 가상 악기를 하나하나 넣어보며 비교 대조해가며 만드는 거예요. 여기엔 두 가지 장점이 있어요. 머릿속 구상만으로 알 수 없는 화성학적인 디테일을 알 수 있고, 어찌됐든 완성도 있는 곡을 빨리 만들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기본적인 곡의 구성은 몰라도 악기 몇 개 정도는 비교적 손쉽게 바꿀 수 있죠. 그걸 창작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요.”
시호는 어느새 흥미롭게 루나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루나는 약지를 펴 보였다.
“마지막으로, 엉터리 곡을 고치는 것. 곡이 엉터리면 엉터리일수록 ‘내가 만들어도 이것보단 낫겠다’ 싶은 마음에 더 악착같이 파고들어서, 결국에는 아예 다른 결과물을 내 버리죠. 그런 경험이 쌓이다 보면 금세 첫 번째 케이스의 경지에 이를 수 있고요. 재밌게도 사람은요, 타인의 성공을 본받기보단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성장할 때 보다 견실해지더라고요.”
“…과연,”
“세상에 진정한 의미에서 아무 인풋 없이 혼자서 무에서 유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어떤 식으로든 기존의 것에 노출이 되기 마련이니까요.”
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론적으로는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시호는 루나의 말에서 중요한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루나는 입술을 오므렸다 핥았다 하다가 시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난 밖에서 한 대 피우고 올게요.”
“천천히 피우고 와요.”
루나는 시호의 팔을 잡아끌었다. 시호는 의아해했다. “나 금연하는 거 알잖아요?”
“…으슥한 골목에서 가녀린 여자애 혼자 서 있게 하려고요?”
“또, 또 시작이네. 카운터에서 맥주라도 사놓고 있을 테니까 만에 하나라도 일 생기면 소리 질러요.”
시호는 살짝 힘을 주어 루나의 등을 떠밀었다. 루나는 터덜터덜 문 밖을 나서려다가 미련이 남았는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시호는 못 본 체 하며 카운터의 점원에게 “생맥 500 둘이요.” 하며 지갑을 꺼냈다. 루나는 포기한 듯 계단을 올라갔다. 그와 엇갈리듯 세 명의 여자 무리가 계단을 내려왔다.
셋은 깔맞춤을 한 듯 딱 달라붙는 검은 가죽 바지, 목둘레를 인조털로 두른 가죽 잠바에 손가락이 나오는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거기에 스모키 화장을 해 짙은 눈가까지 누가 봐도 ‘우리 헤비 록 좋아한다’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키가 제일 작은 여자는 와인색으로 염색한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있었다. 머리핀부터 목걸이까지 온통 금속으로 가공한 해골 문양 장신구들이 인상적이었다. 악기 가방을 멘 중키의 여자는 보브컷 단발 사이사이에 파란색 브릿지가 선명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상의 단추를 몇 개 풀어 드러난 가슴골 위로 해골과 뱀이 합쳐진 문양의 문신이 눈에 띄었다. 또 다른 악기 가방을 멘 제일 키가 큰 여자는 눈꺼풀과 코에 피어싱을 하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윤기가 흐르는 까만 장발은 들여다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시호는 힐끗 그들을 곁눈질하자마자 몸이 굳어버릴 뻔했다. 셋은 시호는 신경 쓰지도 않고 카운터 앞에 나란히 섰다. 트윈테일을 한 여자가 혀로 똑딱 소리를 냈다. 점원은 그들을 보더니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너희들 이 시간에 여긴 무슨 일이야? 이제 곧 공연인 거 안 보여?”
“언니, 패전트 걔네들 오기 전에 두 곡만 시간 좀 빼 주면…”
“안 된다고 했지!”
트윈테일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점원이 언성을 높여 소리쳤다. 그리고 문득 시호의 존재를 눈치 채고는 헛기침을 했다. 시호는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피웠다. 점원은 머리를 낮추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도 밴드 지망생이라면 최소한의 매너는 지켜야지. 10시 공연이면 적어도 이삼십 분 전부터는 장비 체크하고 튜닝하고 릴렉스하는 시간인데 그 동안에 너희들이 점거하고 있겠다고?”
“지금 9시 40분이야. 근데 걔들 안 왔잖아. 그럼 뭔가 사고 친 거고, 우리가 먼저 하고 있다고 뭐라고 말 못해. 우린 준비할 필요도 없어. 어제 낮에도 여기서 연습했다고.”
“억지 부리지 마. 자꾸 그러면 아는 동생이고 뭐고 너희들 여기서 연습도 못하게 한다? …그리고 사장님 말씀 잊었어? 키보디스트 없이는 무대 안 올려준댔지?”
쾅 하고 내려치는 소리에 시호는 문득 뒤돌아봤다. 트윈테일녀가 카운터에 올려놓은 주먹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가뜩이나 진한 화장을 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니 그야말로 야차를 방불케 했다. 점원은 눈 하나 까딱 않고 뒤돌아서서 냉장고를 열어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진상 부리지 말고, 공연 볼 거면 표를 사고, 아니면 가셔.”
“…내가 미디 딴 거 몇 번이고 들려줬잖아. 안 된다고 할 때마다 고쳐가면서.”
“응 사장님이 도저히 허접해서 못 올리겠대~ 참고로 나도 동의하고.”
“웃기지 마, 처음에는 그런 소리 안 했잖아! 그때랑 곡이 바뀐 것도 아니고!”
“사람이 바뀌었잖아.”
여전히 뒤돌아서서 태연하게 받아치는 점원의 말에 트윈테일녀는 발을 꽝꽝 굴렀다.
“리더 말도 안 듣고 지 곤조만 세상 소중한 년을 왜 데리고 있어야 하는데! 애새끼들도 아니고 생각이 다르면 갈라질 수도 있는 거지!”
“어 너 지금 말하는 꼬라지가 애새끼야. 리더라면 첫째로 구성원들을 포용할 줄 알아야 하고, 둘째로 누굴 내쫓고 싶으면 적어도 내부적으로나 대외적으로나 납득할 대안을 마련해 뒀어야지. 데뷔도 하기 전에 키보디스트를 세 명이나 갈아 놓고 이제 와서 미디 틀겠다고 하면 우리가 어떻게 볼지 정말 몰랐어?”
가만히 듣고 있던 보브컷녀가 나서며 말했다.
“언니, 저랑 세미도 그 친구들 딱히 마음에 안 들었어요. 누군 기교 부린다고 전혀 맞출 생각이 없고, 누군 조금이라도 바꿔 보려고 하면 못 하겠다고 땡깡 부리고, 누군 연습 좀 하려고 하면 연락이 안 되고… 차라리 미디가 마음 편하다니까요?”
“윤아야, 너까지 그런 소릴 하고 있으니 더더욱 안 되겠다. 그냥 너희들은…”
“이주 씨, 큰일 났어!”
점원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계단에서 우당탕탕 소리와 함께 여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삼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점내로 뛰어 들어와 카운터 앞의 세 사람에게 눈길도 안 주고 점원에게 말했다.
“패전트 얘네, 택시 타고 오다가 교통사고가 났대.”
“뭐라고요!? 아니 얼마나 다쳤대요?”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데 골절에 타박상에 아주 만신창이래. 어휴, 진짜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여자는 고개를 숙이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점원 역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보던 보브컷녀가 입을 열었다.
“저, 사장님. 혹시…”
“그거 우리가 할게요!”
보브컷녀가 운을 띄우려던 찰나 트윈테일녀가 까치발을 하며 소리쳤다. 여사장은 돌아보지도 않고 한심한 듯 내뱉었다.
“은수야, 타인의 불행을 자신의 기회로 삼겠다고 당당하게도 말하는구나…”
“지금 그런 1도 쓸모없는 가식을 떨 게 아니라 가게를 생각하셔야죠. 그럼 오늘 분 표 전부 환불해주고 욕 처먹으면서 다 같이 병문안이라도 갈까요? 너희들 때문에 오늘 공쳤다고 징징거리게? 기왕 욕먹을 거면 뭐라도 퍼포먼스를 보일 시도라도 하자고요!”
“이 년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여사장이 으르렁거리며 트윈테일녀를 돌아보았다. 옆에서 듣던 시호는 트윈테일녀에게서 지금 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일행과 비슷한 영압을 느꼈다. 무심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일동이 시호를 돌아보았다. 시호는 슬며시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여사장은 크게 한숨을 푹 쉬고는 트윈테일녀를 내려다보았다.
“지은수, 너 할 수 있어?”
트윈테일녀의 얼굴에 희색이 만연해졌다. 그때였다. 이때까지 아무 말도 없던 장발녀가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순간 네 사람의 이목이 장발녀에게 집중되었다. 장발녀는 움찔 하더니 주저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맥북… 고장 나서… 아침에 수리 보냈는데…”
“야 강세미!!!!!!!!!!!”
순식간이었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트윈테일녀가 장발녀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외쳤다.
“너 왜 그 얘기를 지금 해! 아주 데뷔하기 싫어서 기도를 했지?”
“나, 나도 가게 들어오기 전까지 잊고 있었어! 애초에 오늘 여기서 한다는 얘기도 안 했잖아!”
“웃기고 있네. 너 미디에 연주 맞추는 거 버거워 해서 계속 키보디스트 물색하던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어휴, 파트가 파트라 얘를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저기요…”
시호가 한 손을 들고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3인조는 아예 이쪽을 무시, 여사장과 점원은 고개만 까딱 돌려 시호를 바라보았다. 여사장은 얼굴이 흙빛이 된 채 말했다.
“하아… 손님. 오늘은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맥주 드신 것까지 바로 환불해드릴 테니까 모쪼록 다음번에도 와 주시면…”
“그게 아니라요, 아까 무대 보니까 드럼이랑 신디사이저 있던데요.”
“그야 있죠… 그 무거운 신디를 어떻게 들고 다녀요. 근데 연주할 사람이 없잖아요.”
보브컷녀가 한심하다는 듯한 말투로 시호에게 쏘아붙였다. 마침 뒤쪽에서 루나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내려오고 있었다. 시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게요, 연주할 사람이 있거든요.”
“곡은 어느 정도 숙지했어?”
“들리는 대로는.”
“그럼 들은 것의 8할만 해. 괜히 나대서 곡 망치지 말고.”
“…노력해볼게.”
은수는 신디사이저 앞에 선 루나에게 조용히 으름장을 놓고는 드럼 자리로 돌아갔다. 루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신디사이저를 마저 세팅했다. 객석 맨 앞에 자릴 잡은 시호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못한 채 마냥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라이브 하우스 밀키웨이의 무대 위에는 록 밴드 레인드롭스가 본 공연을 오 분 남겨놓고 세팅에 열중하고 있었다. 리더이자 드러머인 지은수, 리드보컬 겸 베이시스트 황윤아, 그리고 막내이자 메인보컬 겸 기타리스트인 강세미는 데뷔 공연을 앞두고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단 한 사람, 금일 한정 임시 키보디스트 한루나만은 영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십오 분 전, 시호의 돌발적인 부킹에 은수와 루나는 맹렬하게 반대했다. 은수는 ‘한 번도 호흡을 맞춰본 적 없는 사람과 어떻게 데뷔 공연을 치르냐’는 이유였고, 루나는 거기에 더해 시호의 무책임한 발언 자체를 성토했다. 시호에게 힘을 실어준 건 나머지 사람들 전부였다. 윤아와 세미는 ‘모험을 해서라도 사람들 앞에서 공연해보고 싶다’며 시호를 지지했고, 사장은 루나에게 ‘무사히 끝내주기만 하면 앞으로 학생의 입장료는 안 받겠다’고 설득했다. 아마 루나의 학적을 밝히지 않았다면 씨알도 안 먹혔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루나의 마음을 돌린 건 시호의 결정적인 한 마디였다.
-무대 아래서 고갤 뻣뻣이 치켜들고 엉터리 곡을 완벽하게 감상하는 것보다는, 무대 위에서 엉터리 곡을 들고 직접 깽판을 쳐 보는 게 훨씬 더 의미 있는 경험 아니에요?
귓속말로 해서 루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한 이 말에, 루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윤아가 건네 준 열악한 음질의 데모곡들을 한두 번 듣자마자 루나의 머릿속엔 코드의 진행과 각 악기의 연주 스타일이 정리되었다. 제법 짜임새는 있었지만 역시 탄탄한 이론적 기반이 부재해서인지 부족하거나 불필요한 부분이 많았다.
‘그래, 어차피 오늘뿐인데 마음대로 신나게 놀고나 가자.’
루나는 은수의 폭언도 한 귀로 흘린 채 다가올 책임 없는 쾌락에 기대가 만발했다. 열 시 정각이 되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관객들이 무대 앞으로 모였다. 은수가 하이햇을 탁탁 치며 윤아와 세미 그리고 루나에게 신호했다. 윤아가 마이크를 잡고 입을 열었다.
“아, 아,… 안녕하세요, 오늘 패전트 대신 공연을 하게 된 록 밴드 레인드롭스입니다. 반갑습니다!”
둥 두두두두둥 챙 하고 은수가 드럼을 치자 관객들이 박수를 쳐 주었다. 윤아는 마저 MC를 이어 나갔다.
“저희는 관객들의 마음에 빗방울처럼 내리는 공연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오늘 밤 이곳, 라이브 하우스 밀키웨이를 찾아와 주신 여러분들의 마음에 촉촉한 울림을 선사해 드리겠습니다.”
윤아가 MC를 마무리하자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가 지하를 가득 채웠다. 이윽고 윤아의 눈짓을 받은 은수가 스틱을 딱딱딱딱 치는 박자에 맞춰 루나는 신디사이저로 전주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윤아의 베이스가 리듬을 타고, 세미의 기타 소리가 허공을 긋고, 마지막으로 은수의 드럼이 발화했다.
“상냥한 시간의 아련한 손길은 기억을 추억으로 바꾸어 가고~♪”
윤아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보컬부의 포문을 열었다. 중성적인 외양의 윤아가 만면의 미소와 함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베이스를 켜는 모습은 천상 소녀 그 자체였다. 남성 관객 대다수는 살짝 얼이 빠진 채 윤아를 바라보았다.
“어제의 눈물이 오늘의 비가 되어 내일은 무지개가 뜰 거라고~♬”
곡이 고조되기 시작하는 파트로 들어가자 세미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깨끗한 고음을 자랑하며 머리칼을 흩날렸다.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앳된 얼굴이 짓는 변화무쌍한 표정의 갭은 관객들의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특히 아까 전 내성적인 모습이 뇌리에 남아 있던 시호는 입가가 움찔거리는 걸 주체할 수 없었다.
윤아와 세미의 후렴이 끝나고 간주 구간이 되자 그동안 보조적으로 다른 악기들에 맞추던 신디사이저가 메인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곡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다른 멤버들이 루나를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시호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아까 전 옆에서 같이 데모곡을 들은 기억이 맞다면 루나는 지금 즉석에서 편곡을 하고 있었다. ‘깽판’이 시작된 것이다.
윤아와 세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은수와 루나를 번갈아보았다. 루나는 두 사람에게 ‘너희들도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 내가 커버하겠다’는 눈짓을 보냈다. 은수가 마지못해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다시 객석을 향한 두 사람은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다시 일어나 시련이 새긴 상흔을 끌어안고~♪”
이윽고 다시 후렴부에 들어가자 윤아의 베이스와 세미의 기타는 방금 전 후렴과는 확연히 다른 소리를 내고 있었다. 루나는 교묘하게, 그리고 충실하게 두 사람의 소리를 백업했다. 만난 지 불과 삼십 분 만에, 그것도 처음으로 합을 맞춘 연주에서 루나는 이들과 ‘엉터리 곡’으로 분명하게 공명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레인드롭스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윤아가 땀투성이가 된 채 꾸벅 인사하자, 마찬가지로 루나를 포함해 나란히 선 땀투성이의 레인드롭스 멤버들이 뒤이어 고개를 숙였다.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으며 멤버들은 헐떡거리면서도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루나는 관객을 등지고 멤버들만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
“괜찮았어. 앞으로 열심히 해.”
“ㅁ, 뭐? 그럼 언니는…”
윤아가 붙잡을 새도 없이 루나는 쏜살같이 무대를 내려와 시호가 들고 있던 자신의 가방을 낚아채며 “먼저 갈게요.”라 남기고는 점내를 가로질러 문 밖으로 사라졌다. 시호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뒤쫓으려 할 때였다. 뒤에서 누군가 툭 하고 붙드는 느낌에 뒤돌아보니 윤아를 위시한 멤버들이었다.
“잠깐만요, 아저씨 저 언니랑 친하죠? 얘기 좀 전해줘요.”
“난 친하다고 생각하는데 저 친구는 모르겠네요.”
“아이, TMI 집어치우고!”
쓸데없이 사족을 덧붙이는 시호에게 은수는 딴죽을 걸며 손을 낚아채더니, 볼펜을 꺼내 손바닥에 전화번호를 적기 시작했다.
“아따따따! 폰 꺼내면 되잖아요! 뭐가 그렇게 성급해요!”
“다 큰 어른이 엄살 부리지 마요!”
다 쓴 은수가 손을 놓고서야 간신히 해방된 시호는 손바닥을 호호 불었다. 시호는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근데, 저 친구랑은 오래 갈 수 있겠어요?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저 친구도 보통 고집과 자존심이 아니거든요.”
“그건 아저씨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죠. 책임지고 전달이나 해 줘요.”
“어, 언니!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전해줄지도 모르잖아!”
“어휴, 죄송해요! 우리 리더가 입이 좀 많이 걸죠? 그래도 속은 깊으니까 나쁘게 보지 마세요!”
어느새 얌전한 막내로 돌아온 세미가 은수를 만류했다. 이 팀의 실질적인 대변자로 보이는 윤아가 은수의 입을 틀어막으며 시호에게 고개를 숙였다.
시호는 살짝 기분이 나빠질 뻔했지만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루나가 미성년자도 아니고, 이런 결정은 스스로 책임지는 게 마땅하다. 한편으로 이 팀을 보건대, 리더가 다소… 아니 좀 심각하게 독불장군 같은 면이 있어도 동생들이 이렇게 따르는 걸 보면 마냥 안 좋은 그림만 나오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전달할게요. 오늘 공연 멋졌어요, 그럼.”
시호는 멤버들에게 웃어 보이고는 혹시라도 루나를 놓칠까봐 서둘러서 가게를 빠져나갔다.
골목을 나와서도 루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도 대기음만 들릴 뿐이었다. 시호는 일단 홍대입구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인적 드문 밤길을 무서워하는 여자다. 빌라 창문들의 불빛이 전부 꺼지기 전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9번 출구가 가까워지자 시호는 루나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남자 두 명과 여자 두 명으로 이루어진 그룹과 무언가 이야기를 하는 듯 보였다. 장난기가 발동한 시호는 말없이 다가가 루나의 양팔을 탁 잡았다. 루나 성격대로라면 필경 꺄악 하며 소스라칠 것이다.
그러나 루나는 그대로 꼿꼿이 서 있을 뿐이었다. 이상하게 여긴 시호가 루나의 옆얼굴을 곁눈질했다. 루나는 이제껏 본 적 없는 경직된 얼굴로 상대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리 중 단발머리의 여자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뭐야, 한루나? 혹시 남자친구야?”
“네가 알 바 아니야.”
루나는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단발머리의 여자와 옆에 있던 포니테일의 여자는 코웃음을 치며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남자 두 명은 별로 관심이 없는 듯 팔짱을 낀 채 상황을 방관하고 있었다. 시호는 루나의 오른편에 서서 살며시 손을 쥐었다.
“멋대로 교내 밴드 만들어놓고, 멋대로 나간 주제에, 아직도 인디 밴드 공연은 다니는구나. 그것도 옆에 남자도 끼고. 너 땜빵하느라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말은 제대로 해야지. 날 밀어내고 싶었던 건 너잖아. 내 대신 리더 해보니까 어때? 도저히 적당히 남자랑 뒹굴면서 편한 마음으로 못하겠지?”
단발머리 여자와 루나 사이에 불똥이 튀었다. 포니테일의 여자가 조소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도도한 척, 깨끗한 척은 다 하더니 너도 별 수 없구나? 그런데 그렇게 사람이 없었어? 왕년의 천재께서 어떻게 키만 큰 동네 아저씨를 골랐대?”
“아, 혹시 경호원 겸용이야? 아무리 그래도 너한텐 너무 사이즈가 크지 않니? 어떻게, 요실금은 안 걸렸니?”
단발머리 여자의 밑도 끝도 없는 음담패설에 시호는 자기도 모르게 불끈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자신의 옆에 있는 여자의 입도 만만치는 않았다.
“적어도 너희들 고기 딜도처럼 실속 없이 허우대만 멀쩡하진 않거든. 때와 장소 안 가리고 바지를 내리지도 않고. 아, 하긴 그때마다 주저 없이 다리를 벌리는 년들이랑 부창부수인가?”
“아니, 듣자듣자하니 이 썅년이 못하는 말이 없네?”
포니테일 여자가 달려드려 하자 시호는 반사적으로 루나를 몸으로 감쌌다. 루나는 주먹으로 시호의 가슴을 때리며 으르렁거렸다.
“뭐하는 짓이에요, 이거 안 놔요?”
“2대 4예요. 쪽수로 완전히 불리해요. 설령 해볼 만 해도 경찰서 가긴 싫고요.”
시호는 루나만 들을 수 있게 속삭이고는 곧바로 루나를 들쳐 업었다. “꺄악! 아저씨 미쳤어? 이거 놔! 사람 살려!” 몸부림치는 루나의 아우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호는 무리를 향해 뒤돌아보며 말했다.
“피차 이 정도면 충분히 딜 교환한 것 같은데, 우린 그만 가 볼게요.”
“뭐야, 아저씨! 그 년 안 내려놔? 야, 뭣들 해! 빨리 저것들 잡아!”
포니테일 여자가 팔짱을 끼고 있던 남자들을 닦달했다. 시호는 더 이상 말을 섞지 않고 루나를 들쳐 업은 채 길가로 향했다. 택시를 잡아 탈 때까지 뒤에서 쫓아오는 기색은 없었다.
택시를 타고 오는 내내 루나는 창밖을 보며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옆에 앉은 시호는 방금 만난 무리들과의 설전을 떠올렸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겉으로는 관심 없는 척 하며 내려다보는 태도로 일관하던 루나가 실은 직접 학교에서 밴드를 만들었고, 멤버들과의 의견 갈등으로 나간 듯하다. 그저 여느 밴드든 있을 법한 송사다. 1학년 때 일이라면 아직 앙금이 남아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이건 괜히 자신이 끼어들 일이 아님을 시호는 잘 알고 있었다.
택시가 빌라촌 앞에 도착하자 시호는 지갑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루나가 먼저 페이앱을 켠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어휴, 이거라도 내가 낼게요. 오늘 공연도 쐈는데.” 시호는 카드를 든 손으로 스마트폰을 든 루나의 손을 가볍게 밀려 했지만, 루나는 탁 하고 시호의 손을 쳐냈다.
루나는 택시에서 내려서는 시호는 내버려둔 채 제 딴에는 빠른 발걸음으로 빌라를 향했다. 그러나 시호가 조금만 빨리 걷자 루나의 발걸음 정도는 금세 따라잡혔다.
“담배 안 피워요? 지금 엄청 피우고 싶은 거 아니에요?”
“내가 무슨 담배에 걸신들린 년이에요? 알아서 피울 테니까 신경 쓰지 마요!”
“잠깐만 있어 봐요.”
시호는 루나의 팔뚝을 붙들었다. 루나는 팔을 빼려고 했지만 완력 차이는 완연했다. 팔을 빼려는 루나에 맞서 시호는 더욱 손아귀에 힘을 꽉 주었다. 루나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윽! …놔요. 안 놓으면 소리 지를 거예요.”
“왜요? 내가 무슨 숭한 짓이라도 할까 봐요?”
“그런 뜻으로 말하는 게 아닌 거 알잖아요?”
“…그건 좀 너무 낯짝이 두꺼운데요, 루나 양?”
시호는 루나의 팔을 놓으며 짐짓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루나는 간신히 해방된 팔을 반대쪽 손으로 주무르며 시호를 노려보았다.
“루나 양은 지난 몇 주 동안, 내가 그쪽을 해코지할 수 있는 사람이란 전제를 두고 매일 나란히 밤길을 걷고, 오늘은 홍대까지 갔다 왔네요?”
“…그래서 불만이에요? 방금 전만 봐도 물리적으로 압도적인 차이가 있는 건 분명하잖아요?”
“그럼 택시를 타고 왔으면 됐잖아요? 기본요금밖에 안 들 테니 내 담뱃값보다 싸게 먹혔을 텐데?”
루나는 입을 앙다문 채 시호를 노려볼 뿐 반박의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시호는 말을 계속했다.
“루나 양, 지금 그쪽 머릿속이 복잡한 거 알아요. 그러니까 이 이상 말꼬리는 안 잡겠어요. 난 다만 루나 양이 자기 분을 못 이겨 나한테 감정적으로 화풀이해 놓고 도망친 채, 우리가 앞으로 줄곧 어색해지는 게 싫은 겁니다. …괜찮으니까 저기 앉아서 달 보며 담배나 한 대 피워요. 옆에 앉아 있어 줄 테니까.”
시호는 늘 같이 앉는 공터 계단으로 걸어가서는 털썩 주저앉았다. 오랜만에 꺼내 입은 양복바지가 반나절도 안 되어 흙투성이가 되었지만 까짓 거 내일 배드민턴 치러 나가는 김에 세탁소에 맡기면 그만이었다.
“아이, 나 담배도 끊어 놓고 큰 결심한 거 안 보여요? 어서 와서 시원하게 한 대 빨아요, 미스 소크라테스!”
시호가 짐짓 농담을 섞어 회유하자 루나는 잠시 망설이더니 쭈뼛쭈뼛 다가와서는 옆에 앉았다.
“남자한테 끌려 다니긴 싫었는데…”
“응? 방금 무슨 말 했어요?”
“기분 탓이에요.”
시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잠바를 벗어서는 루나의 다리를 덮어주었다.
“여긴 홍대 아니니까요. 학기 첫 날부터 감기 걸려서 수업 듣는 건 그림이 안 좋죠?”
“담뱃재 떨어뜨려서 빵꾸 나도 난 몰라요…?”
“괜찮아요. 불태우지만 마요.”
루나는 씩 웃으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맑은 밤하늘에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올랐다. 루나가 한 개비를 전부 태울 때까지 시호는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옆에 앉아 있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루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비익연리 이후, 그것보다 더 나은 곡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정확히 말하면, 그것보다 더욱 내 마음에 드는 곡을. 그런데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안 되더라고요.”
“…”
“혼자 방에서 레퍼런스 참고용으로 수없이 많은 음악을 들으면 들을수록, 오히려 더더욱 나만의 음악이 사라지는 것 같았어요. 이대로라면 더 이상 음악을 좋아하지 않게 될 것 같았어요. 음악에 대한 열정을 스스로 회의하게 될 것 같았죠. 뭐, 이미 회의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요.”
“…”
“그러다가 고등학생 때 친구의 손에 이끌려서, 우연히 한 밴드의 공연을 보게 되었어요. 엉성하고 조잡하기 짝이 없는 음악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이끌렸어요. 처음에는 컴퓨터로 만든 디지털 음악과 다를 바가 없을 거란 생각에 돌아오자마자 방에서 기억을 토대로 트랙을 짜 봤어요. 오히려 지금까지 만든 어떤 곡보다 형편없게 들렸죠.”
‘그걸 한 번 듣고 그대로 디지털로 옮겼다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시호는 마음속으로 있는 힘껏 딴죽을 걸었다.
“대학교에 와서 밴드를 만든 건 그 때문이에요. 내가 쓴 곡을 여럿이서 함께 연주한다면, 지금까지 나한테 부족했던 것들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뭐, 잘 안 됐지만요.”
루나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시호는 루나의 얼굴을 보며 확신했다. 역시 이 여자는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을 하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무대 위에서 레인드롭스 멤버들과 함께 신디사이저를 칠 때 루나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시호는 놓치지 않았다. 시호는 어떻게든 이 소녀에게 다시 미소를 찾아 주고 싶었다.
“…어제의 소크라테스와 오늘의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람이에요.”
“…?”
뜬금없는 시호의 말에 루나는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소크라테스가 비장하게도 담담히 독주를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만약 사형 집행이 연기되고 소크라테스의 심경에 뭐든 변화를 일으키는 일이 일어났어도, 여전히 그가 죽음 앞에 담대할 수 있었을까요?”
“…모르죠. 각자 믿고 싶은 대로 믿겠죠.”
“그래요. 믿음의 영역이에요. 경험은 어디까지나 경험일 뿐, 미래에 대한 보장은 될 수 없어요. 단지 믿음의 근거가 될 뿐이죠. 그리고 내가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그 근거마저도 취사선택할 수 있습니다.”
“말장난일 뿐이잖아요. 실패를 겪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실패로부터 자유로워지겠어요?”
루나의 언성은 높아졌지만 얼굴과 몸짓은 이미 체념한 사람의 그것이었다. 시호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말했다.
“간단해요, 어제의 실패를 내일의 성공으로 덮어씌우면 돼요.”
그와 동시에 시호는 루나 앞에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살짝 번졌지만 은수가 볼펜으로 꾹꾹 눌러 적은 전화번호 11자리는 여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외울 필요 없어요. 이미 문자로 보냈으니까, 잘 생각해보고 연락해요. 그리고…” 시호는 루나의 다리를 덮고 있던 잠바를 걷어서는 안주머니에 있던 하얀 박스를 꺼냈다.
“라떼 소환이지만 이것만큼 실용성도 미감도 충족하는 선물이 없어요. 무난한 향으로 샀는데 그래도 별로면 디퓨저처럼 써요.”
루나가 종이 상자를 열자 나온 것은 역시나 JIMMY CHOO 향수였다. 애초에 향수를 써 본 적이 없는 루나로서는 그야말로 생소한 선물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성에게 주는 선물’로서는 남자 혼자서는 마냥 쉽게 고를 순 없는 아이템이긴 하다, 전반적으로 홀아비 냄새가 풀풀 나는 시호라면 특히나 상당한 노심초사를 동반했을 것이다.
다음 순간 루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시호의 말에 따르면 여자친구도 아니면서)밤에 수시로 벽 너머에서 교성을 들려주는 얼굴 모를 여자였다.
‘어휴, 말 그대로 저치 여자친구도 아니고 얼굴도 모르는 여자한테 뭘 전전긍긍하는 거지, 나.’
루나는 휙휙 고개를 젓고는, 애써 마음을 숨기고자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저씨 참 나이에 안 맞게 귀여우시네요. 그놈의 올 블랙 양복 패션만 찢어버렸어도 훨씬 괜찮았을 텐데.”
“역시 마음에 안 들었던 거구만.”
“관혼상제나 공식 석상 아니면 입지 않는 거로 해요. 그 위화감 이빠이인 올백 꽁지머리 유지할 거면 더더욱.”
자리에서 일어선 루나는 기어이 담아 두었던 독설을 톡 터뜨리고는 도망치듯 탁탁탁 빌라 입구로 뛰어갔다.
“선물 고마워요. 앞으로는 주말에 잘 부탁해요, 아저씨!”
“아, 루나 양 잠깐만요!”
시호는 다급히 일어서며 루나를 불러 세웠다. 루나가 뒤돌아보자 시호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하고 다녀요. 이제야 좀 본판이 사네.”
“뭐래요, 스윗 영서티가…! 주책이야!”
루나는 혀를 빼꼼 내밀고는 계단으로 올라가 이내 시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