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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Sep 15. 2024

피그마리온의 눈물 (6)

“어… 지수 씨? 이것도 충분히 많은데…”

“자, 이것도.”

시호는 눈앞의 식탁에 살짝 현기증이 났다. 고등어조림, 고등어구이에 고등어전까지, 김치와 동치미국물을 제외하면 온통 고등어 일색이었다. 게다가 고등어 반찬들은 예외 없이 고봉으로 쌓여 있었다. 당장 시호 앞에 덜어준 몫만 고등어 두 마리 분량은 되는 것 같았다.

“요즘 고등어가 제철이었나 봐요, 하하…”

“그냥 제가 먹고 싶어서 산 건데, 혹시 고등어 싫어하셨어요?”

“아니에요…”

혹시 모종의 악질적인 장난인가 싶어 시호는 지수의 표정을 뚫어지게 보았다. 지수의 표정은 여태까지 본 것 중 손에 꼽을 정도로 무감정했다. 먹고 싶어서 샀다는 고등어를 먹을 때조차.

“DHA는 선생님에게도 좋으니까 많이 드세요. 노화를 방지해 준다고 하잖아요.”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마음 써 줘서 고마워요.”

“…선생님은 오히려 너무 건강하셔서 문제지만요.”

“응? 방금 뭐라고 했어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시호는 고등어 뼈를 바르느라 지수가 일순 싸늘한 눈빛으로 중얼거린 말을 듣지 못했다. 지수는 어느새 빈 시호의 물잔을 다시 채워 주었다. “고마워요.” 시호는 지수를 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지수는 묵묵히 자기 앞의 대접을 비웠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고등어전을 집어 드는 시호를 보며 지수는 다시 입을 열었다.

“DHA를 많이 먹으면 뇌 기능이 활성화된다고 하던가요.”

“임상적으로 증명된 건 없다고 하지만요.”

“…하긴, 뇌를 더 잘 쓰는 것보다 엄한 데 뇌를 안 쓰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지수 씨, 혹시 요 근래에 불편한 일이라도 있어요?”

“아뇨.”

지수는 찝찝함을 감추지 못하는 시호를 내버려둔 채 무표정으로 2.5인분의 식사를 마저 먹었다. 시호는 필사적으로 원인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혹시 어제 끝까지 안 도와 주고 먼저 빠진 걸 마음에 담아 둔 건가? 그러나 그건 엄밀히 말하면 계약이 아닌 호의의 영역이다. 게다가 어쨌든 반 이상은 도와주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일에 대해선 철저한 지수가 그런 것으로 앙심을 품진 않을 것 같았다. 고생한다고 선물도 줬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선물이 문제인가? 향수를 별로 안 좋아하나? 아니면 마음에 안 드는 메이커였나? 그럼 그냥 안 쓰면 그만이지, 이렇게 틱틱거릴 일은 아닐 텐데? …정말 영문을 모르겠네.’

시호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자 동치미 국물을 쭉 들이켰다. DHA는 몰라도 고등어 두 마리 분의 포화지방은 입안을 느끼하게 만들기 충분했던 터라 목넘김이 시원함을 느꼈다. 지수는 여전히 무표정으로 시호의 국그릇을 다시 채워 줄 뿐이었다.     




3월 첫 주말, 춘계 시즌을 앞둔 마지막 연휴의 롯데백화점에서 을지로로 이어지는 명동 거리는 인산인해가 따로 없었다. 명동역 방면으로 가는 차량 행렬 중 한 대의 핑크색 롤스로이스는 여러 행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차 안 오디오에서는 에이브릴 라빈의 ‘Sk8er Boi’가 흘러나왔다. 서희는 옆에 주희를 태운 채 운전대 가장자리를 드럼처럼 두들기며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He was a skater boy ♪ She said, "See you later, boy" ♬ He wasn't good enough for her~”

“저기, 서희야? 운전할 땐 집중해야지?”

“괜찮아, 언니! 이 속도에 어떻게 사고가 나겠어? ‘아아, 보라! 이 거북이 같은 인간들을!’”

“말 좀 들어! 이런 데서 사고 나면 차 한두 대로 안 끝난다고! 어휴, 내가 면허가 없는 게 죄지!”

주희는 옆의 서희를 보랴, 전후방을 보랴,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차 뒷좌석에는 방금 막 백화점에서 쇼핑한 옷이며 신발들로 가득했다. 그 중 7할은 서희가 주희에게 사 준 것이었다. “얘, 나 이런 거 취향도 아니고 입을 시간도 없어.” 라고 한사코 사양하는 주희에게 서희는 “취향은 없다가도 생기는 거고, 낮에 식자재 사러 다닐 때라도 입으면 돼.” 하며 밀어붙였다.

“아무튼 제발 부탁이니까 좀 꾸미고 다녀, 언니. 가게일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그렇다고 여자를 내려놓고 사는 건 말이 안 돼. 언니는 여전히 꾸미면 누구보다 예쁘단 말이야.”

“어휴, 외국물 먹고 왜 한국어 립서비스가 늘었을까. 저걸 올해 다 걸쳐 볼 수나 있을지 모르겠… 서희야! 앞에 파란불! 파란불!”

삐익 삐익 하고 뒤의 차들이 시끄럽게 경적을 울려대자 서희는 “아, 참.” 하며 대수롭지 않게 액셀을 밟았다. ‘다음번엔 차라리 지하철이나 택시를 타자고 해야지…’ 서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굳게 다짐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서희는 짐을 전부 입구에 내팽개치고는 전기장판을 틀어놓은 이불이 깔린 거실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불 한구석에서 식빵을 굽고 있던 주희의 애묘 금희가 눈을 번쩍 뜨더니 이내 서희임을 확인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서희가 금희의 등을 만지작거리며 노는 사이 주희는 짐을 전부 안방에 들이고는 옷을 하나하나 꺼내 장롱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서희야, 커피 좀 끓여 줄래?”

“오케이~”

서희는 아쉬운 듯 금희를 조금 더 어루만지고는 부엌으로 갔다. 물주전자 옆의 통을 열어보니 원두 가루 여분이 하나도 없었다. 서희는 찬장에서 원두 봉지를 꺼내 그라인더에 붓고는 뚜껑을 닫고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갈갈갈 하고 원두 갈리는 소리가 나자 안방에 있던 주희가 말했다.

“역시 두 사람이 마시니까 빨리 줄어드네. 덕분에 팔 운동도 되고 좋지?”

“언니, 그러지 말고 그냥 자동으로 하나 사 준다니까?”

“멀쩡한 거 놔두고 필요 없다니까? 너 책상물림 주제에 그 정도 운동도 안 하면 나중에 골병 든다니까?”

주희의 완고함에 서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저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딱히 돈을 아끼느라 자동 그라인더를 안 사는 게 아님은 알고 있었다. 주희의 완력이라면 이런 건 힘을 쓰는 축에도 들지 않을 테니 말이다. 좀 귀찮을 뿐이지. 그렇다고 서희가 막무가내로 구입했다간 집주인의 허락도 없이 가전을 들였다며 쫓아낼 것이고, 자연스레 방배동에 있는 원래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원두를 다 갈자 때마침 전기포트의 물이 끓으며 툭 꺼졌다. 전용 용기의 거름망에 원두 가루를 붓고 이어서 뜨거운 물을 붓자 진한 원액이 플라스크 바닥으로 떨어졌다. 서희는 내용물을 컵 두 개에 나눠 부었다. 그리고 한 개는 우유와 설탕을 넣고 휘휘 저었다. 이윽고 주희가 방에서 나오자 서희는 원액만 담긴 컵을 살짝 밀어주었다.

“너 그럴 거면 그냥 믹스커피 사먹어. 이게 업자한테 부탁해서 구해 오는 귀한 커피에 무슨 짓이야.”

“뭐 어때, 맛있는 걸 더 맛있게 먹으려는 건데.”

“그걸 우리는 능욕이라고 하기로 했단다. 너 같은 앤 커피우유를 줘도 구별 못 해.”

주희는 핀잔과 함께 컵에 입김을 후후 불어 올라오는 향을 음미하고는 홀짝거리기 시작했다. 서희는 충분히 식은 카페오레(설탕 1큰술 첨가)를 아주 맛있게 꿀꺽댔다.

주희는 그런 서희의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부친을 여의고 줄곧 혼자 살아왔지만 사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식탁이 마냥 쓸쓸하지만은 않았다. 십 년 전, 부친상을 치르고 한동안 가게를 닫고 집에서 혼자 울적하게 지낼 때, 후배 세 명이 매일같이 찾아와 술 먹자니, 밥 해달라니 귀찮게 한 덕에 금세 털어내고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매일 외상을 달고 다니던 남학생, 그 손놈의 외상값을 늘 남몰래 내주던 여학생, 꼭 혼자 올 땐 주문 마감 30분 전에 와서 맥주 하나 시켜놓고 한 시간 동안 글 쓰다 가는 여학생…

그날을 계기로 셋 중 아무도 이 집에 얼굴을 들르는 일은 없게 되었다. 남학생만이 종종 꾀죄죄한 몰골로 가게에 들러 여학생이 혼자 앉던 자리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맥주를 마시고 힘없이 돌아가곤 했다. 그 원인 제공자는 지금 눈앞에서 설탕이 둥둥 떠다니는 커피맛 단물을 절찬리에 흡입하고 있었다. 주희는 처음엔 이해하려 노력했고, 이윽고 원망했고, 결국은 서서히 잊어갔다. 아니, 잊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서희를 다시 만났을 때 잠시 고개를 쳐들던 원망이 다른 사람을 위한 게 아닌 자신을 위한 것뿐임을 깨닫고는 생각을 바꾸었다.

‘나까지 얘를 내치면… 아니, 내가 얘까지 내치면 정말 아무도 안 남으니까.’

주희는 서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까지도 부어 있던 뺨은 이제 흔적도 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뺨이 빨갛게 부어 온 날, 서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이불 속으로 숨었다. 밖으로 나온 주희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오랫동안 교류가 없던 번호 하나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서희를 만났냐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수화기 너머 빛나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언니, 시호 선배를 위한다면 그 여자 단속 잘 해요. 이 동네에서 그 여자 돌아다니는 거 눈에 띄면 언니고 뭐고 절교예요. 알겠어요?

오랜만에 듣는 빛나의 목소리는 주희가 알던 다정함과 배려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주희가 뭔가 말을 하기도 전에 빛나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날 이후 어제까지 서희는 말 한 마디 없이 집에서 노트북으로 글만 쓰다가 오늘 아침 갑자기 쇼핑 얘기를 꺼내며 같이 가자고 한 것이다. 주희로서는 서희 자신이 기분전환의 계기를 마련한 마당에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그 마이페이스가 운전에까지 적용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저기, 서희야.”

“…응?”

“…아냐, 아무 것도.”

서희는 피식 웃으며 남은 커피를 쭉 들이붓고는 컵을 들고 싱크대로 향했다. 주희는 시호 얘기를 하려다가, 그가 얼마 전 서희와 똑 닮은 미녀를 데려와, 그 치고는 꽤 솔직한 얘기까지 꺼내고, 만취 상태로 그 미녀에게 부축 받아 돌아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예전이었다면 시호의 주소도 알고 있겠다, 바로 아침에 쳐들어가서 진상을 파악했겠지만, 문득 자신과 시호 그리고 빛나의 관계가 더 이상 스스럼없이 그런 사생활을 공유할 만큼 여전히 친근하진 않음을 상기하고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아는 한 시호와 빛나가 그리 쉬이 서로가 실망할 행동을 할 관계도 아니었다.

빛나가 말하는 대로 서희가 한국에 있는 동안은 조금이라도 시호와의 접점을 만들지 않는 게 나을 것이다. 간신히 각자의 일상을 회복한 마당에 굳이 이제 와서 옛 추억을 환기할 필요도 없을 테니 말이다.

‘너희 둘 어느 쪽을 위해서도 말이지…’     




수요일 7교시부터 8교시, 1문과대학 208호. 이번 학기에 국문학박사 황빛나의 《문학 비평 및 토론》 강의가 있는 시수와 강의실이다. 교양 강의이면서도 가장 빨리 수강신청이 마감되는 인기 과목 중 하나로, 루나는 운 좋게 스물다섯 명 안에 들 수 있었다.

소문에 따르면 과제가 일절 없고, 출석도 랜덤하게 부른다고 한다. 대신 수업 중 발표 점수의 비중이 크고 기말고사로 수업 중 다룬 작품 하나와 학생 자신이 개인적으로 읽은 작품 하나의 비평문을 A4용지 네 쪽 분량으로 작성해야 한다. 기말고사를 치른 주말에는 수강생 전원에게 식사를 사 주거나, 영화를 보여주거나, 여름에는 수영장에,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에 데려갔다고 한다. 그것도 전부 빛나의 자비 부담으로.

특히 남학생들의 경우 자신의 선배들에게 ‘검스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니는 G컵 미녀 강사가 두 시간 내내 학생들 사이를 걸어 다니는 수업’이란 말을 듣고 기대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예전의 루나였다면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학과 선배들처럼 “박사면 못해도 서른 언저리일 텐데 그렇게 분 냄새 풍기고 싶나”라는 말에 내심 수긍했겠지만, 머리띠를 벗고 고데기로 머리에 웨이브를 넣고, 콘텍트 렌즈를 끼고 검은 스타킹을 드러낸 반바지를 입고 학교에 온 시점에서는 더 이상 그럴 면목이 없었다.

오후 3시 정각이 되자 문이 열리고 숄더백을 멘 빛나가 강의실로 들어왔다. 남학생들 사이에서 “와…” 하는 탄성이 터졌다. 윤기 나는 단발에 새하얀 얼굴, 하나하나가 공예품 같은 이목구비, 터질 듯한 가슴을 감싼 하얀 블라우스, 와인색 미니스커트 밑으로 드러난 검은 스타킹이 여과없이 드러내는 육감적인 다리, 10cm 가까이 될 법한 아찔한 킬힐 구두까지, 가히 걸어 다니는 섹스어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왼팔 소매 너머로 나온 붕대를 감은 손 정도는 상쇄하고도 남았다.

교탁 앞에 선 빛나는 “그래도 첫 시간에는 얼굴이랑 이름을 알아야죠?” 하며 학생 전원에게 A4 용지를 한 장씩 나눠 주었다. 수업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예상한 학생들은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빛나가 입을 열자 강의실은 일제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이십 분, 시도 좋고, 소설도 좋고, 수필도 좋고, 그림일기도 좋고, 그냥 그림만 그려도 좋고, 뭐든 좋아요. 그 종이 안에 여러분이 표현하고픈 걸 전부 표현해서, 사진으로 찍어서 여기 제가 빔에 띄운 폼 주소로 보내주세요. 그리고 학생 전원의 결과물을 보며 당사자를 제외한 학생들이 비평하는 시간을 가질 거예요. 좋은 비평을 한 학생에게 더 많은 점수를 주겠어요.”

학생들은 서로 마주보거나 빛나를 보며 표정과 눈빛으로 무언의 볼멘소리를 냈다. 빛나는 책상 사이를 걸어 다니며 이어서 말했다.

“이렇게 묻고 싶겠죠? ‘왜 오리엔테이션을 안 하냐’고. 매주 어떤 내용을 다룰지, 평가 방법과 반영 비율이 어떻게 되는지는 전부 강의계획서에 써 놨으니까요. 물론 오늘 이런 걸 할 거라곤 안 써 놨어요. 그랬다간 다들 창피 당하기 싫어서 철저히 준비해 왔을 테니까요.”

여전히 학생들은 불만의 눈초리를 보냈다. 빛나는 어느새 루나가 앉아 있는 줄 오른쪽까지 와 있었다.

“네. 몇몇은 눈치 챘겠지만 이건 여러분이 다음 주부터 본격적으로 비평하고 토론하는 활동을 하기 전에, 비평 받고 토론의 대상이 되는 체험을 하며 조망수용 능력을 환기시키고자 함이에요. 여러분은 언젠가 각자의 일에서 소위 경력자 내지 전문가의 반열에 오를 것이고, 여러분의 지식과 능력을 해당 분야를 모르는 일반인과 비전문가들에게 빈번히 평가받게 될 거예요. 그리고 여러분은 겸허히 그것들을 감수해야 하고요. 제가 좋아하는 어떤 애니메이션에 이런 대사가 있어요.”

학생들의 머릿속에는 ‘속았다’ 세 글자가 떠올랐다. 아마 이 수업은 매번 이렇게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소문이 나지 않은 건 그만큼 빛나의 나머지 수업이 만족스러웠거나, 수강생들이 자기만 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함구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빛나는 루나 옆에 멈춰 서서는 책상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한껏 깔고 말했다.


“‘총을 쏠 수 있는 사람은 총에 맞을 각오가 된 사람뿐이다’, 그럼 시작!”


학생들은 단념한 듯 제각기 손에 펜을 쥐고 머리를 싸매기 시작했다. 빛나는 교탁으로 돌아가려다가 뒤돌아서서는 몸을 숙여 루나의 손목에 남아 있는 향수 냄새를 맡았다.

“학생도 이거 쓰는구나. 반갑네?”

빛나가 속삭이듯 묻자 루나는 마지못해 “네…”라고 대답했다. “음…” 빛나는 뜸을 들이더니 다시 루나에게 속삭였다.

“혹시 남자한테 받은 거야?”

루나는 순간 속으로 뜨끔하며 슬쩍 빛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짐짓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눈에서는 어딘가 탁한 집요함이 느껴졌다.

“아뇨, 제가 예전부터 애용하는 거예요.”

“그래요… 알았어요.”

빛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교탁으로 걸어갔다. 눈앞의 종이에 온 정신을 집중하던 학생들은 아무도 빛나의 표정이 살벌하게 표변한 걸 알아채지 못했다. 빛나가 루나의 옆을 스쳐지나갈 때 자신과 똑같은 향수 냄새가 나서 물어볼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았다. 그런데 루나가 입을 열자 희미하게 난 담배 냄새를 맡았을 때, 내심 흠칫하며 다시금 입을 열게 유도해 재차 확인하자, 빛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루나 역시 빛나가 같은 향수를 쓴다는 사실과 그에게서 나는 결코 모를 수 없는 냄새에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고동쳤다. 눈앞에 마주한 백지에서 시호와 격렬하게 몸을 섞고 있는 완연한 여자의 얼굴을 한 빛나가 보였다. 펜이 꺾일 듯 주먹을 불끈 쥔 채 눈에서 불꽃을 일으키며 루나는 빛나와 똑같은 두 어절을 떠올렸다.

‘에쎄 아이스…!’     


이십 분이 경과하자 빛나는 자신의 폼 계정을 화면에 띄워 제일 먼저 올라온 그림 파일부터 하나씩 열어 학생들의 비평을 시작시켰다. 누구는 오늘 먹은 아침 식사를 소재로 시를 썼고, 누구는 등굣길의 혼잡함에 대해 일본어로 하이쿠를 썼다. 누구는 4컷 만화를 그렸고, 누구는 유명한 노래의 가사를 자신의 입장으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

다양한 포맷이 등장했지만 학생들은 정작 비평보단 진부한 표현으로 치장한 호평 일색이었다. 그야 그럴 것이다. 과와 학년은 다를지언정 한 학교에서 어떻게든 마주칠 사람들인데, 서로 이 자리에서의 발언에 앙심을 품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면서 후환을 남길 배짱이 쉽게 나오겠는가. 빛나도 보다 못해 말했다.

“이런 자리에 신사협정은 없느니만 못하거든요? 자기 바로 옆의 학우와 부딪칠 용기도 없으면서 어떻게 사회에서 싸워나가려고 그래요?”

그러나 어디든 세상에는 예외가 있는 법이다. 한 남학생은 빛나를 처음 봤을 때의 이성적 끌림을 꾸덕함이 느껴지는 리비도를 포함해 수필로 묘사했다. 남학생들은 몇몇은 용자를 마주한 듯 전율에 몸을 떨었고, 나머지는 그저 기가 차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학생들은 예외 없이 경멸의 눈초리를 보낼 뿐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해 한 학생은 손을 들고 일어나 작품의 내적 측면 및 외적 측면에서 전방위적인 비난을 가했다. 비난을 받는 당사자는 그저 자신은 떳떳하고 할 말을 다 해 만족스럽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제가 원한 게 바로 이런 거예요. 오늘 처음 본 강사를 소재로 이렇게 거침없이 표현하는 패기, 그걸 바로 면전에서 까는 패기! 오늘 최고 점수는 이 두 사람입니다. 자, 박수!”

격찬과 함께 빛나가 솔선해서 박수를 치자 학생들은 마지못해 하나둘 따라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즈음 루나는 간신히 펜을 놓고는 서둘러 완성된 종이의 사진을 찍어 폼에 업로드했다.

빛나는 폼에 올라온 파일의 작성자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꽤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시호는 그 노래를 하루도 빠짐없이 들었던 시기가 있다. 작곡가이자 작사가의 특이한 이름 역시 어지간하지 않으면 잊어버릴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가 제출한 포맷은 결코 동명이인이 아님을 확신시켜 주는 중요한 단서, 아니 도발이었다. 빛나는 가까스로 침착함을 되찾고 말했다.

“자, 마지막으로 23학번 한루나 학생. 무려 오선지를 직접 그려 작곡을 해 줬어요. 손품 좀 들였겠는데요? …근데 악보만으론 이걸 연주했을 때 어떻게 들리는지 우리는 알 수 없거든요.”

“…”

“루나 학생에겐 선택과제로 이 악보를 구현한 음원을 제출하도록 하겠어요. 과제를 해 온다면 발표 점수를 주겠어요. …이의 있는 학생?”

학생들은 묵묵부답으로 빛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빛나는 교탁을 오른팔로 짚고 상체를 앞으로 바짝 숙였다. 블라우스를 팽팽하게 부풀린 가슴이 한층 더 부각되었다.

“그럼 없는 것으로 알고…. 루나 학생, 하나만 질문할게요. 이 곡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썼죠?”

루나는 몸을 세우고는 올곧은 눈으로 빛나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에서는 빛이 나고 있었다.

“짝사랑하는 사람을 잊을 수 없는 애달픔을 담았습니다.”

“오~”

루나의 말에 학생들은 예외 없이 감탄하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남녀를 막론하고 강의실의 모두가 루나의 용기와 감정에 응원의 의사를 보내는 와중 단 한 사람, 빛나만은 뒤돌아서서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간신히 표정관리를 마친 빛나는 학생들에게 돌아서며 말했다.

“루나 양의 진심이 담긴 곡을 기대하겠어요. 그럼 오늘 강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학생들은 제각각 따로 노는 인사와 함께 가방을 들고 강의실을 우르르 나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강의실에는 단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루나는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교탁 앞의 빛나에게 다가갔다. 1m 거리에서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일었다. 빛나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루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키가 아담해서 귀엽네, 선배랑 나란히 서면 화목한 부녀지간으로 보이겠어.”

“괜찮아요. 얇은 옷 입으면 아무도 그렇게 안 볼 테니까요.”

루나는 니트 속에 가려진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과연 키에 비하면 나이에 맞는 볼륨은 있었지만 몇 십 미터 밖에서도 알아볼 수 있는 크기의 빛나에 비하면 택도 없었다. 빛나는 코웃음을 쳤다.

“왕년의 천재가 임자 있는 남자나 노리는 도둑고양이가 되다니 서글픈데?”

“딱히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 안 하고요, 선생님도 여자친구는 아니라면서요. 말도 안 되는 인신공격은 삼가주실래요?”

“여자친구 ‘따위’가 아니라고 한 거란다. 네가 비익연리란 곡을 쓸 때 우린 이미 오래 전부터 비익연리 자체였거든.”

“그래요? 전 아저씨한테 그런 얘긴 못 들었는데요?”

“섹스도 안 해 본 젖비린내 나는 어린애랑 좀 놀아준다고 그런 얘기까지 시시콜콜 해 주겠니?”

“하! 섹스로 간신히 좋아하는 남자의 연민을 사 놓고 으스대는 주제에 학생들 앞에서 그 센 척을 다 한 거예요?”

“이게…!” 빛나는 오른손으로 루나의 멱살을 잡았다.

“뭐, 왜, 뭐…!” 루나 역시 양손으로 빛나의 멱살을 잡았다.

“내가 너 같은 꼬맹이가 좁쌀만큼이라도 부러운 줄 알아? 선배의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같이 아팠던 적도 없는 주제에!”

“그래서 이해하고 싶고, 같이 아프고 싶은 거야! 당신만이 아저씨를 이해할 수 있고 같이 아파할 수 있다는 생각이라도 하는 거야? 그걸 오만이라고 하는 거야!”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멱살을 잡은 채 으르렁거렸다. 바짝 올라 있던 열이 점차 식자,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놓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루나는 가방을 가지러 책상으로 돌아갔다. 빛나는 루나의 등에 대고 차분함을 가장한 채 말했다.

“나쁜 말은 안 할게. 단순히 나이 차이만 큰 게 아냐. 자기가 짊어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달프게 살고 있는 사람이야. 너무 깊이 파고들어가서 앞으로도 같이 고달플 수밖에 없는 건 나 혼자로 충분해.”

빛나의 말은 단순히 연적을 떨쳐 내기 위한 엄포만이 아니었다. 루나는 빛나를 등진 채 잠시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이윽고 돌아서서 빛나를 바라보는 루나의 얼굴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선생님, 세 가지만 말할게요.”

“…”

입을 굳게 다문 채 자신을 바라보는 빛나에게 루나는 검지를 펴 보이며 말했다.

“첫째, 예술가에게 고난만큼 영감을 주고 열정을 불태우는 건 달리 없어요. 아저씨를 사랑해서 아저씨의 고난을 마주하는 게 불가피하다면, 기꺼이 손을 잡아 줄 거예요.”

루나는 중지를 펴 보이며 말했다.

“둘째, 말씀하신대로 전 처녀예요. 일 학년 때 나름대로 다가오는 남학생들은 있었지만 하나같이 절 세상 물정 모르는 맹순이로만 보고 어떻게든 한번 자 볼 생각만 가득한 얼간이들이었거든요. 하지만 아저씨라면 기꺼이 제 처음을 바칠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루나는 약지를 펴 보이며 말했다.

“셋째, 아까 거짓말한 게 있는데요, 향수, 남자한테 받은 거 맞아요. 그 사람은 제 옆집에 살고, 얼마 전까지 저와 같은 담배를 피웠었고, 저처럼 달을 보는 걸 좋아하고…”

“…”

“…저의 뮤즈고, 저의 어둠이고, 저의 빛이에요. 그 사람의 이름은 정시호예요. 그럼 다음 주에 봬요.”

루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뒷문을 열고 사라져 갔다. 빛나는 루나가 사라진 쪽을 노려보며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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