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의 늦은 저녁, 블라우스에 스커트 차림의 여자가 한 손엔 서류가방, 다른 한 손엔 찬거리가 든 에코백을 들고 빌라의 계단을 올랐다. 4층까지 걸어 올라간 여자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익숙하게 문 열쇠구멍에 꽂고 돌렸다.
집 안을 들어서자마자 음식 썩은 냄새와 화장실 냄새, 땀 냄새 등의 악취가 한데 섞여서 코를 찔렀다. 개수대에는 먹고 나서 물도 붓지 않은 그릇들에 파리가 꼬여 있었고, 여기저기에 배달 봉지가 어지러이 흩뜨려져 있었다. 화장실 변기에는 음모와 똥 찌꺼기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비누와 칫솔은 언제 마지막으로 쓴 건지 물기 하나 없었다.
여자는 대수롭지 않은 듯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집 안을 훑어보고는 마지막으로 서재의 방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나는 악취는 마치 방치된 지 오래된 무수입 독거노인의 생활공간의 그것을 방불케 했다. 책상과 침대 틀에 쌓인 먼지, 머리맡 근처에 잔뜩 쌓인 빈 술병과 과자 껍질, 환기를 전혀 안 한 채 담배를 피우느라 방 밖에 비해 상대적으로 누런 벽지… 그 한가운데에 남자가 이마 위만 빼꼼 내민 채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있었다.
여자는 며칠을 안 감았는지 기름기가 번들번들한 남자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었다. “일어나. 청소 하고 나서 같이 저녁 해서 먹자.” “으으음… 머리가…” 이불 속에서 남자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여자는 가볍게 웃으며 손가락에 힘을 꾹꾹 주어 두피 마사지를 해 주었다.
“누가 나 없이 이렇게 많이 자작하라고 했어? 빨리 깨끗이 씻어.”
여자는 남자를 억지로 일으켜 옷을 하나하나 벗겨주고는 욕실로 떠밀었다. 그리고는 모든 방문과 창문을 열고, 앞치마를 걸치고는 능숙하게 집안 청소를 시작했다.
널려 있는 쓰레기를 전부 모아 분류하고, 밀린 설거지를 하고, 바닥을 청소기로 돌리고, 걸레로 닦았다. 행주를 빨아 손이 닿을 만한 곳을 전부 닦고, 화장실에 락스를 도포해 수세미로 타일이고 변기고 할 것 없이 문질렀다. 침대에 있던 이불을 옥상에 가져다 널고 새 이불을 꺼내 방향제를 뿌렸다.
한편 문이 닫힌 욕실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여자는 남자를 씻겨주고자 옷을 전부 벗고는 수건 한 장으로 앞만 가린 채 욕실 문을 열었다. 여자의 예상대로 남자는 그저 욕실 의자에 쭈그려 앉아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샤워기를 틀어 남자의 몸을 적시고는 비누 거품을 낸 거품 타월로 남자의 몸 구석구석을 문질렀다. 자신보다 덩치가 훨씬 큰 남자를 씻기고자 여자는 몸을 바짝 밀착했고, 자연스레 여자의 손끝과 더불어 수건 너머 육감적인 가슴과 허벅지가 남자의 몸을 엄습했다.
남자는 말없이 앞을 가리려 했으나 해면체에 피가 몰려 만전 상태가 되자 손으로 가리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남자 자신도, 이를 본 여자도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여자는 모른 체 하며 남자의 긴 머리를 감기고, 면도와 양치까지 끝마쳤다. 연일 폭연과 폭음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도 해면체는 여전히 건강한 상태였다.
여자는 얼굴을 돌린 채 수건으로 남자의 머리의 물기를 꾹꾹 짜 주고는 “몸은 혼자서 닦을 수 있지? 덕분에 아직 도마도 못 꺼냈네. 갈아입을 옷은 문 앞에 놔뒀어.” 란 말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남자가 불쑥 손을 뻗어 여자의 팔뚝을 잡았다.
“서, 선배?”
“….”
당황한 여자는 팔을 빼려다가 문득 자신을 올려다보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를 본 여자는 그것이 일찍이 자신에게 향한 적 없는 ─ 늘 그가 다른 사람에게 그런 눈길을 주는 것을 옆에서 바라보기만 할 뿐인 ─ 눈길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그의 눈에 비치고 있는 사람이 결코 자기가 아니란 사실도.
이 사람이 진정 원하는 건 그 원망스러운 여자가 자신의 곁에 있다는 감각이다. 자신이 아는 이 사람은 아무리 절박하더라도 눈앞에 있는 자신을 마음 속 깊이 다른 사람에 이입해 대할 정도로 자기기만이 능숙하지 않다. 즉 이것은 이 사람이 활력을 얻기 위해 자신에게 맞춰 달라고 응석을 부리는 필사의 몸부림이었다. 지금 이 사람을 거부하면 그는 더더욱 스스로에게로 고립되어 버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여자는 다시 조심스레 앉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의 입술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흐읏, 흐읏, 서희야! 왜 떠난 거야, 서희야…!”
“시호야! 아앗, 아앗! 괜찮아, 시호야! 나 여기 있어! 절대로 안 떠날 거야! 아아앗!”
욕실에서 시작된 정사는 어느새 방 안으로 옮겨가, 자정이 넘어가도록 두 사람은 허기도 잊고 격렬하게 몸을 섞고 있었다. 남자는 눈앞의 여자가 아닌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면서도 허리의 움직임을 쉬지 않았다. 여자는 생전 처음 겪는 살을 찢는 아픔과 뒤이은 하복부의 쾌락, 마침내 좋아해 온 사람과 이어졌다는 기쁨과 그가 진정 원하는 대상이 결코 자신이 아니라는 비참함이 한데 섞여 뇌가 통째로 펄펄 끓는 유열의 탕에 담긴 감각에 몸부림칠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잊지 않고 남자를 자신이 한 번도 부른 적 없는 방식으로 부르며, 풍만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게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시 일어서고 싶어 소중한 사람을 상처 입히고, 다시 일으키고픈 소중한 사람에게 기꺼이 상처를 입은 그날 밤부터, 오랜 친구였던 두 사람의 관계가 조금씩 변해가리라곤 아직 그들은 예상할 수 없었다.
동이 트기 시작하자 먼저 눈을 뜬 건 남자였다. 그는 자신을 품에 안은 채 잠든 여자의 눈가에 맺힌 눈물 자국을 손을 들어 닦아 주었다. “으음…” 여자는 잠든 와중에도 기분 좋은 듯 얼굴을 들이밀었다. 남자가 몸을 빼려 해자 여자는 “으으응…!” 하고 칭얼거리며 남자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간신히 몸을 빼 침대에서 나온 남자는 자신의 고간에 불그스름한 게 말라붙어 있는 걸 발견했다.
남자는 잠들어 있는 여자를 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곧바로 책상 앞에 앉아 스탠드와 노트북을 켜고, 한편에 쌓여 있던 출판사 이름이 찍힌 봉투 하나를 찢어 책을 꺼내 독서대에 고정했다. 그 눈은 더 이상 연인에게 버림받아 실의에 빠진 폐인의 눈이 아니었다.
“허억, 허억…”
막 떠오른 해가 동네를 비출 무렵, 시호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일과인 러닝을 하고 있었다. 오래 뛰다 보면 생성되는 엔돌핀은 뇌를 자극해 정서를 어느 정도 환기시켜 주었다. 이따금 꿈에서 옛날 일을 보고 난 아침에는 눈을 뜨자마자 우울감과 허무감 같은 감정들이 온몸을 엄습하곤 했다. 그럴 땐 어떻게든 의욕을 쥐어짜서 옷을 갈아입고 밖에 나와서는 이런 식으로 무작정 달렸다. 그대로 누워 있어봤자 그날 하루의 리듬이 전부 깨질 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과거를 완전히 외면하기 위함이 아니다. 애초에 외면하고 싶다고 외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분명히 일어난 일이고, 현재는 어느 정도는 그 결과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제 와서 되돌리거나 보상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현재에 충실하며 홀로서기를 하는 것 정도이다.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 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를 위해서 오늘 시호는 하기로 한 일이 하나 있었다.
“선생님, 그건 진짜 아니에요. 제자리에 갖다놓으세요.”
“아이, 괜찮아요. 기왕이면 좋은 고기 쓰면 좋죠.”
“어차피 이거저거 묻혀서 튀기면 별 차이도 없어요. 애초에 등심은 지방이 적은 게 포인트인데 지금 들고 있는 거 보세요. 가격은 두 배 가까이 비싼데 하얀 지방질도 두 배잖아요.”
집에서 이십 분 거리에 있는 마트의 정육 코너 앞에서 시호와 지수 두 사람은 돈가스 고기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코너 점원은 시호의 손에 들린 한돈 등심을 빼앗으며 말했다.
“장사 생각하면 이러면 안 되는데, 우리 아가씨가 너무 똑소리 나서 내 양심을 괴롭히네. 사장님, 여기선 그냥 곱게 아가씨 말 들어요.”
“아니, 이모! 제가 한돈 먹고 싶다는데 왜…”
“응, 난 주기 싫어요. 포기하고 여기 수입산 등심 들고 얼른 가셔! 아가씨, 원래 한 시간 후부터 할인인데 이건 지금 그냥 깎아 줄게!”
“와, 감사합니다! 자주 올게요!”
시호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점원은 새로 출력한 태그를 지수가 고른 포장 등심에 척 하고 붙였고, 지수는 냉큼 그걸 챙겨서 장바구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좀처럼 단념하지 못하는 시호의 팔짱을 끼고 우격다짐으로 계산대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시호는 못내 아쉬운 듯 말했다.
“그래도 내가 직접 요리해 주는 건데, 최대한 맛있는 재료로 만들어 줘야죠.”
“허세 부리지 마세요. 벌면 얼마나 많이 버신다고. 제가 평소에 이 음식 저 음식 척척 해드리면서도 얼마나 값 싸고 좋은 재료를 고르느라 머리 싸매는지 아세요?”
“그 중 2/3은 지수 씨가 먹는다는 것도 알죠.”
“제 월급이니까요. 계약서에 도장 찍으셨잖아요, 벌써 잊으셨어요? …응?”
지수는 갑자기 휙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건 방금 전의 호탕한 정육 코너 점원뿐이었다. 지수가 뒤쪽을 두리번거리는 걸 보며 시호는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웠다.
“무슨 일 있어요?”
“아뇨…, 기분 탓인가…”
“얼른 계산하고 나가죠. 돌아가면서 할 얘기도 있고요.”
이번엔 시호가 지수의 손을 잡아끌며 재촉했다. 지수는 여전히 방금 전 시선을 신경 쓰면서도 시호를 따라 발걸음을 서둘렀다.
돌아가는 길에 있는 작은 공원의 놀이터에는 몇몇 아이들이 그네를 타거나, 시소에 쪼그려 앉아 위험한 장난을 하거나, 미끄럼틀을 거꾸로 내려오며, 저녁을 먹으러 집에 들어가기 전 하루의 마지막 야외 활동을 즐기고 있었다.
“아까 하던 얘긴데… 지수 씨가 아니었으면 절대로 그만큼의 분량과 깔끔함을 낼 수 없었을 거예요.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어휴, 그냥 돈 받고 일 열심히 한 게 다예요. 갑자기 분위기 잡지 마세요, 무섭게.”
시호와 지수는 공원 부지 한편의 벤치에 나란히 앉아 오랜만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거의 주말도 없이 둘이 식사를 하며 나누는 가벼운 담소를 제외하면 집에 함께 있는 시간 내내 각자 번역 작업과 집안일/소설 집필로 얼굴을 마주할 틈도 없었다. 그러다가 점점 팀워크와 능률이 올라가며 낮에 운동을 할 여유도 생겼고, 이렇게 저녁식사 전에 같이 장을 볼 여유도 처음으로 부리게 되었다.
“앞으로는 저녁 되기 전에 퇴근해요. 주말엔 나오지 말고. 월급은 그대로 줄게요.”
“…네?”
시호는 언제부턴가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지수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재다능한 재원이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이해력과 초벌 작업물만 봐도 엿볼 수 있는 풍부한 어학 지식, 가사 만능에 발군의 운동신경, 그리고 견줄 사람이 거의 없을 미모까지, 아마 마음만 먹으면 자신이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이런 고용주와 골방에서 번역에나 매달리며 부엌데기 노릇이나 하지 않고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수가 곁에 있어 주는 지금의 일상은 순전히 그의 호의에 기반을 둔 것이다. 지수가 왜 자신에게 이런 호의를 베풀어 주고 있는지는 시호는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호의를 받는 것을 실감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보은은 어디까지나 감사함을 잊지 않고 오늘을 열심히 사는 것이다.
“그리고… 여름이 되기 전에 정말로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요. 나도 도와줄 테니까.”
그리고, 그 사람이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등을 떠밀어 주는 것.
창백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지수를 돌아보며 시호는 이어서 말했다.
“냉정하게 얘기할게요. 전업 번역가로서 나는 굉장히 운이 좋은 편이에요. 대단한 네임밸류도 없이 많은 분량의 까다로운 텍스트를 기한 맞춰서 번역해 준다는 점 하나로 십 년 가까이 일감이 끊이지 않았고, 담배까지 피우며 그 많은 분량을 작업하면서도 건강 문제로 일을 못하게 되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나도 이제 슬슬 나이가 있어 체력도 예전 같지 않고, 그게 아니라도 일을 주던 출판사가 망하거나 방향성을 바꾸면 그날로 실직자예요.”
“…그럴 수가, …만약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을 하시려고요?”
“뭐, 이 나이 먹도록 회사 같은 조직 생활을 해본 경험도 없고, 머리에 든 건 이 업계 밖에선 일절 써먹을 수 없는 것들뿐이니, 공장 일을 하든, 국비교육 받고 현장일을 하든 해야겠죠. 어떻게든 내 한 입 풀칠 못 할까 봐요. …하지만 지수 씨는 아직 나이도 젊고, 할 줄 아는 것도 많으니, 나와 같은 길을 가긴 일러요. 애당초, 그렇게 될 리도 없겠지만. …아, 내가 비밀 하나 말해줄까요?”
“…선생님.”
“내가 계속 메일로 한번 만나자고 한 거, 사실은 번역 일을 정리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얼굴이나 보고 훈훈하게 마무리할 생각이었어요.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요.”
시호는 눈을 감고 목을 뒤로 젖히며 후우 하고 숨을 내뱉었다. 지수가 중얼거렸다.
“…생각은 없으신 건가요?”
“음? 뭐라고 했어요?”
“글로 먹고 살 생각은 없으신 거냐고 했어요…!”
지수의 목소리가 커지자 시호는 순간 움찔했다. 지수는 벌떡 일어나 시호 앞에 섰다.
“공장 일이니 국비교육이니 현장일이니… 그런 건 아무나 하는 줄 아세요? 선생님처럼 덩치만 크고 빠릿빠릿하지 못하고 손이 서툰 사람은 다른 거 못해서 결국 무거운 거나 메다가 골병들기 딱 좋거든요? 어딜 만만히 보고 태평한 소리나 하시는 거예요?”
“그걸 지수 씨가 어떻게 알…, 아니, 그거 말고 더 앞에 뭐라고…”
“왜 본인이 좋아하는 걸, 잘 하는 걸 내세울 생각을 안 하는 건가요? 그러면서 저보고는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고요? 인지부조화도 정도껏 하세요!”
“아니, 지수 씨 지금 너무 흥분한 것 같은데 일단 진정 좀…”
“빨리 소설을 완성해서 발표하라고요! 십 년 전처럼!”
지수의 쩌렁쩌렁한 외침에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은 일제히 이쪽을 돌아보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었는지 아이들은 반대편으로 하나둘 공원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당혹감이 가득하던 시호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
“…내가 소설을 썼단 얘기를 한 마디라도 지수 씨에게 했던가요?”
“…역자 약력에 출신 학교가 당당히 적혀 있는데, 한 번도 검색을 안 해 봤을 거라 생각하세요?”
“‘빨리 소설을 완성’하라는 건 내가 지금 쓰고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들리는데… 내 책상을 뒤진 거예요?”
“…그래요.”
시호는 한동안 자신을 내려다보는 지수와 말없이 마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오른손으로 이마를 탁 짚으며 “…그런 거였나.”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흥분이 가라앉은 지수는 시호의 양 어깨를 붙들며 말했다.
“선생님, 죄송해요. 제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을 했는지 잘 알고 있어요. 어떻게든 곁에서 도와드리고 싶다는 명분으로 선생님의 호의를 이용해서…”
“…”
“제가 꼴 보기 싫으시면 당장 내일부터 그만둘게요. 지금까지 받은 돈도 전부 다시 돌려드릴게요. 그러니까 제발… 글 쓰는 걸 멈추지 말아주세요.”
지수의 눈에서는 비죽비죽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시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양 엄지로 지수의 눈가를 훔쳐 주었다.
“…됐어요. 이제 와서 싫다고 쳐내기엔 더 이상 지수 씨를 놓을 수 없는 몸이 되었는걸요. 이제라도 알게 되어서 한편으론 속이 후련하네요.”
“흐윽…”
시호는 울먹이는 지수를 살며시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해 두죠. 본인은 모르겠지만, 오늘 지수 씨가 나한테 한 일은 꽤 잔인했어요.”
“…!!”
“그러니까 지금 지수 씨가 내 앞에서 흘리는 눈물로 상쇄한 셈 칠게요.”
“…흐아아아아앙…!”
둘만 남은 공원에서 지수는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시호의 품에서 원 없이 울었다.
…둘을 나무 뒤편에서 지켜보던 누군가가 주저앉아 입을 틀어막고 있던 것도 모르고.
“언니, 여기 맥주 두 병만 더요! 아, 파무침도 추가요!”
“오냐~!”
가게는 평일 7시밖에 안 되었는데도 벌써 여섯 팀 째 손님을 맞고 있었다. 주희는 양손에 쟁반을 들고 날렵하게 주방과 테이블 사이를 왕복했다. 이 정도로 손님이 많으면 파트타임 한 명쯤은 쓸 법도 한데 주희는 한사코 혼자서 일하길 고집했다.
주변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 이상은 주희의 건강을 생각하며 “쉬어가면서 하라”는 충고를 했지만, 주희는 그럴 때마다 일관되게 대답했다.
-내가 썩어도 준치라고 아직은 어지간한 남자애들 이상으로 날아다녀. 정 힘들어지면 가게 팔고 지금까지 모은 돈 쓰면서 여생은 편하게 보낼 거니까 걱정들 마셔.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였다. 주희는 가게에서 일할 때가 좋았다. 몸을 계속 움직이고, 자주 오는 학생들의 이름을 외우고, 내심 그들을 후배로 여기며 적당한 선에서 정을 주다 보면 만성적인 외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집에 돌아와 곧바로 누우면 외로움을 떠올릴 새도 없이 잠들 수 있었다.
최근에는 서희가 들러붙어 살게 된 덕에 해가 떠 있는 동안에도 말동무가 있어서 주희는 마음이 충족되고 있었다. 다행히도 서희는 아직까지 자신이 가장 꺼리고 있는 화제를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주희와 서희 사이의 추억을 논한다면 그 화제는 오히려 안 나오는 게 이상할 테니 말이다.
“언니, 잠깐 나랑 얘기 좀 해!”
한창 기름에서 체로 건져 올린 닭을 탈탈 털고 있던 주희 뒤에서, 서희의 노기 띤 음성이 들렸다. 주희는 후우 하고 한숨을 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기름종이 위에 닭을 올려놓고 데워 둔 소스를 부었다.
“어디서 벌집이라도 건드렸다가 쏘이고 왔니? 왜 그렇게 흥분했어?”
“딴청 피우지 말고 이쪽을 봐! 중요한 얘기니까.”
“나한텐 이게 지금 중요한 얘기거든. 떼쓰지 말고 끝날 때까지 기다려. 저녁 안 먹었지? 여기 있을 거면 닭 한 마리 튀겨 주고, 아니면 집에 가서 알아서 챙겨 먹어.”
“그치만…!”
“너 이 이상 주방으로 한 발짝이라도 들어오면 바로 집에서 내쫓는다.”
주희에게 다가가 따지려던 서희는 우뚝 멈춰 서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잠시 후 서희는 등을 돌리며 말했다. “순살로. 카레 소스가 좋아.”
“대충 주는 대로 먹엇! 얻어먹는 주제에 요구가 많아.”
주희는 거칠게 내뱉으며 냉동실에서 염지된 순살코기를 꺼냈다.
새벽 1시 30분에 남아 있던 손님이 나가자 주희는 늘 하던 대로 청소를 시작했다. 구석의 2인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던 서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희의 반대쪽부터 쓰레기를 치우고 테이블을 향균 티슈로 닦아 갔다. 주희는 그 모습을 스윽 보고는 말없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두 시쯤 청소가 마무리되자 서희는 주희에게 묻지도 않고 주방 냉장고에서 맥주 한 병을 꺼내서는 제일 가까운 테이블에 앉았다. 주희는 맥주잔 두 개를 가져와 마주 앉았다. 거품 모양이 예쁘게 나오게 잔을 기울여 따르고는 서희 앞에 놓자, 서희는 단숨에 잔을 비우고는 탕 소리를 내며 내려놓았다.
“언니, 도대체 왜 시호가 저렇게 자포자기해버린 거야? 빛나는 왜 그렇게 변한 거고?”
자기 잔을 받고는 곧장 비워 버리고 본론을 꺼내는 서희를 보며 주희는 씁쓸하게 웃으며 직접 자신의 잔을 채웠다. 기어이 이 화제와 마주할 시간이 오고 말았다.
주희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서희야, 알려주기 전에 약속 하나만 하자. 지킬 자신 없으면 파고들 생각 마.”
“…”
“시호와 빛나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결코 그들 앞에 나타나지 마. …너도 네가 한 짓이 어떤 건진 알고 있지?”
서희는 잠시 동안 괴로운 표정을 짓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희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대고는 말했다.
“서희야,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하자면…”
“…”
“전제부터 틀렸어. 시호는 ‘저렇게 자포자기해버린’ 게 아니라, ‘필사적으로 거기까지 나아진’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아무 말도 없이 떠나고, 두 사람은 완전히 웃음을 잃었었어. 특히 시호는 간혹 빛나가 억지로 우리 집으로 데려올 때마다, 잠깐만 한눈을 팔아도 당장 자살이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이었어.”
주희는 눈앞의 서희를 배려해 최대한 무감정하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서희의 얼굴은 술을 마셨는데도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런데 몇 달인가 지난 어느 날, 시호가 혼자서 선물을 들고 우리 집에 찾아왔었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희망에 찬 얼굴을 하고. 그리고는 그 해 있을 문예 공모전에 투고해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입상을 해 보이겠다'며, 그걸로 네 앞에 작가로서 떳떳이 설 수 있는 남자가 되겠다며 나한테 웃으며 말했어.”
“…”
“…그리고 입상은커녕 가작에도 들지 못했어. 그뿐만이 아니었어. 문예지 측에서 시호의 원고에 대한 혹평을 잔뜩 적은 편지를 직접 보냈어. 시호는 완전히 재기 불능이 되어서 집 안에 틀어박혀 버렸어. 생업으로 하던 번역도 내팽개치고, 얼마 안 되는 저금으로 연일 술과 안주만 먹으면서.”
“…으윽!”
괴로운 표정으로 듣던 서희는 끝내 자신의 심장 부근을 감싸 쥐었다. 주희는 어느새 혼자서 맥주병의 나머지를 다 비우고는, 잠시 뜸을 들이고 이어서 말했다.
“박사를 따고 갓 강사가 된 빛나는 얼마 안 되는 강사 월급으로 시호를 부양하다시피 했어. 수시로 집에 들러 집안일을 해 주고, 시호를 억지로 밖에 데리고 나가 세상과 단절되지 않게 해 주고…. 자기도 만만찮게 힘들었을 텐데. 폐인이나 다름없어진 시호를 우리 집에 데려왔을 때 내가 그랬어. 이러다 너 먼저 죽는다고. 그랬더니 빛나가 뭐랬는지 알아?”
“…?”
-내 오랜 소원은요, 선배보다 딱 하루만 더 오래 사는 거예요. 이 사람은 너무나도 순수한데다가 감수성이 풍부해서, 내가 없으면 세상에 갈기갈기 찢겨버리고 말 거예요. 그렇다고 선배가 세상에 없으면 나 역시 살아갈 자신이 없어요.
“…빛나가 아니었으면 시호는 진작 술병에 걸려 입원해 있거나, 아예 이 세상에 없었을 거야.”
서희의 눈가에는 눈물 한 방울이 맺혀 있었다. 말없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서희에게 주희는 다가가 어깨를 토닥여주며 말했다.
“…나도 눈치 채고 있었는데, 네가 몰랐을 리가 없겠지? 절대 바뀌지 않을 빛나의 1순위를.”
“…”
“빛나는 시호를 지키기 위해 그를 대신해 싸워 왔어. 우리가 아는 빛나는 결코 싸우는 걸 좋아하는 아이가 아니었지. …이게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야.”
“…그 사람이, 정말 여러 사람을…”
“서희야. 방아쇠를 당긴 건 너야.”
주희는 단호한 말투로 서희의 말을 잘랐다.
“내가 굳이 이 이야기를 해 주는 이유는 첫째, 시호와 빛나는 서로를 아끼며 잘 살고 있으니 더 이상 관심도, …죄책감도 갖지 말라는 것.”
“…”
“…둘째, 혹여나 엉뚱한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것. 중요한 건 너 자신의 인생이야. 알겠지?”
주희는 서희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 꼬옥 쥐어주었다.
‘네가 왜 그랬는지 머리로는 우리 중에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을 거야. 하지만 그 두 사람은 이미 자기들의 일만으로 벅차니까… 어쩌겠어, 나라도 보듬어줘야지.’
목요일 6교시 수업이 끝나자마자 루나는 신촌역 옆 편의점에서 아침 겸 점심 대용으로 제일 싼 햄버거를 사서는, 전자레인지에 다 데울 새도 없이 간신히 미지근해진 그것을 입에 물고 지하철로 달렸다. 오늘은 레인드롭스에서 처음으로 팀원으로서 정식 연습을 하는 날이었다.
연락 자체는 시호에게 전화번호를 받은 바로 다음 날 했지만, 루나가 강의 시간표를 말해 주자 은수는 “에잇, 목요일에 수업 끝나는 대로 뛰어와! 그때까지 연습 좀 해 놓고! 작곡과니까 집에 건반 악기 하나는 있겠지?”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알고 보니 6시부턴 가게 영업 준비 때문에 연습을 할 수 없었고, 그에 맞춰 은수와 윤아와 세미는 평일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수강신청 운이 없어 목요일과 금요일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시간표가 1,2,7,8교시로 잡혀버린 루나로선 달리 방도가 없었다.
평일 오후 3시의 홍대입구역 9번 출구 앞은 비교적 한산했다. 라이브 하우스 밀키웨이 앞 골목은 썰렁하다 싶을 정도로 인기척이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손에 행주를 든 점원 송이주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 루나 양 어서 와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너 다음 학기엔 수강신청 제대로 해! 여차하면 차라리 휴학계 내든지!”
“언니! 이제 두 번째 보는 사람한테 그런 폭언이 어디 있어!”
휴식 중이었는지 멀리서 무대 난간에 앉아 물을 마시던 은수가 루나를 향해 소리치자 옆에 있던 윤아가 제지했다. 세미는 튜너를 물려 기타를 조율하고 있었다. 루나는 대충 고개를 까닥이고는 무대로 걸어갔다. 동료들은 하나 같이 니트에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이었다. 은수와 세미는 긴 머리칼을 하나로 모아 뒤로 묶고 있었다. 은수는 금요일과 마찬가지로 반바지에 검은 스타킹에 구두를 신고 온 루나를 보며 물었다.
“첫 날이라고 기합 넣고 온 거야?”
“아니, 수업 끝나고 바로 온 것뿐이야.”
“내일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와. 위아래 여벌옷도 한 벌씩 가져오고. 우리처럼 가게에 두고 갈아입으면 되니까.”
은수는 루나에게 일방적으로 말을 던지고는 세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세미는 아직도 튜닝으로 낑낑대고 있었다. 은수는 세미에게 다가가 냅다 쏘아붙였다.
“그러게 새 기타를 살 거면 나나 윤아랑 같이 가면 됐잖아! 괜찮은 중고 건졌다더니 어떻게 반나절 만에 음이 틀어져!”
“어쩔 수 없었는걸! 해 지기 전에 안 오면 다른 사람에게 팔겠다는데, 하필 어제 윤아 언니가 고향에 가 있을 줄 내가 알았겠어? 쓰던 건 고장이지, 오늘 루나 언니랑 처음으로 연습하는데 손가락 빨고 있을 순 없지,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그럼 나는? 나한테 얘기했으면 됐잖아! 이게 리더를 아주 핫바지로 보네?”
“언니 거기 사장님하고 가격 흥정하다가 대판 싸운 거 벌써 까먹었구나. 언니랑 같이 갔으면 절대 안 팔아줬을걸…”
어느새 옆에 선 윤아가 지적하자 은수는 “끄응… 혈압 올라, 진짜…” 하며 자신의 머리칼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뒤로 틀었다. 윤아는 은수의 뒷목을 주물러 주며 세미를 타일렀다.
“세미야. 기타 한두 푼 하는 거 아니잖니. 특히 중고는 조금이라도 더 아는 사람이랑 같이 가서 사는 게 무조건 좋은 거야. 좋은 경험 했다 생각하고, 다음부턴 미리 상의하자. 알았지?”
“알았어…”
세미는 시무룩한 말투로 대답했다. 가만히 지켜보던 루나는 세미 옆에 다가가 앉았다. “잠깐 줘 볼래?” 세미는 순순히 기타를 건넸다. 루나는 기타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고는, 튜너를 떼고 주저 없이 헤드머신을 돌리며 조율하기 시작했다.
“어… 튜너 안 써요?”
“대충은 맞을 거야. 급하게 확인해볼 게 있거든. 아, 줄은 언제 갈았어?”
“어제 사자마자 바로요.”
“그럼 키 좀 빠듯하게 내릴게.”
헤드머신을 힘을 꾹꾹 주어 돌리고는 여섯 음을 확인하고 루나는 기타를 메었다. “잘 들어 봐. 내 예상이 맞으면 삼십 초도 안 돼서 음이 틀어질 거야.” 그러더니 루나는 너트와 헤드머신 사이의 줄을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열 몇 번쯤 벤딩을 한 다음 루나는 다시 기타줄을 하나씩 튕겼다. 전체적으로 음이 높아졌지만 줄마다 그 정도가 확연히 달랐다.
“제대로 기타를 따 봐야 알겠지만…” 루나는 기타를 벗어 세미에게 건네며 말했다.
“높은 확률로 너트가 맛이 갔을 거야. 그래서 제각각 줄이 풀리는 게 다른 거고. 일단 너트만 교체해달라고 해서 수리 단가를 낮춰 봐.”
오오 하는 탄성과 함께 은수를 제외한 세 명이 박수를 쳤다. 은수는 팔짱을 낀 채 심드렁한 얼굴로 물었다.
“작곡과에서 그런 것도 배웠어?”
루나는 은수를 올려다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작곡을 하려면 여러 악기의 속성이나 연주법, 기본적인 관리법 같은 건 알고 있는 게 편하거든. 그래서 기회가 되는대로 다양한 악기를 만져 봤을 뿐이야.”
“역시 언니가 와 줘서 다행이에요. 우린 지금까지 쓰다가 고장 나면 그냥 무턱대고 수리를 맡겼거든요. 그러니 뭐가 문제인지 스스로 진단하는 방법도 모르고…”
“내가 많이 알아봤자 업자만큼 정확하진 않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네.”
윤아의 칭찬에 루나는 다소 수줍어하며 대답했다. 어느새 그들 앞에 서 있던 이주가 쯧쯧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어휴, 내가 어쩌다 이런 천덕꾸러기들과 친해져서. 세미야, 그거 당장 내일 오전에 수리 맡겨야 된다? 내가 특별히 사장님 거 몰래 빌려줄게.”
“어, 정말요!? …그랬다가 혼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안 들키게 살살 다루라고, 엄한 짓 하지 말고, 집에 가기 전에 잊지 말고 반납하고! 알았지?”
“와, 언니 고마워요!”
세미는 감격한 나머지 기타를 멘 채 그대로 이주를 끌어안았다. “어우, 얘! 아파! 안을 거면 기타 풀든지!” 이주는 가볍게 세미를 떼어내고는 카운터로 걸어가 안쪽 문 너머로 사라졌다. 그를 바라보던 루나는 뭔가 생각난 듯 일어나 엉덩이를 털고는 “먼저 연습들 하고 있어, 잠깐 물어볼 게 있어서 다녀올게.” 란 말을 남기고는 뒤따라갔다.
카운터에서 안쪽으로 들어가자 여분 의자, 조명, 스피커와 앰프 등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루나는 제일 안쪽에서 이주가 실버 케이스 한 대를 꺼내는 것을 보았다.
“사장님이 기타를 치셨었군요.”
“그럼요. 아무 연고도 없이 단순 장사로 이런 데를 운영하겠어요?”
이주가 케이스를 선반에 올려놓고 뚜껑을 열자 펜더 스트라토캐스터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핏 보기에도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기타를 보는 이주의 눈은 어쩐지 우수에 젖어 있었다. 루나는 이주의 눈을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언니라고 부르면 될까요? 은수랑 애들도 그렇게 부르던데.”
“아, 뭐 그럼 그렇게 불러요. 그래도 은수처럼 서로 말 놓는 건 천천히 해 줘요. 애가 초장에 좀 풀어 줬더니 이젠 맞먹는 게 그냥 디폴트가 됐어.”
“…왜 아까 계속 보고만 계셨어요?”
“응? 아아, 나야 기타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세미가 계속 중간 중간 만지작거리기에 그냥 길들이는 중인가 보다 싶었죠.”
루나는 눈가를 늘어뜨린 채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기타가 참 상태가 좋네요. 당장이라도 쓸 수 있을 정도로. …저라면 이렇게 소중히 여기는 악기를 얼마든지 남의 손을 탈 수 있는 곳에 보관하지 않을 거예요.”
“…뭐, 그만큼 사장님이 나를 믿는단 뜻이 아니겠어요?”
“그럼 더더욱 말이 안 되죠. 사장님이 언니를 믿고 있다는 걸 알면서, 저런 어설픈 친구들에게 사장님 악기를 허락도 없이 빌려준다고요?”
“…”
이주는 잠시 말없이 루나를 바라보더니 기타를 익숙하게 어깨에 메고는 피크를 쥐고 즉흥적으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내 몰입하여 눈을 감고는 격렬한 속주로 이행하더니, 클라이막스에 치닫기 직전 손을 떼고, 기타를 벗어 루나의 어깨에 걸어 주었다.
“…방금 그거 루나 양이 한 거예요?”
“…”
“내 걸 빌려줄 수야 있지만, 루나 양 말대로 저렇게 팀워크도 부실하고 악기 관리도 엉성한 애들한테 맡기려면 보험이 필요하잖아요. 안 그래요?”
“너트 문제란 걸 바로 아셨을 텐데, 왜 가만히 계셨어요?”
“왜냐면 오늘 루나 양이 오는 걸 알았으니까, 아마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덕분에 첫 인상도 깔끔하게 다지고 좋잖아요? 아, 엄밀히 말하면 첫 인상은 아닌가?”
이주는 오른손으로 브이를 만들어 보이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루나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절 챙겨 주시는 거예요? 저도 이전 키보디스트들처럼 금세 나가 버릴지도 모르는데.”
“으으음, 시시콜콜 설명하면 너무 이쪽이 궁색해 보이니까, 그냥 루나 양의 질문이 곧 답이라고 해 둘게요.”
“네? 그게 무슨…”
이주는 루나의 어깨를 붙잡고 반강제로 뒤로 방향을 틀고는 등을 떠밀며 말했다.
“금세 나가 버리지 말라고~! 자, 어서 나가요! 연습해야지, 연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