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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Sep 19. 2024

피그마리온의 눈물 (8)

신촌역에서 십 분 정도 거리에 있는 △오피스텔의 504호실. 방 주인이 알려 준 비밀번호를 누르고 방에 들어온 시호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왔을 때와 하나도 변하지 않은 방 안 정경에 새삼 그리움이 사무쳤다. 책상, 옷장, 침대 등의 기본적인 가구를 제외하면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휑한 것도 여전했다.

혼자 사는 주인의 체형에 비해 터무니없이 큰 킹사이즈 침대는 여전히 책상과 얼마 안 되는 간격을 두고 서재를 꽉 채우다시피 하고 있었다. 사 년 전까지 이 침대에선 두 명이 잤다. 방 주인과 상의도 없이 빌붙으러 온 식객이 멋대로 침대를 바꾼 이래, 어쩌다 시호네 집에서 잘 때를 빼면 그 식객은 매일 밤 방 주인이 학원에서 퇴근하기도 전에 벽 쪽 자리를 선점한 채 잠들어 있곤 했다.

시호는 감상을 접어 두고, 책상 앞에 앉아 방 주인이 올려 둔 한 묶음의 서류를 손에 들고 읽기 시작했다. 논문 형식을 띤 문서의 내용은 국내 시인 겸 연극・영화비평가 임화와 해외의 소설가 겸 마르크스주의이론가 레이몬드 윌리엄스의 작품 세계를 비교하는 것이었다. 저자이자 방 주인인 황빛나 박사의 부교수 임용 지원에 맞춰 학계에 제출할 예정이었다.

‘아무튼 엄청 열심히 한다니까, 우리 황 박사님.’

시호는 갖고 온 노트북을 열었다. 화면을 켜자 미리 띄워 둔 관련 논문과 원서 및 번역본들의 PDF 파일들이 있었다. 빛나는 밖에서 볼일을 보고 천천히 귀가한다고 했으니, 자신은 부탁받은 대로 논문을 영역하며 혹시라도 있을 애로 사항을 점검하고 있으면 될 것이다. 지수에게는 여벌 열쇠를 주고는 오늘 집에 안 들어갈 테니 분량을 끝내는 대로 편하게 퇴근하라고 말해 두었다.

문득 시호는 침대를 돌아보았다. 오늘도 높은 확률로, 아니, 거의 확실하게 쥐어 짜일 예정이다. 명목상 ‘오랜만에 와서 논문 도와준 데 대한 보답’이라 하겠지만, 어차피 그런 게 없어도 두 사람에겐 자연스러운 소통의 일환이었다.

‘그래도 내 침대보다 넓은 건 좋네. 더블 사이즈에서 두 명은 인간적으로 너무 좁아.’     




지수는 식탁에 앉아 노트북으로 열심히 일본어 문장을 한국어로 옮기고 있었다. 이번에 나오키 상을 수상했다는 신예 작가의 장편 소설이었다. 시호가 절반 가까이 해 놓은 분량을 참고하며 지수는 거의 망설임 없이 번역해 나가고 있었다. 일본어라면 대학교에 들어오기 전에 독학으로 어느 정도 토대를 쌓아 놓았고 하물며 소설 같은 현대 산문이면 지수에겐 땅 짚고 헤엄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물론 메이저 언어인 만큼 출판사에서 책정하는 분량 대비 원고료는 상대적으로 짰고, 이 말인즉슨 여기 시간을 오래 잡아먹을수록 시호와 지수의 수입이 줄어든다는 뜻이었다. 그런 만큼 결코 태평하게 붙들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지수가 잠시 숨을 돌리고자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똑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수는 못 들은 체 하고 넘겼다. 어차피 시호가 집에 없으니 자신이 대신할 일은 한계가 있었고, 이런 메이드 차림의 여자가 문을 열고 맞이한다면 오히려 시호에게 안 좋은 소문만 날 수 있었다. 반응이 없으면 저쪽도 알아서 떠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수의 오산이었다는 듯, 곧바로 쾅쾅쾅쾅쾅쾅 하고 문을 부술 기세로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화들짝 놀란 지수는 서둘러 현관문으로 달려가 렌즈로 바깥을 들여다보았다. 시호 말대로라면 지금쯤 자기 집에 있어야 할 빛나가 서릿발 같은 눈매를 한 채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당황한 지수가 이대로 농성할 것인지, 얼굴을 마주할 것인지 고민하려는 찰나 문 밖에서 빛나가 말했다.

“신지수,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순순히 문 열어.”

순간 문손잡이를 향해 뻗던 지수의 손이 움찔했다. 딱히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다니진 않았으니 알려고 하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어디서, 언제, 누구에게 알아냈는지는 몰라도, 지금 문 너머의 여자가 자신의 뒤를 쫓아 오늘 단둘이 보기 위해 함정을 팠다는 것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을 면피해도 어차피 저 여자와 얼굴을 맞대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렇게 생각한 지수는 잠금장치를 풀었다. 거의 동시에 문을 거칠게 열며 빛나가 발을 들이밀었다.

현관에 들어선 정장 차림의 빛나는 마치 벌레를 보는 시선으로 지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지수를 내버려둔 채 구두를 벗고 척척 걸어 들어갔다. 부엌에 들어선 빛나는 노트북 화면을 스윽 보았다.

“과연, 단순한 몸종보단 쓸모가 있나 보네.”

빛나는 빈정거리며 지수를 바라보았다. 지수에게선 자신이 모를 수가 없는 익숙한 향기가 나고 있었다. 그러나 똑같은 향기를 루나에게서 맡았을 때보다 지금 빛나의 심사는 훨씬 더 뒤틀려 있었다. 눈앞의 여자는 ‘그 날’ 이후 자신이 쓰기 시작한 향수를 먼저 쓰고 있던 사람과 기분 나쁠 정도로 비슷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쓸모가 있다고 봐 주니 고맙네요. 아니면 제가 선생님 곁에 있을 의미가 없으니까요.”

“흥, 쓸모도 쓸모 나름이지. 심심풀이를 해소해 주는 건 동네 똥개도 할 수 있어. 네가 뭐 선배에게 대단한 역할이라도 해 주고 있는 것 같아? 요상한 옷이나 입고 분 냄새나 풍기면서 말이야.”

연이어 모멸적인 언사를 던져대며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빛나를 지수는 그저 무덤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히 경고하겠어. 이 집에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어디서 가증스럽게 안주인 행세야?”

“전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역할을 최대한 수행할 뿐이에요. 그것이 선생님에게 필요하다고 확신하고 있고요. 박사님은 박사님이 해줄 수 있는 역할을 해 드리면 되는 일 아닌가요?”

“…주둥이는 잘도 나불거리네. 말 잘했어. 내가 선배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대체 불가능한 일은, 너 같은 수상한 날파리가 조금이라도 선배에게 해를 입히기 전에 배제하는 거야.”

그러더니 빛나는 품에서 단도를 꺼냈다. 당황한 지수의 동공이 확 커졌다. 빛나는 오른손에 단도를 들어 지수의 목을 겨누며 말했다. 

“내가 태평하게 입씨름이나 하려고 선배를 우리 집에 묶어놓은 줄 알아? 그 반반한 얼굴에 흉터가 지는 건 원하지 않겠지? 알아들었으면 당장 이 집에서 나가!”

그러나 지수는 겁먹은 기색은커녕 오히려 안쓰러운 시선으로 빛나를 바라보았다.

“당신한테 선생님은, 그런 식으로 흉기를 들고서라도 지켜줘야 할 존재인가요?”

“…네가 알 바 아니니까 썩 꺼지기나 해!”

빛나의 엄포에 지수는 가만히 서 있었다. 어느새 지수는 빛나를 향한 안쓰러운 시선을 거둔 상태였다. 이윽고 그것은 한심한 것을 깔보는 듯한 시선으로 바뀌어갔다. 지수는 빛나에게 한 발짝 다가가며 말했다.

“꼭 초롱아귀 암컷을 보는 것 같네.”

“뭐, 뭐라고…?”

“당신이 가장 원하는 것은, 선생님이 자신의 인생을 자유롭게 결정해 나가는 것보단, 당신 치마폭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게 아닌가?”

지수는 또 한 발짝 다가갔다. 빛나는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왠지 몸을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아직 모르는 세계를 가로막힌 인간은, 이미 인간으로서 거세당한 거나 다를 바 없어. 당신이 그를 수컷으로 받드는 거랑은 전혀 상관없이 말이야.”

“…다, 닥쳐!”

“그렇다면 당신이야말로 내 최우선 배제 대상이야!”

그 말과 동시에 지수는 번개같이 달려들어 양손으로 빛나의 양 손목을 확 움켜잡았다. 작은 몸집에서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악력이 손목에 가해지자 빛나의 표정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이게…!” 빛나는 손목을 빼려고 했지만 지수의 손아귀는 조금의 빈틈도 없이 압박하고 있었다.

이판사판으로 빛나는 팔뚝을 몸 쪽으로 확 당겨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지수의 몸통을 끌어당기고는 머리를 뒤로 젖혔다가 들이받으며 박치기를 시도했다. 지수는 여유롭게 상체를 뒤로 젖히며 회피했다.

툭.

빛나는 무언가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발밑을 보자 긴 머리칼 뭉치가 떨어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본 보브컷이 드러난 지수는 분노와 놀람이 뒤섞여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빛나가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또 영문 모를 기시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지수는 빛나의 단도를 빼앗았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왼손 엄지와 검지로 날을 쥐었다. 

뚝!

빛나는 눈앞에서 지수가 왼손에 힘을 주어 단도를 부러뜨리는 걸 보고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지수는 부러진 단도를 식탁 위에 내동댕이치고는 가발을 주워 다시 머리에 썼다. 그리고는 얼이 빠져 있는 빛나를 보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당장 이 집에서 꺼져!!!”


빛나는 경황도 없이 서둘러 현관을 나와 빌라 밖까지 달아나서는 한숨을 돌렸다. 자신이 생각한 시나리오대로 안 흘러갔음은 물론, 방금 눈앞에서 벌어진 비현실적인 장면에 아직도 얼떨떨했다.

‘미친 년… 손가락 두 개로 칼을 부러뜨렸어!’

게다가 상대는 지금까지 시호 앞에서 가발을 쓰고 있었던 듯하다.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 아니면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어서? 확실한 건 적어도 원래의 짧은 머리를 드러내고 싶진 않았다는 것이다. 가발이 벗겨졌을 때 보인 격렬한 감정의 동요만 보아도.

또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가발이 벗겨졌을 때 얼굴이었다.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물론 가발을 쓴 그가 서희를 닮아서 기억에 혼선이 생겼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브컷 상태의 얼굴을 봤을 때 든 기시감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선명함과 생생함을 동반하고 있었다.

‘…좀 더 그 여자를 파헤쳐봐야겠어.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그렇게 생각하며 빛나는 자신의 오피스텔로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지수는 빛나가 나간 뒤에도 자리에 앉지 않은 채 팔짱을 끼고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칼만 뺏고 적당히 겁을 줘서 내쫓으려고 했는데, 설마 저렇게 거칠게 반응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빛나는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 거기다가 가발이 벗겨진 얼굴까지 보고 말았다. 저 여자의 발상과 행동력이라면 아마 금세 자신이 지난 학기의 수강생 중 한 명이었음을 기억해낼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시호에게 자신이 숨기고 있는 더 큰 거짓말이 들킬 것이다. 시호의 곁에 있기 위해 했던 작은 거짓말 이상의, 오히려 그날 그 작은 거짓말을 드러내며 덮었던 훨씬 큰 거짓말이.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때야말로 시호는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날이 오기 전까진 시호의 소설을 위해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 두어야 한다. 지수는 자신과 대치하던 빛나의 육감적인 몸매와 터무니없는 행동력, 그리고 지난 학기에 유감없이 보여 준 지성과 학식을 떠올렸다. 같은 강의를 듣던 국문과 학생들이 “정교수로 임용 안 되면 이상하다”고 떠든 걸 생각하면 교수진과 학교에 대한 처세도 능숙하게 해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당신의 자부심이다 이거지.’

표현이 웃기지만 빛나가 말하는 식의 시호를 위한 역할이나 곁에 있을 자격을 나열하자면, 확실히 빛나가 자신을 그토록 멸시하는 것도 부자연스럽진 않았다. 여러 외국어에 대한 지식이 조금 있을 뿐, 국문학과나 여타 인문계열도 아닌 물리학과를 막 졸업한 학부생. 무엇보다도 자신은 결코 해줄 수 없는 결정적인 역할을 생각하면….

지수는 노트북을 덮고, 시호의 서재로 가 책상 제일 밑 서랍의 원고지 뭉치들을 꺼냈다. 십 년 전에 입선한 이래 계속 틈틈이 써 온 만큼 상당한 분량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이걸 전부 스캔하고 또 나머지 번역 작업을 하려면 수면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호가 돌아오기 전에 원고를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 없다.

“이게 내 자부심이야.”

빛나를 생각하며 지수는 중얼거리고는 남은 커피를 한 번에 들이켰다.     



 

3월 하순의 꽃샘추위는 심상치 않았다. 지하에 있는 라이브 하우스 밀키웨이의 사장은 봄이 되었다고 낮에 난방을 틀어 주지 않았다. 덕분에 루나를 포함한 레인드롭스 동료들은 위아래 내복은 기본이요, 니트를 두 개씩 겹쳐 입고 마스크까지 쓰며 주말 연습에 매진하고 있었다.

목표는 4월 마지막 토요일 저녁 공연까지 네 사람의 싱크로를 맞추고, 기존 곡들의 퀄리티를 최대한 끌어올릴 것. 문제는 사장이 이러한 부킹 이야기를 루나가 동료가 된 지 2주 후에야, 즉 불과 지난주 토요일 저녁에 꺼냈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평일엔 루나의 강의시간표 문제로 같이 연습할 시간이 얼마 없고, 주말엔 가게를 일찍 여는 만큼 연습할 시간이 모자랐다.

“그렇게 타이트하게 일정 잡아줄 거면 난방이라도 틀어주든가!” 라고 은수가 입에서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화를 내도 이주는 “그럼 난방비 별도로 더 내든지.”라 태연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사장의 호의로 비교적 싼 값에 무대를 빌려 연습하는 은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오케이, 느낌 좋았어!”

열 번 연속으로 ‘우산 속의 미소’ 합주 연습을 하고는 윤아는 얼굴에 흐른 땀을 닦으며 개운한 듯 말했다. 세미는 그에 동의하듯 입가에 웃음을 띠고 끄덕였다.

“좋긴 개뿔이! 열 번을 해도 똑같이 싸비부터 틀어지는구만!”

은수는 째애앵 하고 스틱으로 크래시 심벌을 치며 소리쳤다. 윤아와 세미는 맥이 빠진 듯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쉬었다. 사실 두 사람도 미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처음엔 ‘맞추다 보면 나아지겠지’라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횟수가 거듭되자 빨리 끝내고 쉬고 싶은 생각이 더 커졌다.  

“아니, 악보대로 문제없이 했잖아. 루나 언니도 각자 단독 연주 듣고 별 말 없었고.”

“언니… 나 배고파서 쓰러질 것 같아.”

윤아와 세미는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은수는 부아가 치밀면서도 윤아의 말에 반박할 거리도 없고 체력적으로 고갈된 건 자신도 마찬가지라 오만상을 찡그린 채 스틱을 뒷목에 대고 스트레칭을 할 뿐이었다.

“…나도 좀 쉬고 올게.”

루나는 어깨와 목에서 두둑 소리를 내며 무대에서 내려와 밖으로 나갔다. 골목을 나오자 날씨는 추웠지만 햇볕을 쬐어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담배에 불을 붙여 빨아들이자 바짝 조여져 있던 정신의 고삐가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마치 혼자만 다른 곳에 있는 감각도 들었다.

“어휴, 머리야…”

그리고 역시나 혼자만의 평화는 레인드롭스 내 또 다른 흡연자의 등장으로 금이 가고 말았다. 은수는 루나 옆에 쭈그려 앉아서는 말보로 레드에 불을 붙여 입에 물었다. 많이 쳐 줘야 중학생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두 사람이 나란히 길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홍대 거리의 행인들의 유교 마인드에 불을 지피기 충분했다.

“나 쉬고 온다고 했는데.”

“누가 뭐래? 나도 쉬고 있는 거야.”

‘혼자 있고 싶으니까 딴 데 가라’는 뜻을 담은 루나의 완곡한 어법을 은수는 태연하게 넘기고는 쪼오오옥 담배를 빨아들였다. 손에 든 담배가 맹렬한 기세로 짧아지더니, 이윽고 담배에서 입을 뗀 은수는 후우우우 하고 길게 연기를 뿜어댔다.

“니코니코틴~♪”

“푸흡!”

한물 간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대사로 은수가 뜬금없는 개그를 치자 루나는 참지 못하고 뿜어버렸다. 은수가 옆을 보자 루나는 고개를 돌리고 열심히 딴청을 피웠다. “에휴, 뭐하고 있는 거냐…” 은수는 혼자 중얼거리더니 바닥에 담배를 비벼 껐다.

“천천히 피우고 와라.”

그 말을 남기고는 은수는 머리 뒤로 손깍지를 끼고는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그거, 아무리 봐도 도움 요청인데요?”

편의점 퇴근길의 공터, 시호의 오른쪽에 앉은 루나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웠다.

“도와 달라니, 뭘요?”

“레벨 업이죠. 지은수 양이 못하는.”

시호는 한 박자 뜸을 들이고는 이어서 말했다.

“연주가 어긋난다는 건 팀원 모두가 느끼고 있어요. 하지만 왜 어긋나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는 도무지 감을 못 잡고 있죠. 하지만 루나 양은 방법을 알고 있죠. …아닌가요?”

루나는 스윽 하고 시호를 한 번 쳐다보고는, 이내 달을 바라보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아니에요.”

“음, 그래요?”

시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는 주머니에서 커피껌을 꺼내 씹기 시작했다.

“금연은 잘 되어가요?”

“막담 이후로 아직 깨뜨리지 않고 있어요.”

“…슬슬 진짜 고비가 찾아올 텐데, 앞으론 둘이 있을 땐 피우지 말까요?”

“후후, 겨우 옆에서 담배 피고 있는 정도로 자기통제가 안 되면 금연한다고 말 못하죠. 생각보다 실천이 어렵고, 실천보다 유지가 어려운 법이니까요.”

“…”

그 말을 들은 루나는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턱을 괴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흐음…”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도, 어째서인지 입 밖에 내기가 망설여졌다. ‘시호가 이 말을 들으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같은 건 처음 알 당시만 해도 고려 요소가 아니었는데, 이젠 조금이라도 정나미가 떨어지는 게 두려웠다. 

그래도 시호를 보고 싶었다. 마냥 맹하고 태평해 보이면서도 순간순간 어른의 여유를 보이며 떠받쳐 주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어차피 밴드 문제는 자신의 문제지 시호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빛나의 말마따나 시호 역시 자신이 짊어진 짐만으로도 충분히 힘든 실존을 지탱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짝! 짝!

갑자기 왼쪽에서 난 박수 소리에 빛나는 화들짝 놀라 엉덩이를 들썩였다. 돌아보자 시호가 자신의 오른쪽 귀에 대고 박수를 치고 있었다.

“뭐, 뭐해요, 지금!?”

“음! 역시 내 귀가 고장 난 게 아니었네! 어쩐지 너무 조용하다 했어.”

“그게 무슨 뜻이죠!?”

“내가 아는 루나 양은 이렇게 말을 가리는 사람이 아닌데, 뻔히 하고 싶은 말이 있을 텐데 우물쭈물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나, 나라고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사는 줄 알아요?”

“적어도 내가 아는 루나 양은 그런데요. 그래서 좋아하는 거고.”

“…!”

순간 루나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머리로는 결코 시호가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님을 알아도, 마음에 둔 남자에게서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사실만으로도 증폭되는 감정은 일순 뇌를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시호는 계속해서 말했다.

“루나 양. 루나 양이 ‘실패를 겪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실패로부터 자유로워지겠냐’고 물었을 때 내가 뭐라 대답했는지 기억나요?”

“‘실패를 또 다른 성공으로 덮으면 된다’…”

“정답.”

“…하지만, 또 다시 실패하면?”

“뭐, 다음번엔 성공하겠죠. ‘인생은 길고 사람은 많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루나 양 역시 인생에서 만나는 수많은 NPC 중 한 명에 불과해요. 서로 이용할 만큼 이용해야지 않겠어요?”

시호는 루나를 향해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롤러코스터를 탄 듯 가라앉았다 붕 떴다 하는 감정을 간신히 추스르고 루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럼 나도 아저씨한테 NPC예요?”

“축하해요, 서브 히로인 후보 정도로는 승격됐어요. 한루나 루트 진입까지 좀 더 분발하세요.”

“꿈 깨세요, 스윗 영서티 씨. 나한테 아저씨는 용량 문제로 언제 지워도 상관없는 더미 캐릭터니까.”

“푸하하하하하! 아아, 역시 이래야 루나 양이지.”

루나의 독설에 시호는 거침없이 웃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는, 루나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나도 그런 아저씨가 …좋아요. …물론! 인간적으로요!”

“그건 참 기쁜 말이에요. 어쨌든 누가 나에게 호감을 갖는다는 건 양쪽 모두에게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니까요. 거기엔 실패도 성공도 없어요, 존귀한 마음이 있을 뿐이죠.”

“존귀한 마음이 있을 뿐이다…”

“그래요. 그걸 마주할 용기가 있다면, 실패는 두렵지 않아요.”

시호는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루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달하늘 아래 애틋하면서도 안타까운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     




“자, 준비됐지? 오늘은 좀 나아져 보자!”

일요일 오전 연습 시간, 전날 끝내 해결점을 발견하지 못한 이래 축 처져 있는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은수는 기합을 넣었다. 윤아와 세미도 주섬주섬 자신의 악기를 어깨에 맸다.

루나는 지난 밤 시호가 해준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갖는다는 것은 존귀한 마음이며, 자신과 상대방에게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 마음을 마주한 채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응원해 주었다.

물론 호감에서 비롯된 행동이 늘 정당성을 띠지는 않는다. 혹자는 ‘내가 누굴 좋아한다는 사실이 그 사람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말까지 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애당초 타인의 자존감을 헤아릴 수 있다는 건 교만한 생각이다. 자신이 믿는 진심대로 행동하고, 눈을 돌리지 않고 결과를 마주할 뿐이다.

‘…고마워요, 용기가 생겼어요.’

루나는 마음속으로 시호의 얼굴을 되새겼다. 그리고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입을 열었다.

“연습하기 전에 너희들에게 각각 할 말이 있어.”

루나의 말에 세 명은 일제히 그를 돌아보았다. 점원은 멀리서 재밌는 걸 보듯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은수야. 절 끝날 때 들어가는 크래시에서 킥드럼이 조금 빨리 들어가는 것 같아. 그러다보니 무의식적으로 박자도 빨라지는 게 아닐까? 그 부분만 좀 신경 써줘.”

“…!”

눈을 크게 뜬 채 신묘한 표정을 짓는 은수를 뒤로 하고 루나는 가방에서 악보를 꺼내 윤아와 세미에게 건넸다.

“윤아야. 베이스 라인이 싸비 이후에 떠야 할 곳에선 가라앉고 가라앉을 곳에선 뜨는 것 같아. 내가 새로 짜 봤으니까 한번 이거대로 쳐 볼래?”

“아…, 알았어요…”

“세미는 반주는 안 바뀌었지만 윤아가 옆에서 치는 거에 익숙해지도록 해 줘. 그리고 보컬 고음 올릴 때 손이 같이 기세를 타 버려서 반주의 정밀도가 떨어지는 것 같더라. 거기만 해결되면 나머지 자잘한 것들은 서로 연습하면서 맞춰나갈 수 있을 거야.”

“…네!”

윤아와 세미는 기쁜 얼굴로 루나에게서 받아든 악보를 악보대에 끼웠다. 이를 바라보던 은수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자, 각자 루나가 말한 사항 유념하면서 가 보자! 원, 투…!”

“아, 한 가지만 더!”

“아잇, 한루나 씨! 또 뭐!”

루나의 중단에 신경질을 내는 은수의 목소리는 기분 탓인지 평소보다 누그러진 것 같았다.

“윤아랑 세미도 슬슬 나한테 말 편하게 해 주지 않을래? 한두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존댓말 듣기는 부담스럽거든…”

루나의 말에 은수는 눈썹을 몇 번 꿈틀거리더니 윤아와 세미에게 “이것들이 리더한텐 막 하면서, 어? 어디서 사람 차별하고 있어? 저 말도 유념해! 알았지!” 라 소리쳤다. 윤아와 세미는 고개를 돌려 루나를 쳐다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은수는 다시 스틱을 딱딱 치며 외쳤다.

“그럼 진짜로 시작한다. 원, 투, 쓰리, 포…!”        


해질 무렵이 되자 골목 앞에도 인파가 붐비기 시작했다. 먼저 옷을 갈아입은 루나는 밖에 나와 네온사인 아래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은수가 오늘은 자신이 크게 쏘겠다며 루나에게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하자 윤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언니, 큰 기대하지 마. 롯데리아가 버거킹이 되는 정도니까.”

“야, 버거킹 무시해? 요즘 버거 콤보만 해도 다 6, 7천 원 이상이야!”

은수의 일갈에 루나는 “와, 학식보다 비싸네! 기대할게.” 하며 적당히 장단을 맞추고는 나온 게 십오 분 전이었다. 아마 저 셋은 접때 본 무대 의상을 입고 오늘밤 홍대 거리를 활보하고 다닐 것이다. 그것까지 권유하지 않는 것은 은수 나름의 배려일까, 아니면 선 긋기일까. 어차피 과제 때문에 같이 어울릴 시간도 없지만 말이다.

“어휴, 밖에 나오니까 춥네! 너 반바지 괜찮냐?”

옆을 돌아보자 은수가 머리만 트윈테일로 묶은 채 연습할 때 입던 옷에 롱자켓를 걸치고 나오고 있었다. 말보로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며 은수는 루나를 보고 씨익 웃었다.

“어쩌겠어. 미를 위해서는 희생해야 되는 게 있는 걸.”

“오호라, 보여줄 사람이 있단 얘기구만. 누구야? 어떤 사람이야?”

“그걸 질문이라고…. 저번에 봤잖아.”

루나의 대답에 은수는 잠시 눈을 감고 그날을 회상하고는 천천히 루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어렵게 입을 뗐다.

“와…, …얘가 순진한 거야, 겁이 없는 거야?”

“그게 무슨 뜻이야?”

“난 뭐 삼촌이나 매니저 같은 건 줄 알았지. 패션만 봐도 빼박이잖아.”

“내가 구경시켜주겠다고 데려왔던 거야. 어쨌든 그 사람 덕분에 내가 여기 동료가 됐으니까, 웬만하면 호의적으로 봐 줬으면 하는데…”

“…그래, 네가 감당할 일인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왈가왈부하겠냐? 미안하다, 잊어.”

루나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걸 감지했는지 은수는 다급히 화제를 종료했다. 갑자기 대화가 끊기자 두 사람 사이엔 어색함이 감돌았다. 먼저 정적을 깬 건 루나였다.

“애들이 좀 늦네.”

“뭐, 너도 봤잖아. 풀 세팅하려면 시간 좀 걸리지.”

“…나중에 본 공연 때 나도 저렇게 입어야 해?”

“혼자 얌전한 대학생 티내려고? 문신이나 피어싱까진 안 바라니까 최대한 맞춰.”

“난 윤아처럼 앞섬 까는 건 못 하겠는데…”

“그런 건 기대도 안 합니다요. 보여줄 거 있는 애들이나 까는 거지, 우리 같은 년들이 까 봤자 아청법 위반이야.”

“…와, 지금 은근슬쩍 ‘우리’라고 도매금으로 엮은 거야? 얘 보기보다 영악하네?”

“그런 너는 자학 드립에 부정은 고사하고 ‘난 아니에용’ 하고 거리두기 하는 거냐? 이 이기적인 것아!”

두 합법 로리는 골목의 공기를 오염시키며 서로에게 치명타를 스쳤다. 어색했던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지자 은수는 원래 하려고 했던 말을 꺼냈다.

“…오늘은 고마웠어.”

“내가 고마울 일이라도 했어? 팀이잖아.”

루나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치면서도,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숨기고자 고개를 비스듬히 올려 하늘을 보았다. 은수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래, 팀이니까. 우리도 열심히 공부할거야. 너한테 되도록 아쉬운 소리 안 하게.”

“아쉬운 소리라니 듣기 좀 그렇네. 어쩌다 보니 내가 한 발 더 빨리 캐치했을 뿐인데…”

“비익연리의 천재 작곡가 한루나.”

은수는 어느새 루나를 향해 똑바로 서 있었다. 루나는 애써 태연한 척을 했지만 좀처럼 은수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천재 소리는 빼 줘. 그게 벌써 몇 년 전인데.”

“이래봬도 난 주제 파악을 잘 하는 편이거든. 지금은 나랑 윤아랑 세미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서 곡을 써도 너를 당해낼 순 없어."

"얘 왜 이래? 낯 뜨겁게…"

"…하지만 언젠간, 우리도 네가 인정할 만한 곡을 만들 거야. 반드시…!”

“…”

루나는 그에 대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음악에 대한 진지함은 저들이 자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진 않는다. 어설프게 대답했다가는 오히려 자존심을 다치게 할 수 있었다. 살짝 고개를 돌려 본 은수의 눈은 자신이 여태껏 본 것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진지했다.

‘빨리 좀 올라와, 얘들아…’

익숙지 않은 분위기에 루나는 그저 좌불안석으로 윤아와 세미가 빨리 준비를 마치길 간절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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