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대 학생체육관 테니스 코트에서는 머리를 뒤로 묶은 두 여자가 배드민턴 라켓을 쥐고 대치하고 있었다. 게임 스코어는 2 : 1, 포인트 스코어는 19 : 15였다. 2게임을 딴 쪽이 2포인트만 더 따내면 끝나게 되어 있었다.
1게임으로 방어 중인, 키가 크고 피부가 보기 좋게 그을린 쪽은 온몸이 땀투성이였다. 탄탄한 근육이 늘씬하게 박힌 팔다리가 반들반들하게 비쳐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매료되어 바라보았다. 관중석 한복판에 모인 체육교육과 학생들은 “하나, 둘, 셋, 남주희 파이팅!” 하고 절도 있으면서도 우렁찬 목소리로 응원했다.
2게임으로 이기고 있는 쪽은 얼굴에 땀이 한두 방울 흐르는 것을 제외하면 별로 지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표정도 상대와 달리 평온해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방금 막 코트에 들어선 줄 알 것이다. 심지어 관객석을 보며 리듬체조봉을 돌리듯 손끝에서 라켓을 팽그르르 돌리는 여유까지 선보였다. 체육교육과 학생들은 “우우~” 하며 여자를 향해 야유했다.
체육교육과와 살짝 떨어진 곳에는 남녀 한 쌍이 앉아 김밥을 사이에 놓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여자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정말 숨 쉬듯이 티배깅을 하고 있네. 내가 주희 언니였다면 한 대 쥐어박았다.”
“우리 2학년 5반 이서희 어린이는 그냥 재밌어서 하는 걸 걸. 아무 악의 없이 저런다는 게 제일 무서워.”
“좀 단속 잘 해 봐. 연인이잖아.”
“내가 그럴 깜냥이 있었으면 쟤가 나랑 사귀기나 했을 것 같아?”
남자는 단념한 듯한 말투였지만 코트의 여자를 보는 시선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옆의 여자는 부아가 치밀어 손에 김밥 몇 조각을 올려놓고 남자의 입에 짓이기듯 밀어 넣었다. 남자는 군말 없이 그를 받아들여 다람쥐마냥 볼을 부풀린 채 꾸역꾸역 씹었다. 여자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말 박사 안 할 거야? 나도 들어온 주제에 이런 말 하는 게 웃기지만, 세간에서 인문사회계열 석사는 학사랑 별 차이가 없다고.”
“헤허. 허하히 허 해후허 히하 흐허호 허히하.”
“…내가 잘못했어. 다 삼키고 말해도 돼.”
간신히 조금씩 입 안의 내용물을 삼켜 가는 남자에게 여자는 페트병의 뚜껑을 따 내밀었다. 잠시 후, 목을 축인 남자가 말했다.
“됐어. 어차피 뭐 배울 거 있나 들어온 거니까. 내가 내린 결론은 ‘돈과 시간 버려가며 좋은 경험 했다’, 이거야.”
“지금 한창 논문 주제 고르는 후배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네.”
“우리 빛나는 나보다 똑똑하니까 돈과 시간을 버리는 일은 없을 거야.”
여자는 알고 있었다. 학부 전공이 물리학인 남자가 국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을 갔던 것 자체는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원래부터 소설을 써온 사람이니까. 그러나 소설을 쓰는 것과 국문학을 전공하는 것은 상관관계가 지극히 희박한 사항이다. 그런 식이라면 동서고금 역사 속 문호들은 대부분 자국 문학을 전공했어야 설득력이 있다.
배드민턴은 결국 21 : 20, 세트 스코어 3:1로 끝이 났다. 승자는 패자에게 악수를 권하고 와락 끌어안은 다음, 곧바로 남자에게 달려와 ‘포상 타임’이랍시고 끌어안으며 몸을 비벼댔다. 끝까지 진지하게 임하고 패배가 확정됐을 때도 미소를 잃지 않던 패자는 그걸 보는 순간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지며 “야, 이서희 이 미친년아! 안 떨어져!?” 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목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고 있을 때 남자 옆에 앉아 있던 여자는 남몰래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 아버지에게 조금이라도 점수를 따 보겠다고 대학원에 들어가고 자기 힘으로 공모전에서 입선까지 한 연인인데 여간 예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혼자 꽃밭에 사는 이 여자가 상상이나 해 봤을까. 딸을 끔찍하게 아끼는 그의 아버지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텃밭에 발을 걸치고 있는 남자를 얼마든지 유린할 수 있다는 것을, 환경과 재능을 타고나 학부를 다니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자신 옆에서 남자는 다른 일을 생계로 삼으며 자신의 아버지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 나라 문단에 글 도장을 찍는 희망고문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것을.
오후 3시의 주택가 앞 공터는 인근에 거주하는 노인들과 주부들의 생활체육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한편에는 족구 네트를 쳐 놓아 다용도로 이용할 수 있었다. 여기저기서 여가를 즐기듯 각자의 운동을 하는 와중 여기만은 승부의 불꽃이 맹렬하게 튀고 있었다.
“20 대 15! 매치 포인트!”
…고 하기엔 실력의 차이가 확연했다. 트레이닝복 차림의 서희는 라켓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마찬가지로 트레이닝복 차림의 주희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이, 언니! 이게 뭐야~! 전혀 실력이 안 늘었잖아! 좀 더 비등한 소모전을 기대했는데.”
“나 내일모레 사십이야 이것아! 그러는 넌 그동안 마땅한 상대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실력이 안 줄었냐? 역시 시 대회 고등부 3등 출신이라 썩어도 준치다, 이거냐?”
“그런가? 역시 선수촌에서 권유가 왔을 때 받을 걸 그랬나?”
“아서라. 선수촌에서 너처럼 행동하면 몰매 맞고 쫓겨나기 딱 좋아.”
주희가 호흡을 고르며 자세를 잡는 와중에 서희는 검지 끝에 라켓을 수직으로 세우는 묘기를 부리고 있었다. 지나가던 아이가 방방 뛰며 옆에 있는 엄마의 팔을 당기며 “와, 저 누나 짱 멋있다!” 하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서희가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자 아이는 수줍은 듯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손을 흔들어 되돌려주었다.
주희는 왠지 기운이 빠져, 몸에 힘을 풀고 서희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요 며칠 힘이 빠져 있어서 내심 걱정했는데, 또 이렇게 금방 기운을 차려 고마울 따름이었다.
재밌어 보이는 게 있으면 앞뒤 안 가리고 달려가고, 그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을 말려들게 하고, 그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극명하게 갈리지만, 애석하게도 자신은 그에게 애호를 받아 버린 몇 안 되는 사람이자 그를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서희는 그런 성격 덕분에 어지간하면 누굴 진심으로 미워하는 일이 없었다. 만약 누군가 그에게 미움을 산다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주희는 늘 생각해 왔다.
‘…하지만 네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 자체가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 그랬다간 너 자신부터 상처입고 아파할 테니까.’
“자, 집중! 매치 포인트 족구 하라고 해! 지금부터 대역전극 들어간다!”
“그냥 콜드 게임 해줄게~ 좀 있다 가게도 여는데~”
“시꺼! 빨리 치기나 해!”
주희는 짐짓 호기를 부리며 라켓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서희는 스트레칭을 하는 시늉을 하며 공터를 주욱 둘러보았다. 시계 기둥에서 제일 가까운 나무 뒤쪽, 선글라스에 마스크를 낀 남자가 서희와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곧바로 몸을 숨겼다. 그 외에 철봉 운동을 하는 노인 남성, 앞뒤로 박수를 치며 걸어다니는 중년 여성, 윗몸일으키기를 하는 중년 남성, 자갈밭에서 맨발 걷기를 하는 노인 여성, 그 옆에서 앉은 채 스트레칭을 하는 노인 여성… 지난 3주간 이 시간의 인원수를 체크한 바에 따르면 이 다섯 명이 최대고, 다섯 시 이전에 전부 귀가한다.
다섯 시 이후 서희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면 남자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는 서희가 고용한 사설탐정으로 얼마 전부터 어떤 사람의 뒷조사에 착수했다. 대상이 대상인 만큼 얽혀 있는 인물들의 위상과 영향력만 해도 상당할 것이고, 그렇기에 만전을 기해 빈틈없이 비밀리에 준비해야 한다.
이변이 없는 한 주희가 그 시간에 가게에 묶여 있다는 건 서희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주희가 알았다면 무조건 자신을 말리며 차라리 그 증오와 분노를 대신 받아주겠다고 나설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단순히 개인을 둘러싼 송사로 접근한다면 보다 간단하고, 과격하면서도, 즉각적인 해결책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과 부채의식 말고는 얻을 수 있는 게 없음을 서희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학습했다.
‘…감정적으로 되면 안 돼.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어디까지나 냉정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그럼 마무리 샷 간다─!”
탕 하고 서희의 라켓에 맞은 셔틀콕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진주까지 고속버스로 3시간 반, 거기서 시내버스와 마을버스를 환승하며 1시간 반, 꼬박 다섯 시간이 넘게 걸려서야 지수는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지수는 시골에선 보기 드문 이질적인 외모 덕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마을에 들어서서 걸어갈 땐 아예 자신을 빤히 보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차도가 없는 길목으로 들어가 하천 다리를 건너 언덕을 넘자 비로소 아담한 한옥 한 채가 보이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자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녁에는 집에 돌아가야 해…’ 지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빳빳하게 다린 위아래 까만 양복은 일 년에 딱 하루만 입는 옷이었다. 거기에 구두 차림으로 편도 여섯 시간의 여정은 아무리 건강한 지수라도 약간은 피로가 쌓였다. 특히나 마을을 걷는 내내 주변을 신경 쓰느라 쌓인 정신적 피로는 몇 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돌담을 따라간 끝에 나온 나무 대문 앞에서 지수는 가발을 벗고 콘텍트 렌즈를 빼고 주머니에 넣어 둔 안경을 썼다. 대문을 열자 끼이이익 하고 녹슨 경첩이 소리를 냈다. 지수는 천천히 마당으로 들어갔다.
ㄱ자로 된 기와집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여기저기 금이 가고 부서져 있었다. 바깥을 한번 둘러보고는 지수는 겨우내 떨어진 마른 나뭇잎과 나뭇가지가 뒹구는 쪽마루 한편을 대충 손으로 털어내고 앉았다. 눈을 살며시 감자 봄 냄새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와 온몸을 감쌌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몸과 마음을 가라앉히자 눈앞에 옛날의 장면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장례식장에서 자신을 끌어안으며 친척들에게 일갈하던 할아버지의 모습, 밭에서 챙모자와 작업복을 입은 자신의 귀를 잡고 끌고 나오던 할아버지의 모습, 도복을 입은 자신의 뺨을 때리던 할아버지의 모습, 장롱 깊숙한 곳에 있던 옷을 입은 자신의 팔을 붙들고 오열하던 할아버지의 모습, 전교 1등 성적표를 가져왔을 때 앞에선 내색하지 않았으면서 틈만 나면 그걸 꺼내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던 할아버지의 모습, 병석에 누운 채 숨겨둔 적금 통장을 건네주며 ‘행복하게 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던 할아버지의 모습…
지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방금 전까지 별 생각 없이 보던 풍경이 새삼 아름다운 색을 발하고 있었다. 마른 나뭇잎 하나가 굴러와 손등을 덮은 모습은 마치 상냥함이 형태로 모습을 바꾸어 자신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지수는 그것을 집어 들어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서 스르르 그것을 놓자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실려 저 산 너머로 사라져갔다.
“또 올게요.”
지수는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려 천천히 마당을 나섰다.
-이번 역은 신촌, 신촌 역입니다. 내리시는 문은 오른쪽입니다…
신촌역에 내리자 이미 밤 9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지수는 스마트폰으로 PDF 파일을 훑으며 머릿속으로 영역英譯에 열중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그대로 활자로 옮기면 어느 정도 할당량을 충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눈은 화면에 고정한 채 몸에 익은 감각만으로 6번 출구를 향하던 도중이었다. 왼쪽 어깨가 살짝 스치는 느낌이 나더니 등 뒤에서 “아이고, 아이고 내 다리!” 하며 아우성을 치는 소리가 났다. 지수가 돌아보자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무릎을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옆에는 비슷한 차림의 남자가 주저앉아 “야, 괜찮아?” “이거 부러진 거 아냐?” 하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지수는 그를 보자마자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깨달았다. ‘요즘도 이런 놈들이 있나, 하긴 힘든 시대긴 하지…’ 지수는 작게 한숨을 쉬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바람잡이 역할의 남자는 다친 척 주저앉은 남자를 부축한 채 지수를 보며 “이봐요, 이런 혼잡한 데서 폰을 보며 걷다니 제정신이에요? 여기 지금 사람 다친 거 안 보여요?” 라 소리쳤다. 지수를 귀를 후비며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휴, 그것 참 큰일이네요. 제가 뭘 해드려야 할까요?”
“지금 사람 쳐 놓고 그 건방진 태도는 뭐야! 됐고, 병원 가 봐야 할 것 같으니까 이십만 원 정도만 내놔 봐! 아쿠쿠…”
주저앉은 남자는 뻔히 눈에 보이는 공갈을 하면서도 굳이 연기를 이어나갔다. 어느새 주변에 몰려든 몇몇 구경꾼들이 수군거렸다. ‘직원 오기 전에 처리해야지.’ 지수는 천천히 걸어가며 “제가 지금 시간이 없거든요, 빨리 해결해 드릴게요.”라 하더니, 남자의 눈앞에서 왼발을 땅에 팍 디디고는 오른발을 힘껏 차올리는 시늉을 했다.
“우아악! 뭐, 뭐야!?”
예상대로 남자는 뒷걸음질 치며 멀쩡한 두 다리로 몸을 일으켰다. 2인조는 잠시 멍청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지수는 팔짱을 낀 채 조소하듯 말했다.
“와! 다리가 나았어요! 이십만 원은 저한테 주시면 되겠네요!”
구경꾼들은 와하하하 하고 박장대소했다. 졸지에 망신을 당한 2인조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지수가 그들을 내버려둔 채 갈 길을 서두르던 그때였다. 다친 척 하던 남자가 “이 씨발년이!” 하면서 지수의 등 뒤로 달려들었다. 지수는 빠르게 돌아서며 몸을 숙여 자신의 어깨를 남자의 겨드랑이에 넣고는, 왼손으로 남자의 어깨를 잡고 오른손으로 남자의 가랑이 사이를 홱 들어 올리며 뒤로 넘겨버렸다. 석재 타일 바닥에 온몸으로 떨어진 남자는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윽, 윽…” 거렸다.
이를 본 나머지 한 명이 “개 썅년!” 하면서 지수에게 주먹을 쥐고 달려들었다. 일순 지수의 눈이 빛나더니 서 있던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는 어느새 남자의 코앞까지 다가와서는 초당 4회의 속도로 배에 주먹을 꽂다가 손날로 턱을 쳐 올리며 마무리 일격을 가했다. 이번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혼절하며 쓰러졌다.
지수는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몇 장 꺼내 두 사람에게 던지고는 바삐 자리를 떴다. 구경꾼들은 박수와 환호로 지수를 배웅했다. 머릿속에서 방금 전까지 하던 영역을 이어서 하는 데 정신이 팔린 지수는, 구경꾼들 사이에 단 한 명 박수를 치지 않은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촬영하고 있던 걸 눈치 채지 못했다.
집에 돌아온 지수는 옷과 가발을 전부 벗어던지고는 속옷 차림으로 곧바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모니터 오른쪽에 PDF 파일을 띄운 채 왼쪽에는 오늘 아침 출발하기 전까지 붙들고 있던 워드 파일을 열고는, 지수는 오면서 머릿속으로 번역한 내용을 한 자 한 자 써 나갔다.
얼마쯤 지났을까, 다소 까다로운 원문에 지수가 머리를 싸매고 있는 와중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액정에는 시호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지수는 곧바로 버튼을 밀어 전화를 받았다.
“네, 선생님. 무슨 일 있으세요?”
-지수 씨, 생일 축하해요!
전화기 너머 시호는 다짜고짜 지수에게 축하 인사를 했다. 시계를 보자 11시 5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기일이자 지수의 스물네 번째 생일이 지나기 2분 전이었다. 자신은 시호에게 생일을 알려준 적이 없으니 분명 메신저에 등록된 대화 상대의 생일 알림을 봤을 것이다. 그것도 방금 막.
“성인이 무슨 생일을 챙겨요, 야하게.”
지수는 쑥스럽고 멋쩍어 괜히 툴툴거리듯 말했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자신이든 주변이든 챙길 수 있으면 최대한 챙기는 게 맞아요. 이거 너무 미안한데요, 내가 오늘 하루 종일 정신이 없다가 이제야 폰을 확인하는 바람에…
“마음만 받을게요, 그럼 내일 봬요.”
오늘의 할당량을 아직 마치지 못한 걸 깨닫고 조급해진 지수가 서둘러 통화를 마무리하려던 그때였다.
-내일은 메이드복 입고 오지 마요. 찬거리도 사오지 말고요. 하루 종일 밖에서 먹고 놀아요.
놀란 지수가 대답할 새도 없이 통화는 끊어졌다. 지수는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 키보드로 손을 가져갔다. 화면에 시선을 집중하려 했지만 시야가 흐려져 손등으로 눈을 슥 문지르자 물기가 묻어나왔다.
오랫동안 지수에게 생일은 챙길 기념일이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기일과 겹쳐서가 아니었다. 옆에서 축하해 줄 사람도 환경도 없이 혼자 촛불을 켜고 있어봤자 자신이 혼자임을 뼈저리게 실감할 뿐이기 때문이었다. 당연한 듯 옆에서 자신을 생각해 주는 시호의 존재야말로 지수에게는 선물이었던 것이다.
루나에게 수요일은 가장 학교에 가기 싫은 날이었다. 1, 2교시는 전공과목인 음악사가 있고, 7, 8교시에는 빛나의 얼굴을 봐야 했다. 음악사는 고등학교 때처럼 지루한 역사 이야기를 들으며 열심히 펜을 놀릴 뿐인 수업이라 좀이 쑤셨다. 빛나의 경우 그날 이후로 딱히 자신에게 시비를 건다든지 불이익을 준다든지 하는 적대 행위를 하는 것도 아니고, 강의 내용 자체는 인기를 반증하듯 매주 충실했지만, 같은 남자를 사이에 둔 연적과도 같은 입장인데다 상대는 여러 가지로 자신에게 없는 것들을 잔뜩 가지고 있으니 그게 시호에게 얼마나 매력적으로 느껴질지 생각만 해도 위가 따끔거렸다.
교수가 2교시를 일찍 끝내주어 다음 수업까지 시간이 애매하게 남은 몇몇 학생들은 여고에서 하던 대로 여기저기 모여 수다를 떨었다. 과는 물론이고 교내에 친구가 한 명도 없는 루나는 공강 시간 내내 혼자 있을 곳을 찾아다니곤 했다. 루나 자리 근처의 학생들은 최근 학내 게시판에서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신촌역 킬 빌’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 찍어 게시판에 올린 동영상은 위아래 까만 양복을 입은 미녀가 삼십 초 만에 공갈 협박을 하던 남자 두 명을 때려눕히고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고, 그 밑에는 제각기 목격자를 자청하는 사람들이 썰을 풀고 있었다.
‘독립 영화나 유튜브 촬영이라도 했나 보네.’
루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90분 연속으로 재미없는 내용을 억지로 머리에 쑤셔 넣고 나니 니코틴이 절실하게 마려웠다. 바로 인접한 학생회관 뒤뜰에 공용 흡연장이 있다는 것은 음악대학의 장점 아닌 장점이었다.
계단을 내려가 건물 밖으로 나오자 익숙한 장발과 기타 가방의 뒷모습이 루나의 눈에 띄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봄 잠바를 입은 세미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루나는 놀라서 다급히 그를 돌려세웠다.
“세미야, 여긴 어쩐 일이야? 올 거면 연락이라도 주지.”
“언니 놀라게 하려고 그랬지. 역시 음악대학 건물이 맞구나?”
“어휴, 배짱 한번 두둑하네. 나 아침에 여기 수업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그럼 전화해야지, 살려달라고.”
세미는 혀를 빼꼼 내밀었다.
학생회관 뒤쪽의 학생식당에 들어서자 약속이라도 한 듯 세미는 두 사람 분의 짐을 들고 창가 쪽에 재빨리 자리를 잡고 루나는 왕돈가스 정식과 핫초코 두 잔을 키오스크로 주문했다. 루나는 영수증을 들고 세미의 맞은편에 앉았다.
“너 오늘 계 탄 거야. 나한테 학식 얻어먹은 애는 네가 처음이야.”
“역시 한국은 학연, 혈연, 지연이네! 내가 Y대생 동료 덕분에 학식도 먹어 보고.”
루나의 말에 세미는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생각해 보니 밴드 동료를 밀키웨이 밖에서 사적으로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당장 얼마 안 남은 공연 준비도 있어 그런 유대를 쌓을 기회가 적었던 것도 있다. 비교적 친분이 오래 되어 보이는 저들에 비해 자신은 아직 이방인에 가까웠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 준 세미가 루나는 내심 고마웠다.
“세미가 열아홉 살이었지? 오늘은 학교 쉰 거야?”
루나는 그동안 궁금했던 걸 완곡하게 물었다. 가볍게 물을 개인 사정은 아니었지만, 단둘이 있을 기회가 앞으로 얼마나 있을지 알 수 없는 이상 어느 정도는 과감하게 진도를 뺄 필요가 있었다.
“나 블랙고시. 언니들이랑 같이 밴드 하고 싶어서 깔끔하게 자퇴했어.”
세미는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루나는 내심 한숨을 돌렸다.
“그럼 너도 내년부터 학식 먹으면 되겠네.”
“응? 학식이야 언니가 사 주면 되잖아.”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고…”
루나가 무심코 완곡 화법을 해제하기 직전, 세미가 전광판을 보고는 “어, 우리 거 나왔다!” 라 외치며 영수증을 들고 배식구로 뛰어갔다. 루나는 살짝 진이 빠지려는 걸 붙들었다.
“‘그 얘긴 하지 마라’, 이건가…”
잠시 후 세미는 트레이를 들고 와 앉았다. “언니, 왜 돈가스를 하나만 시켰어?” 궁금해 하는 세미에게 핫초코 한 잔을 밀어놓고 루나는 돈가스를 자기 앞으로 끌어 와 썰기 시작했다.
“난 어차피 이거 1/3 이상 못 먹어. 한 조각만 얻어먹을 테니까 나머진 네가 다 먹어. 모자라면 다른 것도 시켜줄게.”
“…피, 나 그렇게 많이 안 먹거든?”
세미는 루나가 베푸는 아량에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애써 숨기고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루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날이 닳은 나이프로 돈가스를 힘겹게 썰어나갔다.
“…”
“아, 나 언니 보는 책 좀 봐도 돼?”
침묵이 어색했던 세미는 루나의 가방에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러든지.” 루나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가방을 연 세미는 ‘인문사회수학’이란 라벨이 붙은 책을 꺼냈다.
“무슨 작곡 전공이 수학을 배워?”
“앞에 ‘인문사회’가 붙어 있잖아. 밸런스 패치용이란 거겠지. 그래도 다들 수능 수학을 공부하고 와서 별 무리 없이 듣더라. 난 조졌지만.”
“왜? 언니는 아니야?”
“난 특기자 전형이라 입상 경력이랑 실기만 봤거든. …자, 이제 먹어.”
루나는 다 썬 돈가스 접시를 세미에게 밀어 주었다. 세미는 어느새 교재를 눈이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음…, 음…, 이런 내용을 배우는구나. 검고 수학보다는 조금 어렵네. …다른 것도 좀 볼게.“
세미는 뒤이어 ‘대학영어’ 교재를 꺼내 펼치고는 중간 중간 고개를 끄덕거리며 읽었다. 루나는 포크로 돈가스를 한 조각 찍어 입에 넣으며 말했다. “대학 오면 이런 식으로 하기 싫은 것도 잔뜩 해야 돼. 불쌍하지?”
“그렇구나.”
이미 교재에 정신이 팔린 세미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보다 못한 루나가 세미에게 손수 한 조각씩 먹여 주는 모습을 학생들은 신기한 듯 보며 지나갔다.
결국 루나가 전부 먹여주고 난 뒤에도 세미는 교재를 보느라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앉을 자리가 없어 트레이를 든 두 학생이 “저기요, 혹시 자리 있나요?” 하고 (아마 용기를 쥐어짜내)눈치를 주고 나서야 독서를 종료하고 학생식당을 나왔다.
“아, 잘 먹었다!”
세미는 배를 통통 두드리며 루나 옆을 걸었다. “오늘 세미의 새로운 면모를 봤네.” 루나는 난처한 듯 웃음을 지었다. 하긴 연습할 때를 돌이켜보면 몰입과 끈기는 세 사람 중 단연 최고였다. 확실한 동기만 있으면 자기가 만족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나아갈 아이였다.
그렇다면 조금 등을 밀어주는 정도는 해도 괜찮을 것이다.
“모처럼 왔는데 합주 한번 해볼래?”
“합주? 우리 둘이서?”
“그건 밀키웨이에서도 할 수 있는 거고, 피아노과나 관현악과 중에 지금 공강인 애들이 연습실에서 실기 연습하고 있을 거거든. 두세 곡 정도만 어울려줄 수 있냐고 물어봐야지.”
“정말!? …근데 그 사람들이 하는 음악은 우리랑 꽤 다르지 않아?”
“너 그거 편견이다. 전공과목 중에 전자음악실기 같은 것도 있고, 세부 전공 상관없이 여기 학생들이 관심 있는 음악 장르 다 따지면 안 걸리는 게 없을걸. 밴드만 밴드 음악을 하는 게 아냐.”
“…그래도 혹시라도 방해한다고 괜히 안 좋은 소리 들으면…”
말과는 달리 기대에 부푼 세미의 표정을 보고 루나는 쿡 웃으며 말했다.
“정중하게만 부탁하면 돼. 걱정 말고 따라와 봐.”
루나와 세미는 복도를 돌아다니며 연습실 문 너머로 합주 상대를 물색한 끝에 유일하게 남자 둘만 있는 방을 두드렸다. 각각 피아노와 관현악 전공이었던 둘은 유아독존 땅꼬마로 악명이 자자한 루나가 들어오자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루나가 합주 얘기를 꺼내며 세미를 들어오게 하자 두 사람은 세미의 얼굴과 가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와, 어떻게 존재만으로도 천상의 하모니가 울리는 것 같지? 누나 혹시 남자친구 있어요?”
“바보야, 저렇게 예쁜데 남자친구가 없겠냐? 그, 혹시 누나 친구 중에 아직 솔로이신 분 혹시…”
“이것들이 물소 짓도 상대 봐 가면서 해야지! 얘 아직 미성년자니까 쇠고랑 차고 싶으면 계속 지껄여 봐라?”
루나가 주먹을 불끈 쥐며 버럭버럭 소리치자 두 사람은 “헉” 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미는 쭈뼛쭈뼛 다가와서는 꾸벅 인사하며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잘 부탁해요, 오빠들.”
“오! 그, 그래요! 한번 재밌게 놀아 봐요!”
파인 옷을 입고 상체를 숙이며 엉겁결에 가슴골을 노출한 건 결코 이 아이의 고의가 아니었겠지만, 남정네 둘이 얼굴이 벌개진 채 콧구멍을 벌렁거릴 정도로 효과는 확실했다. 루나는 윤아가 옷을 세미와 공유한다는 사실을 오늘만큼은 다행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두세 곡 정도만 맞춰달라고 할 요량이었는데 남학생들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두 시간이나 어울려 준 덕에 세미는 피아노와 바이올린 그리고 첼로 세션을 깔고 무려 스무 곡의 기타를 칠 수 있었다. 특히 세미가 어떤 곡을 요청하든 피아노 반주자가 적절한 애드리브를 깔아 준 덕에 바이올린을 켜는 남학생과 첼로를 켜는 루나가 손쉽게 따라갈 수 있었다.
마지막 곡을 끝내자 세미는 가슴에 손을 얹으면서 특유의 아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오늘은 정말 제 인생에 잊지 못할 날이에요. 언니, 오빠들 모두 고마워요.” 라는 풋풋하고도 올곧은 감상을 터뜨렸다. 남학생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두 사람을 배웅했다.
“우리도 간만에 좋은 일탈했어요. 숨통 터 줘서 고마워요.”
“만약 음대 지망한다면 다시 우리 학교에서 봤으면 좋겠어요.”
루나는 세미를 정문까지 바래다주기로 했다. 기왕이면 신촌역까지 배웅해주고 싶었지만 3시 수업에 늦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캠퍼스 한가운데를 나란히 걸으며 루나는 세미에게 말했다.
“…나쁘지 않지? 다음에 기회 되면 은수랑 윤아도 데려와. 버거보다 가성비 좋은 학식을 마침껏 대접해줄게.”
“…”
세미는 어딘가 처연한 눈빛을 한 채 말이 없었다. 루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채 침묵에 어울려주었다. 정문 앞에 다다르자 루나는 세미의 등을 툭툭 쓸어주며 말했다.
“조심히 들어가고, 내일 연습 때 보자.”
“저…, 언니! 실은…!”
“어. 난 너 오늘 못 본 거야. 비밀은 꼭 지켜 줄게.”
예상치 못한 대답에 세미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게 알았어?”
“너희 셋이 함께 자취하는데 네가 이 시간에 학교를 가는 게 아니면 언니들 따라 연습을 하거나 알바를 하거나 어딜 돌아다니거나 하겠지. 너 혼자 단독 행동을 한다고 하면 은수나 윤아가 필히 행선지를 물었을 거고, 여긴 줄 알았으면 바로 나한테 연락해서 너 마중 나오라고 했을 거고. …맞지?”
“…언니 너무 눈치가 빨라서 조금 싫어지려고 한다…”
“연장자를 우습게보면 안돼요.”
“사실은…”
뭔가 말하려는 듯 우물쭈물하는 세미의 볼을 루나는 양손으로 몇 초간 꼬집었다. 그리고는 뒤돌아서서 걸어가며 어깨 너머로 손을 흔들었다.
국내 굴지의 놀이공원 ㅇ랜드의 대관람차는 즐거웠던 하루가 저무는 걸 아쉬워하듯 이따금 끼긱 소리를 내며 어느덧 꼭대기에 다다라 있었다. 원피스 위에 숄을 걸친 지수는 창밖에 비치는 밤의 놀이공원의 전경을 구경하고 있었고, 시호는 그런 지수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노는 센스는 부족한 아저씨라서 기껏 생각해낸 게 이런 데였는데, 오늘 즐거웠나요?”
시호의 물음에 지수는 고개를 돌리고 혀를 살짝 내밀었다.
“네. 특히나 격렬한 어트랙션을 탈 때 선생님의 표정이요.”
“…글쎄 소싯적엔 눈 하나 깜짝 않고 탔는데 말이죠, 벌써 담이 작아졌나…”
지수는 자기가 손 붙들고 앞장서서 끌고 간 주제에 하나같이 타는 내내 오만상을 찌푸린 시호를 떠올리며 쿡쿡 웃었다. 지수가 웃음을 그치자 시호는 입을 열었다.
“나도 오늘 하루 지수 씨가 활기찬 걸 보며 즐거웠어요.”
“…활기찼나요, 오늘 제가?”
“물론이죠, 몇 번이나 눈동자에 생기가 돌던데요.”
그 말과 함께 빙긋 웃는 시호의 얼굴에 지수는 순간 스스로에게 들릴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휙휙 내젓고는 이성을 되찾았다. “무슨 일 있어요? 어디 아파요?”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시호에게 지수는 애써 웃어 보였다. “갑자기 살짝 피곤해서요. 오늘 정말 원 없이 놀았나 봐요.”
“열나는 건 아니겠죠? 그동안 무리를 시켰으니…” 시호는 지수에게 바짝 다가가 이마를 맞대며 열을 쟀다. 거짓말을 들킨 전적이 있고 아직도 그를 속이고 있음에도 의심 한 점 없이 천진하게 자신의 말을 믿어 주는 시호를 생각하면 가슴이 조일 듯 아팠다. 그리고 그때마다 지수는 자신의 결심을 환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