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unghoo Kim Sep 26. 2024

피그마리온의 눈물 (11)

세미의 말에 방금 전까지 환희에 차 있던 공간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세미의 어깨에 얹은 은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테이블로 걸어오던 윤아는 그대로 멈춰 서 버렸다. 루나는 멤버들을 보지 않은 채 여전히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어후, 벌써 취했나. 마시면 얼마나 마셨다고 환청이 들리네.”

은수는 세미에게서 떨어져 손부채로 얼굴을 부치며 이야기를 얼버무리려 애썼다. 세미는 벌떡 일어나서는 쐐기를 박듯 말했다.

“나 수능이랑 실기 준비해서 작곡과 가고 싶어. 언니, 허락해 줘.”

(꽝!!!!)

은수는 양손으로 테이블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놀란 루나는 일어서서 은수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말했다. “…은수야, 화부터 내지 말고 일단 세미 얘기 좀…”  

“닥치고 있어. 넌 좀 있다 얘기할 테니까.”

“루나 언니, 이 문제는 끼어들지 말아 줘.”

으르렁거리는 은수에 이어 윤아 역시 은수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루나에게 말했다. 윤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세미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어?”

“…”

“…세미야, 이럴 땐 솔직하게 말해줘. 다른 거 눈치 보지 말고.”

“…난주 언니 기억 나? 루나 언니 전에 있던 키보디스트.”

“하도 연습 제 때 안 나와서 언니가 잘라 버린 사람?”

“그 언니 피아노과였잖아. 큐베이스나 FL 쓰는 법도 가르쳐 줬고, 그래서 은수 언니가 어떻게든 키보드 음원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뭐 지식과 실력이야 지금까지 왔던 키보디스트 중엔 루나 언니 다음이었지. 그러면 뭐해, 매일같이 바쁘다면서 연락이 안 되는데. …세미야, 너도 알잖아. 그 사람은 그냥 우릴 두고 간 본 거야. 우리가 성공 못할 것 같으니까 빌미를 만들어서 나간 거고.”

“…하지만 그만큼 우리가 믿음을 못 준 것도 사실이잖아?”

“…윽!”

윤아 뒤에 서 있던 은수는 이를 악물고 소리 지르는 걸 참았다. 루나는 혹시라도 은수가 달려들까 봐 노심초사하면서도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럼 세미도 은수 언니랑 내가 못 미더워졌어? 그래서 나가고 싶은 거야?”

“아냐…! 조금이라도 언니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으니까, 일단 합격하고 돌아오겠다는 거야!”

윤아의 말에 반박하는 세미의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은수가 윤아를 밀쳐 내고 세미 앞에 섰다.

“구구절절 말할 필요 없어. 눈앞에 있는 사실은, 상경하고 처음으로 우리에게 온 기회를 네가 손수 발로 차 버리겠다는 거야. 안 그래?”

은수의 말은 조금의 비꼼도 없이 그저 잔잔한 파도와 같은 분노가 느껴졌다.

“언니…, 그래서 허락해달라고 하는 거야! 만약 언니들이 싫다고 하면 난…!”

“우리가 뭐라고 네 인생을 속박해? 우릴 진짜로 네 앞길 막은 양아치로 만들려고?”

방금 전까지 당당하던 세미의 표정이 점점 무너져 내려갔다.  

“너 검정고시 붙었을 때 우린 분명 기회를 줬어. 지금이라도 평범하게 살고 싶으면 집에 돌아가서 수능 공부하라고. 그때 우리랑 함께하겠다고 한 건 너야.”

“언니, 그치만 그땐…!”

“넌 우릴 배신했어.”

“언니!!!” “은수야!!” 은수의 폭언에 윤아와 루나는 크게 놀랐다. 여태껏 성난 얼굴로 버럭버럭 지르던 언사들을 합쳐도 지금 이 굳은 얼굴로 담담히 말하는 한 마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얼굴도 보기 싫으니까 내일 당장 집으로 돌아가. 나머지 짐은 택배로라도 보낼 테니까.”

(쨕!!!)

찢어질 듯한 파열음이 메마른 공기를 갈랐다. 루나와 윤아는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미는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오른손을 들고 씩씩거렸다. 은수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왼뺨을 감싸면서도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으윽…!” 세미는 눈물을 흩뿌리며 가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세미야!” 윤아가 다급히 뒤따라가려 한 그때였다.

“황윤아! 너도 나가고 싶어?”

은수는 평소보다 다소 절제된 어조로, 하지만 명백하게 분노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윤아는 돌아보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세미는 역시 착해. 나였으면 반 죽여 놨을 텐데.”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오늘밤엔 가게에서라도 자면서 반성하고 있어. 세미는 내가 달랠 테니까.”

그러고서 윤아는 가게 밖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은수는 맥이 탁 풀려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루나가 달려와 팔을 부축하려 하자 은수는 뿌리치고는 스스로 일어나 의자에 걸터앉았다.

“…정말 세미를 내보낼 거야?”

루나의 물음에 은수는 들은 체도 않고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어휴, 애들이 불쌍하지. 이런 성격파탄자를 리더라고…” 부아가 치민 루나가 주머니의 담배를 확인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너지?”

은수가 어느새 자세를 고쳐 앉고 루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가?”

“너잖아. 세미한테 바람 넣은 거.”

“…또 뭔 생사람을 잡는 거야. 내가 세미한테 바람 넣을 만큼 한가해 보여?”

“세미가 집에 갔다 온다며 자릴 비운 날이 있었어. 너네 학교 갔다 온 거잖아?”

루나는 속으로 놀랐지만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

“의심병도 이 정도면 중증이네. 증거 있어?”

“4월에 철원을 갔다 왔다는 애가 봄 잠바에 앞이 파인 옷을 입고 돌아왔는데 곧이곧대로 믿는 게 바보지. 게다가 걔네 부모님이 걜 얼마나 금지옥엽으로 키웠는데, 걔가 가슴골 다 드러나는 옷을 입고 집에 들어갔을 것 같아? 그래서 걔 친구들한테 연락해서 물어봐서 확인했지.”

‘안 되겠다, 세미야. 이젠 못 숨길 것 같다.’

루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럼 세미한테 직접 물어보거나 그냥 묻어두면 될 걸 지금 와서야 나한테 들이대는 건 무슨 저의야?”

“시기상 너 말곤 없어. 세미한테 무슨 말 했어? 뭐라 했기에 애가 저런 말을 하냐고.”

“캠퍼스 구경시켜 주고 밥 먹이고 타 과 애들이랑 합주시켜 준 게 다야. 왜, 내가 대학 오라고 한 마디라도 불어넣었을까 봐?”

“쓸데없는 짓이나 하고 있어. 왜 나한테 그런 얘길 한 마디도 안 했지?”

“내가 왜? 세미가 어린 애야? 너희들처럼 알바도 하고 자기 꿈도 확실한 아이야. 너희들이 세미의 엄마나 친언니라도 돼?”

그러자 은수가 와락 달려들어 루나의 멱살을 잡고 노려보았다.

“나하고 윤아는 세미가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냈어. 그리고 서울에 있는 동안은 우리 둘이 세미의 엄마고 친언니야. 들어온 지 두 달 남짓 된 게 어디서 주제넘게 나대고 있어.”

“근데 왜 나도 눈치 채고 있던 세미의 열망을 너희들은 몰랐을까? 그렇게 오래 알고 지냈고 소중하게 여긴다면서.”

은수의 폭언에 루나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받아쳤다.

“내가 말해줄까? 세미는 나를 통해 또 다른 세계를 본 거야. 혼자 방 안에서 악기나 뚱땅거리고 컴퓨터나 만지작거려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세계 말이야! 다양한 재능을 지닌 다양한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음악을 수련하고 고민하는 세계를…! 너희들이 보여줄 수 없던 세계를 말이야!”

“닥쳐….”

“알기나 해? 세미는 배움에 대한 열망이 큰 아이야! 학교 공부를 할 만한 머리도 충분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에 집중하느라 종종 주변에 소홀해지는 걸 제외하면 구김살 없고 밝은 성격이라 모두에게 사랑받을 아이야! 그런 애가 너희들에게 미움 받기 싫어서 스스로의 가능성을 제한한다는 건…!”

“닥쳐! 그런 건 진작 알고 있다고!”

은수는 루나의 멱살을 쥐고 흔들며 바락바락 소리쳤다. “닥쳐… 닥쳐…” 루나는 자신의 멱살을 쥐는 힘이 점점 약해지는 걸 느꼈다. 은수의 눈시울은 어느새 뜨거워져 있었다.

“우린 걔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우리조차 배운 적 없는 정석적인 음악을 가르쳐 줄 수도, 하다못해 그럴 수 있는 사람을 소개해줄 수도 없어! 그래서 어떻게든 기회를 잡아 뜨고 싶었어! 일단 떠서 안정 궤도에 들면 원하는 걸 할 수 있으니까!”

“…세미 역시 같은 생각을 했을 거야. 제도권에서 제대로 음악을 배우면서,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서, 자신을 다리 삼아 너희들이 성공할 활로를 뚫고 싶겠지. …아니, ‘우리’라고 해야 맞겠지?”

은수는 눈가에 눈물이 고인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루나를 바라보았다. 루나는 은수의 어깨를 붙들고 말했다.

“나한테도 레인드롭스는 구원의 동아줄이야. 너희들 덕분에 음악에 대한 열정을 되찾을 수 있었어. 한번 밴드에 실패했다고 손을 놓고 타성적으로 살고 있던 내게 너희들이 또 다른 기회를 준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다 같이 모여서 천천히 의논해 보자. 나한테 이미 너희들은 남이 아니니까.”

“…”

루나의 자상한 태도에 은수는 어느새 완전히 무장해제 되어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은수는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번쩍 들더니,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루나에게 건넸다.

“나 먼저 갈게! 난방 어떻게 켜는지 알지? 좋은 밤 보내!”

“…자, 잠깐! 나 혼자 이 아저씨 커버하라고!?”

상황 파악이 덜 된 루나는 열쇠를 받아든 채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쏜살같이 가게 밖으로 나가려는 은수를 다급히 불러 세웠다. “아 참!” 은수는 무언가 생각난 듯 루나를 돌아보았다.

“다다음 주까지 숙제야! 본선에 들고 나갈 신곡을 써올 것! 나도 윤아랑 세미랑 같이 써올 테니까!”

“은수야…”

“천재한테 마냥 맡겨놓기만 해서야 재미없잖아? 그럼 내일 낮에 보자! …좋은 밤 보내고!”

은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야, 기다려!”

다시 뒤돌아 선 은수는 붙잡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루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샤워를 마친 윤아는 순식간에 몸이 나른해지는 걸 느꼈다. 리허설하랴, 본 공연하랴, 설전을 벌이고 세미를 쫓아가 어르고 달래 데려오랴, 오늘 하루는 요 근래 통틀어 유독 힘든 날이었다. 방에 들어온 윤아는 겨우 진정되어 핫초코를 손에 들고 침대에 앉아 있는 세미에게 말했다.

“너도 씻고 오늘은 그만 자자. 내일 내가 언니 부를 테니까 셋이서 천천히 의논하고.”

나이트캡을 쓰고 맞은편 이층 침대 사다리를 붙들고 올라가려던 윤아는 세미가 버려진 강아지 같은 눈망울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언니…, 나 집에 보내지 마…”

“왜 그런 말을 해. 누가 널 억지로 데려간대? 설사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나도, 나랑 언니가 너를 두 눈 뜨고 놓아줄까봐?”

윤아는 세미 옆에 앉아 손등을 쓸어 주었다. 세미는 말을 이어나갔다.

“난 언니들 옆에 당당하게 있고 싶어.”

“언젠 비굴하게 있었어? 누가 우리 메보 겸 기타리스트를 뭐라 하겠어?”  

윤아는 너스레를 떨면서 방 문 앞의 인기척의 주인을 슬쩍 보며 검지를 입에 대었다. 세미는 띄엄띄엄 말을 이어나갔다.

“언니들이 나를 데리고 서울로 오려고… 우리 부모님 앞에서 무릎까지 꿇고… ‘세미는 저희가 지켜주겠습니다’라 했을 때… 난 세상을 얻은 것 같았어. ‘너희들처럼 고등학교도 졸업 못한 날라리로 살게 할 수 없다’는… 아빠의 말 한 마디 때문에… 둘이서 내 검정고시 비용까지 벌어 줬잖아.”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던가. 근데 어쩌겠어, 아버님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고…”

윤아는 머쓱해져서 볼을 긁적였다.

“그래서 나도 흔들리지 않았어. ‘언니들과 함께라면 셋이서 다른 걱정 없이 음악만 하고 살아도 되겠구나.’ 싶었어.”

“…”

“근데 루나 언니를 보고 알았어. …언니, 그거 알아? 루나 언니, 학교에서 아싸다? 나를 데리고 음대 건물 안팎을 돌아다니는데 아무도 아는 체를 안 했어. 심지어 뒤돌아서서 흘겨보는 사람도 몇 있었어.”

“…이야, 그건 좀 의외다. 실력도 있고 카리스마도 있어서 꽤 사람들이 따를 줄 알았는데.”

“그치? 우리한테는 그렇게 헌신적으로 대해 주잖아. 그날도 학교 사람들 대하기 어색할 텐데 나 합주 시켜주겠다고 몇 층에 걸쳐서 연습실을 기웃거리는 거야.”

“그만큼 세미를 마음에 들어 한 거 아냐?”

“생각해 봐, 학교 사람들하곤 나름대로 일 년을 얼굴을 봤겠지만 나는 서로 안 지 한 달 반 남짓이었다고. 아직 남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을 위해 보통 그렇게까지 해?”

“그건…”

“…그때 알았어. 부족한 게 없어 보이는 이 사람도 스스로를 바꾸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는 걸. 그래서 나도 마냥 제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됐어. 언니들이 나를 지탱해 줬듯, 언젠가 나도 언니들을 지탱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흐읍!”

세미의 말에 감정이 북받쳐 오른 은수는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손으로 억눌렀다. 고개를 들은 세미는 비로소 눈앞에 서 있는 은수를 발견했다. 윤아는 눈가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빙긋 웃었다. “그렇댄다, 이 바보야.”

“언니…!”

“세미야…!!!”

은수는 세미의 품에 달려들어 펑펑 울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는… 너랑 윤아 앞에서… 너무 무능력한 언니라서…! 혹시라도 너희들을 놔주는 게… 그나마 내 마지막 양심인 건가…! 언제나… 언제나…!”

“아냐…! 나야말로 미안해…! 흐흑… 좀 더 빨리… 말했어야 했는데…! 또 이렇게… 언니들을 힘들게…!”

“아이… 진짜! 겨우 애 달래 놨는데… 진짜… 눈치는 약에 쓸래도 없어…!”

윤아는 훌쩍거리며 두 사람을 끌어안고 머리를 맞대었다. 이날 밤 세 사람의 결속은 눈물과 함께 한층 더 강해졌다.       




“헉…, 허억…, 진짜… 더럽게… 무겁네…!”

루나는 시호를 들쳐 업고 테이블에서 무대까지 30m 가량을 기어오다시피 하며 기진맥진해 있었다. 무대 위에는 가게에서 잘 경우를 대비해 대기실에 비치해 둔 담요를 전부 꺼내 겹쳐 깔고는 난방을 틀어 놓았다. 담요 위에 시호를 내던지다시피 눕힌 루나는 무대 난간에 앉아 맨투맨을 펄럭거리며 땀을 식히고 있었다.

‘애들은 화해했겠지? 근본은 다들 정이 많은 녀석들이니까…’

루나는 세 사람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아마 은수와 윤아는 결국 세미가 원하는 대로 해 줄 것이다. 솔직히 내일부터 당장 입시를 준비한다고 해도 빠듯한 감이 있지만, 실기를 자신이 도와준다면 Y대는 무리라도 세미 실력에 인서울은 무리 없이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올해는 더 이상 밴드 활동을 같이 하기 힘들 것이다. 기껏해야 6월 인디퍼레이드 본선 무대까지가 한계일 것이다. 6월에 전국 고3 학생과 재수생 전원이 응시하는 수능모의고사가 있는 걸 생각하면 세미에겐 치열한 고비가 될 것이다.

‘수능은 내가 도와줄 수 없으니까…’

생각이 복잡해지자 어쩐지 뒤통수가 당겨 오기 시작했다. 뒤통수엽과 관자엽 사이를 꾹꾹 누르거나 고개를 휘휘 젓다 보니 옆의 세상 모르게 자고 있는 시호가 눈에 들어왔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역시 여자가 반할 매력은 눈곱만큼도 없는 남자였다. 머리는 길러 뒤로 대충 묶고 다니고, 그러다보니 커다란 머리가 그대로 노출되고, 키가 커 봤자 그를 살릴 패션 센스를 갖추지도 않았고, 학벌만 번지르르하지 주변에서 그 나이에 가질 만한 경제력도 없고, 무엇보다도 이성의 호감을 사기 힘든 직설적인 언행의 소유자다. 문제는 그런 남자를 자신이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과 인연, 외모, 스펙 어느 면에서도 자신보다 우세하고 이미 몸까지 섞은 연적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연적보다도 더 예쁜 외모의 동료를 시호가 나름 소중하게 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득 아까 전 술 게임 때 일이 떠올랐다. 만약 윤아와 시호가 단둘이 술에 취한 상태로 있다면, 그리고 윤아가 용인한다면, 시호는 윤아를 건드릴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시호는 자기 입으로 빛나가 여자친구가 아니라고 했고, 빛나 역시 부인하지 않았다. 윤아 역시 남자친구가 없었다. 게다가 둘 다 성인이다. 나이 차이가 좀 있다고 해도 그건 제3자가 젠더로서 갖는 생리적 거부감일 뿐이다. 어떤 윤리적 터부도 걸려 있지 않음에도 윤아 같은 미인을 취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윤아가 자신의 팀 동료라는 건 여기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신은 시호의 여자친구도 아니니까.

홀로 번뇌에 빠진 채 시호를 보고 있자니 자신이 이런 남자에게 빠져 내적 갈등을 자초하고 있다는 사실에 부아가 치밀면서도 괜히 그의 입술이 탐스러웠다. 입가는 미처 못 깎았는지 잔수염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손을 살짝 갖다 대니 따끔따끔했다. 문득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이 떠올랐다.

‘…내가 먼저 어프로치하고 아저씨가 술김에 그걸 받아들여도 아무 문제없잖아?’

루나의 눈동자에는 점점 욕망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옷가지를 하나둘 벗어던진 끝에 전라 상태가 된 루나는 무대에 서자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차가운 공기 때문일까, 바로 몇 시간 전까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연주하던 감각 때문일까, 앞으로 자신이 벌일 일을 상상했기 때문일까, 머리 한편이 멍해진 루나는 알 수 없었다. 주저주저하면서도 루나는 천천히 시호에게 다가갔다. 담요 위로 올라간 루나는 시호에게 몸을 바짝 붙이며 다리를, 허리를, 가슴을 타고 얼굴 가까이까지 나아갔다.

루나는 시호의 얼굴에 대고 ‘당신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어 버렸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것이 터무니없는 말임은 자기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처음 그의 품에 안겨 보호를 요청한 그날부터, 매일 퇴근길에 동행해 달라고 한 것도,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그의 따뜻함에 마음을 드러내 버린 것도, 그의 말에 용기를 얻어 바뀌고자 노력한 것도, 지금 이렇게 기정사실을 만들겠다고 알몸으로 그를 끌어안은 것까지 모두 명백하게 자신이 선택했다. 그런 말을 하는 게 책임전가나 다름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루나는 스스로 말을 꺼낼 수 없게,

“으음…”

시호의 입술로 자신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그 순간 루나는 시호의 몸이 움찔하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살짝 입을 떼고 시호의 얼굴을 보았다. 시호의 놀란 눈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것도 잠시, 루나는 다급히 검지를 시호의 입에 갖다 대고 말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아무 것도 묻지 말아 줘요. 그저 오늘밤만 아저씨를 나한테 줘요.”

“…!”

“나를 좋아해 달라고 말 안 할게요. 몸으로 아저씨를 속박하기 싫어요. 그래도 처음이니까… 오늘밤만… 오늘밤만 날 연인처럼 아껴 주면 안돼요…?”

루나는 시호의 가슴팍을 부여잡고 울먹거렸다. 스스로도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 난 꼼짝없이 이 사람에게 빠져 버렸구나.’

“…미안해요, 그렇게는 안 돼요.”

시호는 몸을 비틀거나 무리하게 일으키지 않고, 그저 손으로 루나의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정말이에요! 매달리지 않을게요! 원한다면 앞으로 아는 체도 안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오늘밤만…!”

“그럴 순 없어요. 루나 양에게 그런 잔인한 짓은 못 해요.”

루나의 애원에도 시호의 대답은 단호했다. “…나 그만 몸 좀 일으켜도 될까요?” 시호의 말에 루나는 비틀비틀 힘없이 물러났다. 시호는 자신의 양복 상의와, 깔고 있던 담요 한 장을 루나에게 덮어주었다. 시호는 루나에게 등을 돌린 채 입을 열었다.

“루나 양을 어린애로 보기 때문이 아니에요. 나이가 몇 살이든 루나 양은 내가 아는 가장 이지적이고 성숙한 여자 중 한 명이에요. 거기에 재기 넘치고, 매력적이고, 멋지고요.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남자였으면 애저녁에 고백했을 거예요.”

웅크린 채 땅바닥을 응시하고 있던 루나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없어요, …려 둬요…”

“응? 뭐라고 했어요?”

“…필요 없어요. 혼자 내버려둬요.”

“집에 가서 자야죠. 뒤돌아보고 있을 테니까 어서 갈아입─”

“나 지금 차였다고요! 제발 그냥 좀 가 줘요!”

루나가 버럭 내지른 울음 섞인 말에 시호는 가슴 한쪽을 창으로 푹 찔린 느낌이었다. 여자가 우는 모습은 몇 번을 봐도 참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곳에 혼자 남겨 두고 갈 수도 없었다.

시호로서도 방금 전 상황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온몸이 바닥에 내던져지는 느낌과 무언가 입술에 닿는 감촉에 잠에서 깨어 보니 알몸 상태의 루나가 자신을 끌어안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시호의 이성은 만약 여기서 놀라거나 거부 반응을 보이면 루나가 평생의 상처를 입게 될 거란 생각에 미쳤고, 그에 따라 최대한의 평정심을 발휘해 루나를 설득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나는 오늘 실연을 당했고 상처받았다. 루나는 웅크린 채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게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시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용기를 냈다가 좌절한 상대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그가 가능한 빨리 자신을 회복할 수 있게 손이 닿을 거리에서 응원해 주는 것 정도이다.      




자신이 얼마나 울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의식이 끊겨 있었고, 다시 의식이 든 건 포근한 온기와 더불어 조금씩 들썩거리는 느낌과 함께였다. 루나가 눈을 뜨자 보인 건 익숙한 말총머리였다. 시호는 루나를 업은 채 숨을 헐떡거리며 신촌역 1번 출구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아저씨…! 지금 뭐하는 거예요!?”

“하아…, 하아…, 일어났어요? 하아…, 하아…”

시호는 겨우겨우 대답하면서도 멈춰서는 일 없이 걸었다. 루나는 질겁했다.

“일단 내려 줘요. 잠들었으면 깨우든지 담요를 덮어주고 가든지 하면 될 걸, 왜 이렇게까지 무모한 짓을 해요?”

시호는 바들거리며 루나를 내려주고는 한동안 숨을 돌렸다. 이윽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런 데서 자면 몸 축나요. 택시도 없고, 깨우긴 미안하고 해서…”

“우리 집 잠금장치 비밀번호예요. 어차피 나 깨워야 했다고요.”

“그랬다면 루나 양을 내 침대에 재웠겠죠. 난 바닥에 이불이라도 깔고 자고.”

막힘없는 시호의 말에 루나는 속으로 기가 찼다. ‘자길 덮치려 한 여자를 바로 그날 자기 집에서 재운다고?’ 그건 달리 말하면 시호에게 자신은 그런 관계가 될 것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는 상대란 뜻이 아닌가.

“아저씨, 나 아저씨 좋아해요.”

“…”

“사람으로서, 친구로서, 그리고 남자로서.”

루나의 말에는 애절함보단 일종의 자포자기가 느껴졌다. 시호는 대답이 없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자신들이 사는 빌라를 향해 걸었다.

가로등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덧 빌라 앞 공터가 나왔다. 여느 때라면 공터 계단에 나란히 앉아 달을 보았겠지만 오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둘은 계단을 올라가서는 곧장 빌라 입구로 들어갔다. 4층까지 올라가서는 시호가 열쇠를 꺼내려 할 때였다. 뒤에서 루나가 와락 끌어안는 느낌이 들었다. 루나는 시호의 등에 얼굴을 기댄 채 말했다.

“…좋아한다는 말보다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었는데, 잊고 있었어요.”

“…”

“고마워요…. 아저씨 덕에 내 안의 소크라테스를 되찾을 수 있었어요.”

“…”

“내가 아저씨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정녕 없는 건가요? …아저씨가 아파서 눈물을 흘릴 때, 곁에서 눈물을 닦아 주는 것도, 난 해줄 수 없나요?”

“…”

시호는 천천히 루나의 팔을 풀고는 돌아보았다. 그리고 무릎을 숙여 루나와 눈높이를 맞추고는 담담히 말했다.

“루나 양. 나도 루나 양이 좋아요. 어쩌면 루나 양이 나를 좋아하는 것보다 더.”

“그렇다면…!”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가진 그늘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요. 루나 양이 그 속에서 열정을 잃고 나에게 찌들어 버리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시호는 루나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이것이 이별을 고하는 제스처임을 루나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첫 번째 사랑이 오늘 종언을 맞았음을 루나는 이번에야말로 뼈저리게 실감했다.     




-…나에게 찌들어 버리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겁쟁이.”

자신의 방에서 지수는 헤드폰을 벗으며 중얼거렸다. 시호의 양복 상의 안감에 교묘하게 붙여 둔 도청기는 홍대 근처 지하에서부터 신촌역 부근까지 한결같은 통신 감도를 자랑했다. 덕분에 예상치 못한 루나의 당돌한 대시와 처절한 실연까지 생생하게 듣게 되었다.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잠시 기분을 가다듬고는 지수는 한창 번역 작업 중인 워드 창을 아래로 내리고 오른쪽 트레이 아이콘 중 커서를 갖다 대어 HimitsuCam이란 이름이 뜨는 걸 더블 클릭했다. 곧바로 시호의 스탠드 갓 안쪽에 붙여 둔 초소형 카메라가 방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전송했다. 시호가 비통한 표정으로 방에 들어와서는 상의를 아무렇게나 침대에 벗어 던지고 의자에 앉았다.

내일은 일요일이다. 시호는 지수와 배드민턴을 치러 나가지 않는 한 하루 입은 양복을 드라이클리닝을 맡기고자 세탁소를 들르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월요일 아침에 시호가 운동을 나간 사이 양복에서 도청기를 회수할 여유는 충분하다.

시호가 빛나와 방에서 얼마나 뒹굴든, 렌즈를 통해 집에서 모니터로 몇 번을 보든 지수는 상관없었다. 만약 오늘밤 루나와 선을 넘었더라도 딱히 지수가 안절부절못하거나 부아가 치밀 일은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은 창작의 양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빛나처럼 슬슬 시호를 속박할 듯한 위험한 수준까지만 치닫지 않으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가진 그늘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요.


“그늘 말이지…”

지수는 시호의 말을 떠올리며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늘 없는 사람은 없으며, 하물며 훌륭한 창작자는 자신의 그늘까지 곱씹은 끝에야 불후의 역작을 만들 수 있다는 게 지수의 신념이었다. 그러나 지수는 그와 별개로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그늘까지 함께 짊어지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사실을 시호를 사랑하는 빛나와 루나를 통해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그 마음이 때로 독선적이고 이기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진실마저 말이다.


‘한루나의 슬픔과 좌절까지 소설의 양분으로 삼는 거예요, 선생님. 그것이 선생님이 할 수 있는 그에 대한 최선의 전별입니다.’   
이전 10화 피그마리온의 눈물 (1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