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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Sep 30. 2024

피그마리온의 눈물 (13)

병원 측에서 지하에 마련해 준 빈소에 사흘간 왔다간 조문객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소년의 부친을 담당하던 출판계 관련자 두어 명과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친척들 서넛을 제외하면 결국 대부분 동네 사람들이었다.

상주 완장을 찬 소년이 얼굴에 황망함을 드리운 채 주저앉아 있는 사이 밀린 병원비를 납부하고 장례지도사를 불러 일련의 절차를 처리해준 사람은, 불과 두어 달 전 참척을 당한 소녀의 아버지였다. 후배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소년을 대신해 조문객들과 인사를 주고받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소녀의 죽음 때 이미 다 소진해 나오지 않는 줄 알았던 소년의 눈물은 화장장에서 터지고 말았다. 오열하는 일 없이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다가 실신해 버린 소년을 대신해 납골당에 유골 항아리를 반입하고 등록한 건 역시 소녀의 아버지였다.

소녀의 죽음 때부터 이미 위태롭던 소년의 상태는 부친상을 계기로 급격히 악화되었다. 학업은 고사하고 그렇게 꾸준히 쓰던 소설도 내팽개친 건 물론 식음을 전폐한 채 매일같이 누워 있기만 했다. 위로 차 들른 소녀의 아버지가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꾸조차 안 했다. 더 이상 그 몰골을 보고 있기 힘들어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는 소년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진아야 …보고 싶어…” 라 중얼거리는 걸 듣고는 소년의 등을 팡팡 때리며 울부짖었다.

“이 녀석아…! 이렇게 늪에 빠져 있으면 내가 감사하겠느냐, 진아가 좋아하겠느냐…! 나는 애비니까 가슴에 묻고 살 수밖에 없을지언정… 앞으로 살아갈 날이 창창한 녀석이 이 무슨 미련한 짓이야…!”

학교 측에서는 소년에게 당월 말까지 유고결석을 허용했고, 후배 소녀는 하루도 빠짐없이 집에 들러 소년의 상태를 확인하고 집안일을 해 주었다. 처음에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던 소년은 일주일째부터는 “오늘도 자살 안 하고 버텼어.” 라며 자학적인 농담을 던지기 시작했고, 월말쯤에는 후배와 함께 집안일을 하게 되었다.

유고결석 마지막 날, 후배가 집에 들어서자 본 것은 반짝반짝 윤이 나는 바닥과 창문 그리고 식탁 위에 차려진 8첩 밥상이었다.

“오전에 동네 돌아다니며 떡 돌렸어. 내가 반푼이라 여태껏 감사 인사를 깜빡하고 있었지 뭐야. 근데 오히려 찬거리를 잔뜩 받아버려서 면목이 없네. 너희 집 몫도 있으니까 갈 때 가져가.”

앞치마 차림의 소년이 서툰 스냅으로 프라이팬의 전어를 지지며 말했다. 후배는 감격스러운 나머지 소년을 꼭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가 위험하다는 걸 인지하고 단념했다.

식탁에 마주앉은 두 사람이 한창 식사를 하던 도중, 소년은 불쑥 말을 꺼냈다.

“나 Y대 물리학과로 교차지원할 거야.”

수저를 든 후배의 손이 멈췄다. 후배가 천천히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눈빛은 분명 빛나고 있었지만 그것은 자신이 익히 알고 또 좋아하던 그것과는 명백히 달랐다.

“아, 딱히 진아에 대한 미련 때문만은 아니야. 떠난 애한테 매달려봤자 아무 소용없잖아.”

‘그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긴 해…? 선배 애초에 물리학에 관심 있던 적 없잖아…?’

“그저 한번쯤 알고 싶어서 그래. 그 녀석이 왜 그렇게나 그걸 전공하고 싶었는지…, 그 끝에서 무엇을 보고 싶었는지. 그게 녀석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최선의 전별이라 생각해.”

소년은 후배를 마주보며 말했지만, 후배는 소년의 요사스런 빛을 띠는 눈 너머에 비치는 게 자신이 아님을 확신했다. 한편으론 진학을 통한 진로 설정으로서도 터무니없는 발상이다. 고등학교 이과 과목에 대한 기초도 없이 교차 지원으로 물리학과를 들어가 봤자 뭘 할 수 있겠는가, 기껏해야 지진아 수준으로 수업을 따라가는 게 고작이다.

그러나 지금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목소리를 내어 지적했다간 그땐 정말로 소년이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당장 제일 중요한 건 오늘을 힘차게 살아낼 수 있는 원동력이다. 어차피 소년의 입시까진 일 년도 채 안 남았다. 그 동안에 불가항력적으로 목표를 수정할 가능성은…

‘…선배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야.’

…안타깝게도 희박하다. 강둑에서 어른의 키스를 하던 걸 자신에게 걸린 이후 소년은 미친 듯이 입시 공부에 몰입했고, 사설 모의고사에서 Y대 국문과를 충분히 노릴 정도로 점수를 끌어올렸다. 교차 지원을 위한 잉여 점수 정도는 수능 전까지 무리 없이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빛나야 워낙 성적이 좋으니까, 지금부터 Y대 말고 S대 국문과를 노리고 공부해 봐.”

‘…바보냐? 선배가 거기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왜?’

후배는 속에서 천불이 나는 것을 애써 숨겼다. 결국 진아냐고, 진아를 위해서라면 자신이나 소년의 꿈은 어찌 돼도 좋으냐고 버럭버럭 따지고 싶은 말이 목구멍 근처까지 치고 올라왔다. 그걸 입 밖에 내지 못한 이유가 소년의 재활을 우선해서였는지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미움 받기 싫어서였는지는 지금도 딱 잘라 대답할 수 없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이때만 해도 또 다시 비슷한 일에 두 사람이 시달리고 여적 친구 이상 연인 미만으로 지금까지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것이다.     




“맛있지? 아주 혀에서 살살 녹지?”

“냐아~옹(할짝, 할짝, 할짝…)”

“이보시게, 묘공. 자네와 내가 매일 이 시간에 여기서 대치한 지도 어언 다섯 달이 넘어간다네.”

“(할짝, 할짝, 할짝…)”

“털갈이를 했다고 그간 츄르에 길들여져 비대해진 몸뚱이를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할짝, 할짝…) …흐아아아아암…”

오늘도 지수는 이른 아침 출근길의 고양이에게 츄르를 헌납하며 만지게 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츄르를 다 빨아먹고 배가 불렀는지 고양이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식빵을 굽기 일보 직전이었다.

“인간계에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네. 하물며 사귄 지 다섯 달이 된 남녀는 이미 ABCDE, 갈 때까지 갔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지!”

“골골골골골…”

“또 인간계에서 성현으로 칭송받는 맹자께서는 人不可以無恥, 사람은 수치심이 없을 수는 없다고 하셨네. 자문해보게, 고양이가 인간의 섬김을 받는 동물이라면, 과연 고양이가 수치심을 알아야 하겠나, 몰라야 하겠나?”

“골… 골…”

“그렇지! 다섯 달에 걸친 츄르라는 헌신에 대해 쓰담쓰담조차 허용하지 않는다면 이는 인간과 가장 가까이 공존한다는 고양이로서 수치스럽고 몰염치한 일이 아니겠는가!”

“(Zzzzzz…)”

절찬리에 동양철학까지 끌어들여 등을 만지고 싶은 자신의 욕구를 정당화하는 냥스라이팅을 펼치는 지수의 말은 귓등으로도 받지 않은 채 고양이는 아침잠에 돌입했다. 지수는 입가에 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래…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하나의 몸짓이 더욱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법이지. 자넨 꿈속에서 털공이라도 굴리고 있게. …그럼 실례하겠네.”

손끝을 등에 대어도 고양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지수는 손끝을 이용해 등을 쓸기 시작해 점점 손가락 면, 손바닥, 이윽고 손 전체로 등을 어루만졌다. 과연 그쯤 되자 고양이도 눈치를 채고 살며시 눈을 떠 지수를 보았다.

“골골…”

고양이는 이내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지수는 감개무량한 듯 표정이 풀어져버린 얼굴을 하면서도 꿋꿋이 사극 말투를 고수했다.

“…마침내 자네의 등을 허락한 건가! 아아, 실로 기념할 만큼 기쁜 날일세. 자네가 보인 친애에 대해 내 앞으로도 신의를 저버리지 않도록 하겠네!”

그때였다.

“엄마! 저 누나 이상해!”

길 맞은편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순간 고양이의 귀가 쫑긋하더니 몸을 벌떡 일으키고는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다. 반사적으로 돌아본 지수의 눈에는 한껏 원망이 깃들어 있었다. 이쪽을 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천진난만하게 웃는 아이의 눈을 옆의 엄마가 황급히 가렸다.

“…저런 사람은 길에서 봐도 아는 척 하면 안 돼…!”

지수를 뒤로 한 채 모자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져 갔다. ‘거 초면인 사람한테 그렇게까지 말을…’ 혀를 쯧쯧 차며 일어난 지수의 눈에 문득 자신이 입은 메이드 복장이 비쳤다. 지난 다섯 달 동안 매일같이 입고 가사 일을 하고 노트북 앞에 앉아 있다 보니 어느새 남이 자신의 복장을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쓰지 않게 된 것이다.

‘습관이란 게 정말 무서운 거구나…’

메이드복을 입은 여자가 길고양이랑 사람처럼 이야기하는 모습은 애니메이션에서나 용납될 장면이다. 현실에서 그랬다가는 바로 마약수사반에 임의동행을 당해서 머리털부터 음모까지 싹 채취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하물며 자신은…

“자, 오늘도 일하러 가 볼까!”

더 이상 잡생각이 들기 전에 지수는 손바닥으로 뺨을 탁 치며 기분을 전환했다. 이런 데서 미주알고주알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있느니 이런 자신을 받아들여주는 공간에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는 게 훨씬 건설적이다. 오늘 점심 메뉴는 시호가 좋아하는 양고기를 준비했다. 자연스레 맥주를 곁들이게 되겠지만 오후에 공터에서 배드민턴 한 번 돌려주면 술기운 따위 싹 날아갈 것이다.  

담배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배드민턴에서 지수의 페이스에 철저히 말리던 시호는 어느새 실력이 일취월장해 지수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매일같이 츄르를 먹어 비대해진 고양이와는 대조적으로 시호는 다섯 달 동안 군살도 빠지고 혈색도 좋아졌다. 조만간 건강진단을 받으면 이 년 전과는 확연히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다. 처음 봤을 때 헐떡거리며 오르던 과학관까지의 계단도 지금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부 시호가 스스로의 의지로 스스로를 변화시킨 것이지만 그걸 유도한 게 자신임을 생각하니 지수는 희열을 금치 못했다.

‘…이 정도 간섭은 전혀 문제없잖아?’

빌라 계단을 올라가며 지수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시호의 절반을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 시호를 위해서라면 당사자가 원하든 원치 않든 어떤 짓이라도 눈 하나 깜짝 않고 감행할 수 있는 사람, …시호가 스스로의 경지에 도달하는 데 결코 도움이 안 될 방해자.

4층 문 앞에 선 지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천천히 내쉬었다. 마치 입김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그 얼굴을 흩뜨려 버리듯.

‘난 당신과 달라요, 황빛나.’     


“이날까지 고생 많았어요, 신지수 씨.”

시호는 척 봐도 두툼한 봉투를 내밀며 지수에게 선고했다. 문이 잠겨 있지 않은 데에 첫 번째로 놀랐고, 운동을 나가 있어야 할 시호가 식탁에 차분히 앉아 있는 데 두 번째로 놀란 지수는, 시호의 권유로 마주 앉자마자 훅 들어온 통보에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선생님, 그게 무슨…”

“번역가 정시호는 오늘부로 폐업합니다. 남은 분량이 좀 있긴 한데 그건 혼자서 어떻게든 될 거고, 오늘 지수 씨 가자마자 출판사에 연락해서 더 이상 일을 안 받겠다고 할 거예요.”

지수는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고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그런 말씀을 하셨죠. 혹시 출판사에서 눈치라도 줬나요?”

“조만간 줄 거예요. …지수 씨한텐 말하기 민망한 사안이라고만 해 둘게요.”

‘…결국 일이 터지는구나!’

지수는 짚이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 이야기를 꺼내 봤자 시호에게 득이 될 게 없었다. 자신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고,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이번 달 말까지 계산해서 월급하고 퇴직금하고 +@까지 넣었어요. 어차피 지수 씨니까 그간의 급여도 다 관리해서 저축하고 있었을 테고, 나이도 젊고 능력도 출중하니 무슨 일을 하게 되든 걱정이 안 돼요.”

“선생님…”

“단 한 가지 걱정되고 또 송구스러운 건, 어쨌든 어느 일자리든 소위 스펙을 안 보진 않을 텐데, 지수 씨가 나에게 보여준 기술과 소질들은 하나같이 규격화하기 애매한 것들이란 점이에요. 그 때문에 얼마 동안이라도 지수 씨 옆에 붙어서 그런 부분들을 채울 수 있게 신경써주고 싶었는데, …내 상황이 생각보다 많이 촉박해졌어요.”

“…그런 것까지 신경 안 쓰셔도 돼요. 혼자서 잘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해요. 지수 씨가 어느 학교에서 뭘 배웠는지, 성적은 어떻게 받았고 무슨 대외활동을 했는지 전부 긁어모아서 나에게 보내요.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이 정리되면 말해줘요. 내 인맥이나 아는 사람 인맥 다 동원해서 최대한 괜찮은 곳에 포트폴리오 넣으며 추천해줄게요. 석사에서 끝난 채 번역만 십 년 한 잉여라도 일단 나름의 연줄은 있거든요.”

시호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러나 아무런 전조도 예고도 없이 하루아침에 이런 결정을 전달하는 걸 지수는 납득할 수 없었다. 자신이 예상하는 ‘그것’이 원인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조금 자극해 보기로 했다.

“선생님, 이거 정말 매너 없는 짓이에요.”

“…미안해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요.”

“…제가 지금 하루아침에 실직자 됐다고 불평하는 줄 아세요?”

“…”

“저한테 말하기 민망한 사안이 대체 뭔가요?”

“…말 그대로예요. 그냥 넘어가 줘요.”

“삼 년 반을 같이 일했어요. 그 중 삼 년은 재택이었긴 하지만…. 일에 관련된 애로사항인데도 저한테 못 말할 거라면… 정말 서운한 거라고요.”

지수는 짐짓 목소리를 깔고 감정이 실린 체를 했다. 시호는 지수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개인적인 일이니까 말 못하는 거예요.”

“생업에 지장을 끼칠 정도면 개인적인 영역은 벗어난 거죠! 상의 한번 할 생각도 안 들 정도로 제가 못 미더우신가요?”

“…미안해요.”

어느새 지수는 손부채를 하며 얼굴의 열을 삭히고 있었다. 적당히 자극만 하려고 했는데 상황에 이입하다 보니 어느새 자신마저 몰입해 있었다.

“…저는 그렇다 치고, 선생님은 앞으로 무슨 일을 하시려고요?”

“음… 일전에도 말했듯이 국비교육을 배워 볼까 생각중이에요. 이래봬도 물리학과 출신이니, 전기 쪽 자격증 공부는 땅 짚고 헤엄치는 거나 다름없고, 그게 아니면 다른 거라도…”

“놀고 있네…”

“…!!”

시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 침착하고, 몸에 인이 박힌 듯 자신을 배려하던 지수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힘든 폭언이었다.

“그 나이 먹고 현장 경험 1도 없는 사람이 자격증 따면 옛다 하고 관리자 달아준대요? 꿈 깨세요! 공사 현장, 송배전 현장 가서 아저씨가 할 수 있는 건 시다일밖에 없어요! 까대기 하고, 반생 묶고, 팔뚝만한 전선 실드 낑낑거리며 벗기고, 재수 없어서 조금이라도 크게 다치면 푼돈 받고 나가리고! 그러면 자격증 1도 없는 소장이 한마디 하겠죠. ‘야야, 너는 경험이 없응께 당분간 돈 벌 생각보단 배울 생각으로 일해라잉~’”

“무… 무슨…”

“공장이나 시설 보전업무는 뭐 다를 것 같아요? 기계나 설비 관련 지식이나 기술 없으면 전기 암만 알아봤자 시체예요, 시체! 뒤에서 뺀찌나 들고 다니는 뺀찌쟁이라고 무시당하기 딱 좋다고요! 둔한 주제에 덩치는 드럽게 커서 설비 사이 왔다 갔다 하다가 애먼 스위치 툭툭 건드리며 라인 다 꺼뜨리고 시말서 쓸 게 눈에 훤하네! 그래도 그건 욕만 먹으면 끝나지, 재수 없게 차단기 안 내린 고압 배전반 건드렸다가…”

“아니, 잠깐, 잠깐… 대체 지수 씨가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어요?”

“그건 선생님이 아실 거 없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선생님 같은 먹물은 그런 데 있어봤자 하루하루 시들다가 언제 재수 없게 산재로 요단강 건너도 이상할 거 하나 없단 사실이에요. 아시겠어요?”

지수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윽박지르듯 시호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시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애꿎은 식탁이나 노려볼 뿐이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시호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해야 되는 거예요. 먹고 사는 문제가 늘 취사선택이 가능한 건 아니라고요.”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분이 저한텐 왜 그러세요? 그럼 저도 뒷배 없고 스펙 없는 맨몸뚱아리인데 쿨하게 술집이나 나갈게요. 선생님은 싸게 해드릴게요.”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에요! 내 눈에서 피눈물 나는 꼴 보고 싶어요?”

시호가 정색하며 벌떡 일어났다.

“어제까지 같이 지식노동 하던 파트너가 팔다리 망가져서 병원에 누워 있으면 제 기분은 뭐 다를 거 같으세요?”

지수도 옆구리에 손을 짚은 채 맞받아쳤다.

“일하다 보면 다칠 수도 있는 거죠! 지식노동 하던 놈이 수요 없으면 육체노동 하는 거고! 지수 씨, 나는 서른 중반 꺾였지만 지수 씨는─”

“아니, 나이 그렇게 먹지도 않은 양반이 아까부터 답답한 소리만 해대고 있네. 서른다섯이 뭐요! 벌써 치매라도 왔어요? 어제 먹은 밥 기억 못해요? 두 달 전 원어 애로사항도 기억해내는 분이 무슨 엄살이 그렇게 심해요?”

“내가 그래서 전에도 아까도 말했잖아요, 그런 건 번역 바닥 떠나면 하등 쓸모없는…”

“그럼 쓸모 있는 분야를 파세요! 등잔 밑이 어두워도 유분수지! 맨 아래 서랍의 그것들은 뭐 고구마라도 구워 드시려고 쌓아놓았어요?”

“…지수 씨. …말했잖아요, 그건…”

“소설, 소설, 소설! 대체 왜 그 좋은 필력 가지고 삽질하고 있는데요? 유사 이래 지금처럼 소설 쓰기 좋은 시대에 대체 왜?”

“…필력이 후지니까.”

시호는 차분한 말투로 내뱉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니, 필력이 후지다니 지금 장난…” 반박하려는 지수를 손을 들어 제지하고는, 시호는 검지를 폈다.

“첫째, 내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대학원 이후입니다. 이런 예술 창작 분야는 재능과 선행학습이 갑인 거 알죠? 내가 정말 재능의 ‘ㅈ’이라도 있었으면 이 나이 먹도록 이러고 있겠어요? 멀리 갈 것 없이 이어령과 마광수가 언제 자신의 분야에서 독자성을 인정받았는지 생각해봐요.”

사실 그 두 사람까지 갈 것도 없이 바로 자기 주변에 있는 사례를 굳이 함구하고는 시호는 이어서 중지를 폈다.

“둘째, 난 쓸 생각이 안 들면 때려죽여도 그날은 한 글자도 못 쓰는 사람입니다. 지금처럼 콘텐츠의 소비 텀이 짧은 시대에 나 같은 한량 마인드론 롱런 못해요.”

역시나 앞서 생각한 사람이 노트북을 신체의 일부처럼 끼고 다니며 틈나는 대로 집필에 몰두하던 걸 시호는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약지를 펴며 시호는 말했다.

“무엇보다도 내 입선 이력은 신인에게 으레 주는 아차상 하나로 끝입니다. 그게 벌써 십일 년 전이고 지금까지 갱신 없음. …이걸로 근거는 충분하죠?”

정확히는 사 년 전에 투고한 작품이 이문기의 평을 대필한 편지로 영혼 밑바닥까지 털리며 까인 게 가장 최근의 공모전 이력이지만 시호는 그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넘어갔다. 지수는 뭔가를 생각하듯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이윽고 천천히 눈을 뜨고는 시호를 노골적으로 노려보았다.

“거짓말, 핑계, 자기비하…”

“지수 씨…”

이번에는 지수가 손을 들어 시호의 말을 제지하고는 검지를 폈다.

“첫째, 로즈 와일리가 신예 작가로 인정받은 건 일흔여섯 살의 일이에요. 혹여나 그건 그림이잖아 같은 뻘소리 하실 거면 접어두시고요. 그림이나 음악이나 여타 다른 분야보다 원천적으로 훨씬 재료와 기법과 규격에서 자유로운 글에서 나이니 재능이니 얘기하는 건 덜 떨어지는 짓이니까.”

“…”

난처한 표정의 시호는 아랑곳 않고 지수는 중지를 폈다.

“둘째, 별도의 생업이 있는 사람이 창작에 에너지를 쓰기 힘든 건 본인이 더 잘 알잖아요? 하루 24시간 창작을 할 수 있고 하물며 그게 생계수단이 되면 진짜 답 없는 베짱이가 아니고서야 다들 자연스럽게 시간을 쏟게 돼요. 그래도 수익이 적으면 허리띠를 졸라매며 개선책을 고민하고. …지금까지 번역일하며 그렇게 꾸리셨잖아요? 프리랜서를 십 년 넘게 해 놓고 어디서 약을 파세요?”

이제 패가 전부 거덜 난 시호는 쭈구리가 되어 바닥만 쳐다볼 뿐이었다. 지수는 쐐기를 박고자 약지를 폈다.

“무엇보다도… 제가 바본 줄 아세요? 처음 만난 날 분명히 제가 소설가 지망생이었다고 말씀드렸죠? 글을 읽고 이게 엊그제 글을 쓰기 시작한 사람의 것인지, 몇 년은 원숙해진 사람의 것인지도 구분 못할 것 같아요? 그리고 적폐 중 적폐인 한국 문단의 실상을 누구보다 잘 알 법한 사람이 거기서 상 탄 게 없단 사실을 필력이 후진 근거로 들고 있는데, 제가 ‘아, 그렇군요’ 하고 순순히 속아줄 줄 알았어요?”

“…”

완전히 침묵한 시호는 자리에서 목석이 되어버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지수에게 이렇게 신랄하게 말로 봉쇄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수는 몰입한 나머지 속이 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시호가 답답해서가 아니라, 시호가 이런 궁색한 변명까지 하며 애써 감추고 있는 ‘진짜’ 이유를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걸 지수가 먼저 건드렸다간 시호는 아예 대화를 단절하고자 지수를 내쫓거나 시호 스스로 나가버릴 것이다.

‘좋아, 채찍은 때릴 만큼 때렸으니 이제 당근 차례지.’

지수는 숨을 고르고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지난 몇 달간 뻔질나게 들락거린 사이트들의 주소를 치고는 Tab과 Enter 키를 번갈아가며 눌렀다. 그리고는 화면을 시호 쪽으로 돌렸다.

“선생님의 치명적인 첫 번째 문제는 자기평가가 낮다는 거예요. 보세요.”

시호는 지수가 열어둔 창을 하나하나 클릭했다. 해외 포럼처럼 보이는 사이트에는 익숙하다 못해 잘 아는 내용의 소설이 영어, 일본어, 중국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의 외국어로 쓰여 있었다. 아니, ‘번역되어’ 있었다. 그 밑에는 대체로 호평을 이루는 댓글 가운데 한두 개씩 진지한 평이 달려 있었다.     


-…とにかくこの小説の原作者は「面白さ」を極めることに真剣だということは確言できる。追伸。多分原文は外国語だろう。微妙に文法にこだわることから自分勝手に察してるつもりだが。

(…어찌됐든 소설 원작자가 재미를 추구하는 데 진심인 건 확언할 수 있다.

P.S 아마 원문은 외국어일 듯. 미묘하게 문법에 집착하는 걸 보고 뇌피셜 돌리는 거지만.)


-If you put up with only 30 minutes, it will surely be interesting. Neither be like Shinji Ikari, who does not look around at all because of self-thought, nor be like B-class Harem protagonist who lacks the intelligence and acts based on libido. It was good to see the hero with clear principle after a long time.

(장담컨대 삼십 분만 붙들어라. 틀림없이 재밌어진다. 주인공이 신지놈마냥 자기공상에 틀어박혀 옆은 1도 안 보는 벽창호도 아니고 뽕빨하렘물 남주마냥 능지 떨어져갖고 허리가 이끄는 대로 행동하지도 않음. 간만에 심이 있는 주인공 보니까 좋네.)


-Es hat einen wunderbaren klassischen Tribut. Auf einen ungezwungenen Blick sieht es so aus, als wäre es nur eine Collage und verspielt, aber es verwendet nicht nur ein Meisterwerk als bloße Beute, sondern auch für jede Arbeit einen gewissen Respekt erteilen.

(고전에 대한 오마주가 예사롭지 않다. 얼핏 보면 그저 작품 이름만 빌려서 장난치는 것 같다. 하지만 결코 걸작의 위세만을 어그로용으로 써먹고 버리는 게 아니라 각각의 작품에 분명한 경의를 표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각 포럼의 원어민들이 한두 명씩은 나름 진지한 평가를 해 주고 있었다. 지수는 뒷목을 주무르며 으스댔다.

“공치사하는 거 별로 많이 좋아하는데, 저 이거 하느라 그동안 하루 네 시간 이상 못 잤어요. 그래도 댓글 보는 재미가 쏠쏠해서 여기까지 끌고 왔네요.”

그러나 뿌듯한 미소를 띤 지수와는 정반대로 시호의 표정은 점점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눈동자에는 점점 불안과 두려움이 깃들었다.

“이거… 언제부터 한 거예요?”

“왜 저번에 밖에서 볼일 보고 오신다고 하루 통째로 비우신 날 있죠? 그때 원고 싹 다 스캔해놓고 밤부터 바로 작업했어요.”

“지수 씨가 생일날 하루 쉬기 얼마 전…”

“네, 맞아요! 그날도 제가 일 보고 귀가하자마자 번역하는 와중에 선생님이 축하해주셨죠. 정말이지 충실한 하루─”

“지금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을 했는지 알아요!!!!!!!!!!!”

처음 듣는 시호의 진짜배기 노성에 지수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얗게 질렸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하게 피가 몰려 있었다. 그러나 눈동자에는 분노 대신 불안과 두려움의 빛이 더욱 짙어졌다.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요! 저번에 똑같은 이유로 공원에서 푸닥거리했을 때 내가 분명 말했죠! 지수 씨는 나한테 잔인한 짓을 했다고!”

“…제가 선생님에게 잔인한 짓을 했다고요…?”

“차라리 나한테 한 거면 백 번 나아요! 지금 지수 씨가 한 일로 피를 볼 사람이 누군지 알기나 해요?”

시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안절부절못했다. 공모전에서 입상한 작품을 포함해 지수가 번역해 올린 글의 절반 이상은 문단 관계자들에게 노출된 내용이었다. 작가명을 기입하진 않았지만 눈썰미 좋은 몇몇 해외 독자들은 댓글로 ‘이거 한국인이 쓴 것 같은데’ 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누군가 이를 발견해 학과장에게 직간접적으로 알리기만 해도 빛나의 처우가 위태로워질 게 명약관화였다.

한편 간신히 정신을 붙잡은 지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대로라면 이 바보가 어떻게 이야기를 끌고 갈지 뻔했고, 그랬다가는 전부 원점으로 돌아가 버릴 것이다.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가장 고르고 싶지 않은 방법이었지만 오늘 이 자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은 피비린내 나는 악역이 될 것이다.

시호는 흥분을 가라앉히듯 심호흡을 하고는 조용히 말했다. “…지워요.”

“…”

“지금이라도 올린 거 전부 지워요. 그럼 없었던 일로 할 테니까.”

“싫어요.”

지수의 대답은 단호했다. 시호는 소리라도 지를 듯 눈을 부릅뜨며 인상을 썼다가, 이내 짐짓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방금 사이트들 얼추 봐 놨어요. 원작자 권한으로 글 삭제와 당신 영구 차단 요청할거예요.”

“그러시든지요. 아이디는 얼마든지 새로 팔 수 있어요. 그리고, 제가 딴 데 올린 글을 다른 사람이 거기 올릴 수 있단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지수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시호는 지수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지수를 보는 시호의 눈에는 오만 부의 감정이 뒤섞여 차마 마주보기 힘들 정도였다.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당신을 얼마나 믿었는데…!”

“하, 메이드 옷 입었다고 순종적인 하수인 행세나 할 줄 알았어요?”

“그런 걸 바란 적 한 번도 없어! 적어도 내 주변 사람이 상처 입는 걸 내가 싫다고 하면 멈춰야 하는 거잖아!”

“선생님 주변 사람 따위 제가 알 바 아니에요. 착각하신 것 같아 말씀드리는데, 그날 선생님을 이고 이 집에 들어올 때부터 전 선생님과 선생님의 글을 최우선으로 생각했어요. 다른 모든 건 그를 위한 희생양일 뿐이죠.”

“…당신은 미쳤어! 제정신이 아냐!”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전 제가 가장 좋아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대상에 대해 거짓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거든요. …당신과는 다르게.”

지수는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웃는 것과 동시에 시호의 멱살을 깃조르기로 움켜쥐었다.

“…콜록!”

목이 졸려 괴로워하는 시호는 아랑곳 않고 지수는 이어서 말했다.

“여기서 질문. 당신에게 보다 소중한 건 소설일까요, 주변 사람일까요?”

“그…그걸 질문이라고! 사람을 저버린 어떤 예술이든 가치가 있을까! …콜록!”

“또, 또 냉수에 이 빠질 흰소리 하신다. 제가 ‘사람’이라고 했어요? ‘주변 사람’이라고 했죠. 왜 있잖아요. 황빛나 박사, 이서희 작가, 남주희 사장…”

“네…네가 그 사람들을 어떻게…! 쿠, 쿨럭!”

지수는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더욱 세게 깃을 졸랐다. 시호는 지수의 팔을 떼어내려 했지만 마치 접착제로 붙인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수는 태연하게 말했다.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제발 묻는 말에나 대답하세요.”

시호는 간신히 숨을 가다듬고는 지수를 보며 천천히 대답했다.

“…빛나도, 서희도, 누나도, 내 인생의 보물 같은 인연들이야. 소설 따위… 그 사람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그래요? 제가 보기엔 전혀 아닌데?”

지수는 짐짓 과장되게 머리를 갸우뚱했다.

“이진아와 아버지가 연이어 죽자 당신은 그런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희망 전공을 바꿨어요. 황빛나가 당신과 캠퍼스를 같이 걷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점수보다 낮은 Y대를 지망하는 줄 알면서도.”

“…아냐, 난 몰랐어.”

“현역 대학생 소설가 이서희와 사귀게 되자 명분을 얻은 당신은 다시 펜을 쥐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이때부터 당신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죠. 이서희에게 점수를 얻고 싶어 국문학 대학원에 와 놓고는 그의 아버지인 학과장을 능욕했어요. 당신은 학과장이 앙심을 품을 걸 모르지 않았어요. 기린아인 당신에게 대학원은 바보들 천지로 보였겠죠. 그럼 그냥 조용히 인사하고 집에 가면 될 걸 기어이 그 개판을 치고 간 이유는 이 말을 하고 싶어서였죠.. ‘이 좆밥 그지 깽깽이들아, 너희들 다 덤벼도 나한테 안 돼.’”

“…그건 네 제멋대로의 해석이잖아.”

“네, 그렇죠. 하지만 이제 와서 당신이 그런 뜻이 아니었다며 석고대죄를 하고 다닌들, 제 제멋대로인 해석이 훨씬 와 닿을 걸요? 사람은 결코 이성적인 동물이 아니고, 기억보다 자존심이 우세한 동물이거든요. 아닌가요?”

“…크윽!”

“그리고 당신은 번역 일을 시작했어요. 왜 기업체에 들어갈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을까요? 당신은 너무 잘 알고 있거든요. 기업체에서 매일같이 특근 야근에 시달리면 결코 당신 스타일의 진득하고 묵직한 집필은 불가능하다는 걸. 어차피 연인은 자기보다 돈도 많고 가진 것들도 많으니 자기 한 몸 건사할 수입만 있으면 걱정할 게 없다는 걸. 이서희에게야 빌런은 깽판치고 대학원을 나간 당신이 아니라 자존심에 기쓰 나서 나잇값 못하고 날뛰는 자기 아버지고, 당신은 그저 문단 권력의 희생자일 뿐이니, 당신에게 작가 지망생 이상의 예비 배우자로서의 역할을 기대하는 건 과분하게 여겼겠죠. 물론 당신은 이런 이서희의 심정을 자알 알고 있었어요.”

“…듣자듣자 하니까…”

“근데 당신으로서는 예상 못한 사건이 터졌어요. 작가로서의 당신이 무엇보다 소중했던 이서희가 아버지 이문기에게 승부수를 던지며 당신을 떠난 거예요. 이서희 그 작자도 참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그렇게 하면 이문기가 백 번 옳다구나 하고 더 집요하게 당신을 괴롭혔으면 괴롭혔지, 정말 당신을 놔줄 거라고 생각하다니. 그렇게 치명상을 입은 당신은 재기불능 직전까지 다다랐고, 황빛나는 몸과 마음을 바쳐 당신을 구제했어요. 그리고 당신은 또 다시 번역 일을 재개하며 그 생떼 같은 소설 역시 은근슬쩍 다시 시작했어요. 이번에 번역을 관두더라도, 다른 무슨 일을 하든 소설만은 놓지 않을 거고요. 뭐 어때요, 이문기를 자극하지만 않으면 황빛나는 무리 없이 정년 트랙을 밟을 거고, 그렇게만 되면 애저녁에 황빛나의 0순위인 당신은 그야말로 모든 걸 얻는 건데… 내 말이 틀려요?”

“…정말 터무니없는 유언비어에 중상모략이야. 내가 이런 사람을 믿고 있었다니 기가 차서…”

지수가 쉼 없이 날린 말의 산탄을 간신히 버텨낸 시호는 짐짓 대수롭지 않은 척 평을 남겼다.

“네, 터무니없는 유언비어에 중상모략이죠. 전부 신지수 머리에서 나온 뇌피셜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모두 동의할걸요?”

“…입 다물어. 참을 만큼 참았어.”

시호의 맥없는 저지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고르고 고른 예리한 말의 저격탄이 30cm도 안 되는 거리에서 무참하게 발사되었다.

“당신에게 주변 사람은 늘 2순위였어. 소설에 밀리든, 죽은 연인에게 밀리든, 떠난 연인에게 밀리든.”

“그만해…”

“당신의 두 번째 문제이자 최악의 문제는 터무니없이 이기적인 주제에 남에겐 완벽하게 이타적으로 보이고픈 위선자란 점이야. 주변인들에게 선한 사람 소린 듣고 싶지만 정말 뼛속까지 이타적인 사람이 되어 자신의 근원적인 욕망은 버리기 싫지. 그래서 당신은 스스로의 욕망을 외곬수, 고집, 동년배와 아득히 동떨어진 순진함 같은 결여된 사회성으로 포장했어. 그런 당신에게 중독되어버린 그들은 당신의 첫 번째가 되고 싶은 마음에 기꺼이 스스로를 망가뜨렸─”

“그만하라고 했지!!!!!!”

시호는 지수의 목을 움켜쥐었다. 시호의 커다란 양 손아귀에 가느다란 지수의 목은 손쉽게 들어왔다. “꺽… 꺽…” 지수는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비릿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감정이 온몸으로 누출되는 시호는 이미 반쯤 미쳐 있었다.

“내가, 내가 대체 어떡하면 좋았는데! 소중한 사람들이 슬퍼하는 걸 보고 싶지도 않고, 소설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은데!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늘 고민했다고! 나보고 아예 펜을 꺾고 누군가의 동반자 역할에 충실하거나, 모두를 외면하고 글월에 빠져 살기라도 하란 말이야? 어!? 말해봐! 어디 그 뚫린 입으로 말해보라고!!!!”

“…그래요.”

“…어?”

지수의 대답에 시호는 어리둥절해 하며 순간적으로 손의 힘이 빠졌다. 지수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남은 힘을 짜내어 시호를 있는 힘껏 밀쳤다. 기세 좋게 뒤로 밀려난 시호는 벽에 머리와 몸통을 박고는 겨우 진정되기 시작했다.

위험 수준 직전에서 간신히 해방된 지수는 숨을 몰아쉬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시퍼렇게 멍들고 선명하게 손톱자국이 난 지수의 목덜미가 시호의 눈에 들어왔다.

“아냐… 누굴 희생시키고 싶었던 적은 없어…! 난, 난 그저… 모두와 행복하길 바랐을 뿐이야…! 으아아아아…!”

시호는 밀려드는 죄책감에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부짖었다. 지수는 손수건에 물을 적신 채 시호에게 다가가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러지 말아요. 제가 자초한 거니까, 선생님한테 죽었어도 원망하지 않았을 거예요.”

시호는 목이 잠긴 채 말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죠? 내 글에 당신이 목숨을 버릴 가치씩이나 있나요?”

“네.”

즉답이었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군요. 손에 피를 묻히면서까지 글을 놓지 말라는 건가요?”

“…네. 제 피도, 눈물도, 죽기 전 마지막 표정도 선생님의 글을 위한 양식이 될 수 있다면… 전혀 아깝지 않아요.”

“…처음으로 지수 씨가 무서워졌어요.”

시호는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진이 빠진 채, 넘을 수 없는 장벽을 바라보듯 지수를 보며 입가를 씰룩거렸다.

“비밀 하나 말해줄까요?”

어느새 지수는 시호가 좋아하는 평소의 온화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뭐죠?”

“선생님 주변 여자들도 마음은 저하고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이봐요, 지수 씨…”

“황빛나 박사가 알았으면 말렸을 것 같아요? 자기 커리어 망치지 말라고?”

지수의 물음에 시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자신이 아는 빛나라면 말리는 건 고사하고 그가 아는 기자를 포섭해 특집 기사로 다루게 할 것이다. 그걸로 학과장에게 미움을 사 더 이상 모교에서 강의를 못 하는 한이 있어도.

지수는 어머니가 아들을 어루만지듯 시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전 선생님이 어떤 길을 가든 상관없어요. 단지 선생님이 자신의 욕망에 늘 솔직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주변에서도 알아서 솔직해질 거예요.”

“무책임하기는,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윤리적인 인간 사회라 일컬을 수 없어요.”

“처벌 받고 싶지 않으면 길거리에서 옷을 벗지 않겠고, 미움 받고 싶지 않으면 자는 사람을 덮치지 않겠죠. 하지만 처벌 받을지언정, 미움 받을지언정 증폭된 욕망에 이끌려 행동하는 것 역시 인간다움의 일환이 아닐까요.”

“…정말이지 상상 이상의 걸물을 내 집에 들여놨네요.”

시호는 반쯤 달관한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지수는 씨익 웃으며 일어나더니 식탁에 있던 봉투에서 오만원권 네 장을 꺼냈다.

“어쨌든 그 뜬금없는 번역 폐업 얘긴 보류해 두고, 제 퇴직금도 도로 고이 넣어두시는 거로 해요. …근데 이 생난리를 쳐 놓고 오늘 정상 근무하는 것도 웃기지 않아요?”

“이젠 아주 솔선해서 루팡 짓을 하는군요.”

“인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이 돈으로 야무지게 열심히 놀며 리프레쉬하길 건의합니다. 서로에게 행한 못할 짓도 다 씻어버리고요!”

“지금 한 번만 말해두는데 정신적 데미지는 이쪽이 입은 게 압도적이거든요? 물타기 없기예요!”

“역시 선생님은 솔직한 게 제일이에요.”

지수의 장난스러운 미소에 시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생각해보건대 오늘 지수의 일련의 돌발 행동은 연출된 연기보단 돌출된 광기에 가까웠다. 한편으론 그 표변에 오금이 저릴 듯 여러 의미로 전율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그가 품고 있었을 그늘과 고독이 느껴지는 걸 부인할 수 없었다.

결국 이 역시 고슴도치의 딜레마의 일환이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상처 입게 되면서도 상처가 아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다가간다. 이윽고 딱지가 난 만큼 상대방에게 익숙해지지만 언젠가 또 다시 새로운 상처를 얻는다. 상처는 달리 표현하면 경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으레 따르는 가치 판단을 배제한다면, 우리는 교육, 사회생활, 인간관계를 비롯한 모든 경험에서 그만큼의 생채기를 얻는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시호는 오늘 서로 생채기를 주고받은 지수가 한층 더 애틋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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