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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Oct 03. 2024

피그마리온의 눈물 (14)

5월이 끝날 무렵부터 시작된 장마는 길거리는 물론 마음까지 눅눅하게 만드는 기분이었다. 빛나는 왼손에는 서류가방을, 오른손에는 우산을 들고 한동안 왕래가 없던 길목을 걷고 있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시호가 사는 홍실빌라를 기준으로 빛나의 오피스텔에서 정반대에 위치한 곳이다. 그래서 혼자서 갈 땐 바이크 이동이 자연스러웠다. 그곳의 주인은 빛나의 바이크 복장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나 지금부터 볼 용건은 결코 그렇게 속 편한 게 아니었다. 빛나나, 오늘 빛나를 부른 장본인이나 간밤에 통화할 때 그 용건에 대해선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공유하는 관계자를 연상하는 것만으로 서로의 심중을 알 수 있었다.

제법 비탈길을 올라간 끝에 보이는 한 채의 단독주택. 다가구주택이자 대학생들을 위한 자취방으로 운용되는 이곳은 보증금과 월세가 주변의 절반밖에 안 해 캠퍼스에서 꽤 떨어져 있음에도 매학기 1순위로 공실이 다 찼다. 주변 원룸빌라 주인들은 그를 두고 상도덕이 없다고 수군거렸지만 당사자는 “내 집에서 내가 싸게 받겠다는데 뭔 불만들이 그리 많아?” 하며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빛나는 대문을 열고 들어가 계단을 올라갔다. 3층까지 올라가 통로를 조금 들어가면 바로 앞에 현관문이 있었다. 도어락 뚜껑을 열고 20140531을 누르고 닫자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풀렸다. 십 년째 바뀌지 않은, 세상에서 단 네 명만 알고 있는 비밀번호. 그 의미를 생각하자니 빛나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올 것 같았다.

‘…집어치워. 감상에 젖을 때냐고.’

빛나는 고개를 휙휙 젓고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현관에 들어서자 웬 육중한 갈색 털 뭉치가 빛나의 가슴팍에 달려들었다. 양손이 비어 있지 않은 빛나는 허겁지겁 팔뚝으로 그것을 받쳐들었다.

“애오- 애오-”

“…금희야, 너 도대체 얼마나 찐 거야? 울음소리까지 파묻혀서 안 들리잖아.”

“애오오-”

우산과 가방을 대충 현관에 던져두고 한 손으로 엉덩이를 받치며 다른 한 손으로 귀 뒤를 긁어 주자, 금희는 기분 좋은 듯 목을 울리며 빛나의 얼굴을 핥았다.

“너무 구박하지 마라, 걔 올해로 열세 살 할아버지야. 네 가슴까지 점프하는 데만 한 달치 기력은 썼을 걸?”

앞치마 차림의 주희가 부엌에서 나왔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빛나는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다.

“…둘 다 건강해서 다행이에요.”

“넌 더 예뻐졌네, 질투 나게. 어서 들어와 앉아.”

주희는 말을 남기고는 곧바로 부엌으로 돌아갔다. 빛나는 금희를 땅에 내려놓고 문 옆 우산꽂이에 우산을 집어넣고는 서류 가방을 들고 주희를 뒤따랐다. 오랜만에 맡는 감귤 디퓨저의 향기를 무심코 콧속 깊이 빨아들였다.

식탁 한가운데에는 갓 구운 듯 윤기가 나는 마들렌과 브리오슈가 은은한 향기를 내고 있었다. 양쪽에는 갓 내린 커피 컵이 있었는데 손님 쪽 자리에만 커피 옆에 우유가 담긴 유리잔이 있었다. 빛나가 자리에 앉자 주희는 냉동실에서 꺼내 자른 초코 브라우니를 접시에 담아 왔다.

“출출하지? 어서 들어.”

“…잘 먹을게요.”

빛나는 커피에 우유를 조금 붓고 티스푼으로 가볍게 저었다. 그리고 브라우니 한 조각을 가볍게 베어 물고는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그리운 달콤함이 입속 가득히 퍼졌다. 빛나는 현관에 들어설 때만 해도 어색 일변도였던 표정이 어느새 풀어진 걸 자각하지 못했다. 주희는 그 모습을 턱을 괴고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정말, 맛이 그대로네요. 그대로…”

빛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애써 참았다. 애당초 빵이나 과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주희는 혼자 먹기 위해 제과를 하지 않는다. 시호 역시 떡을 좋아하지 빵이나 과자는 솔선해서 건드리지 않는다. 네 사람 중 빵과 과자를 유독 좋아하는 건 두 사람, 그리고 특히 초코 브라우니는 지금 이 자리에 없는 한 사람은 손도 안 대는, 오직 빛나만을 위한 과자였다.

박사가 되고, 강의를 하며 시호를 돌보고, 바빠지는 와중 주희의 존재는 빛나의 마음속에서 점점 후순위로 밀려갔다. 숫기 없고 제 코가 석 자인 시호가 집에 있는 주희를 솔선해서 찾아갈 리가 없으니 자연스레 자신밖에 남지 않는데도 빛나는 가지 않았다. 주희와 가장 친했던 ‘그 사람’의 부재를 환기하게 되는 게 내심 두려웠다.

심지어 몇 달 전,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 온 주희에게 차마 못할 말까지 해 버렸다. 그런데도 주희는 어제 빛나에게 연락해 아무렇지 않게 “간만에 와서 과자라도 들래?” 하고 권유했다. 그게 전부가 아님은 빛나도 알고 있었다. 오늘 이곳에 오면 제일 원망스러운 사람을 보게 될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주희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만나서 직접 말하고 싶었다.

“미안해요… 너무… 오래 걸렸죠?”

빛나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한 마디씩, 한 마디씩 간신히 말을 이었다. 주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빛나에게 다가가서는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말없이 빛나의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그리움도, 원망도, 감사도, …지금부터 일어날 일에 대한 부탁도, 서투른 말 대신 진심을 담은 손짓으로 전달했다.  

   

“그럼 난 잠시 나갔다 올게.”

“네.”

오후 3시 10분 전,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주희가 현관을 나서는 걸 빛나는 배웅하러 나왔다. 운동화를 신고 우산을 집어든 주희는 문을 열려다가 뒤돌아서서 빛나를 바라보았다.

“빛나야, 고마워.”

“…제가 고맙죠.”

“오랜만이야, 아빠 기일이 외롭지 않은 건.”

주희의 말에 빛나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정말로, 정말로 미안해요! 선배한테도 오늘 무슨 일 있어도 연락하든 찾아오든 하라고 할 테니까…!”

“에이, 됐어, 됐어! 입이 방정이지! …빛나야, 난 괜찮아. 사람은 누구나 작든 크든 외로움을 안고 사는 법이야. 그리고 외로움을 필연으로 받아들여야만 인연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거고.”

“…그치만!”

“지난 십 년, 난 너희들에게 과분할 정도로 많은 걸 받았어. 근데 정작 너희들에게 난 얼마 주지도 못했어. …그러니까 언제든 부담 없이 찾아와.”

그 말과 함께 주희는 문을 닫고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 우산을 들고 대문 앞에 서 있자, 저 멀리서 우비에 선글라스를 쓴 서희가 전봇대 뒤에서 살며시 나왔다. 대문 앞을 가로막고 있던 주희는 서희가 다가오자 슬쩍 옆으로 비켜주었다.

“…고마워.” 서희는 옆을 지나치며 주희에게 간신히 들릴 정도로 말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난 여기만 지킬 거야. 안에서 둘이서 어떻게 치고 박든 난 모른다.”

주희는 서희의 등에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빛나는 팔짱을 낀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바깥에서 누군가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윽고 발소리가 문 앞에 다다라 멎고는 뒤이어 도어락 다이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잠금 장치가 열리는 소리, 문이 열리는 소리, 문이 닫히는 소리, 비닐을 걷어내는 소리, 부엌으로 이어지는 발소리, 그리고…

“잘 지냈어, 빛나야?”

빛나가 눈을 뜨자 춘추복과 얇은 드레스 차림의 서희가 손을 모으고 앞에 서 있었다. 빛나는 혀를 쯧 차더니 턱으로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서희는 조용히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용건이 있으면 학과에 번호를 물어보든지. 나도 어차피 당신한테 볼일이 있었거든.”

빛나는 서희를 쳐다보지도, 서희를 향해 몸을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

“그랬으면 나 오늘 집에서 나올 틈도 없었을 거야. 너나 시호와 접촉하려는 걸 아빠가 알면 아예 날 방에 가둬 놓을 거야.”

“그거 참, 이문기한테 고마워할 일이 생길 줄은 몰랐네. …그래서 치외 법권 구역인 여길 고른 거고?”

“…”

빛나의 질문 아닌 확인에 서희는 침묵으로 수긍했다. 하긴 어지간한 남자가 육탄전에서 주희를 당해낼 리도 없으니, 지금 여기만큼 무슨 말이든 행동이든 서로 편하게 들이박을 곳도 또 없다. 빛나는 서희를 째려보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당신, 선배를 만났어?”

지난주부터 보인 시호의 영문 모를 변화는 분명 이서희와 관련이 있었다. 실생활에서나 인간관계에서나 자폐적인 시호의 성향 상 그 정도로 그를 흔들 수 있는 사람은 한 손에 꼽았다. 서희는 그 중 제일 유력한 용의자였다.

빛나의 질문에 서희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후우…” 서희를 압박하고자 빛나는 짐짓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윽고 서희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났어. 마지막으로 만나서… 시호의 분노도, 저주도, 폭력도 다 받아낼 작정이었어.”

“염병하네. 아무리 선배가 당신 때문에 벼랑 끝에 몰렸어도, 당신한테 털끝만큼이나마 화를 낼 위인이야?”

빛나는 조소하듯 쏘아붙였다. 서희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빛나는 서희를 향해 삿대질하며 큰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그래! 선배는 답답할 정도로 착하니까! …근데 이건 알려나? 더 이상 선배한테 당신은 아무 쓸모도 없다는 거 말이야! 내가, 이 내가! 선배의 모든 걸 떠받쳐 주고 있거든!”

“…”

“당신이 가 버리고 선배는 하루라도 입에 술을 안 대는 날이 없었어! 그 술 못 먹는 선배가! 그 성실하기 그지없는 선배가!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그날그날의 노르마를 채우는 대로 침대로 데려가서 잔뜩 뽑아냈어! 선배가 지쳐서 잠들어 버릴 때까지! 매일! 한 세 달 정도 하니까 더 이상 혼술을 안 하더라!”

“…”

“나 이제 가을에는 부교수야! 그렇게 되면 이문기도 마냥 나 쉽게는 못 건드려! 그럼 내가 뭐부터 할 건지 알아? 더 큰 집으로 이사해서 선배 데려올 거야! 그리고 내가 쓰는 모든 논문에 공동 저자로 선배를 넣을 거야! 이문기도 천년만년 살아 있진 않겠고, 선배는 자연스레 자신에게 마땅한 위상을 얻을 수 있겠지! …사 년 전 당신한테는, 이런 비전 비스무리한 거라도 있었어?”

“…”

빛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희 앞으로 다가가, 손끝으로 그의 턱을 들어올렸다.

“당신이 일방적이고 개똥같은 행동원리로 선배에게 엿을 먹였을 때, 난 먼 미래를 내다보고 칼을 갈아 왔다고! 내 말이 틀렸어? 틀렸으면 어디 말해봐!”

서희는 묵묵부답이었다. 감정이 가득 실린 빛나의 말들에 지리멸렬하고 허황된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오직 시호를 바라보며 자신을 내던져 인고의 세월을 버틴 것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문기의 딸인 이상 오롯이 시호를 위해 헌신할 수는 없는 자신은 흉내조차도 낼 수 없는 점이다.

“빛나야, 미안해… 내가 부주의했어.”

빛나에 의해 시선이 고정된 채 서희는 말했다.

“하!… 이제 와서 그런 시덥잖은 사과를…”

“그날… 아빠랑 만났어… 시호…”

“…!!!!!!!!!!!!!”

서희는 자신을 내려다보던 빛나의 거만한 표정이 삽시간에 분노로 일그러지는 걸 보았다. 다음 순간, 온 집을 무너뜨릴 기세의 노성이 서희의 귀를 관통했다.

“씨발 이 찢어죽일 개 같은 년이!!!!!!!!!!!!!!!”

빛나는 사자후를 내지르는 동시에 오른손을 확 치켜들었다. 서희는 저항을 단념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대로 내리치려던 빛나의 뇌리에 주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서희의 부어오른 얼굴을 보면 보나마나 또 주희는 속상해 할 것이다. 때린 자신을 탓하기는커녕 그저 스스로의 잘못인 양 또 한동안 속앓이를 할 것이다.

“…씨발!”

빛나는 서희에게서 손을 떼고, 개수대 난간을 짚은 채 서희를 등지고 섰다.

“…이문기가, 선배한테 뭐라고 했어?”

“…나도 몰라. 둘만 남긴 채 쫓겨났으니까.”

“하아…”

빛나는 개수대에 대고 토할 기세로 한숨을 쉬었다. ‘저 맹순이가 이런 상황에 자기를 방어하려고 거짓말할 리는 없어. 그렇다면 이문기가 과연 선배한테 무슨 말을 했을까?’

생각해볼 것도 없었다. 위험하게 보일 정도로 자기 딸을 싸고도는 이문기는 서희와 시호가 함께 있는 걸 본 것만으로 펄펄 뛰었을 것이다. 그리고 서희를 내보내자마자 시호를 압박했을 것이고, 이문기가 휘두를 수 있는 시호에게 유효한 압박 수단은…

“…겨우 내 거취로 감히 선배를 협박해? 망할 노인네가…”

빛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를 들은 서희는 식탁 위에 올려놓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빠…! 대체 얼마나 더 업보를 쌓으려는 거야…!’

“이서희.”

별안간 빛나가 서희의 이름을 부르자, 서희는 허둥지둥 대답했다.

“어, 어? 왜?”

“내가 분명히 저번에 말했지? 선배한테 털끝만큼이라도 다가가면, 이문기의 시체를 보게 될 거라고.”

“…!”

“그게 허세 같으면, 네 앉은 오른쪽에 있는 서류 가방을 열어봐.”

서희는 의자 오른쪽에 기대 둔 서류 가방을 발견하고, 안에 있는 서류 뭉치를 꺼냈다.

“원한다면 가방 째 가져가도 좋아. 당연하지만 복사본이거든.”

서희는 식탁 위에 서류 뭉치를 놓고 《1998.07.16. 역삼동 H주점 로비 문건》이란 제목으로 시작되는 문서부터 한 장씩 넘겨보았다. 부정 임용, 논문 대필, 국비지원 학술서 사업 중간이익 착복 등 자신이 몇 달 전부터 근거자료를 모으고 있는 부친의 비리의 역사가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걸로는 안 돼! 근거가 빈약해! 이걸 들고 싸웠다간 백 퍼센트 역풍 맞고 매장당할 거야!’

서희는 식은땀을 흘렸다. 개수대에서 돌아선 빛나는 서희의 표정을 보고는 전혀 다르게 이해했다.

“나만큼 네 애비의 어둠을 잘 아는 사람은 없어. 왜? 지난 사 년간 난 네 애비의 수족이나 다름없었거든! 내가 이걸 터뜨리지 않은 것도 이문기를 폭사시키려면 내 팔 한쪽을 같이 날려야 하기 때문이었어.”

‘안 돼…!’

“너희 부녀에게 고마워해야겠지. 망설이지 않아도 될 명분을 줬으니까.”

“안 돼!”

서희는 일어나서 빛나의 팔을 붙들었다. “빛나야, 안 돼!”

“하… 이제야 좀 위기가 눈에 보이나?”

빛나는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웃더니 오른손으로 서희의 머리채를 쥐고 확 올렸다. “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서희가 고개를 뒤로 확 틀었다. 몇 주 전과는 확연히 다른 전개에 빛나는 통쾌한 듯 광소했다.

“꺄하하하하! 그래, 역시 머리카락은 진짜가 제 맛이지!”

“…?”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서희의 얼굴을 보며 빛나는 저주와도 같이 퍼부었다.

“이서희. 너와 네 애비는 선배에게 방해되는 주제에 너무 활개 치며 살았어. 남은 인생은 네 애비는 감옥에서 썩고, 너는 한국은 물론 한국인이 있는 곳 어디에도 발을 못 붙이더라도, 억울할 건 없겠지?”

“…빛나야, 아파…! 아파…! 제발 이것 좀 놔 줘…!”

고통에 눈물까지 흘리며 사정하는 서희를 보기 힘들었는지 빛나는 서희의 머리채를 놓았다. 해방된 서희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무릎을 꿇고 빛나의 발에 머리를 조아렸다.

“빛나야, 미안해! 전부 내가 잘못했어!”

“…쯧!”

“내가 생각이 짧았어…! 너희들에게 한 마디 의논도 안 하고…! …그저 이것밖에 없다고, 이게 최선이라고 제멋대로 단정하고…! 그게 사태를 여기까지 끌고 왔어! 다 나 때문이야!”

빛나는 자신의 발에 이마를 문대고 있는, 한때 매일 밤 한 침대에서 자던, 친언니처럼 따르면서도 여자로서 부러워했던 상대를 보자 만감이 교차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낚아채 간 여자, 끊임없이 돌발행동을 일삼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여자, 하지만 희로애락이 한없이 투명해서, 그 이면에는 다른 이해타산 없이 오직 ‘새로운 경험’과 ‘재미’밖에 머릿속에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미워할 수 없는 여자…

“…참 빨리도 깨닫네, 어?”

빛나의 말에는 분노보단 회한과 서글픔이 더욱 짙게 묻어나왔다. 이제 와서 이 여자에게 화풀이를 한다고 달라질 것도, 나아질 것도 없다. 말 그대로 이미 다 지나간 일이다. 그러나 지금 제일 중요한 문제는, 아니, 그때부터 제일 중요했던 문제는 따로 있었고, 이 여자는 그와 무관하지 않다.

“…네 애비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돼.”

“…빛나야, 내가 아빠를 설득할게! 모든 걸 내려놓으라고! 만약… 만약 그렇게 안 된다면…!”

“…안 된다면?”

빛나의 물음에 서희는 고개를 쳐들고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내 손으로 아빠를 학계와 문단에서 매장하겠어.”

순간 빛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이 여자가 진심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의고 홀아버지 슬하에서 금이야 옥이야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 이 여자가? 빛나는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서희를 쏘아보았다.

“…네가?”

“…”

“말이야 누구나 할 수 있어. 하물며 이미 너한테 된통 데인 전적이 있는데, 어떻게 널 믿지?”

“…”

“선배는 너 때문에 죽기 직전까지 몰렸어, 알아?”

“…”

서희는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빛나는 다리를 휙휙 휘둘러 발에 붙은 서희를 떨쳐내고 차갑게 내뱉었다.

“그러니까 너도 목숨 걸어.”       



    

장맛비가 창문을 후두둑후두둑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시호는 원고지를 앞에 두고 연필을 입에 물고 있었다. 노트북에선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딱히 시호가 찾아서 튼 건 아니었다. 유튜브에서 무작위로 고른 클래식 음악이 점지한 결과였다.

루나의 열렬한 고백과 거절이 있던 그날 밤 이후로 시호는 더 이상 아무렇지 않게 비익연리를 들을 수 없었다. 퇴근길을 마중하는 일도, 밤에 집 앞 공터에서 이야기를 하는 일도 없어졌다. 궁금하면 바로 옆집 문을 두드릴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마 자신이 저지를 수 있는 무신경함의 끝이자 최악의 어프로치일 것이다. 지금 루나 앞에 자신이 나타나봤자 그에게 아무 위안도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뒤이어 떠오른 것은 서희의 얼굴이었다. 오랜만에 본 그의 외모는 이전보다 훨씬 아름다워져 있었다. 세월을 겪으며 차분해진 성격이 크겠지만, 그만큼 시호가 진정 좋아하던 천진함은 옅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날 시호는 처음으로 서희의 눈물을 보았다. 늘 그의 웃는 얼굴만 보던 시호로서는 그날 이후 서희의 눈물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심란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저나 서희가 한국에 온 걸 주희 누나는 알고 있나? …아냐, 그랬다면 나한테 연락을 안 했을 리가 없는데. …앗!’

시호는 주희의 이름을 떠올리자마자 황급히 달력을 보았다. 5월 31일. 달력에는 그저 특별한 일 없는 까만 날이었지만 사 년 전까지만 해도 새해 달력을 걸 때 네 사람의 생일과 함께 제일 먼저 표시하는 기념일이었다.

주희 아버지의 기일.

이날만큼은 주희는 가게 문을 안 열고 집에서 온갖 음식을 준비했고, 나머지 세 사람은 다른 모든 일정을 뒤로 하고 술과 선물을 사들고 주희의 집으로 모였다. 자정이 지나도록 밤새 떠들며 놀고 나선 거실에서 함께 잠을 잤다. 이는 서희가 떠나기 전까지 한 번도 거른 적 없던 연례행사였다.

서희가 떠난 후 응모한 공모전에서 처절하게 박살나고, 폐인이 된 모습을 주희에게 보인 이후 시호는 주희를 마주하는 게 창피해졌다. 그렇다고 아예 연락을 끊을 생각은 없었기에 주희의 가게에 종종 얼굴 도장을 찍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매일 앉는 자리에 시호가 앉으면 주희는 말없이 치킨과 맥주를 차려 주고 지나갔고, 주희가 카운터에 없는 틈을 타 전표에 자기 이름을 적어놓고 도망치다시피 가게를 나왔다.

빛나와의 대화에서도 주희는 오랫동안 언급되지 않았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531일에 빛나는 주희를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주희가 서희 다음으로 아낀 동생이 빛나임을 생각하면 무정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시호는 빛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간신히 재활에 성공한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서희를 떠올릴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벌써 십주기구나. 춘부장께서 가신 지도.’

시호는 십 년 전 처음으로 친해질 당시의, 아직 이십대였던 시절의 주희를 떠올렸다. 하나뿐인 부친을 여의고 그저 방 안에서 술과 담배에 의존하던 주희의 모습을. 매일같이 오는 세 사람에게 노골적으로 짜증을 내던 모습을. 그러나 주희가 차갑게 대할수록 시호는 그를 내버려둘 수 없었다. 사람과의 유대를 원하는 주제에 사람에게 상냥해질 여유가 없는 이율배반의 괴로운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곳은 그런 마음만으로 편하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뚝!

옛 생각을 하며 연필 끝을 엄지로 꾹꾹 누르던 시호가 불쑥 격해진 감정에 힘 조절에 실패하자 심이 부러져 버렸다.

“쉬엄쉬엄 하세요, 찡그리면 주름 져요.”

어느새 옆에 온 지수가 책상 위에 커피잔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고마워요. 잠깐 딴 생각 하고 있었어요.” 시호는 잔을 입에 가져가며 슬쩍 지수를 올려다보았다. 유월에 접어들건만 지수는 메이드복 안에 받쳐 입은 터틀넥 셔츠로 목을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 그게 무엇을 감추기 위한 건지 아는 사람은 이 방에 있는 둘 뿐이었다. 시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수의 뒤에 서서 셔츠를 잡아당겨 목 부분을 드러냈다.

“…!”

지수는 움찔하면서도 시호에게 순순히 몸을 내 주었다. 손으로 졸린 멍은 하룻밤 만에 제법 가라앉았지만 손톱자국만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아이, 참… 약 바르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시호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지수는 멋쩍게 웃으며 다시 목덜미까지 셔츠를 올렸다. 화제를 전환하고자 지수는 원고지를 집어 들며 물었다.

“그나저나 예전부터 궁금했는데요, 번역할 땐 안 그러시면서 소설은 왜 워드 프로그램을 안 쓰고 아직도 원고지에 수기로 집필하세요?”

“오래된 습관이라 그래요. 효율의 문제도 있다 보니 바꿔보려고 몇 번 시도했었는데 안 되더라고요.”

시호는 다시 의자에 앉아 휴지를 한 장 뜯어 책상에 올려놓고는 커터 칼로 연필을 깎기 시작했다. 속도가 안 나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분량이 쌓이면 보관 공간도 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글을 쓰는 데에는 그보다 중요한 요소들이 훨씬 많기에 딱히 치명적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어? 이 원고지, 다 써 가는데요?”

지수가 열 쪽 남짓밖에 안 남은 여분 페이지를 팔랑거리며 보여줬다. “아차… 그러고 보니 지난주에 확인했는데 어제 산다고 한 게…” 시호는 앞머리를 긁적거렸다. 어제는 하루 종일 지수와 싸우랴, 놀러 다니랴 하느라 책상 앞에 앉지 않았으니 원고지를 건드릴 일도 없었다. 지수는 배시시 웃었다.

“어제는 참 재미있었어요, 그쵸?”

“…두 번 재미있었다간 수명이 남아나지 않을 거예요.” 시호는 질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제가 가서 사 올게요. 바람도 쐴 겸.”

“밖에 비와요. 퇴근도 얼마 안 남았는데 지수 씨는 쉬고 있어요.”

시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지수는 시호의 어깨를 가볍게 누르며 말했다.

“선생님은 집필에 집중해주세요. …어제 제가 한 말 기억나시죠?”

그 말에 시호는 어제 자신에 의해 목덜미가 너덜너덜해진 채 자신의 얼굴을 닦아 주던 지수의 얼굴을 떠올렸다. 귀기가 서렸다고까지 할 수 있는 맹목적인 헌신. 시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을 알고 있었다.

“…고마워요, 지수 씨.”

“제가 할 일인걸요.”

지수는 빙긋 웃어 보이고는 서재를 나가 현관에서 구두를 신었다. 우산을 집어 들고, 현관문을 연 그때였다.

“아…!” / “…!”

문 앞에는 레인코트를 입은 노신사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지수는 노신사의 얼굴을 보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가 정시호 선생 집이 맞나요?”

“…”

노신사는 지수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물었다. 지수는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노신사의 시선을 피했다. “음? 지수 씨, 무슨 일 있어요?” 현관문이 닫히지 않는 걸 이상하게 여긴 시호가 서재에서 나왔다. 그리고 노신사와 시선이 마주치고는,

“아…”

“…잘 지냈나요, 정 선생?”

말을 잇지 못하는 시호에게 노신사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시호는 목이 멘 채, 고개를 돌린 채 안절부절못하는 지수를 향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지수 씨, 정말 미안해요. 한 시간 정도만 자릴 비워줄 수 있어요?”

“…(끄덕)”

지수는 입을 꾹 닫은 채 고개를 숙이고는 노신사 옆을 지나 계단을 총총 내려갔다.

‘저 사람이 이제 와서 여긴 왜 온 거지? 선생님하고 아직도 연락하는 사이였나?’

지수를 살피던 노신사의 눈빛은 분명 기시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럴 만 했다. 사 년 동안 그렇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 한 상대인데, 반 년 정도 못 보고, 변장 좀 했다고 아예 눈치 못 채는 게 도리어 이상했다. 저쪽도 자신을 이런 곳에서 이런 모습으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만 말이다.

만약 저자가 시호에게 사실을 얘기한다면? 지수 역시 애당초 그것을 영원히 숨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앞으로 한 발짝만 더 가면 되는데, 설마 저 사람에게 가로막히게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수는 실로 오랜만에 동요를 억제할 수 없었다.

‘이기선 교수…!!!’      


교수는 자기 앞의 커피를 티스푼으로 천천히 저으며 소용돌이를 바라보았다. 맞은편에 앉은 시호는 교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이미 다 마신 자신의 컵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정 선생, 이걸 봐 봐요. 가운데에 커피 분말 하나가 둥둥 떠 있어요.”

“…”

“만약 정 선생이 방금 전 똑같은 조건 아래 있었다면, 똑같은 결과가 나왔을까요?”

“…아닙니다.” 시호는 힘없이 대답했다. 교수는 곧바로 질문했다.

“어째서죠? 똑같은 조건이라면, 당연히 똑같은 결과가 나와야 할 텐데?”

“…똑같은 조건부터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불확정성의 원리에 따르면.”

시호의 대답은 아까보다 더 기운이 없었다. 교수가 커피를 저을 때부터 시호는 그가 카오스 이론 얘기를 할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시호에게 카오스 이론은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그의 첫사랑인 진아가 유독 사색하기 좋아하던 대상, 그리고 또 하나는…

“그래요. 카오스 이론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한계를 과학의 언어로 유감없이 드러낸 정리입니다. 우린 눈앞의 결정되지 않은 한 줌의 미래조차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미약한 존재입니다.”

“…설마 이십 년 가까이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은 말씀을 하시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당연하지요.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우주 만물 중 제일 자유로운 존재임을 반증하니까요. 그 어떤 과거로부터도, 운명으로부터도, 인과로부터도…”


…딸 진아에게 처음으로 카오스 이론을 알려준, 아버지 이기선 교수의 인간찬가의 수단.

“어때요? 요즘은 좀 자유롭게 살고 있나요?”

“…마치 예전에는 자유롭지 않았던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실례했어요. 하긴 우리가 얼굴 보는 것도 어언 십이 년 만이죠? 나도 참, 아직도… 아니, 아무 것도 아니에요.”

교수는 시호의 눈치를 보며 커피잔을 홀짝였다. 시호는 여전히 교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다시 둘이서 마주앉아 담소를 나누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십육 년 전, 시호가 물리학과로 지망 학과를 변경한 것을 그의 담임에게서 들은 교수는, 시호의 집에 찾아가 최후통첩을 고했다.

-네가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학대해봤자 아무도 좋아하지 않아. 만약 네가 기어이 물리학과로 오면, 난 평생 진아의 아버지가 아닌 교수 이기선으로서만 널 대할 거야, 알겠니?

이듬해 시호가 기어이 Y대 물리학과에 진학하자, 교수는 자신의 말을 무정하리만치 철저하게 지켰다. 사적인 연락은 물론 캠퍼스에서 마주쳐도 시호의 인사에 꾸벅 목례만 하고 지나갔다. 진아의 2주기 때 빛나가 안부 인사를 빌미로 시호를 데리고 연구실을 찾아갔지만, 교수는 오히려 “빛나 양, 앞으로 학교에서는 너무 친분을 드러내지 않는 게 좋겠어요. 용무가 없으면 연구실엔 오지 마세요.”라는 말과 함께 빛나에게까지 선을 그어버렸다.

거부당한 무안함과 서운함을 숨기지 못하는 빛나를 옆에서 보고 있던 시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연구동에 다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교수를 질타했다.


-내가 진아를 추모해 물리학을 공부하는 게 당신 눈에 거슬린다면 얼마든지 날 내쳐도 됩니다! 하지만 나만큼, 아니, 친구로서는 나보다 더 진아와 친했던 빛나까지 내치는 건 무슨 저의입니까? 의연한 척, 어른스러운 척은 혼자 다 하는 주제에, 사실은 진아에 대해 떠올리게 하는 우리를 마주하기 싫을 뿐인 게 아닙니까? 겁쟁이! 비겁자! 아무리 입에 현학을 올리며 고고한 척, 통달한 척 해 봤자, 살아 있던 사람을 처음부터 없던 사람으로 치부할 순 없어! 진아는 죽었어! 하지만 우린 살아가야 하잖아!


시호는 소란을 듣고 달려온 동료 교수들과 직원들에게 붙들려 끌려가고, 학사경고를 받고야 말았다. 이날 이후 시호는 교수와 소 닭 보듯 하는 사이가 된 건 물론 빛나와도 얼굴을 마주하기 껄끄러워졌다. 어느 계기가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세월이 많이 지났습니다. 따님의 얼굴도 이제 와선 기억이 흐릿합니다. 근데 방금 카오스 이론 이야기를 들으니, 신기하게도 다시 생생해지는 기분입니다.”

“그래요, 그 아이도 참 카오스 이론을 좋아했지요.”

시호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 교수의 얼굴을 보았다. 자신의 기억 속 모습보다 훨씬 주름이 지고 초췌해 있었다. 부인과 사별하고 외동딸 진아와 단둘이 살아가던 교수는 그날을 계기로 외톨이가 되어버렸다. 진아는 아빠를 무척이나 따르던, 아빠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아이였다. 시호는 진아가 떠나고 한참 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진아가 유학을 염두에도 두지 않은 건 다름 아닌 홀로 남을 자신의 아버지를 걱정해서였음을.

그런 딸을 하루아침에 잃었지만 교수는 주저앉아 있을 수 없었다. 바로 얼마 뒤 딸과 교제하던 소년 시호가 부친상을 당해 고아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딸을 사랑했기에 딸이 아끼던 소년을 두고 볼 수 없던 그는 남은 기운을 짜내어 소년의 부친과의 이별을 함께해 주었다.

그리고 이후 딸을 가슴에 묻고 혼자 버텨내야 하는 긴 여생을 내다본 그는, 독한 마음을 품고 시호와 빛나를 떼어냈다. 아버지 이기선의 역할은 끝났지만, 인간 이기선의 인생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기에.

물론, 정시호와 황빛나의 인생 역시.

“…제가 여기 사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황 박사하고는 가끔 마주칠 기회가 있으니까요. …그런 식으로 뿌리쳐져서 황 박사도 상처가 없지 않았을 텐데, 노인네의 염치없는 부탁에 흔쾌히 대답해 주더라고요.”

“…그랬군요. 빛나가…”

“이제 다음 학기엔 부교수가 된다지요? 황 박사 실력이야 타과 뒷방 늙은이인 나도 전해들을 정도니, 앞으로 정말 기대가 되는군요. …크흠!”

교수는 별안간 헛기침을 하더니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을 막았다. “쿨럭!… 쿨럭!…” 탁하고 시원치 않은 기침을 연거푸 하고 나자 교수의 안색은 눈에 띄게 상기되었다. 시호의 얼굴에 근심이 드리웠다.

“아버님! 괜찮으세요?”

“…으으음…”

시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에게 다가오는 걸 한 손을 들어 제지하고는 교수는 등받이에 등을 천천히 기대고는 심호흡을 했다. 팔걸이를 있는 힘껏 붙든 교수의 손은 핏기가 없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조금만 참으세요, 바로 119 부를게요!”

“…됐어요. 난 괜찮아요.”

“하지만 아버님…!”

“괜찮대도… 가끔 비 오면 이래요… 겨울에 걸린 독감이 조금 오래 가는 것뿐이에요…. 잠깐 이러고 있으면 괜찮아져요…”

교수는 그대로 꿈쩍 않고 심호흡을 하며 손끝과 발끝을 조금씩 꼼지락거렸다. 시호는 교수의 옆에 서서 여전히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교수가 물끄러미 고개를 돌려, 어느새 예전의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고 있는 시호를 보았다. 열아홉 살의 소년은 서른다섯 살의 청년이 되었지만, 더 이상 그의 1순위는 딸이 아니었지만, 딸이 좋아하던 거짓말을 못하는 투명한 눈동자만은 그대로였고, 그것만으로 이 공간에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알고 있지… 시호도… 아주 훌륭하게 살고 있다는 걸…”

그리고, 교수가 겉치레를 집어던지고 오랜 본심을 털어놓기에도….

“아버님…”

“무슨 일을 하고 있든 너는 너 자신…. 그런 망설임 없는 모습을… 진아도 참 좋아했었지.”

“아버…님…”

“…네 말이 맞다… 겁쟁이는 나였어. 두 사람을 마주하고 있으면… 진아가 없는 현실에 짓눌릴까봐…”

“아버님!!!”

시호는 교수를 와락 끌어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교수 역시 눈시울이 뜨거워진 채 말없이 시호의 등을 쓸어 주었다.


카오스 이론에 따르면 완벽히 파악된 초기 조건으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현상계에서 초기 조건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미래를 완벽히 예측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기에야말로 팔다리를 늘어뜨린 채 부유하며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미래보단, 미약한 나비의 날갯짓으로나마 자신의 의지로 개척하고자 하는 미래가 보다 인간적이고 또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진아는 죽었다. 하지만 진아가 남긴 사랑은 죽지 않았다. 지상에 남은 사랑은 직간접적인 에너지원으로서 남은 사람들을 북돋아 준다. 사람들은 사랑을 기억할 때마다 살아나갈 힘을 얻고 이윽고 태고부터의 죽음의 충동을 이겨내게 된다.


어딘가에서 누군가 두 사람을 향해 미소 짓는 느낌이 들었다. 물리학을 좋아하고, 바이크를 좋아하고, 은근히 성에 관심이 많고, 늘 천진한 얼굴을 하면서도 주변을 살뜰히 챙기던, 귀엽고 애처로운 소녀가.     




마트 가장자리에 있는 분식 코너 테이블에서 지수는 옆자리에 원고지 다발과 연필 한 다스가 든 비닐봉지를 내려놓은 채 앉아 있었다. 슬슬 집에서 나온 지 한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이면 교수가 시호에게 지수의 정체를 낱낱이 밝히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젠장, 여기까진가…!’

지수는 어묵 국물을 다 마신 종이컵 가장자리를 물어뜯으며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집에 들어가면 시호가 무슨 얼굴로 자신을 맞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무슨 말을 들을지 까지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돌바닥에 머리를 박을 것 같아서 애써 떠올리지 않고 있었다.

‘도망칠 순 없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머릿속이 전쟁 상태인 지수는 누군가 자기 옆에 의자를 끌어와 앉은 줄도 모르고 있었다. 이마에서 관자놀이를 감싸 쥐고 열심히 생각 중인 지수의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상은 잘 찾고 있나요?”

“…!”

놀란 지수가 돌아보자 교수는 다 안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걱정 말아요. 정 선생에겐 일언반구도 밝히지 않았으니까, 안심하고 돌아가도 돼요.”

“…”

“연구실은 고사하고 기말고사도 안 보고 사라져 버려서 걱정했어요.”

교수의 눈에서는 거짓말이나 떠 보는 기색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수는 그제야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오, 처음으로 내게 질문을 해 주는군요.”

“무엇 때문에 제게 그렇게 적극적으로 권유해주신 건가요? 성적도 그렇지만, 학문에 대한 동기도 결여된 제게…”

교수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분식 코너 주인에게 “저도 어묵 이천원어치만 먹을게요.” 하고 펄펄 끓는 탕 속의 꼬치 두 개를 꺼내서는 하나를 지수에게 건넸다. 그리고 자신의 어묵을 한 입 베어 우물거리더니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내가 본 게 맞으면, 지수 학생은 자기가 진정 뭘 하고 싶은지 몰랐어요. …그렇죠?”

“…”

“뭘 하고 싶은지는 모르면서, 늘 뭔가를 할 준비가 된 눈을 하고 있었어요. 무관심과 나태함을 가장하고 있어도, 눈동자는 늘 호기심과 의욕으로 각성 상태였다고요. 그래서 손을 잡고 끌고 오고 싶었어요.”

“…그렇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늘 드리고 싶었던 말씀입니다.”

교수는 턱을 괴고 지수를 바라보았다. 지수는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사실은 전 제가 뭘 원하는지 늘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걸 찾아서 열심히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것이 지수 학생의 ‘이상’인가요?”

“네.”

교수를 마주보는 지수의 눈에는 한 점 거리낌도 망설임도 없었다. “흠…” 교수는 고개를 기울인 채 손을 입술과 턱에 대었다. 잠시 후 교수는 손을 떼고 빙그레 웃었다.

“…내가 안이하게 이해하려 들면 안 되겠죠?”

“…”

지수는 미소로 화답했다.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묵 값을 지불하고는 지수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겸사겸사 정 선생 좀 잘 부탁해요. 언제 한번 연구실에도 놀러 오고요.”     




빛나는 욕실 세면대 앞에서 몇 번이고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장기간 찌든 피로 그리고 애증과 분노로 뒤덮여 꼴이 말이 아니게 피폐해져 있었다. 재회한 자신에게 그렇게 혹독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조금도 자신을 원망하지 않는 서희를 보고 있자니, 빛나는 ‘자업자득이야, 그런 대우를 받아도 싸.’라고 스스로 납득시키는 자신에 대한 혐오까지 들 것 같았다. 거울 속 자신에 대고 빛나는 무심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선배, 나 잘 하고 있는 걸까.”

‘…!’

문득 빛나는 자신이 결코 약한 소리를 내뱉지 않던 대상을 떠올렸음을 자각하고,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지키겠다고 맹세한 대상에게 무심코 의존할 정도로 자신은 분명 쇠약해져 있었다. 조금만 더 약해지면 학과장이나 이서희에게 맞설 수도 없게 될 것이다.

빛나는 오늘은 이만 자리를 뜨기로 했다. 이 정도면 서희에게 압박은 충분히 주었고, 친구들에 대한 죄책감을 무겁게 느끼고 있는 서희는 실효성은 둘째치더라도 학과장의 전횡을 좌시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둘의 사이가 갈라져서 돌이킬 수 없게 되기라도 한다면 그 이상 바랄 것도 없다.

욕실에서 나온 빛나는 눈앞의 광경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전신의 말초 신경이 경련했다. 서희는 얼굴부터 팔다리까지 두드러기와 붉은 반점이 올라온 채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눈은 흰자위를 뜬 채 두 손은 목을 부여잡고, 쌕쌕거리는 호흡 소리를 내면서도 서희는 소리를 지르지 않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상태를 알리지 않으려는 듯.

“이서희! 정신 차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빛나는 서희를 반듯이 눕히고 머리 밑에 가방을 받쳐 기도 확보를 시도했다. 그리고 빛나의 눈에 들어온 건 서희의 입가에 묻어 있는 브라우니 가루였다.

“설마…!” 빛나는 황급히 식탁 위를 확인했다. 분명 세 조각 정도 남겨 뒀을 브라우니가 하나도 없었다. “안 돼! 안 돼! 언니!!!! 언니!!!!!” 빛나는 악을 쓰듯 외치며 달려가 베란다 창문을 벌컥 열었다. 주희는 양복을 입은 수상한 남자 몇 명과 대문 앞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그랬다. 주희의 초코 브라우니는 사실상 빛나만을 위한 간식이었다. 빛나보다도 훨씬 더 당분과 과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는 아이스크림에 붙은 초코 시럽 한 방울, 초코칩 한 조각조차 못 먹는 사람이었다. 왜냐면…

“브라우니!!! 초콜릿!!! 알레르기!!!! 이서희가!!!!!!”

완전히 공황 상태에 들어서서 제대로 된 문장조차 만들 수 없었음에도 주희는 빛나의 말을 듣자마자 우산을 내팽개치고 계단으로 뛰어갔다. “뭐해! 빨리 119에 전화해! 알레르기 환자 있다고! 조금이라도 늦으면 죽는다고! 어서!!!!” 뒤따라오려는 남자들을 돌아보며 주희가 포효하듯 내지르자, 남자들은 더 이상 따라오지 못한 채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빛나는 그대로 창가에 선 채 입을 벌리고 덜덜덜 이를 부딪치고 있었다.

“황빛나, 정신 차려! 서희 고개 옆으로 살짝 돌리고 입 열고 있어! 혹시라도 입 안에 찌꺼기 남아 있으면 뱉을 수 있게 등 쓸어 주고!”

그 말과 함께 현관문을 박차고 들어선 주희는 신발을 벗을 새도 없이 부엌으로 들어가 찬장을 열었다. 곧이어 구급상자를 꺼내 열자 제일 위에 기관지 확장제가 있었다. 빛나가 가까스로 정신을 붙들고 주희의 지시대로 했지만 서희는 어느새 상태가 더 악화되어 목 위가 파랗게 변한 채 팔다리를 경련하고 있었다. 주희는 서희의 입에 확장제를 물렸다.

“이서희! 살고 싶으면 힘껏 빨아! 마시고─! 내쉬고─!”

목숨이 경각에 달해 생존 본능이 극대화된 서희는 눈이 튀어나올 듯 세게 확장제를 빨았다. 숨을 내쉬면서 콜록거리자 미처 삼키지 못한 브라우니 잔여물이 튀어나왔다. 빛나는 물티슈를 손가락에 감고 서희의 입술과 이 사이에 낀 잔여물을 조심스레 닦아냈다.

십 분도 안 돼서 구조대원들이 도착해 서희를 들것에 실었다. 주희는 몸을 일으켰다. “언니, 저도 같이 가요!” 빛나는 허둥지둥 일어나려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빛나는 울먹이며 말했다.

“제가… 제가 몰아붙였어요!… 널 믿을 수 없으니까… 너도 목숨 걸라고!… 설마 저 바보가…!”

“…”

주희는 잠시 그대로 서 있더니 빛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네가 먹인 것도 아니잖아. 저 바보가 자기 몸 갖고 엄한 짓 한 거지. 걱정 마, 초동 대처 잘 했으니까 별 문제 없을 거야. 넌 여기 있다가 진정 좀 되면 돌아가. 뭣하면 문 잠그고 여기서 자도 되고.”

“…오늘 안 돌아올 거예요? 별 문제 없을 거라면서요?”

“저 녀석이 정신 차렸을 때 옆에 자기 아빠밖에 없으면 누구한테 연락도 못해서 돌아버릴걸? 또 어쨌든 내 집에서 내가 만든 브라우니 먹고 이렇게 됐으니까 내가 욕을 먹어야 엄한 데 불똥이 안 튀지 않겠어?”

주희의 말에 빛나는 정신이 확 들었다. 저런 상태의 서희를 옆에 둔 채 학과장과 맞닥뜨린다면 여러모로 결코 자신에게 좋을 게 없었다. 빛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구조대원를 따라가려던 주희는 잠시 멈춰 서서는 돌아보며 말했다.

“빛나야, 넌 역시 내가 아는 가장 상냥한 아이야. 우리들 중 네 상냥함에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

“그 상냥함을 너 자신에게도 돌렸으면 좋겠다. 갔다 올게!”

말을 마치자마자 주희는 쏜살같이 계단을 뛰어 내려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빛나는 인기척이 없어지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어느새 냉정함을 되찾은 빛나의 뇌는 천천히 현재 상황을 정리했다.

서희가 죽을 위험까지 감수하며 브라우니를 먹은 건 빛나의 말대로 ‘목숨을 걸고’ 자기 아버지에 대한 처결 권한을 얻어낸 것과 같았다. 이것으로 빛나가 가진 이문기의 비리와 그늘에 관한 문건은 봉인되었다. 어차피 동귀어진할 가능성이 커서 최악의 경우가 아니면 한동안 이문기를 우산 삼아 학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던 빛나로선 결과적으로 손해 볼 게 없었다. 적어도 빛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 상황에서 내가 기어이 문건을 터뜨렸다간 언니가 슬퍼하겠지.’

빛나는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 환풍기를 켜고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서희는 이제 더 이상 시호에게 다가갈 수 없다. 루나는 한 달 전부터 강의 시간에 볼 때마다 우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실연당했거나 적어도 시호와의 관계가 뜻대로 되고 있지 않은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제 시호를 휘두를 수 있는 가증스러운 도둑고양이는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

‘끝내겠어, 이걸로 전부.’

빛나는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세면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이 안광을 잃고 탁해진 것을 빛나는 깨닫지 못했다.     




우산을 쓴 시호는 달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쳐다보며 걷고 있었다. 구름에 가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달이 틀림없이 그곳에 있음을 상기하니 아쉬운 마음도 그럭저럭 달랠 수 있었다. 정말 소중한 것들은 자신이 잊더라도 대개 그 자리에 묵묵히 남아 있음을 새삼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 시간 전, 교수와의 오랜만의 재회 이후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있던 차에 빛나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알지? 양손 무겁게 하고 와.” 빛나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꽤 가라앉아 있었다.

시호는 앉은 자리에서 주희를 위한 선물을 약 십 분 동안 고민했다가, ‘그러고 보니 누나가 내일모레 사십이지?’ 라는 생각에 다다르자 곧바로 집을 나서서는 약국에 들러 온갖 건강보조식품을 샀다. 선물로서 센스가 꽝인 건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주희 같은 강골일수록 자신의 건강관리에 무심한 경우가 많음을 생각하면 나쁘지만은 않다고 시호는 스스로 납득했다.

오랜만에 보는 단독주택에 들어서서, 오랜만에 보는 계단을 올라, 한때 손에 익은 8자리 비밀번호 20140531을 눌렀다. 현관에 들어서자 시호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훨씬 비대해진 금희가 뒤뚱뒤뚱 걸어와서는 ‘애오-’ 하고 울었다.

“어휴, 세상 팔자 좋은 녀석. 좀 있으면 굴러다니겠다, 야?”

시호가 손끝으로 금희의 등을 쓸어주고 있자니, 부엌에서 빛나가 조용히 걸어 나왔다.

“웬일이래? 예전엔 선배가 매일같이 집에 와도 열 번 중 한 번도 아는 체를 할까 말까 하더니.”

“…원래 남자들끼리는 이심전심으로 안부를 주고받는 법이거든. 난 늘 금희의 인사를 받았어.”

시호의 너스레에 빛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땅콩 뗀 지 오래 돼서 패러미터가 반대로 기운 거 아냐?”

“그런 거 치고는 네 가슴팍에 갈색 털이 풍성하게도 묻어 있잖아, 이 노망 난 색골 축생이 어디서 감히…”

시호가 가볍게 콧잔등을 때리자 금희는 “애오오오-” 하고 살짝 늘어지듯 울며 거실로 돌아갔다.

“아이, 노인학대하지 마. 내가 힐링하려고 안고 있었다니까.” 빛나가 등을 돌려 부엌을 향하자 시호도 뒤따랐다.

“전화 받자마자 온 거지? 언니한테는 말 안 했고?”

“네가 깜짝 놀래주자며. 그나저나 오늘 가게는 안 할 텐데, 어디 나갔어?”

시호의 물음에 빛나는 방금 막 내린 듯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컵에 따르며 대답했다.

“금방 돌아올 거야. 자, 일단 이 집에서만 마실 수 있는 거.”

“오… 진짜 오랜만에 마셔 보네, 누나 커피.”

빛나에게서 커피를 받은 시호는 대충 후후 식히고는 바로 입에 댔다. 블루마운틴 특유의 산미가 혀끝에서 입안으로 화악 퍼져나갔다. 빛나는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커피에 살짝 부었다. 시호는 그를 보고 피식 웃었다.

“역시 내린 그대로 마시진 않는구나.”

“난 그래도 주인장에게 용인 받은 사항이야. 누구처럼 설탕까지 듬뿍 넣진 않는다고.”

빛나의 말에 시호는 자연스럽게, 한 컵을 내리는 데 드는 원두 값만 만 원 가까이 들어가는 고급 커피에 조금의 주저도 없이 백설탕을 푹푹 투척하는 부잣집 영애를 떠올렸다. 그럴 때마다 주희는 “과자 만들어 둔 거 눈에 안 보여? 너 나중에 그거 다 살로 간다?” 하며 핀잔을 주곤 했다.

정겹고 상냥하고 따스하던 그때의 광경들을 이제 와서 되돌릴 수 없는 건 알고 있었다. 추억은 과거에 흘러가 버렸기에 추억이다. 그러나 추억을 떠올릴 수조차 없게 된다면 현재를 견뎌낼 수 있는 버팀목 몇 개가 사라지는 셈이다. 이는 어제보다 좋게 말하면 평온하면서도 나쁘게 말하면 삭막하고 무미건조한 삶을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며, 시호는 자신과 빛나 역시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빛나야, 누나 오기 전에… 하아암… 해 둘 말이 있어.”

‘오늘 내가 무리하긴 했나, 왜 이렇게 졸리지.’ 시호는 시나브로 몸이 나른해지고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

시호 앞에 앉은 빛나는 묵묵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나… 얼마 전에… 서희를 만났어…. 지금… 한국에 있어.”

“…그래.”

“…응? …안 놀라네?”

시호는 고개를 꾸벅거리면서도 졸린 눈을 비벼대며 물었다.

“…이상한 일도 아니잖아. 선배가 보고 싶었나보지.”

빛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시호는 서희 얘기를 두고 빛나가 격하진 않더라도 최소한 온화하지는 않은 반응을 보일 거라 예상한 터라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런가, …혹시 …너도 만났어?”

“…”

빛나는 대답 대신 자신의 카페오레를 홀짝거렸다. 시호 역시 수마를 쫓고자 자신의 커피를 쭉 들이켰다. 이미 커피의 맛을 즐길 여유는 없었다. 주희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잠들어 버릴 순 없었다. 빛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났어, 세 달 전에. 그리고 방금 막.”

“…뭐?”

“몇 시간 전까지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자리에 있었어. 지금은 아마 위세척을 하고 입원해 있을 거야.”

“…너, 너… 지금 대체… 무슨 소릴…”

시호는 연이은 빛나의 믿기 힘든 말들에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생각을 정리하려고 하면 할수록 엄습해 오는 졸음에 뉴런이 뚝뚝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점점 흐릿해져가는 눈앞의 빛나의 표정은 왠지 슬픈 기색을 띠고 있었다.

“선배한테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말을 듣지 않았어. 오늘은 그를 포함해서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매듭을 지었고.”

“…빛나야, …그게 무슨… 이해가 안 되니까… 처음부터 설명을…”

빛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호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손으로 말총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선배는 걱정할 거 없어. 내가 있는 이상 아무도 선배를 건드리지 못해. …그 메이드 코스프레나 하는 사이코도.”

“…! …너………설………마…………”

시호의 의식은 거기서부터 아득한 심연으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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