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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Oct 10. 2024

피그마리온의 눈물 (16)

저는 어릴 적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PMC의 부대장인 아버지와 인류학자이자 대민 전문가인 어머니는 제가 돌이 되기도 전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저를 떠맡겼습니다. 어린 시절 저에게 부모님은 가뭄에 콩 나듯 산더미 같은 책과 장난감과 함께 얼굴을 비추고는 며칠 만에 말도 없이 떠나버리는 존재였습니다.

처음엔 울며불며 몇 날 며칠을 토라져 있던 저도 몇 번이나 그런 일이 반복되자 그 어린 나이에 부모님에게 정을 떼고 아저씨, 아줌마라고 부르며 남처럼 대하게 됐습니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저를 호되게 나무랐지만 저는 굽히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그런 저를 늘 감싸주셨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이던 어느 날, 일 년 만에 돌아온 아버지와 어머니는 얼굴도 마주치려 하지 않는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수야. 이해해 주렴. 세상에는 당장 나쁜 어른들에게 끌려가 내일 총알받이로 죽을지도 모르는 아이들이 도처에 있단다. 그런 아이들을 구해내 조금이라도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울 수 있다는 게 아빠와 엄마의 보람이야.”

그런 두 분에게 저는 빈정거리듯 대꾸했습니다.

“그럼 아예 돌아오지 않는 게 어때요? 아저씨랑 아줌마 덕분에 감사하게도 전 총 맞아 죽을 일 없는 불쌍하지 않은 아이로 태어나 버렸으니까요.”

그 말을 들은 두 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자리를 뜨시더니 그날 곧바로 출국하셨습니다. 그것이 그분들을 본 마지막 기억입니다. 몇 달 후, 시리아 내전의 혼란 속에서 반군을 지원하시다가 순직하셨거든요.

할머니는 충격을 받아 드러누우시더니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한 달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린 마음에 저는 ‘나 때문에 부모님과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저를 떠맡는 데 난색을 표하기 바쁜 친척 어른들의 말소리 같은 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나셔서는, 당신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저를 대학까지 보낼 것이고, 여기 있는 연놈들에게 물려줄 재산 따위 한 푼도 없으니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서로 모른 체 하며 살자고 친척 어른들에게 일갈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이제부터는 내가 할아버지를 지켜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한 푼이라도 돈을 벌어 살림에 보탬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동네 품꾼들을 따라 일을 나섰습니다. 농장, 축사, 논, 밭… 뼈도 다 안 자란 초등학생이 성인도 몸을 갈아가며 하는 일들을 똑같이 하는 건 무리였습니다. 새벽에 일을 나가 오후 일찍 하교 시간에 맞춰 돌아오면 수저 들 힘도 안 남아 있었고 다음 날 새벽까지 죽은 듯이 자는 나날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담임교사의 전화로 결국 할아버지가 아셨고, 일하던 저를 찾아 집에 끌고 오신 할아버지는 엄하게 다그치셨습니다.

“내가 너 보고 돈 벌어오라고 일언반구라도 말했더냐? 쓸데없는 짓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저는 고분고분하게 할아버지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어른과 똑같은 일을 할 체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저는 방과 후에는 동네에 하나뿐인 태권도장에서 얻은 도복을 입고 온 산을 뛰어다니며 홀로 무술을 수련했습니다. 부친의 피를 이어받은 덕분인지 중학교 1학년 때 저는 도장의 사범과 대련해 이길 정도로 실력이 늘었습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할아버지의 귀에 들어갔고, 할아버지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산에 올라와 수련 중인 저를 찾아내서는 처음으로 따귀를 때리셨습니다. “이놈이 어디서 무술 따위나 하고 있어! 왜 공부하란 말 하나를 이렇게 안 들어! 공부는 실패해도 다치거나 죽진 않지만 무술은 실패하면 목숨 내놔야 한다는 걸 모르느냐!” 할아버지의 눈에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보이신 적 없는 눈물이 맺힌 걸 본 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다음 날부터 할아버지는 조합원 일도 그만두시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학교 앞에서 기다렸다가 제 손을 꽉 붙들고 집에 데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잠든 걸 확인하기 전까지는 주무시지 않고 대문 앞을 지키셨습니다. 할 일이 없어 학교 공부를 하거나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게 되었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돌자 읽을 게 있나 찾아보러 어머니가 쓰던 방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방 책장에는 여러 외국어로 쓰인 문화인류학 서적과 몇 권의 소설책이 있었습니다. 외국어 서적엔 애당초 손을 댈 엄두도 못 낸 채 소설책들만 뽑아내고 있자니 책 사이에 있던 쪽지 한 장이 빠져 나왔습니다. 그것은 제가 말로써 부모님을 내쫓다시피 밀쳐낸 날, 어머니가 저에게 남긴 편지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지수야


네가 이걸 읽고 있다는 건 우리에 대한 너의 미움이 조금은 누그러졌다는 뜻이겠지

누구보다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한 시기에 널 외롭게 한 형편없는 부모로서 반성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선택을 후회한 적 없고, 지금도 마찬가지란다     


이것만은 알아주길 바란다

엄마와 아빠는 딱히 가정에 충실한 소시민 대신 가정에 소홀한 영웅이 되길 택한 게 아니야

뱃속에 너를 품고 있을 때 우연히 인권 유린의 실상을 보게 되었고

그때부터 도저히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이전처럼 살아갈 수 없었어 

결코 그 아이들이 더 소중하다든지, 더 불쌍하다든지 한 게 아니야     


어제까지 식탁에서 고향의 처자식의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하던 동료가

오늘 구출한 자기 자식과 비슷한 나이의 소년병 스파이의 총에 맞아

피거품을 물며 죽는 지옥의 한복판에서도

우리가 아직 살아 있음에, 우리가 할 일이 남아 있음에 감사한다

우리가 너라는 돌아올 곳이 있음에 감사한다     


사랑하는 지수야

그래서 우리는 행복하다

목숨을 걸고 지킬 가치가 있어 행복하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워지는 생의 감각에 행복하기 이를 데 없다      


지수야

곁에 있어주지 못하는 부모라 미안하다

우리의 자식으로 태어나줘서 고맙다

우리의 몸과 영혼을, 온 존재를 바쳐

사랑한다     


“…염병하고 있네, 자식 방치한 막장 부모가 혓바닥만 길어가지고…”

저는 욕지기를 내뱉으며 편지를 갈기갈기 찢었습니다. 잊고 있었던 애증이 한 번에 끓어올랐습니다. 만약 이들이 눈앞에 있었다면 온갖 폭언과 욕설을 쏟아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유년기에 변변히 같이 시간을 보내지도 않은 제 속에서 두 분의 인상은 한없이 옅어져 있었습니다. 원망할 대상의 존재가 희미해지자 갈 곳을 잃은 원망하는 마음은 스스로를 괴롭게 했습니다.

문득 저는 탁상 거울에 비친 스스로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생전 아버지가 저를 보며 곧잘 어머니에게 “지수는 점점 당신을 쏙 빼 닮아가네”라 말씀하셨던 게 생각났습니다. 저는 무언가에 홀린 듯 곧장 장롱을 열어 제일 안쪽에 있던 어머니의 드레스를 꺼냈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파운데이션을 얼굴에 두드리고 립스틱을 바른 것만으로 저는 생전 어머니와 흡사한 용모의 여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2차 성징이 지날 나이에도 변하지 않은 여자 같은 얼굴과 목소리는 더 이상 콤플렉스가 아니었습니다.

욕실에 들어간 저는 거울을 보았습니다. 거울 속에는 제게 남성의 정체성을 물려준 아버지와 용모를 물려준 어머니가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손가락을 들어 그들을 가리켰습니다.

“당신들의 사랑 따위 난 인정 안 해. 사랑 받는 사람의 감정이나 형편을 돌아보지도 않는 사랑, 제멋대로 그저 자신을 이해해주길 바라는 사랑 따위…!”

그러자 옆에서 무언가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할아버지였습니다. 제가 다급히 욕실을 나와 할아버지를 일으키려 하자, 할아버지는 제 팔을 붙들고 울부짖으셨습니다.

“대체 왜 이러는 게냐, 지수야…! 네가 이러면 나는, 나는 어쩌면 좋단 말이냐…!”

그제야 저는 깨달았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할머니를 잃었지만, 할아버지는 자식 내외와 아내를 잃었다는 것을, 그럼에도 손자를 키워내야 했기에 슬픔을 억누르고 강한 체 해 오셨던 것을요.

그때부터 저는 오직 학교 공부에만 매달렸습니다. 일을 하고 싶어서, 무술을 단련하고 싶어서, 여장을 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는 걸 꾹 참고 그저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중학교 2학년 1학기 중간고사에서 저는 전 과목에서 한 문제를 틀렸고, 전교 1등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성적표를 받아든 할아버지는 제 앞에선 “수고했다”고 짧게 한 마디를 하셨을 뿐이었지만, 저 없는 곳에선 동네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붙들고 자랑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할아버지를 위해 저 스스로를 억누른 지 일 년이 지날 무렵, 할아버지는 노환으로 몸져누우셨습니다. 의사는 원래 약했던 심혈관계가 수 년 전 연이어 일어난 비극과 최근 몇 년 간의 일들에 의한 스트레스로 타격이 누적되어 손쓸 도리가 없는 지경까지 왔다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병원에 입원하시고 돌아가시기까지 석 달 동안 할아버지는 간병인도 쓰지 않고 버티셨습니다. 학교를 쉬어서라도 돌봐드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며 으름장을 놓으셨습니다. 하교하자마자 병원에 가 씻겨드리고 간식을 챙겨드릴 때마다 할아버지는 점점 야위어 가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하루하루 혼자가 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생일 이틀 전, 할아버지는 지난 세월 당신께서 알뜰히 모으신 전 재산이 든 적금 통장과 한 장의 각서를 제게 건네며 말씀하셨습니다.

“지수야…. 나는 내 자식과 며느리가 선택한 삶을 인정할 수 없었단다. 녀석들이 집에 올 때마다 내가 못돼 처먹은 부모라고 얼마나 나무랐는지 아니…? …하지만 녀석들은 늘 행복해 보였어. 그것이 늘 나를 안심하게 했단다.”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주변 사람의 행복을 희생한 사람들이에요.”

“그렇겠지…. 그 업보가 무엇인지는 네가 제일 잘 알잖니…? 지수야. 내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뿐이란다…. 행복하게 살려무나.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것이 네 행복으로 이어지기를 기도하마…”

그것이 할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이튿날 새벽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중환자실로 전동되셨고, 그 다음날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의 장례 때는 모든 반 친구들과 동네 사람들이 와 주었습니다. 그 와중에 할머니 장례 이후 방문 한 번, 전화 한 번 없던 친척들이 찾아와서는 자기들 앞으로 유산을 남기지 않았냐며 난리를 쳤습니다. 도장 사범님이 본인이 할아버지가 임명한 저의 후견인이라는 내용의 위임장을 들이대며 호통을 치자 그들은 덤벼들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할아버지가 작성한 각서를 내보였습니다. 장례 부조금을 양도하는 대신 더 이상 유산 문제를 걸고넘어지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친척들은 못 이기는 척 서명하고 물러갔습니다.

저는 적금을 깨지 않았습니다. 담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저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업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가방도 안 메고 학교에 와서 매일 오전 수업만 듣고는 일을 하러 나갔습니다. 공사 현장에서 구조물 철거도 배선 작업도 해 봤고, 공장에서 라인 유지 보수와 증설도 해 봤고, 산에서 태양광 발전 시설도 세워 봤습니다. 거기서 받는 돈으로 생활비를 대신했습니다.

어쩌다 수업이 없을 땐 옆의 애들이 떠들고 놀 때 혼자서 소설을 썼습니다. 변변히 행복한 기억도 없이 그저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저에게 오직 그것만이 위안을 줬습니다. 제 소설을 본 사범님은 재미있다고 호평해주셨습니다. 한번 소설가를 지망하는 건 어떠냐는 말씀까지 해 주셨습니다. 저는 정중히 말씀드렸습니다.

“사범님.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꿈은 그저 잠시 행복감을 주는 역할로 그 소임을 다합니다.”

사범님은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사범님은 노끈으로 묶은 책 더미를 양손에 들고 저희 집에 오셨습니다. 전부 수능 관련 교재들이었습니다.

“어린놈이 벌써부터 세상 통달한 척 꽉 막힌 소리 하는 거 아냐. 이런 시골 촌구석에서 미주알고주알 떠들지 말고 큰물에서 놀면서 네 꿈을 찾아!”

몇 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저는 수능을 준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오전에는 인강을 듣고, 낮부터 저녁까지 일을 하고, 밤에는 문제를 풀었습니다. 무술을 단련했던 몸이라 그 생활을 수능 때까지 버틸 수 있었습니다. 수능 당일에는 사범님이 시험장까지 저를 데려다주시고, 점심 엔 사모님이 싸 주신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12월에 나온 성적은 K대나 Y대 중위권 학과에 들어갈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하향 지원한다면 확실하게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명문대 배출 실적을 원했던 담임은 K대나 Y대를 지원하길 원했고, 사범님도 “한국에서 중요한 건 졸업이 아니라 입학이야. 하고 싶은 걸 못 찾았다면 제도권에서 일단 최대한 도약해보고 다음 스텝을 생각해도 돼.” 라며 그에 동의하셨습니다.

그렇게 전 Y대 물리학과에 입학했고, 일 년 후 온라인에서 선생님을 만났고, 거기서 또 삼 년 후 대타 강의를 온 선생님을 직접 만나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어때요? 정말 재미없죠?”

지수는 말을 마치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지수를 바라보는 시호의 눈은 연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계속 혼자 살아온 거예요? 친구나 연인은 없었어요?”

“에이, 맨주먹 개털이 그런 거 사귀는 건 사치죠.”

시호는 오늘에서야 왜 자신이 지수에게서 느낀 고독과 그늘이 낯설기는커녕 애처롭고 애틋하게 느껴졌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자신과 비슷해 보이면서도 훨씬 고달픈 길을 걸어왔다. 자신이 빛나나 교수 같은 주변 사람들에게 응석부리며 여전히 진아에게 연연하고 있을 나이에 지수는 마땅히 응석부릴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그날 강의실에서 선생님을 뵀을 때 저는 직감적으로 깨달았어요. 아무리 아파도, 어떤 상처를 받아도, 펜을 놓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역정을 내도, 불만을 터뜨려도, 피를 토해도 펜 끝으로 할 사람이라는 걸.”

“지수 씨…”

“그리고, 그날 선생님의 집에서 원고를 읽었을 때 그것은 확신으로 바뀌었어요. 동시에 제가 어떻게 선생님을 도와드릴 수 있을지 깨달았고요.”

담담히 말하는 지수의 말투에서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축이 있었다. 시호는 이 굴지의 스토커에게서 두려움을 느꼈지만, 그보다도 더 크게 다가오는 감정이 있었다.

천부적인 재능과 그를 발휘하게 한 피나는 노력에 대한 경외.

그럼에도 홀로 외로이 싸워나가야 했던 처절한 인생에 대한 동정과 연민.

“…그렇다면 이제는 내 차례예요.”

그래서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본인의 선택이려니 하며 덮어두고 호의를 받기만 할 수 없었다.

“지수 씨는 지금까지 충분히 해 줬어요. 앞으로는 내가 지수 씨를 위해 헌신할 차례예요.”

시호는 팔꿈치를 받쳐 몸을 일으켰다. 마취가 거의 풀려 수술한 부위가 욱신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씀은 하지도 마세요. 그럼 제가 해온 일은 도대체 뭐가 되나요?”

“…”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선생님의 글을 위해서라면 전 제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요. 그게 제 삶의 보람이고 기쁨이에요. 왜 이해를 못하시는 거죠?”

“…피는 못 속인다더니.”

시호가 질린 듯 내뱉었다. 순간 지수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그게 무슨 의미죠?”

지수의 말투에서는 은은하지만 분명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시호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그런 헌신 난 인정 안 해요. 헌신 받는 사람의 감정이나 형편을 돌아보지도 않는 헌신, 제멋대로 그저 자신을 이해해주길 바라는 헌신 따위…!”

시호가 자신의 말을 그대로 빌려 공격하자 지수는 발끈했다.

“절 그자들과 똑같이 취급하지 말아요! 적어도 전 이해해달라고 칭얼거린 적 없어요! 선생님이 절 미워하게 되어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요!”

“지수 씨가 칭얼거려주길 내가 원해요! 영문도 모른 채 미워하게 되는 것보다 그게 백 배 낫다고요!”

“싫어요, 선생님한테 부담 주는 일만은 하기 싫다고요!”

지수는 어느새 자신의 감정이 격해진 줄 자각하지 못하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대체 왜 끼어드신 거예요? 조금이라도 잘못 맞았으면 즉사였다고요! 선생님이 목숨 걸고 구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잖아요, 그 시점의 저는!…”

다음 순간 지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시호는 몸을 틀어 지수를 끌어안고는 등을 토닥거렸다.

“…어휴,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헛똑똑이라니까.”

“선생님…”

“사람의 마음을 만만히 여기면 안 돼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사람은, 이성의 방향과, 이해타산과 상관없이 누군가를 죽도록 미워할 수도 있고, 목숨 바쳐 사랑할 수도 있어요.”

시호는 지수의 품이 역시 가냘프다고 느꼈다. 그가 남자란 사실은, 마음만 먹으면 눈 깜짝할 새에 맨손으로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인간흉기라는 사실은 상관없었다.

“내 마음 속에서 지수 씨는 여전히 소중한 파트너고,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에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지수는 지수다.

“…안 돼요. 그런 건.”

“내 마음이에요. 내가 정해요.”

두근.

“저한테 쏟는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창작에…”

“즐거움을 뺏긴 채 억지로 창작을 할 수는 없어요.”

두근, 두근.

“…또 제 버릇 못 버리고 터무니없는 일을 벌일지도 몰라요?”

“…그건 좀 화를 많이 낼 거예요.”

“진짜 박력 없어 보이는 경고네요.”

“어쩔 수 없죠. 어지간해선 내가 지수 씨를 진심으로 내칠 순 없을 테니까.”

두근, 두근, 두근.

지수는 심장이 점점 더 크게 고동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끌어안은 채 명치 부근에 귀를 대고 있는 시호에게도 아마 들릴 것이다.

처음부터 기대하고 있지 않았다. 이십삼 년을 남자로 살아왔고, 그렇기에 자신이 시호의 재능에 반할지언정 사람 자체에 반할 줄은 예상도 못했다. 시호의 마음에 들기 위해 여장을 할지언정 시호가 정말로 자신을 여자로서 좋아하리란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그렇게 철저히 시호를 위한 도구로서 옆에 있다가, 때가 되면 모든 것을 밝히고 사라질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수 역시 인간이었다. 자신이 계획한 대로 시호를 완벽하게 유도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같이 지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자신이 시호의 말과 행동에 일희일비하는 빈도가 늘어났다. 그리고 그만큼 자신의 원래 성별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게 되고 있었다.

‘…만약, 조금만 응석을 부려도 된다면…’

“선생님.”

지수는 살며시 시호를 떼어내고 그와 얼굴을 마주보았다.

“세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말해 봐요.” 시호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지수는 자신의 이마를 가리키며 말했다.

“첫 번째로, 여기다 뽀뽀해주세요.”

쪽.

시호는 아무 망설임 없이 지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지수는 화들짝 놀라 자신의 입술을 가리고 얼굴을 붉혔다. “아… 아니… 누가 입에다…”

“에이, 분위기 이상하게 뭘 홍조를 띄워요? 같은 남자끼리.”

시호는 대수롭지 않은 듯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지수는 일순 힘이 빠졌다.

‘…하…, 그래, 같은 남자끼리…’

그러나 지수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이거야말로 내가 황빛나를 보며 경계하던 집착하는 마음이었지.’ 시호를 전력으로 지탱한다는 목표는 변하지 않았다. 응석을 부릴지언정 시호를 위해 그 임계점은 명확해야 했다.

지수는 시호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는 속삭이기 시작했다. 한동안 방 안에는 두 사람의 숨소리와 창밖의 빗소리만이 은밀하면서도 절절하게 울려 퍼졌다.     




빛나는 자신의 방에서 불을 끈 채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어제 저녁 오피스텔에 돌아온 이후, 빛나는 물 한 방울 마시지 않은 채 한나절이 지나도록 침대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저께, 그러니까 일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빛나는 어느 병원 응급실에서 의식을 되찾았다. 왼팔에는 하얀색 수액이 꽂혀 있었다. 의사는 빛나가 영양실조 직전 상태로 폐가에 홀로 쓰러져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빛나에게 중요한 건 자신의 상태가 아니었다. 빛나는 의사를 붙잡고 혹시 삼십대 남성 한 명이 같이 쓰러져 있지 않았냐고 물었으나, 돌아온 대답은 “아뇨, 환자분 혼자 마루 위에 곱게 누워 있었다고 해요.”였다.

휴대폰을 켜서 문자를 확인하자 마침 한 시간 전에 지수가 보낸 게 한 건 있었다.

-선생님은 무사하세요. 혈흔이랑 탄피도 다 없앴고요. 염치가 있다면 당분간 혼자 머리 좀 식히면서 선생님을 위해 뭘 할 수 있는지 처음부터 다시 고민해 봐요.

시호가 살았다는 안도감을 얻자 뒤이어 찾아온 건 자신이 시호를 죽일 뻔했다는 죄책감이었다. 빛나는 오른손으로 왼팔의 주삿바늘을 확 뜯어버렸다. 개방된 혈관으로 피가 수도꼭지를 튼 듯 떨어졌다. 간호사가 소독과 지혈을 위해 다가가자 빛나는 그의 손에 들린 밧드를 쳐서 떨어뜨렸다.

빛나는 뽑은 주삿바늘을 자신의 목에 대며 소리쳤다.

“치료 같은 거 필요 없어요! 난 여기서 죽을 거예요!”

의사는 침상과 거리를 두며 외쳤다. “저 환자 빨리 RT하세요! 아티반 1ml 인젝!” 그러자 빛나의 뒤에 있던 간호사가 잽싸게 빛나의 양팔을 잡아 침대에 눕히고, 옆에 있던 간호사는 빛나의 손에서 주삿바늘을 뺏었다. 이윽고 우르르 달려온 간호사들이 가져온 끈으로 빛나의 팔다리를 묶고, 엉덩이에 아티반 주사를 놓았다. 빛나는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악을 썼지만 금세 몸에 힘이 빠지더니 정신을 잃었다.

그날 저녁 눈을 뜬 이후 빛나는 더 이상 난동은 부리지 않았지만 말 그대로 모든 의료행위를 거부했다. 수액 주사도, 식사도, 의사 면담도 마다하고는 월요일 오전에 빛나는 병원을 나와 택시와 버스를 타며 장장 다섯 시간이 걸려서야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흘 넘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빛나의 공복감은 한계까지 치달아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이 정도로 사람이 죽을 리가 없었다. 애당초 죽을 배짱이 있었다면 이미 옥상에서 떨어지든지 식칼로 경동맥을 긋든지 했을 것이다. 빛나는 제대로 자살 하나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휴대폰을 켠 빛나는 오늘이 화요일임을 새삼 확인했다. ‘…내일 강의 준비해야 하는데. 그 전에 점심에 학과 교수님들하고 약속이 있었지…’ 방금 전까지 죽네 마네하며 내적 갈등을 벌여 놓고 학교 일을 신경 쓰고 있는 자신이 빛나는 참 골계적으로 느껴졌다.

‘이제 와서 강의고 부교수고 무슨 소용이야…’

꼬르르르르륵────

그러나 빛나가 사회적 인정이라는 상위 욕구를 유기하고픈 충동과 상관없이, 3대 욕구인 식욕은 빛나가 약한 인간임을 무정하게도 환기해주었다. ‘오냐, 그렇다면 나도 눈치 안 보고 막 나가주겠어!’ 빛나는 힘이 빠진 몸을 이끌고 침대에서 나와 옷방으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아~ 잘 먹었습니다!”

빛나는 캠퍼스 근처 라멘집에서 돈코츠 라멘 곱빼기를 순식간에 비우고는 그릇을 내려놓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점내의 몇몇 학생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시선을 빛나는 분명히 느꼈다. 비슷한 시선을 빛나는 오피스텔에서 나와 라멘집에 이르기까지 이미 여러 번 느꼈다.

“어유, 국물 튀었네.”

빛나는 나무 곽에서 휴지를 몇 장 뽑아 라이더 복장의 가슴팍에 떨어진 국물을 슥슥 닦았다. 한 번 닦을 때마다 스판 소재의 옷에 착 달라붙은 가슴이 탄력 있게 일그러졌다. 빛나의 오른편에서 면을 홀짝거리던 점잖아 보이는 중년은 힐끔힐끔 그를 쳐다보았다. 빛나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의자를 빼고 일어나자 중년은 황급히 라멘 그릇에 얼굴을 박다시피 하며 시선을 피했다.

가게를 나온 빛나는 해방감에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지금까지 빛나는 결코 사람이 붐비는 장소나 시간대에 라이더 복장을 입고 돌아다니지 않았다. 늦은 밤과 이른 아침에 시호의 집을 왕래할 때도 실외에선 결코 헬멧을 벗지 않았다. 그래서 십오 년을 바이크를 탔음에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일부였다.

‘…내일부턴 좀 뒤통수가 따끔따끔하겠네.’

빛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헬멧을 쓰고 밖에 세워 둔 바이크 시트에 엉덩이를 걸쳤다. 시동을 걸고는 브레이크를 놓고 스로틀을 서서히 당기며 오후까지 내린 비가 아직 마르지 않은 도로로 들어갔다. 식욕이 채워지자 곧바로 다음 욕구가 호소하는 건지 시트에 찰싹 붙은 몸의 부분이 살짝 애달파졌다.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평소에 이 시간대에 바이크를 타면 행선지와 하는 일은 대부분 정해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당분간은 그곳에 갈 수 없다. 어쩌면 영영 갈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시호가 용서하더라도 빛나 스스로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시호에게 약을 먹여 납치하고, 끝까지 자신이 선을 넘는 걸 말리던 그에게 총상까지 입혔다. 신고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이었다.

빛나는 남가좌2동 쪽으로 방향을 틀고는 본격적으로 가속했다. 저 멀리 M대학교 부지가 보였다. 퇴근 시간이 지났음에도 도로는 여전히 차들로 붐볐다. 빛나는 그 사이를 이를 악물고 뚫고 지나갔다. 마치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 상념들을 뿌리치려는 듯.

그러나 그날 지수의 말만은 여전히 빛나의 귓가에 맴돌며 그를 괴롭혔다.  

-당신은 누구보다 예쁘지만 조금도 아름답진 않고, 누구보다 똑똑하지만 조금도 비범하진 않아. 그래서 줄곧 선생님의 뒤를 좇을지언정 한 번도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간 적은 없었지.

‘…그걸로 충분히 행복했어! 아예 홀로 뒤에 남겨지는 것보단 백 배 나았다고!’

빛나는 탑차를 오른쪽으로 추월하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당신은 그들처럼 선생님에게 진정한 의미의 상처를 남길 정도로 영혼의 교감을 나눈 적이 없거든.

“…그리고 상처 입은 선배가 돌아온 건 언제나 내 품이었어! 상처를 핥아 준 건 늘 나였다고!”

빛나는 7세대 그랜저와 모하비를 연달아 앞질러 가며 소리쳤다.

북가좌2동에 들어선 빛나는 골목 쪽으로 들어서서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꽤 길게 이어지는 오르막길 꼭대기에서 오토바이로 단번에 날아가듯 내려가면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빛나는 그저 빨리 도파민을 내보내 쾌락으로 괴로움을 무마하자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삼 분 정도 올라간 끝에 눈앞에 맞은편 내리막길밖에 남지 않자 빛나는 방향을 뒤로 돌려 클러치를 풀며 스로틀을 당겼다. 바이크는 비에 젖어 저항이 줄어든 내리막길의 탄력을 받아 거침없이 가속했다. 빛나는 지금까지 바이크를 타며 이런 짜릿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슬슬 도로가 보이자 멈춰 서고자 빛나가 브레이크에 손을 대려 할 때였다.

어디선가 튀어나온 아기고양이가 자신의 5m 앞에서 아장아장 걸어가는 걸 빛나는 뒤늦게 발견했다. “썅!!!” 빛나가 거친 욕설과 함께 오른쪽으로 방향을 급하게 꺾자 바이크는 아슬아슬하게 고양이를 비껴가며 사선으로 기세 좋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눈앞에 맹렬한 속도로 다가오는 담벼락을 본 빛나가 곧바로 핸들을 놓고 옆으로 구르려 할 때였다. 

빛나의 눈앞에 별안간 메이드복 차림의 지수의 환영이 나타나서는 말했다.

-당신이 가장 원하는 것은, 선생님이 자신의 인생을 자유롭게 결정해 나가는 것보단, 당신 치마폭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게 아닌가?

“나… 나는… 나는…!!!!!!!!!!!!!!”

빛나는 핸들을 놓지 못하고 꽉 움켜쥔 채 눈을 부릅뜨고 지수를 노려보았다.

콰아아아아앙!!!!

다음 순간, 요란한 충돌음과 함께 바이크가 담벽에 부딪쳐 반파되고, 빛나의 몸은 하늘로 붕 떴다. 바이저가 깨지며 드러난 빛나의 눈가엔 서러운 눈물이 맺혀 있었다.

‘…뭐가 옳은지 머리로 알고 있다고 해서 그대로 마음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난 강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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