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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Oct 24. 2024

피그마리온의 눈물 (17)

토요일 저녁, 창밖에는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남자는 물끄러미 창밖의 하늘을 보고는 가늘게 한숨을 쉬며 다시 전공서로 눈을 돌렸다. 일 년 전의 자신이었다면 밖에서 눈을 맞아가며 원고지를 붙들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예상은 했지만 교차지원으로 들어온 문과생에게 학부 수준의 물리학은 허들이 높았다. 서울권 타 대학의 장학금 대신 Y대 네임밸류를 선택해 들어온 쟁쟁한 이과생들 사이에서 남자는 수업을 따라가기도 벅차 2점대 학점을 간신히 방어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학내 친구도 없는 남자에게 지난 일 년은 고독하고 힘든 시간이었다.

그런 남자가 그나마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고향 후배이자 사실상 자신의 유일한 친구인 여자가 내년 봄이면 이곳에 입학한다. 수능 채점 결과는 지금까지의 모의고사와 마찬가지로 지망학과인 Y대 국문학과는 여유롭게 쓰고도 남았다. 담임이나 주변 사람들은 “차라리 S대를 써도 무난하게 붙을 거다”라며 상향 지원을 종용했지만 본인의 의지가 워낙 확고하기에 이변은 없을 것이다.

우우웅 하고 남자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에 표시된 이름을 보자 남자는 냉큼 슬라이드를 올려 전화를 받았다.

“어, 빛나야. 너도 눈 오는 거 보고 있어?”

“응. 역시 서울 눈은 더럽게 후졌네. 감질나게 내려와서는 픽픽 녹아내리긴. 우리 동네에서 첫눈은 쌓이는 게 디폴트인데.”

“축하해. 너도 이제 어엿한 서울 촌놈이야.”

“그건 선배를 지칭할 때 쓰는 말이고, 난 아래 말고 위에 달렸으니까 촌년이라 해야지.”

“벌써부터 국문과 티내는 거 봐.”

여자의 거침없는 입담에 남자는 피식 웃었다. ‘처음 알 때만 해도 이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응? 잠깐만.’

남자는 뒤늦게 이상함을 느꼈다.

“…너 지금 서울 왔어?”

“응. 오늘 신촌역 근처에 자취방 계약했어. 방값이 학비라더니 그 말이 맞네.”

“아니, 빛나야. 그런 거라면 신촌 주민인 나한테 한번 물어나 보지. 너 혼자 서울에서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언니랑 같이 찾아봤으니까 걱정 마셔. 선배 안 그래도 학과 공부로 머리 터지는데 나까지 귀찮게 하면 안 되잖아.”

“공부는 내가 알아서 하는 거고… 귀찮을 게 뭐 있어, 우리 사이에.”

남자는 고등학교 시절 곧잘 서로 왕래하던 여자의 언니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안도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 사람 다 자신에게 조언 한 마디 구하지 않은 게 못내 서운했다.

“노파심에 말해 두자면 방 찾는 거 선배한테 물어보자고 언니가 말 꺼냈는데 내가 자른 거야. 다른 거 안 보고 제일 싼 방 골라서 여름에 덥게 겨울에 춥게 사는 인간한테 여자가 살 방을 고를 안목이 있을 리가 없잖아.”

“…”

남자는 방금 전 자신의 생각을 철회했다. 예나 지금이나 이 여자의 성격은 무서우리만치 철두철미하고 냉정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의지할 수 있었고.

“…그래서? 지금 방이야? 뭐 치킨이라도 싸들고 갈까? 참고로 해 넘어가기 전이니까 술은 안 된다?”

“이야, 서울이 눈 뜨고 코 베어가는 곳이라더니, 술도 못 마시는 미성년자 혼자 사는 집에 당당히 쳐들어오려는 문란한 대학생이 여기 있네?”

“오호, 좋아. 난 딱히 건전할 생각은 없으니까, 이젠 코스프레 의상에 불과한 교복을 입고 깨끗한 몸으로 기다리고 있도록.”

“저기요 아저씨, 내년 2월까진 엄연히 고등학생이거든요? 발목시계가 그렇게 마려우세요?”

이 정도로 거침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건 일찍이 연인이었던 소녀와도 하지 않던 대화였다. 하물며 소녀가 살아 있을 당시에는 여자 쪽에서 먼저 말을 걸거나 전화를 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남자의 연인과 유일하게 남은 혈육이 차례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Y대에 입학하게 된 남자가 동네를 뜨기까지, 여자는 하루도 빠짐없이 남자의 앞에 나타나 이거 하자고, 저거 하자고 귀찮게 굴었다. 여자의 그런 행동은 남자의 마음에 적잖은 위안이 되었다. 수능을 보고 온 날 자신을 위해 저녁식사를 차려 놓은 여자에게 남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감사를 표현했다.

-빛나야. 솔직히 말할게. 아직도 난 진아가 빠져나간 구멍이 이따금 시려. 그래서 앞으로 내가 다른 누구를 좋아하게 되는 건 좀처럼 상상이 안 돼. …하지만 네가 없어지면 난 하루라도 제 정신으로 살아 있을 자신이 없어. 무인도에서 평생 살아야 한다고 하면, 딱 한 명 곁에 있는 사람을 고를 수 있다면, 그건 예나 지금이나 너일 거야.

그러자 여자는 “어휴, 두 번 밥 차려 주면 아주 그냥 반지 들고 프로포즈까지 하겠다?”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 날 이후 일 년 동안 여자는 더 이상 남자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학과 공부에 시달리는 남자가 기분 전환 겸 거는 전화는 받았지만 그 반대는 없었다.

여자가 수능을 보고 온 날, 거의 일 년 만에 동네에 돌아온 남자는 여자를 킹크랩 전문점에 데려갔다. 호기롭게 제일 비싼 코스를 시킨 것까지는 좋았지만, 랍스터를 헝겊에 싸지도 않고 망치로 내리치려는 남자의 모습에 화들짝 놀란 여자는 황급히 남자의 손을 붙들었다.

“그러다 다쳐! 내가 해 줄 테니까 손 하나 까딱 하지 마!”

남자는 여자의 불같은 기세에 주눅이 들면서도 순간 그의 손과 입에서 풍기는 너무나 잘 아는 향기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묻고 싶은 말들을 그저 마음속에 묻어둔 채, 그렇게 보름 가까이 지나 있었다.

“됐고, 빨리 밖으로 나와. 슬슬 추워질 것 같거든.”

“밖이라니, 너 설마 우리 집 앞에 있는 건─”

남자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남자는 부리나케 파카를 두르고 방을 나섰다. 빌라 밖으로 나온 남자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타이어부터 후면, 몸체, 머리까지 완전히 까맣게 도색한 오토바이. 마치 주변의 빛을 모두 빨아들일 것 같은 위세의 그것 옆에서, 여자는 위아래 올 블랙의 바이크 수트를 입고 그 위에 가죽 잠바를 걸친 채 입에는 에쎄 아이스를 물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여자가 남자를 돌아보고는 담배를 변명할 생각도 없는 듯 입에 문 채 씨익 웃었다.

“잘 지냈어, 선배? 앞으로도 선배라고 부르게 생겼네?”

“빛나야… 도대체 뭐야? 이게…”

“혼다 CB1300 3세대. 수랭 4스트로크 DOHC 직렬 4기통 엔진을 장착했고 배기량은 1284cc, 연비는 리터당 25km…”

“내 말은! 네가 왜 바이크를 몰고 있는 거냐고…! 거기다 담배까지…”

“…”

“대학 붙어서 들뜬 건 좋은데, 할 짓 안할 짓은 분별해야지! 너 이러는 거 누님도─”

“선배.”

연소자를 다그치는 듯한 남자의 말을 여자는 단호히 잘랐다. 이 역시 종래의 그로선 볼 수 없는 행동이었다. 여자는 땅에 떨어뜨린 담배를 구둣발로 짓이겨 불씨를 껐다.

“나도 이제 성인이야. 권리를 자유롭게 누리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나이라고.”

“빛나야…, 그런 말 하는 게 아니잖아. 너 한 해 몇 명이나 오토바이 타다가 죽는지 몰라서 그래?”

“이동용이나 통학용 아냐. 인적 없는 도로에서 레저용으로 타는 거야. 여름부터 생긴 내 유일한 취미야.”

“그렇지만…”

“진아 언니는 되고, 난 안 돼? 안전하게 타면 문제없잖아?”

그 말에 남자는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직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럼 담배는 뭐야? 그것도 취미로 배운 거야?”

“응. 스트레스 해소에 그만이던데?”

“…내가 피우지 말라고 하면, 나부터 피우지 말라고 할 거지?”

“잘 아네.”

“어휴, 내 잘못이다, 내 잘못이야. 이제 와서 미러링을 당할 줄이야.”

남자는 살짝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연락이 거의 없던 지난 일 년 동안 자신의 생각보다 여자가 거칠게 살고 있었던 모양이다. 여자가 오토바이를 몰고 흡연을 한다는 사실보다, 오죽 고독하고 힘들었으면 그런 것들에 의존했을까 하는 생각에 남자는 애잔함을 느꼈다.

“빛나야.”

그렇다면, 해줄 말은 하나뿐이다. 남자는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

여자가 아직 앳됨이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고생 많았어.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선배…”

남자는 물어보지도 않고 시트 뒤에 걸려 있던 바이저 없는 헬멧을 집어 들어 머리에 썼다. 여자는 말없이 턱끈을 매 주었다. 여자가 시트에 올라타 헬멧을 쓰자 남자는 여자를 끌어안고 허리를 꽉 붙들었다. 여자의 바이저에 묘하게 김이 서린 걸 눈치 채는 사람은 없었다.

스탠드를 풀고 시동을 걸고는, 브레이크를 놓고 스로틀을 당기자 두 사람을 태운 오토바이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신촌의 밤거리를 내달리고 있었다. 방금 전에 다그치던 건 어느새 잊어버렸는지 목을 울리며 철없이 신나 하는 남자를 뒤에 태운 채 여자는 한 가지 다짐을 하고 있었다.

───설령 그가 자신을 영영 연인으로 여기지 않는다 해도, 결코 실망하지 않고 평생 곁에서 지켜주겠다고.

일 년 전, 남자에게서 절절한 구절을 들은 여자는 집에 돌아와서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북받쳐 울음을 펑펑 터뜨렸다. ‘세상에 단둘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너하고’란 말을 듣는 건 일찍이 진아도 누린 적 없었고 앞으로 어지간한 사람은 누릴 수 없을 호사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뒤에 감춰진 절망적인 사실을 보다 부각시켜 줄 찰나의 위안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은 진아가 할 수 있던 연인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

남자에게서 다른 모든 말과 마음은 얻을 수 있을지언정, 서로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사람끼리만 주고받는 어떤 이성보다도 높은 로고스와 어떤 정념보다도 깊은 파토스의 신호는 자신에게 닿지 않는다.

누구를 흉내 내 바이크를 탄들, 누구를 흉내 내 흡연을 한들 말이다.

‘…그래도 괜찮아. 내가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 나는 선배를 사랑하니까, 진아 언니보다도 훨씬 더!’

여자의 몸에서는 어두운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달콤하면서도 씁쓸하고, 끈적거리면서도 애달픈 빛을 거리에 흩뿌렸다. 남자는 그를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다.     




밤부터 또 다시 내린 비는 새벽 동이 트자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택시에서 내린 시호는 비를 맞으며 ㅅ병원 본관 로비로 곧바로 뛰어갔다. 각각 13층, 17층에서 정체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못해 시호는 비상계단을 통해 5층까지 뛰어 올라갔다. 수술실 앞 창구에 앉아 있는 간호사에게 시호는 배를 감싸 쥐고 헐떡거리며 말했다.

“헉…, 헉…, 여기…, 헉…, 황빛나…, 환자라고…, 헉…, 수술…, 어디서…”

“황빛나 님 어젯밤에 수술 끝나고 9층 회복실 올라가셨고요, 지금 절대 안정이라 보호자 외에 면회 금지입니다.”

“그래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간호사가 무감정하고 딱딱한 말투로 상황을 알려주자 얼굴에 화색이 만연해진 시호는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고는 되돌아가 비상계단을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본격적으로 에어컨을 켜지 않은 6월 초의 실내는 덥고 습하기 짝이 없었다.

9층 복도에 들어서서 둘러보며 걷다 보니 회복실 앞 의자에서 십대 중반쯤의 외견을 한 여자가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있었다. 시호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여자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 쥐며 시호는 말했다.

“저 왔어요, 누님.”

여자는 고개를 들어 커다란 눈망울로 시호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이내 눈물을 글썽거리며 시호를 와락 안고는 등을 콩콩 때렸다.

“왜 늦었어! 왜 늦었어! 전화도 안 받고, 이제야 문자 본 거야?”

“죄송해요, 피곤해서 자고 있었어요.”

“무서웠다고! 저녁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빛나가 사고 나서 실려 왔다고 하지, 의사는 다짜고짜 수술에 동의하겠냐고 하지, 영동에서 신촌까지 택시를 타고 달려왔는데도 수술은 안 끝나 있지, 기껏 수술 끝나니까 환자 안정해야 한다며 얼굴도 못 보게 하지,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밤새 한숨도 못 잤단 말이야!”

“고생 많았어요. 다사다난한 밤이었겠네요.”

시호는 빛나의 언니이자 유일한 혈육, 황미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사실은 아직 실밥도 못 푼 배의 상처가 미친 듯이 아렸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이 사람에게는 평생 이 상처의 존재를 숨겨야 할 것이다.

“그래서 빛나는 어때요? 많이 다쳤어요?”

시호가 옆에 앉으며 묻자 미나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전신 타박상에 갈비뼈가 다섯 대 부러지고, 왼쪽 정강뼈 개방골절에 오른쪽 위팔뼈 목 부분 골절.”

“…그래요? 앞으로 재활하는 게 일이겠네요.”

“…너 어쩐지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다?”

미나가 시호를 흘겨보며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 쳤다. 시호는 살짝 움찔했다. 아닌 게 아니라 시호는 오토바이 사고가 났을 때 제일 치명적인 부위를 상상하며 부리나케 달려왔으니 말이다. 미나는 시호의 생각을 읽었는지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래, 팔다리야 부러져봤자 어떻게든 낫지. 목뼈 아래로 다쳤으면 살아도 산 게 아니었겠지만.”

그렇다. 자동차 사고와 오토바이 사고의 결정적인 차이는 운전자의 몸이, 정확히는 척추가 노출되는 여부다. 척추의 손상은 높은 확률로 중추신경계인 척수의 손상으로 이어지고, 흉수 레벨 이하의 손상은 하지 마비, 경수 레벨의 손상은 사지 마비 즉 식물인간으로 귀결된다.

십오 년을 바이크를 타면서 유일하게 난 사고가 팔다리 골절에서 그친 거면 어쨌든 평생 누워서 욕창에 걸릴까 전전긍긍하거나 휠체어에서 못 벗어나고 배변도 자기 의지대로 안 되는 케이스에 비하면 운이 좋은 편이었다.

“앞으론 두 번 다시는 오토바이 못 타게 할 거예요.”

“얼씨구, 무슨 수로? 걔가 작정하고 숨어서 타면 네가 어떻게 잡아낼 건데?”

시호의 말에 미나는 코웃음을 쳤다. 시호는 허벅지에 올린 주먹을 꽉 쥐었다.

“기어이 또 타려고 든다면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막아야죠.”

“…너 지금 내 앞에서 그게 할 소리니?”

“죄송해요. 하지만 입장이 바뀌었다면 빛나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요.”

“…그렇긴 하지.” 미나는 시호의 말을 순순히 납득했다. 잠시 후, 미나는 손을 뻗어 시호의 얼굴을 어루만지고는 자기 쪽으로 시호의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시호야. 같은 말과 행동이라도 빛나가 이면에 품고 있는 마음은 바다보다도 깊고 넓어. …알고는 있니?”

“누님…”

“두 사람 일이니까 난 오랫동안 지켜보기만 했어. 하물며 빛나는 스스로 크다시피 했으니 내가 끼어들 명분도 없어. 하지만 이젠 답을 들을 때가 온 것 같아.”

미나는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큰 눈동자로 시호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고개를 붙잡힌 시호는 눈을 돌려봤자 미나의 눈동자를 회피할 수 없었다. 언제까지고 두 사람의 줄다리기가 이어질 것 같았던 그때였다.

회복실 문이 열리더니 근무복 위에 AP가운을 두른 간호사가 나와서는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황빛나 님 깨어나셨어요. 언니분을 찾으시는데, 혹시 어디 가셨을까요?”

그러자 미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다짜고짜 시호의 손을 잡고 회복실로 들어가려 했다. 간호사가 부리나케 막아서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면회는 가족만 허용되고요, 소독하고 가운 입고 들어가셔야 돼요. 혹시 환자분과 관계가…”

“언니 찾는다면서요, 얘는 오빠고. 문제없죠?”

여자가 아랑곳 않고 들어가 비치된 AP가운의 밀봉을 뜯으며 대답하자 간호사는 잠시 멍하니 있더니 항변하듯 중얼거렸다. “아니, 누가 봐도 저쪽이 언니…”

말을 끝내기도 전에 미나가 확 째려보자 간호사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시호는 AP 가운을 걸치면서 살며시 미나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과민반응 좀 그만 해요.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어우 씨…”

미나는 애써 욕을 참으며 분을 가라앉혔다. 사십 대의 나이에 많이 봐줘야 중학생으로 보이는, 반로환동 연구 같은 걸 한다면 실험체로 제일 먼저 끌려갈 비현실적인 동안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회복실에 들어가자 제일 가까이 있는 침대에 빛나는 오른팔과 왼다리에 깁스를 하고는 누워 있었다. “언니!” 미나의 얼굴을 본 빛나는 화색이 만연해졌다. 그러나 뒤이어 들어온 시호를 본 순간 빛나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빛나는 시호를 응시하며 힘없이, 그러나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

“빛나야…” / “빛나야!?” 같은 어절을 말하는 두 사람의 다른 강세는 그것이 내포하는 뜻이 판이함을 알 수 있게 했다.

“지금은 별로 선배 얼굴 보고 싶지 않아. 언니 앞에서 쓸데없는 말 하고 싶지도 않고. 그러니까 빨리 가.”

“황빛나, 그게 무슨 소리야? 네 멋대로 주택가 담벼락에 들이박아서 실려 왔다니까 이 시간에 헐레벌떡 달려온 애한테!”

“언니는 끼어들지 마. 선배, 부탁이니까 당분간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 줘. 제발…”

빛나는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다시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미나는 더 이상 따지지 못하고 주먹을 꽉 쥘 뿐이었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자 방금 전 간호사가 따라 나와서는 이런저런 설명을 해 주었다. 오늘 중으로 일반 병실로 전동한다는 것, 경과를 봐야 알겠지만 최소 2주의 입원치료와 1~2개월간의 재활치료가 필요하다는 것, 왼다리와 오른팔을 못 쓰는 환자가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일상생활 활동은 한정적이니 간병인 신청을 권장한다는 것 등등이었다.

팔짱을 낀 채 잠자코 듣던 미나는 입을 열었다.

“간병인이라…. 사무실을 계속 비울 순 없고, 못미덥지만 없는 것보단 낫겠지. 퇴원하면 영동에 데려가서 돌보면 되니까, 보름만 남의 손 타는 수밖에.”

“저, 누님.”

시호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간병인 따로 쓰지 마세요. 대신 오늘 저녁까지만 빛나 곁에 있어주세요. 저는 빛나 강의 대타하고 오피스텔에서 필요한 것들 챙겨 올게요.”

“그건…”

“병원에 있는 동안은 제가 딱 붙어서 돌봐줄게요.”

“…!”

미나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저런 소릴 듣고서도 그러고 싶으냐는 말이 얼굴에 쓰여 있었다. 그러나 시호의 눈빛은 진지했다.

“빛나한테 받은 것들을 생각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랜만에 보는 청명한 햇살이었다. 제 아무리 햇빛이 들지 않는 그늘이라 해도 고개를 들면 파란 하늘이 보이는 것만으로 기분이 덩달아 맑아졌다. 루나는 학생회관 뒤뜰에서 끽연을 하는 여러 학생들 중 지금 유일하게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이어폰에서는 아직 한 번도 대외적으로 공개되지 않은 레인드롭스의 신곡 데모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은수와 윤아와 세미가 짠 곡을 루나가 편곡하고, 네 명이서 함께 가사를 고민한, 완전체 레인드롭스 전원이 처음으로 만든 곡이었다. 사흘 후 수원인디퍼레이드 본선 경연장에서 레인드롭스는 현장의 관객들과 실시간 스트리밍을 보는 시청자들에게 이 곡을 첫 선을 보일 것이다.

그리고 결과 여하에 상관없이, 레인드롭스는 반년 간 활동을 휴지할 것이다. 서로의 진심을 있는 힘껏 부딪친 그날 이후 세미는 아르바이트를 관두고 수능 공부와 밴드 연습에만 매진해왔다. 본선 무대가 끝나면 세미는 밴드에서도 물러나 다섯 달 뒤의 수능을 향해 전력투구할 것이다. 실기 시험에 대비해 일주일에 한번 루나는 세미에게 피아노와 작곡을 가르쳐 주기로 했다.

지난 한 달 반, 루나는 매일을 필사적으로 보냈다. 학과 공부는 학과 공부대로, 밴드일은 밴드일대로 마치 생명을 불태우는 기세로 매진했다. 멤버들은 이유를 짐작하면서도 잠자코 입을 다물어 주었다. 현재에 최선을 다해 잊으려고 해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둘이서 앉아 달을 보던 공터 계단을, 그의 현관문 앞을 지나가야 했다. 가끔 너무 힘들 땐 방 안에서 창문 밖의 달을 보며 눈물을 흘리곤 했다.

흔히들 말한다. 인생의 쓰디쓴 경험이야말로 창작자의 성장을 위한 거름이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말이 그렇듯, 아무리 이치에 맞아도 당사자가 아니면 쉽게 해선 안 될 말이다. 인간이 약한 존재이기에 상처받고 아픔을 느끼며, 그렇기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말이다.

루나는 시호의 상처와 아픔을 같이 느끼고 싶었고, 시호의 거부는 루나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시호만이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루나는 총명한 머리로 그를 전부 이해하면서도, 여전히 마음으로는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들어가자.”

루나는 재떨이에 담배를 던지고는 1문과대학 건물로 발길을 옮겼다. 학기 초만 해도 길게 느껴졌던 네 시간짜리 공강도 어느새 익숙해져, 잠깐 사색을 하기만 해도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쏜살같이 각도를 달리했다. 매주 이 시간에 빛나를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강의계획서에 따르면 다음 주에는 작가 이서희의 특강이 예비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인기 작가의 강연을 별도의 시간과 돈을 들이지 않고 들을 수 있다며 좋아했지만, 루나는 영 탐탁지 않았다. 연적으로서의 감정을 떼놓고 보면 빛나는 학생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훌륭한 강사였다. 그런 강사의 마지막 시수를 굳이 다른 사람에게 배정하는 건 적어도 강사 본인의 의도는 아닐 터였다.

강의실 208호의 빈자리에 적당히 앉은 루나는 이어폰을 뺐다. 바깥의 소리가 들리게 되자마자 루나의 귀에 들어온 건 시시한 가십거리들뿐이었다. 간밤에 빛나가 바이크 수트를 입고 대학가를 활보했다든지, 그 옷차림으로 당당히 식당에서 라멘을 먹었다든지 하는 내용들이었다.

“학교에는 맨날 정작 쫙 빼입고 오더니…”

“결국 얼굴값 하는 거야? 혹시 옷 벗으면 막 문신투성이인 거 아냐?”

‘한심하긴…. 그렇게 아저씨한테 매달려 사는 사람이 상대가 좁쌀만큼이라도 위화감 느낄 짓을 할 리가 없잖아.’

아이러니하게도 빛나와 충돌하며 서로의 파토스를 내보여 본 루나는, 자의적으로 구축한 빛나의 이미지가 훼손되자 제멋대로 실망하고 환멸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홀로 그에게 공감하고 있었다.

정각이 되자 강의실 문이 열렸다. 여기저기서 떠들고 있던 학생들은 들어온 사람이 매주 보던 미녀 강사가 아닌 올백머리의 덩치 큰 아저씨라는 사실에 일순 얼어버렸다.

“지금부터 책상을 옮기겠어요, 모두 원으로 둘러앉으세요! 그러고 나서 제 소개를 하고 수업을 시작하겠어요.”

학생들이 미적거리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자 시호는 칠판에 자신의 이름을 쓰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황 선생님은 일신상의 사정으로 오늘 강의를 못 해서 제가 대신 하게 됐습니다. 토론 수업을 하는데 다들 교탁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죠? 어색하더라도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말할 수 있어야 해요. 전 이것이 토론 이전에 모든 대화의 선결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다들 일어서서 책상 옮겨주세요!”

자리에서 몸이 굳어버린 단 한 명을 제외하고, 학생들은 마지못해 일어나서 책상을 끌기 시작했다. 시호는 앉아 있던 루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놀란 눈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쪽에 아무도 눈길을 안 주는 사이 시호가 루나에게 다가가자 익숙한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루나는 가까스로 아련한 눈빛을 거두고 짐짓 씩씩한 얼굴로 시호에게 악수를 권했다.

“…잘 지냈어요? 더 삭았네요, 아저씨.”

“…루나 양은 더 예뻐졌네요.”     


수업이 다 끝난 후의 음악대학 1층 카페 트레비앙은 한산했다. 시호는 카운터에서 커피를 받아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루나에게 바닐라라떼를 건넨 시호는 에스프레소를 살짝 마셔보았다. 원두의 차이가 있는 만큼 역시 주희네 집에서 마시던 것만은 못했다.

“아저씨 에스프레소 마셔요?”

루나는 신기한 듯 시호를 바라보며 달달한 바닐라 라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잔을 내려놓자 입술에 하얀 거품이 남아 있었다. 오천 원 판매가에서 재료 원가는 천 원도 안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 그리 대수일까. 친애하는 사람의 기분 좋은 얼굴을 마주보며 담소를 나눌 가격으로 오천 원이면 싼 정도가 아니다.

“…아뇨, 한번 도전해봤는데 영 아니네요.”

시호는 잔을 살짝 밀었다. ‘원두가 싸구려라 입맛을 버렸다’ 같은 말은 이 자리에선 불필요했다. 정작 자신은 집에서 한 봉지에 이백 몇 십 원 하는 믹스커피도 잘만 타 먹는다. 복잡하게 쓴 것보다 단순하게 단 것의 수요가 더 많은 건 전혀 특이한 게 아니었다.

루나는 시호의 잔을 끌어와서는 손에 들고 살짝 입에 머금었다. 처음 느끼는 아찔하게 쓴 맛에 혀가 얼얼해질 지경이었다. 방금 전까지 마시던 단맛과는 대조적이다 보니 더욱 생생하고 극적으로 다가왔다.

시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루나는 이내 잔을 내려놓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

“우리 토요일에 수원에서 공연해요.”

“수원? 웬일로 또 거기까지…”

“레인드롭스의 올해 마지막 무대예요.”

“…예?”

놀란 시호에게 루나는 그날 그가 잠든 사이 일어난 일과 이후의 경과를 설명해 주었다. 시호는 시종일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루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루나는 자신이 처음 시호를 만날 당시와는 꽤나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

“…저에게 이미 레인드롭스는 돌아갈 집이에요. 그 친구들과 함께 하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할 거예요.”

“역시 멋진 사람이에요, 루나 양은.”

“아저씨…, 아니, 정시호 씨. 그래서 부탁이 있어요.”

“…”

시호를 바라보는 루나의 눈은 필사적으로 용기를 쥐어짜고 있었다. 시호는 말없이 루나를 마주보고 있었다.

“…과거의 제 팬으로서, 지금의 제 친구로서… 응원하러 와줄 수 있어요?”

루나는 주머니에서 초대권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시호는 한참을 말없이 초대권을 응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요, 갈 수 없어요.”

삽시간에 굳어진 루나의 실망한 눈빛을 본 시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갈 수 없는 대외적인 이유는 명확했다. 이 자리를 파하는 대로 시호는 빛나의 오피스텔에서 짐을 챙기고 그 외에 필요한 것들을 사서 병원에 갈 것이다. 미나와 바통을 터치하는 대로 2주 동안 시호는 빛나의 옆에 딱 붙어서 그의 손과 발이 되어 줄 것이다. 단 몇 시간이라도 자리를 비웠다간 무슨 애로사항이 발생할지 모른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루나가 여전히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시호는 느낄 수 있었다. 시호 역시 루나에게 마음이 없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루나가 그날 고백하기 훨씬 전부터 시호는 어렴풋이 자신을 향한 그의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재능에 비례해 너무나도 순수하고 잇속을 챙길 줄 모르는 루나는 자신의 마음을 감추는 데도 서툴렀다. 그가 시호 앞에서 빈번이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할수록 그 기전을 거슬러 올라간 끝에 자신이 있다는 건 눈치가 없는 시호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루나에게 인간적인 호감이 컸던 시호는 내심 그러한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루나가 용기를 내어 고백한 그날, 시호는 새삼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자신의 처지를 통찰했다. 애매한 학위 빼면 가족도, 돈도 없는 천둥벌거숭이, 언제 그만두게 될지 모르는 프리랜서 번역가라는 직업, 띠동갑 이상 차이가 나는 연인을 둔 루나가 감당해야 할 시선…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호를 옭아맨 건 그런 자신이 음악가 한루나의 꽃길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자격지심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것들조차도 보다 큰 진실을 감추기 위한 명분이었음을, 그날 지수에게 십자포화로 폭로당했다.

-당신에게 주변 사람은 늘 2순위였어.
-당신은 터무니없이 이기적인 주제에 남에겐 완벽하게 이타적으로 보이고픈 위선자야.

시호는 연인을 희생시킬지언정 결코 소설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루나였다면 어느 한쪽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괴로워하겠지만 결국은 연인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음악을 타협하거나 아예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손에 쥔 것을 내려놓더라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호에겐 여전히 소설을 쓰는 게 지상 과제였다. 오직 그것을 위해 이십 년 가까이 자신을 갈아 넣었고, 당연히 주변이 그에 휘말리는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걸 깨달았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펜을 꺾을 배짱도 없었다.

돌이켜보면 루나를 거절한 것은 오랫동안 소설을 위해 이기적인 위선자로 산 시호가 변덕으로나마 양심을 발휘한 몇 안 되는 귀중한 케이스였는지도 모른다. 루나가 이런 속사정을 알게 될 일은 앞으로도 요원하겠지만 말이다.

시호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금명간에 루나의 방문을 두드려서라도 하기로 한 이야기를 꺼냈다.

“나 이사 가요. 서울 바깥으로.”

“…!”

루나의 동공이 확 커졌다. 시호는 한 템포 쉬고는 이어서 말했다.

“오해하지 말아요. 루나 양은 조금도 상관없어요. 나한테 꼭 필요해서 여길 떠나는 거예요.”

“너무 갑작스럽잖아요! 하던 일은요? 여기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요?”

“재택 프리랜서니까 일은 문제없고, …딱히 서울에 있어야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거짓말이었다.

지수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그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한 날, 시호는 출판사들에 연락해 ‘지금 맡고 있는 원고까지만 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늦어도 이달 말에 번역가로서 시호의 일은 끝난다.

그리고 이사를 하자마자 시호는 휴대폰 계정을 동결할 예정이다. 몇 안 되는 연락조차 끊은 채, 오롯이 지수와의 생활에 집중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이 지수의 두 번째 부탁이었다.

루나는 의자 팔걸이를 움켜쥔 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지금이 시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임을 직감했다.

시호가… 자신이 처음으로 좋아한 남자가… 떠나간다.

루나는─시호 앞에선 세울 생각도 안 했지만─허세나 자존심 따위 일절 버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하고 싶은 말들을 하기로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시호의 팔을 붙들고 루나는 말했다.

“나 내조 잘할 수 있어요.”

“…”

“시호 씨는 돈을 벌기 위한 일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해요. 돈은 내가 벌 수 있어요.”

“…”

“알죠? 곡 쓰는 건 나한테 일도 아니에요. 십 년만 일해도 저작권료가 얼마나 될지 상상해 봐요. 내 곡을 좋아하잖아요? 시호 씨가 내 곁에 있어주기만 하면 얼마든지 쓸 수 있어요!”

“…”

“원한다면 가끔씩 다른 여자를 안아도 좋아요. 남자는 원래 여자 하나로 만족을 못한다고 익히 들었고…, 어쨌든 나보다 오래 만난 건 황─”

“못 들은 걸로 할게요. 농담이 좀 세네요.”

시호는 고개를 돌려 루나를 외면했다. 자신이 가장 원치 않던 미래를 루나가 그리고 있는 걸 차마 들어줄 수 없었다. ‘이걸로 됐어…’ 시호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걸 예상한 루나는 한편으로는 후련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마음 한 구석이 송두리째 떨어져나간 허무함을 참을 수 없었다.

연기의 마지막은 끝맺음을 좌중에게 알리며 지금까지 연기였음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아하하하하하!” 루나는 시호의 어깨를 탁 때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네, 농담이었어요! 내가 레인드롭스를 내팽개치고 띠동갑 아저씨의 보모 역할이나 할 리 없잖아요! 뭘 진지하게 받고 있어요?”

“…정말 끝까지 방심을 못하겠네요.”

시호는 안심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모습마저 루나에게는 마음 속 깊숙이 사무쳤다. ‘…바보 같은 사람.’ 문득 한 가지 장난이 떠오른 루나는 시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사 가면서 아무것도 안 줄 거예요? 난 아저씨가 여기에 있었다는 증거가 필요해요.”

“어… 그건 미처 생각을 못 했군요. 이를 어쩐다…”

억지나 다름없는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짓는 시호의 난처한 표정을 루나는 애피타이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루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지금 당장 줄 수 있는 게 있는데, 어떡할래요?”

“예…? 어떻게…”

“일단 두 손을 여기 올려 봐요.”

루나가 테이블을 가리키자 시호는 고분고분하게 두 손을 위에 나란히 올렸다. 루나는 그를 감싸 누르고 팔에 무게를 실어 시호가 손을 빼지 못하게 했다. 놀란 시호가 얼굴을 든 순간,

“으음…”

“…!”

루나의 입술이 곧장 시호의 입술에 닿았다. 시호는 루나에게서 찰나의 달콤함과, 뒤이은 아련한 씁쓸함을 느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루나는 입술을 떼고는 의자 옆에 놓아 둔 가방을 들었다.

“…농담일 리가 없잖아요, 바보 같긴.”

시호를 돌아보지 않은 채 중얼거리고는 루나는 카페를 뛰쳐나갔다. 얼마쯤 달렸을까, 흐르던 눈물이 입가를 타고 내려왔다. 살짝 머금어 보니 왠지 에스프레소와 비슷한 맛이 났다. 그제야 루나는 에스프레소가 어떤 맛인지, 어째서 때때로 단순한 달콤함 대신 복잡한 씁쓸함을 상기하는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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