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대 중앙도서관 앞을 왕래하는 학생들은 독수리상 아래 앉은 남자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남자는 맨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표정으로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185cm의 장신에 머리띠로 이마를 내놓은 다가가기 어려운 외모의 남자가 그러고 있으니 누구도 쉽게 그를 지적하지 못했다.
동계 방학 중 교수 연구실에서 난동을 부렸다는 이유로 개강과 동시에 학생징계위원회는 남자에게 학사경고를 선고했다. 이미 적성과 안 맞는 수업에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남자는 휴학계를 내고는 하릴없이 캠퍼스 안팎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물리학 공부를 내려놓았다고 해서 다시 원고지를 손에 들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저 캠퍼스 여기저기 엉덩이 붙일 데만 있으면 앉아서 담배를 피워댔다.
금연 구역에서 닥치는 대로 흡연을 해대면서도 남자는 지금까지 한 번도 교내 순찰대에 걸리지 않았다. 든든한 자원봉사자가 있었으니 말이다. 2시 방향의 은행나무 뒤편에서 남자가 잘 아는 여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남자는 꽁초를 들고 쓰레기통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빛나야…. 너 수업은 안 들어가니? 신입생은 맘대로 휴학도 못할 텐데.’
남자는 문득 여자의 학교생활이 신경 쓰였다. 남자가 휴학계를 냈다는 이야기를 들은 여자는 한바탕 잔소리를 해대더니 “난 이제 모르겠다. 어디 선배 맘대로 해봐! 나도 이제 내 인생 챙겨야겠다!” 하며 엄포를 놓고는, 정말로 그날 이후로 남자의 자취방에 놀러오지도, 전화를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며칠 안 되어 저렇게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며 남자가 몸을 피할 타이밍을 알려주고 있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지금이 한창 같이 다닐 친구 만들 시기 아니니… 나처럼 아싸 되려고 그래?’
남자가 착잡한 마음으로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던지려 한 그때였다. 누군가 옆에서 다가오더니 남자의 팔을 딱 붙들었다.
“당첨!”
남자는 자신을 붙든 손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어마어마한 미모의 여자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서 있었다. 키나 몸매는 고향 친구에 못 미쳤지만 미의 여신을 본 딴 듯 아름다운 이목구비에서 남자는 좀처럼 눈을 뗄 수 없었다.
멍하니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던 남자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애써 시치미를 뗐다.
“당첨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죠? 전 그냥 길에서 주운 꽁초를 버리려던 건데…”
여자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남자의 손에서 꽁초를 뺏어들었다.
“에쎄 아이스라…, 너 지금 주머니에 든 담배 뭐야?”
“에쎄 아이스죠.”
“당처어어어엄! 순찰대! 순찰대! 여기 현행─ 읍!”
여자가 남자의 손을 치켜들며 방방 뛰며 소리를 지르자, 남자는 황급히 여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주변을 둘러보자 이쪽을 보는 눈빛들이 심상치 않았다. 남자는 몸을 숙여 여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거래하자고요. 얼마를 원해요? 참고로 이번 달 남은 전 재산은 십만 원밖에 없어요.”
“…겨우 십만 원으로 딜을 보겠다고? 내가 지금까지 너 학내에서 담배 피우는 거 찍은 사진들 건네주면 학고 2회차 아닌가?”
“…!”
“학점도 1학년 때부터 2점대 턱걸이던데, 조만간 성적으로 학고 한 번만 더 먹으면…”
남자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이 여자는 계획적으로 자신을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여기서 계속 얘기하긴 뭐하고,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볼까? 물리학과 09학번 정시호 군.”
남자는 여자의 눈에서 먹잇감을 포착한 뱀의 눈빛을 보았다.
“푸하하하! 너, 너 그 나이 먹도록, 자판을 못 외워…? 푸흐흑!”
중앙 문예 동아리 부실에서 남자를 컴퓨터 앞에 앉혀놓은 채 여자는 배를 잡고 웃었다. 남자가 찌릿 하고 노려보자 여자는 간신히 횡격막을 달랬다.
“뭐 어때요! 글은 연필로 쓸 수 있으면 됐지.”
“얘, 그건 아니다. 내일모레면 21세기도 십년차야. 자판을 어느 정도는 치지 못하면 문맹이나 다름없다고. …혹시 집에 컴퓨터가 없었어?”
“아버지가 물려주신 게 있어요. 딱히 할 게 없어서 그다지 켜본 적은 없지만요.”
여자는 신기한 생물을 보듯 남자를 보았다. 저 나이 또래의 남자에게 컴퓨터는 몸의 일부와도 같은데, 눈앞의 남자는 마치 생소한 기계를 대하듯 말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보기 드문 20대 디지털 이주민이었다.
“좋아, 분명 네 입으로 말했어.” 여자는 붙박이 서랍을 열어 뒤지더니 1,000자 원고지 한 권을 꺼냈다. 그와 함께 어디서 꺼냈는지 연필 한 자루를 손수 칼로 깎아서는 남자에게 내밀었다.
“이 자리에서 뭐든 작품 하나를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써 내면, 너를 고발하지 않는 대신 한 학기 동안 여기서 잡일을 하는 거야. 알았지?”
“근데 저 휴학생인데 부실에 드나들어도 되는 거예요? 말 나올 텐데…”
“그건 대표인 내가 알아서 하는 거고! 괜히 몸 뺄 궁리부터 하지 말고 빨리 쓰기나 해!”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 생각에 돌입했다. 삼 분도 안 되어, 남자는 연필을 들어 원고지 둘째 줄 한가운데에 《탁란 세대》라는 제목을 적고는 두 줄을 띄우고 내용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원고지를 절반 정도 채웠을까, 여자는 슬쩍 옆으로 다가가 내용을 엿보았다. 주인공 소년은 밖에서는 무기력한 주제에 집에서만 폭군 행세를 하는 자신의 아버지를 단지 자신을 유년기 동안 키워줄 의부라 굳게 믿으며, 자신의 누이에게 금지된 욕망을 품고 있는 충격적인 도입부로 시작하고 있었다.
도입부부터 몰아치는 강렬한 도파민의 향연에 여자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이마를 짚었다. 그러나 연필을 쥐고 원고지를 채워 가는 남자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음료수라도 사 오자는 생각에 여자가 부실 문을 열자 키가 크고 가슴이 큰 미인이 서 있다가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여자는 문을 닫고는 미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미인은 여자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여자는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웠다.
“선배님? 혹시 국문과?”
“네. 이번에 입학한 10학번 황빛나입니다. OT에서 뵀었습니다, 이서─”
“쉿, 쉿! 목소리가 커!”
여자는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제지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아무튼 잘 부탁하고, 여긴 무슨 일이야? 혹시 동아리 가입?”
“아뇨, 그냥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요.”
미인 역시 여자에 맞춰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는 문을 살짝 열고는 여전히 글쓰기 삼매경에 빠진 남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사람은 여기 왜 와 있는 건가요? 반성문이라도 쓰고 있는 건가요?”
“아, 아냐, 아냐! 왠지 문필가의 끼가 있을 것 같아서 눈여겨 봐 뒀다가 끌고 와서 시켜봤는데, 제대로 월척이었네?”
미인은 약관의 천재 작가로 소문이 자자한 여자의 사람 보는 눈에 왠지 모를 열등감과 부아가 치밀었다.
‘문필가의 끼는 무슨… 혼자 독고다이로 엄한 짓 하고 다니니까 눈에 밟힌 거겠지.’
“…정확히 보셨어요. 제 주변 사람 중 제일 글을 잘 쓰는 사람이에요.”
“뭐야, 아는 사이였어? …혹시 남자친구?”
“…아, 아니에요! …그냥 동네 바보 오빠예요. 챙겨 주지 않으면 큰일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남자를 훔쳐보는 미인의 발그레한 얼굴은 여자가 지금까지 본 그 누구의 얼굴보다도 예쁘고 매력이 넘쳤다.
이 날, 정시호와 황빛나는 이서희와 처음으로 조우했다. 얼마 안 있어 시호와 서희는 정식으로 교제하게 되지만 지금의 세 사람에겐 아직 알 수 없는 미래의 일이었다.
수요일 7교시, 《문학 비평 및 토론》의 마지막 주차 수업이 시작되는 오후 3시에 맞춰 모자에 선글라스를 쓴 서희가 강의실로 들어섰다. 교탁 앞에 선 서희가 변장을 벗자 강의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학생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강의실 여기저기서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설마 했더니 정말 왔네?”
“염치란 게 없는 건가?”
“이래서 글과 작가를 동일시하지 말란 거구나…”
서희는 몸이 떨리는 걸 꾹 참고 있었다. 충분히 각오했을텐데도 불구하고, 십 년 전까지 찬란한 학창 시절을 보냈던 모교에서 후배들의 경멸을 한 몸에 받는 기분은 비참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갑자기 누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긴 생머리를 웨이브로 말고, 흰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검은 스타킹에 구두를 신은, 키가 작고 귀여운 소녀였다. 소녀는 강의실을 돌아보면서 입을 열었다.
“우린 지금 시험을 보고 수업을 들으러 온 거지, 누군가를 조리돌림하러 온 게 아니잖아요?”
서희를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소녀에게 집중됐다. 소녀의 입담은 거침없었다.
“저분이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기라도 했나요? 아니죠? 그래서 여러분의 알량한 정의와 평등 의식을 빌려 저 적폐 금수저에 죽창이라도 꽂고 싶은 건가요? 정말이지 지성의 상아탑의 의식 수준은 저 같은 양민은 차원이 달라서 못 따라가겠네요!”
“방금 발언은 인신공격입니다! 철회하세요!”
피아노과 여학생이 일어나서는 소녀를 가리키며 외쳤다. 여기저기서 “사과해!” “너 혼자 잘났어?” 라며 소녀를 공격하는 소리가 들렸다.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려는 찰나, 서희가 교탁을 두 손으로 내려치며 소리쳤다.
“그만하세요! 여러분의 의향은 잘 알았어요!”
강의실이 그제야 잠잠해지자, 서희는 교탁에 손을 짚은 채 말을 이었다.
“시험지를 나눠주겠어요. 여기서 시험을 보고 싶지 않은 학생은 시험지에 학번과 이름만 써서 책상에 올려놓고 하교해도 좋아요. 단 오늘 밤 9시까지 황 선생님 메일로 제출하도록 하세요. 약속하건대, 채점에는 아무 불이익도 없을 거예요.”
서희는 앞에서부터 시험지 매수를 세어 나눠주었다. 시험지를 받은 대부분의 학생들은 뒤로 돌리자마자 자신의 학번과 이름을 쓰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의실을 나갔다. 2분도 안 되어, 강의실에는 방금 전 소녀를 포함해 학생이 다섯 명밖에 남지 않았다.
다섯 학생이 시험지와 씨름하는 동안 서희는 내내 뒤돌아서 있었다. 모교 학생 스물다섯 명 중 스무 명이 자신을 거부했다. 하물며 학교 밖에서는 이서희라는 이름은 ‘천재 작가’보다는 ‘이문기의 딸’로서 압도적으로 인식될 것이다.
그러나 서희는 용기 있는 한 명과 그를 따른 네 명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로 했다. 언제나 그렇다곤 감히 말할 수 없어도 대체로 누군가는 민의의 증오와 광기 속에서 몰매를 맞고 있는 사람에게 당당히 손을 내밀어 줄 것이고, 그를 통해 용기를 얻은 사람들이 동조를 통한 자기보신이 아닌 소신과 양심을 선택할 것이다. 서희가 흘리는 눈물은 틀림없는 희망과 기쁨의 의미였다. 누가 뭐라고 해도 말이다.
침상 옆 가림막을 친 채 시호는 빛나의 옷을 갈아입히고 있었다. 2주 간의 입원 끝에 오늘 드디어 빛나는 퇴원한다. 빛나는 환의를 벗고 반팔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로 갈아입었다. 평소엔 집 안에서만 입는 옷이었지만 앞으로 두 달 동안은 외출복까지 겸하게 될 것이다.
“영동에서 재활 열심히 해. 이제부터가 진짜로 힘든 거 알지?”
“…걱정 마.”
빛나의 대답에는 힘이 없었다. 그 날 이후, 시호는 변함없이 빛나의 간병에 열과 성을 다했다. 하지만 더 이상 빛나에게 다정하거나 친근한 말을 건네는 일은 없었다. 빛나는 서글프지만 자신이 받아들여야 할 대우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시호도 엄연한 부상자인 이상, 자신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한계 가까이 힘들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내심 멀지 않은 미래에 응어리가 풀리고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고 기대했다. 어젯밤 목욕을 하며 시호가 다음과 같이 말하기 전까지는.
-나 이사 가. 당분간은 그쪽 일에 집중하느라 연락 못할 거야. 상황이 안정되면 알려줄게.
빛나는 이사 외엔 전부 거짓말임을 곧바로 직감했다. 아마도 지수가 그렇게 말하라고 시켰을 것이다. 안 그러면 자신이 시호에게 질척거릴 거라 예상했을 테니까.
‘…정말 이제는, 완전히 끝나는구나. 내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
간밤에 빛나는 시호가 잠든 걸 확인하고는 숨을 죽인 채 하염없이 울었다.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걸 보고도 시호는 별 말이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퇴원 수속을 마치고, 병원을 나와 터미널로 향했다.
경부고속터미널에 도착한 두 사람은 어느새 본격적으로 더워진 여름의 햇살을 피해 서둘러 대합실로 들어갔다. 빛나가 목발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아 있는 사이 시호는 이십 분 후 출발하는 청주행 우등버스표를 끊어 왔다.
“청주터미널에서 누님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혹시라도 안 나와 있으면 무리해서 혼자 내리지 말고 꼭 직원한테 부축해 달라고 해.”
“알았어.”
두 사람은 말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빛나는 살짝 시호의 옆얼굴을 보았다. 놀랄 정도로 아무 감상도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잠시 후면 헤어질 텐데, 앞으로 영영 못 볼지도 모르는데, 시호의 얼굴에선 조금의 아쉬움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고, 그것이 빛나를 절망적이게 했다.
‘…싫어.’
이대로 그를 보낼 순 없었다. 이대로 오랜 짝사랑을 끝낼 순 없었다.
‘…난 이미 몇 번이고 좌절해 왔어.’
그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 이미 그는 연인이 있었다. 연인이 죽자 그는 연인의 그림자를 좇으며 버텼다. 그리고 곧 새로운 연인을 만나 십 년을 사귀고는 최악의 방식으로 헤어졌다. 그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여자의 처음까지 바쳤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은 그의 연인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마지막 정도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겠어!’
시호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어휴, 더워서 안 되겠다. 캔음료 좀 뽑아올게. 너도 포카리면 되지?”
“난 선배를 좋아해!”
빛나는 시호의 손을 붙들고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시호는 놀라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아했어…! 선배가 진아 언니와 사귀고 있을 때도, 서희 언니와 사귀고 있을 때도, 그 뒤에도 줄곧!”
“…”
빛나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오랫동안 참고 참았던 말의 제방을 터뜨렸다.
“알고 있어. 난 그 두 사람처럼 선배와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이어질 수 없다는 걸! 선배가 아무리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 줘도, 연인을 대하는 마음에서 비롯될 순 없다는 걸!”
“빛나야…”
“그래서 수없이 다짐했어! 가장 친한 친구로서, 후배로서, 여동생으로서 선배 옆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자고! …하지만 결국 그럴 수 없었어! 언제부턴가 선배에게 다른 여자가 다가가는 것 자체가 무섭고 싫어졌어! 그래서 선배가 안 보는 곳에서 가장 음험하고 잔인한 방식들로 그들을 배제해 왔어! …이런 여자에게 정이 떨어져서 떠나버리는 건 어느 남자든 당연하겠지?”
“빛나야… 그런 게 아냐…”
“변명할 필요 없어. 자업자득인걸, 누굴 탓하겠어. 마지막까지 못 볼 꼴 보여줘서 미안해. 표 주고 그만 가 봐. 혼자 탈 수 있으니까.”
시호는 목발을 짚고 일어나려는 빛나의 어깨를 눌러 억지로 앉혔다.
“빛나야, 오해하고 있나 본데, 네가 싫어서 떠나는 게 아냐.”
“듣기 싫어, 빨리 가 버려!”
빛나는 목발을 휘두르며 시호를 억지로 떨어뜨리려 들었다. 시호는 목발을 빼앗아 던져버리고는 빛나를 꽉 끌어안았다. 빛나는 몸부림을 치면서 오른팔의 석고 붕대로 시호의 머리를 몇 번이고 때렸다. 시호는 아픔을 참다가 냅다 빛나의 머리를 껴안고 입을 맞췄다.
“…!?!?!?”
입술을 빨아들이고 이를 건드리는 진한 스킨십을 거치자 빛나는 그제야 어안이 벙벙한 채 풀린 눈으로 시호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 머리를 맞은 아픔에 시호의 눈가는 촉촉해져 있었다.
“내가 너한테 계속 희망고문을 할 수 없어서 떠나는 거야!”
시호는 빛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난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글을 포기한 적이 없어. 글은 언제나 내 인생의 1순위였어. 나는 진아도, 서희도, 너도 글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적이 한순간도 없었어!”
“…!”
“마음속으론 이미 그렇게 정해놓은 주제에, 순 이기적인 놈인 주제에 너희들에게는 어수룩하고 선한 사람 행세를 했어!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뜻을 꺾을 도량도, 배짱도 없으면서!”
“선배…”
“네 마음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그래, 네 말대로 너는 진아나 서희처럼 될 순 없어. 그 녀석들 같은 반짝이는 천분天分이 너에겐 없으니까. 하지만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단 한 명 내 곁에 있었으면 하는 건 바로 너라고! 너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선배…!”
“하지만 내가 글을 붙들고 있는 한 나의 이런 말들은 전부 공허하고 입 발린 소리에 불과해. 넌 언제까지고 내가 돌아볼 날을 기다리며 고통과 번민 속에 살아갈 거야. 빛나야, 그러니까─”
시호는 다음 말을 하기 전에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글을 전부 내려놓고 올 때까지 기다려줘.”
그리고 시호는 주머니에서 실반지를 꺼내서는 빛나의 왼손 약지에 끼웠다.
“약속할게. 식이나 법적 절차는 돌아와서 하더라도, 명실상부 오늘부터 네 남편은 나야.”
그리고 곧바로 또 하나 실반지를 꺼내 자신의 왼손 약지에 끼웠다.
“내 아내는 너고.”
“…아아!”
빛나는 입을 가린 채, 굵은 눈물방울을 하염없이 흘렸다. 시호는 엄지로 아내의 눈물을 닦아 주며 멋쩍은 듯 짐짓 밝은 어조로 말했다.
“남편으로서 한 가지만 요청하자면, 앞으로 바이크는 타지 마. 이제 부교수 되면 월급도 늘 텐데, 차라리 자동차를 타.”
“응…! 선배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 그러니까… 반드시 돌아와야 돼?”
빛나는 남편을 끌어안고 마지막으로 그의 체취와 온기를 온몸으로 느꼈다. 십칠 년을 참은 끝에 얻어낸 사랑이지만, 다시 그를 만나기 전까진 하루하루를 십칠 년분의 그리움을 이겨내야 함을 빛나는 잘 알고 있었다.
어느 가을 오후, 순창 아미산 기슭에는 고요한 가운데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자신의 몸통의 두 배는 굵은 나무 뒤에 숨은 시호는 가스총을 들고 고글 너머로 주변 지형을 둘러보았다. 상대는 시호보다 몇 수 위다 보니 좀처럼 꼬리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세 시간 동안 전적은 6:1. 그나마 한번 이긴 건 상대가 몸 풀기 삼아 첫 판을 봐준 덕이었다. 나머지는 언제나 허를 찌르는 곳에서 기습을 당해 속수무책으로 졌다.
-오늘은 그만 하죠? 슬슬 날도 어두워질 텐데.
-한 판만 더 해요! 이번엔 무조건 내가 이길 테니까.
그렇게 호언장담을 하고 시작한 지 삼십 분. 경계 구역 전부를 샅샅이 뒤져도 상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 번 정도는 마주쳐야 정상인데 이건 신출귀몰의 영역을 넘어섰다.
‘설마 먼저 집으로 돌아갔나…?’
급기야는 시호는 상대가 절대로 안할 법한 짓까지 떠올렸다. 슬슬 하늘도 어둑어둑해지고 있으니 승패가 어쨌든 해산해야 할 판이었다. 시호는 확성기를 꺼내들고 외쳤다.
“지수 씨! 내가 졌어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합시다!”
“네~”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올려다보자 시호는 머리털이 곤두설 정도로 깜짝 놀랐다. 높이가 10m는 되는 소나무 꼭대기에 앉은 채 지수는 싱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요?”
“이번 판 시작할 때부터요.”
“삼십 분을 숨죽이고 그러고 있었다고요? 안 무서워요?”
“그다지요?”
오늘도 시호는 지수의 비범함에 여지없이 놀라고 말았다.
두 사람은 정답게 이야기하며 산 중턱에 홀로 있는 단독주택으로 돌아왔다.
이곳은 수도와 전기가 들어오면서도, 주변 민가와는 산길로 가로막혀 있어 말 그대로 육지의 섬 같은 곳이었다.
시호가 빛나를 한창 간병할 당시 지수는 순창 일대를 답사한 끝에 마침 매물로 나온 이 집을 발견했고, 중개사무소를 통해 집주인과 연락하여 계약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이때 지수는 오랫동안 묵혀 둔 할아버지의 적금통장을 마침내 깼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시호는 면목없어하며 자신의 저금으로 갚으려 했지만 지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어차피 제 집이에요. 나중에 별장으로도 쓸 수 있고요. 좀 빨리 샀다 치죠.
빛나를 배웅하고 시호가 다시 홍실빌라에 돌아올 즈음엔 이사 준비가 끝나 있었다. 지수는 자신의 방을 이미 처분하고 시호의 방에 있던 짐을 전부 박스에 정리하거나 완충재로 포장한 뒤였다. 일주일 전 병실 보호자들에게 몇 시간만 빛나의 케어를 부탁하고 밖에서 레인드롭스의 선물을 사는 겸사겸사 월세 계약을 해지해 둔 지라, 다음 날 오전 곧바로 이삿짐센터를 불러 방을 완전히 비웠다.
이사하고 나서 월말까지 둘이서 남아 있는 번역 작업을 미친 듯이 마무리하고 나서, 지난 세 달 동안 두 사람은 그야말로 원 없이 놀았다. 방에서 책을 보며 뒹굴거나, 새로운 요리에 도전하거나, 콘솔 게임을 하거나, 쭉 해오던 배드민턴을 하거나, 서바이벌 게임을 하는 등등 그들이 재밌게 생각하는 것들을 전부 했다.
밤에는 마당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하늘의 달과 별을 보았다. 호일에 싼 고구마를 장작 사이에 넣어놓았다가 꺼내서 먹는 맛은 아무리 해도 질리지 않았다.
시호가 약속한 대로, 그동안의 매일매일은 순전히 지수를 위한 것이었지만, 지수가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시호의 마음도 절로 풍요로워졌다.
오늘 밤도 변함없이 두 사람은 모닥불 앞에 나란히 앉아 하늘을 보고 있었다.
“아, 다 익었겠다. (…) 자, 지수 씨.”
시호는 목장갑을 낀 손으로 호일을 벗겨낸 고구마를 지수에게 건넸다. 그를 건네받는 지수의 얼굴은 오늘따라 여러 가지 감정이 섞인 듯 보였다.
“고마워요, 선생님.”
시호는 지수의 얼굴을 보고는 잠시 그대로 있었다. 이윽고 옆으로 바짝 다가가 자신의 어깨를 툭툭 쳤다. 지수는 조심스럽게 시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한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그렇게 있었다.
“지수 씨.”
먼저 침묵을 깬 건 시호였다.
“이런 말 하고 싶진 않았는데… 안 되겠어요. 확답을 받아놔야겠어요.”
“네…”
지수는 힘없이 대답했다.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요. 사회의 규칙이니 불문율이니 하는 건 밀어두고, 일단은 지수 씨가 웃을 수 있는 쪽으로 밀고 나가요.”
“…”
“그리고 이건 내 개인적인 욕심. 기회가 되는 대로 다시 소설을 써 봐요. 쓰고 또 쓰다 보면 언젠가는 굉장한 작품이 나올 거예요. 지수 씨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사람이니까. 날 믿어요.”
“…흐윽…”
“…약속해줄 거죠?”
“…네, 약속할게요.”
시호는 옷이 젖기 시작해 팔과 가슴까지 적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까지고 지수에게 어깨를 빌려주었다. 별 하나가 서글픈 푸른빛을 발하며 하늘 너머로 떨어지고 있었다.
방 안에 두 사람의 숨소리와 창밖의 빗소리만이 은밀하면서도 절절하게 울려 퍼지던 저녁, 지수는 시호에게 속삭였다.
“두 번째 부탁. 서울을 떠나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살아요.”
“…!?”
시호는 꽤 놀란 눈치였다. 지수는 이유를 설명했다.
“제가 그날 선생님을 모시고 와서 책상 위에 있던 원고를 본 날, 저는 선생님에게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요소가 결여된 걸 알아챘어요. 바로 ‘작품 세계에 틀어박히는 은둔형 외톨이 기질’이에요.”
“은둔형 외톨이 기질?”
“물론 아무리 천재라도 일반 사회와 소통하는 최소한의 채널이 있어야 그 진가를 발휘하는 건 맞아요. 하지만 선생님은 글에 올인하는 듯하면서도 번역은 물론이고 몇 안 되는 주변 사람들에게 정신력과 체력을 소모하고 있어요. 그러니 당연히 자신의 심상에 오롯이 집중하지 못한 채 불완전한 글이 나오는 거죠.”
시호는 지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안 그래도 떨어지는 집중력의 대부분이 자신의 글이 아닌 번역과 인간관계에 소진되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그렇게 자신의 생계와 소중한 친구들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수의 말은 그것들을 내려둔 채 도박을 하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필요한 과정이기도 했다. 글로 성공할 수도 있고, 글로 실패할 수도 있다. 모든 걸 걸어서 부딪쳐 봐야 포기하더라도 미련이 남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런 애매한 상태로는 언제고 또다시 빛나에게 상처를 주게 될 것이다.
“알았어요.” 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지수 씨에겐 뭐가 남죠? 나 좋은 일만 잔뜩 시켜주는 셈이잖아요.”
지수는 싱긋 웃었다. “그래서 세 번째 부탁을 드리는 거예요.”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는 시호를 보며 지수는 다음 운을 떼었다.
“이사하고 나면 한동안은 집필 작업 대신 저하고 많은 시간을 보내주세요.”
“…!”
“제가 어릴 때 부모와 하지 못한 것들, 친구들과 하지 못한 것들을 함께 해 주세요. 그야말로 원 없이 말이에요.”
“지수 씨….”
“그리고 제가 충분히 만족하고 나면… 아무 예고 없이 선생님의 곁을 떠나겠습니다.”
시호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왜죠?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저 역시 선생님의 고독을 방해하는 요소니까요. 덤으로 식비도 세 배로 들고요. 같이 공멸할 게 뻔한데 뻔뻔하게 붙어 있을 순 없어요.”
“안 돼요, 그것만은 받아들일 수 없어요! 지수 씨 보고 또 다시 혼자가 되게 내버려두라고요?”
“선생님, 제발요!”
지수는 시호의 어깨를 붙들고 소리쳤다. 그 얼굴은 시호가 여태껏 보아 왔던 지수의 얼굴 중 가장 간절하면서도 애달팠다.
“제가 말했잖아요! 제일 중요한 건 언제나 선생님의 글이라고, 그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상관없다고요…! 아직도 제 마음이 이해가 안 되세요…?”
“지수 씨…!”
“정 저를 안타깝게 여기신다면, 하루라도 빨리 작품을 발표해 주세요. 이건 저를 위한 것만이 아니에요. 이진아, 이서희, 황빛나, 한루나… 선생님을 사랑한 끝에 눈물을 흘린 사람들을 위해서도, 새로운 소설을 기다리는 세상의 독자들을 위해서도, …소설을 쓰세요.”
새벽의 쌀쌀한 공기에 시호는 잠에서 깼다. 눈을 떠 보니 이불을 두른 채 의자에 앉아 베개를 끌어안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모닥불은 방금 전까지 타고 있었는지 불씨가 남아 있었다.
최고의 파트너이자 최악의 스토커인 그는… 이제 이곳에 없다.
“지수 씨…”
애통한 마음에 시호가 눈을 질끈 감자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이제부터 그도, 자신도 고독과 싸워나가며 생존해야 한다. 시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면 적어도 연장자 체면에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지.’
시호는 옆의 양동이에 담긴 물을 부어 모닥불의 불씨를 완전히 꺼뜨렸다. 이불과 베개를 들고 들어가서 침대에 던져놓고는, 밥솥에 쌀을 안쳤다. 오늘 아침은 돼지김치찌개다. 지수가 가르쳐준 대로 만들면 아무 문제도 없다.
아침을 먹고 나면 바로 글을 쓸 것이다. 이 첩첩산중에서 누구보다도 세상과 소통하고픈 열망을 가득 담아, 연필을 무기 삼아 고독과 싸울 것이다. 언젠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써내고 산을 내려갔을 때, 더욱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할 수 있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