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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Oct 27. 2024

피그마리온의 눈물 (18)

“빛나야.”

“…”

“빛나야, 듣고 있는 거 아니까 일어나 봐. 안 씻고 잘 거야?”

시호는 휠체어 옆에 서서 끈질기게 빛나를 회유하고 있었다. 빛나는 누워서 고개를 돌린 채 철저히 시호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다른 자리의 몇몇 환자들은 무슨 일인가 하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오늘 오전, 예정대로 빛나는 일반병동 6인 병실로 전동되었다. 석식 시간이 끝날 때쯤 시호는 빛나의 개인 물품과 위생 용품들 그리고 환자용 에어 매트를 들고 왔다. 시호와 바통을 터치하듯 미나가 나가려 하자 빛나는 “잠깐, 간병인은 어쩌고? 나 이 상태로는 숟가락으로 밥 먹는 것 말고 아무 것도 못하는데?” 라며 당황했다.

그러자 미나는 시호를 가리키며 “여기 정 간병사님 있잖아, 무슨 걱정이야?” 라 하고는 빛나의 귀에 바짝 대고 “2주 동안 마냥 참을 거야? 여기 목욕실 문 잠글 수 있더라~♪” 하고 속삭였다. 빛나는 남의 속도 모르고 쓸데없는 섹드립을 치는 언니를 말없이 오른발로 밀어냈다.

“호호호, 그럼 당분간이지만 동생 내외를 잘 부탁해요, 여러분.”

미나는 병실 환자들과 간병인들에게 정중히 인사하고는 시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그 길로 영동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 세 시간 째, 빛나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은 채 농성하고 있었다.

“뭐여, 둘이 싸운 겨? 아따! 남자가 잘못했네, 맞제? 이이?”

옆자리의 다부진 체격의 중년 환자가 시호를 보며 핀잔을 주는 시늉을 했다. “하하, 그러게요…” 시호는 반쯤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엄마, 저 언니는 안 씻고 잔대! 나랑 똑같다, 히히!” 병실 끝 창가 자리의 주인인 초등학교도 채 안 들어갔을 법한 아이가 엄마를 잡아당기며 이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소연아, 엄마가 다른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안 된다고 했잖니.” 누가 봐도 피로가 누적된 얼굴의 여자가 힘없는 목소리로 아이를 꾸중했다.

보다 못한 시호는 빛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빛나 너, 이렇게 제멋대로 굴 거야? 병실 사람들에게 이게 무슨 민폐야?”

“…”

“여기 환자들이랑 보호자들, 전부 빨리 낫고 싶어서 서로 도와주고 배려하며 지내는 사람들이야. 너도 환자로서 자기 몸 관리하는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

“…”

“나 볼 면목 없다고 밀어내는 모양인데, 너 이런 식으로 굴어서 몸 상태 악화되거나 병실에서 쫓겨나거나 하면 누님한테도 면목 없어지는 거야. 누님이 1인실 쓰자는 거 내가 뜯어말렸어. 2주 동안 내가 물심양면으로 VIP 뺨치게 돌볼 테니까 생돈 날리지 말자고. 그랬더니 카드 하나 주시더라. 필요한 거 있으면 사양 말고 긁으라고.”

“…”

“알아들었으면 간병인 말 좀 들어. …내가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너한테서 십팔 년 만에 처음 맡아보는 냄새 나.”

“…!!?!?!!!?!??”

빛나는 침대 위에서 튕기듯 상체를 들고는, 곧바로 갈비뼈 골절 부위에서 엄습해오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시호는 재빨리 탁자 위에 있던 빵으로 빛나의 입을 막아 소음을 차폐했다. 간신히 비명을 그친 빛나는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자신의 목이 뻗는 부위의 냄새를 킁킁거리며 확인했다. 딱히 땀 냄새나 암내는 나지 않았다.

“으이구! 당연히 수술하기 전에 환부는 세척했겠고, 너 오전에 잘 때 누님이 몸 싹 닦아줬대. 그간 얼마나 피곤했으면 닦아주는 내내 눈 한번 깜빡거리지도 않았단다. 진짜 어지간히 몸을 혹사한 게 아닌가 보네.”

시호는 쯧쯧 하고 혀를 찼다. 빛나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역시 너무 심하게 놀렸나.’ 그제야 시호는 빛나의 눈치를 보았다. 잠시 후, 빛나는 말없이 휠체어를 가리켰다. 시호는 빛나가 왼손으로 팔걸이를 잡고 앉을 수 있게 침대 오른쪽에 휠체어를 붙여 바퀴를 고정했다.

그러자 빛나는 시호를 보며 왼팔을 벌렸다. 안아서 옮겨달라는 제스처다. ‘이제야 좀 솔직해지네.’ 시호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빛나에게 몸을 숙인 그때였다.

(퍽!)

“으윽!”

명치에 욱씬한 고통을 느끼며 시호는 풀썩 주저앉았다. 간신히 숨이 돌아오자 눈앞에 보인 건 왼주먹을 내지른 상태의 빛나의 싸늘한 표정이었다.

“배… 배를 때려? 너 역시, 내 걱정 1도 안 했지?”

“명치거든.”

빛나는 시크하게 한 마디 하고는 오른발과 왼팔을 이용해 혼자서 휠체어에 올라타 시호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목욕을 받아보실까?”

“삼가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여왕님.”

시호는 명치를 문지르면서 일어나서는 찬장에서 목욕 용품이 담긴 바가지를 꺼내 빛나에게 들리고, 이제야 한시름 놓은 듯 편안해진 얼굴로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쭉 지켜보던 중년은 두 사람이 병실 문을 나서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남자가 잘못한 기 맞네.”     


빛나를 목욕실에 들인 시호는 앞치마를 입고 문을 잠갔다. 비치된 환자용 목욕의자에 빛나를 앉히고 환의를 벗긴 시호는 입에서 소리를 내려는 걸 황급히 틀어막았다.

빛나는 말 그대로 목 아래로 성한 데가 없었다. 오른팔과 왼다리의 석고 붕대는 둘째치더라도 왼팔과 오른다리도 제법 큰 상처를 처치했는지 손바닥 크기의 거즈가 군데군데 붙어 있었고 늑골 보호대까지 차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늑골 보호대로도 무마할 수 없는 빛나의 가슴만이 건강미를 뽐내고 있었다.

시호는 애써 평정심을 갖고 빛나의 늑골보호대와 팬티까지 마저 벗겼다. “여긴 내가 씻을게!” 빛나는 가랑이 사이를 왼손으로 가리며 다급히 말했다. 시호는 한번 끄덕이고는 빛나의 왼팔부터 물에 적신 수건으로 적시기 시작했다. 이어서 어깨, 가슴, 배 순으로 계속했다. 시호가 빈번이 상체를 숙이자 빛나가 말했다.

“무릎을 굽혀. 선배 그러다 허리 나가.”

“아, 참. 그러게. 역시 빛나는 환자일 때도 냉정 침착하다니까.”

“…”

사실 빛나는 그것보다는 시호의 배를 줄곧 신경 쓰고 있었다. 자신을 돌보다가 혹시라도 상처가 악화되면 그야말로 시호에게 고개를 들지 못할 일이다.

자신의 욕심과 집착이 광기의 발톱이 되어 할퀸 상처를 간신히 직면할 수 있게 된 빛나는, 정말로 하고 싶던 말을 꺼냈다.

“…미안해.”

“신경 쓰지 마.”

시호는 빛나의 오른다리를 닦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빛나는 이어서 말했다.

“난 악한 세상으로부터 선배를 지키고 싶었어. 설령 내 손이 피로 물든다 해도…”

“…”

“…설마 내 손으로 선배를 다치게 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시호는 바디워시 거품을 손에 묻혀 빛나의 상체를 문지르며 잠자코 듣고 있었다. 빛나가 말을 마치고 한동안 샤워실에는 시호가 빛나를 씻기는 소리만 들렸다.

목욕과 머리감기까지 마친 빛나의 머리를 드라이어로 말리며 시호는 마침내 침묵을 깼다.

“빛나야, 기억 나? 오래 전에 네가 나에게 해주던 일들이야.”

“선배…”

“이뿐만이 아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힘들 때마다 늘 옆에 있던 건 너였어.”

시호는 묵묵히 빛나의 머리를 매만졌다. 빛나는 감정이 벅차오를 것 같았다.

“너한테는… 목숨도 아깝지 않아.”

시호의 말에 빛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대로는 눈물이 들킬 것 같았다. 그 누가 이러한 말을 들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빛나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결코 그의 첫 번째가 될 수는 없음을.

진아나 서희처럼 될 수는 없음을.

시호가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할수록 빛나는 그 사실을 엄중하게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언제까지나.     

   



회견장 옆 대기실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서희는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하고 손끝으로 테이블을 탁탁 두드리고 있었다. 눈앞에는 몇 번이고 퇴고한 입장 발표문이 놓여 있었다.

잠시 후 변호사가 문을 열면 수많은 기자들이 기다리는 한복판으로 걸어간다.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지고, 질문 세례가 쏟아질 것이다. 지금까지 신작을 낼 때마다 몇 번이고 기자들 앞에 섰지만, 이번에는 목적이 다르고, 분위기가 다르고, 상황이 달랐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어떻게 볼까? 아버지를 상대로 정의를 구현한 투사? 아니면 피도 눈물도 없는 불효녀? 어느 쪽이든 서희는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 원래라면 검찰에 자료를 넘긴 시점에서 서희의 역할은 끝나는 것이다. 자신이 아버지를 법 앞에 내던졌다고 해서 그 사실을 대중 앞에 공개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서희는 기어이 작가로서의 명예도 포기할 각오로 오늘의 회견을 선택했다.

똑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변호사가 고개를 내밀었다.

“작가님, 들어오시면 됩니다.”

서희는 원고를 손에 들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대기실에서 회견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카메라 플래시가 팡팡 터져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서희는 가운데에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변호사가 마이크를 들고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이번 이문기 스캔들에 대한 이서희 작가님의 입장 발표가 있겠습니다.”

수첩에 필기하거나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던 기자들의 이목이 일제히 서희에게 집중되었다. 변호사가 높이를 맞춰준 마이크에 대고 서희는 차분히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저는 오늘 작가가 아닌 죄인의 딸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저의 부친은 이문기로 현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스캔들의 장본인입니다. 뇌물 수수, 직권 남용, 성 접대 교사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악행들이 이십여 년 동안 부친의 손으로 자행되었습니다. 부친이 학계와 문단 그리고 관계자들에게 끼친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부친이 부정하게 취한 권력과 축재한 부의 직간접적인 수혜자였습니다. 저는 하나도, 단 하나도 혼자만의 힘으로 성취한 게 없습니다. 부친을 사랑했지만 부친의 후광에 힘입어 문필을 이룩했다는 말을 듣기 싫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조차 결국 부친의 울타리 안에서 해야 했습니다. 이문기의 딸이 이서희라는 사실만은 영원히 불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부친의 죄를 고발했습니다. 부친에게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부친이 지금까지의 죗값을 치르고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게 제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부친의 일그러진 사랑의 수혜자로서 함께 비난받고 돌팔매질을 당할 각오로,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부친의 죄가 밉습니다. 작가로서, 문단의 일원으로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부친의 딸이자 하나뿐인 가족입니다. 만약 부친을 비난하신다면 그 수혜자인 저 역시 비난하십시오. 만약 부친에게 돌을 던지신다면 절반은 제게 던지십시오.

저는 여전히 부친을 사랑합니다.

학계와 문단의 여러 분들, 무엇보다 독자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이해할 수 없네. 저것이 자승자박 외에 무슨 의미가 있지?”

탐정은 사무실에서 서희의 기자회견을 생중계하는 공영방송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 처음 사무실에 그가 방문한 날, 자신의 아버지를 사찰해 달라고 의뢰할 때부터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고 느꼈다.

딱 한 번, 어느 정도 친분이 형성되었을 무렵 물어본 적 있다. 원한이나 이해관계라도 있는 거냐고. 그에 대해 서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 거라면 더더욱 이런 방법으로 몰락시키면 안 돼요. 차라리 서로 칼을 쥐고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게 깔끔해요.

워딩이 좀 적나라하지만, 적어도 법으로 정의를 구현하는 데 감정이나 이권이 개입되면 안 된다는 서희의 신념은 절절히 전해진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탐정 역시 서희와의 만남에서 어떤 민감하고 낯 뜨거운 정보도 가리지 않고 전부 공유할 수 있을 정도로 솔직해지게 되었다.

그저께 검찰청 앞에서 서희는 탐정에게 악수를 청하며 의뢰의 종결을 고했다. 탐정은 마지막까지 ‘자료만 익명으로 던져 주면 알아서 저들이 진행할 것이다’ ‘이서희 씨가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다’고 만류했지만 서희는 요지부동이었다.

우웅 하고 휴대폰이 울렸다. 통화한 기록이 없는 처음 보는 번호였지만 탐정은 이미 발신자를 짐작하고 있었다.

“네, 잘 지내셨습니까? 지금 방송 보고 계시죠?”

-결국 이서희를 설득해내지 못한 겁니까. 이럴 거였으면 병원에서 꺼내기 전에 터뜨리는 게 나았을 텐데요.

기괴하게 변조된 목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말했다. 탐정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럴 순 없죠. 클라이언트의 의향은 늘 최우선이니까요.”

-안일하긴, 이서희는 이제 작가로서의 생명은 끝났습니다. 저렇게 카메라 앞에 얼굴을 내놓고 자신의 아버지를 고발했다고 시인한 이상 대중들은 이서희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 먼저 저 장면을 떠올릴 거란 말입니다.

“그걸 전부 알면서도 끝내 그 사람이 선택한 겁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아버지가 받을 비난을 덜어주고 싶었을 테니까요. …저는 그 선택을 존중합니다.”

-하! 당신이 존중해서 어쩔 건데? 그래서 그에게 뭘 해줄 수 있는데?

“…”

-빛 속에서 날개를 달고 있던 이서희는 어둠 속에서 암약하는 당신이 도와줄 수 있었다 쳐도, 날개를 잃고 캄캄한 무저갱으로 추락한 그를 어떻게 원래 자리로 돌려놓을 건데?

전화기 너머 목소리는 광소하듯 쏘아붙였다. 탐정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당신도 좀 솔직해지지 그래?”

-…뭐라고?

“이서희 씨가 나에게 의뢰하러 온 지 얼마 안 되어 당신은 나에게 접촉해 왔어. 이문기의 가장 음습한 모습들이 담긴 자료들을 수시로 보내면서 말이지. 그래서 도와주는 이유를 묻자 당신은 ‘그저 정의를 원한다’고 했지.”

-맞아. 그래서 돈 한 푼 안 받고 당신 일을 도와준 거야. 그리고 당신은 꽤나 실망스러운 결과로 보답했지.

“대체 당신이 실망할 대목이 어디 있지? 이문기는 법의 심판을 받을 거야. 이서희가 대중 앞에서 이문기를 감싼다고 해서 그동안 저지른 죄가 사라지기라도 하나?”

-지금 당장 같이 비난하더라도 누군가가 동정하는 의견을 내기 시작하면 멍청한 대중들은 덩달아 그에 휩쓸리겠지. 그 어떤 법전보다 국민정서법을 위에 두는 대한민국 검찰이 그걸 의식하지 않을 것 같아?

“그럼 당신도 그걸 뒤집을 이문기와 이서희 씨의 치부를 퍼뜨려서 여론전을 하면 돼. 아니면 제대로 판결하라고 판사를 협박할 수도 있겠고. …자신이 없나?”

-당신이 제대로 설득만 했으면 아무도 그런 후처리를 할 필요가 없었다고! 내가 건넨 자료들이 오롯이 형량에 반영된다면 충분히 이문기를 죽을 때까지 가둬둘 수 있었어! 이해가 안 돼?

“이해되고말고. 당신이 원하는 것은 법에 의한 정의가 아냐. 어디까지나 이문기를 평생 감옥에 썩혀두는 거지.”

-…하, 이문기에 대한 징벌이 목적이었다면 내 손으로 노인네 목 하나 못 딸 것 같아?

“못 따지. 이문기가 사체로 발견되거나 행방불명되면 당장 최소한 두 사람이 그게 타살인 줄 확신할 테니까. 나, 그리고 당신을 아는 누군가.”

탐정은 체크메이트를 꽂았다. 전화기 너머에선 아무 반응도 없었다.

“당신이 이런 짓까지 하면서 돕고 싶고 지키고 싶은 사람이 누군지 난 몰라. 알아내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도 있겠지만 딱히 그러고 싶지도 않고.”

-…듣던 중 다행인 소리네.

“이봐, 나라고 이서희 씨가 그런 선택을 하길 바랐을 것 같아?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만약의 이야기지만, 단지 그 사람이 나를 돌아보게 하고 싶었다면… 그래, 그 사람이 손쓸 새도 없이 이문기를 나락으로 보내 놓고, 모르는 일이라고 끝끝내 잡아떼면 돼. 속수무책으로 아버지를 잃고 벼랑 끝에 내몰린 여자의 마음에 파고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그 사람은 평생 아버지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 거야. 동시에 마음 한편에 나에 대한 의심을 늘 갖고 살겠지. 하루하루 살아가는 순간이 생지옥일 거야.”

-참 거창한 사랑 고백이군. 꼴에 어울리지 않게 대단한 순애보 납셨어.

“딱히 부정하거나 얼버무릴 생각은 없어. 당신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 테니까.”

-…

딱히 살인자로 의심받는 게 두려운 게 아니다.

미움 받는 게 두려운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바보같이 착한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 때문에 내 소중한 사람이 살인자가 되었다’고. 그렇게 상대에 대한 두려움과 부채 의식이 공존하는 정신 상태로 평생을 생지옥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 옆에서 어찌 마냥 행복한 채 있을 수 있겠는가.

-당신이 쓸데없는 마음만 안 품었으면 다 잘 됐을 거야.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명백히 힘이 빠져 있었다. 탐정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말했다.

“애석하게 됐네. 세상에서 제일 예측할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이라서.”

-….

얼마쯤 지났을까, 침묵하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다신 연락할 일 없을 거야. 늘 뒤통수 조심하라고.

“…잘 지내라.”

탐정은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서랍에서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를 빼물고 불을 붙였다.    


지수는 통화가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휴대폰의 전원을 끄고 강물로 있는 힘껏 던졌다. 저 멀리 있는 프로젝터에서는 기자들에게 질문 세례를 받는 서희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지수의 미간은 있는 힘껏 찌푸려져 있었다.

“비싼 것 치곤 마무리가 허술한 놈이잖아. 말도 많고.”

지수는 좀처럼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 자는 자신의 정체도 모른 채 그간의 정황과 이쪽의 요구만으로 이미 그 뒤에 숨겨진 사정까지 꿰뚫어보고 있었다. 과연 폼으로 탐정 일을 하는 게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자신과 시호의 정체에 얼마든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쯤에서 접촉을 그만두는 게 서로에게 유익할 것이다. 섣불리 그 자를 치려다간 자신이 이문기를 매장하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이 시호에게 알려질지도 모른다.

‘하긴 마무리가 허술한 건 나도 마찬가지인가.’

지수는 손바닥으로 뺨을 탁탁 때리며 심기일전하고는 갈 길을 서둘렀다. KTX를 탄다고 해도 서울에서 전북은 꽤 시간이 걸리고, 그 안에서 이동하는 건 몇 배는 더 걸릴 것이다. 외지인이 발품을 팔아 원하는 매물을 찾는 건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적어도 시호의 간병이 끝날 때까지는 새로운 거처로의 이주가 마무리되어야 할 것이다.

시호와 빛나도 방송을 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수는 혹시라도 시호가 우발적으로 행동할까 걱정되지는 않았다. 어차피 하고 싶어도 못할 것이다. 정에 휩쓸려 마무리를 망친 탐정보다 훨씬 더 서희를 생각하는 실력자의 존재를 떠올리며 지수는 씨익 웃었다.     


병실 TV로 뉴스를 보고 있던 시호는 떨어뜨린 과자를 주울 생각도 없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예전에 끝난 사이라 해도, 한때 뜨겁게 사랑했던 연인이자 여전히 친구로 여기는 사람이 스스로를 십자가에 매다는 것과 다름없는 일을 벌이는 모습을 태연하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설마, 저렇게까지 한다고…!?” TV를 보는 빛나의 눈동자는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침 속보로 뜬 이문기 스캔들의 내용을 보며 빛나는 단번에 출처가 자신이 모은 자료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자신의 것보다 훨씬 철저하게 이문기를 나락으로 보낼 수 있게 세팅된 자료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자료의 출처가 서희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난 당신에게 거기까지 바라진 않았어, 이서희…’

서희가 뭐라고 말하든 결과적으로 시호는 이문기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워졌다. 이제 시호의 글이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선배의 마음에 빚을 지우다니, 제멋대로인 건 죽을 때까지 안 낫겠어.’

빛나는 물끄러미 시호를 돌아보았다. 시호는 여전히 TV에 눈을 고정한 채 말했다.

“…빛나야, 내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답해줘.”

“…”

빛나는 대답이 없이 시호의 뒤통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저번에 분명 서희를 두 번 봤다고 했었지? 혹시 지금 저 상황에 대해 조금이라도 언질을 했었니?”

“…”

계속 대답이 없자 시호는 뒤돌아서 빛나를 보았다. 명백히 화를 참는 얼굴이었다.

“질문이 너무 애매한가? 그럼 이렇게 물어볼게.”

“선배…”

“이문기의 비리들을 갖고 서희를 압박한 적이 있어?”

“…”

‘올 게 왔구나.’ 빛나는 마음속에서 붙들고 있던 무언가를 털썩 내려놓고는, 태연한 표정으로 시호를 보며 대답했다.

“어, 있어.”

시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그렇게 서희가 미웠어?”

“선배를 위해서 한 일이야.”

“뭐…?”

“선배를 위해선 문단에 군림하는 이문기는 물론이고 제멋대로 경거망동하는 이서희를 눌러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내가 오랫동안 수집한 이문기의 비리 자료들을 내밀며 압박했어.”

“너…, 너 정말…”

“그랬더니 내 발에 머리를 조아리며 빌더라. 자신이 이문기가 물러나도록 설득하겠다고, 그러지 못하면 자신의 손으로 이문기를 매장하겠다고. …설마 저렇게까지 할 줄은─”

“황빛나아아아아아아!!!!!!!!!!!”

격노한 시호는 병실이 떠나가라 노성을 질렀다. 병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일제히 시호를 쳐다보았다. 빛나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시호를 마주보고 있었다. 시호는 풀썩 무릎을 꿇었다.

“‘날 위해서’…, ‘날 위해서’… 그런 소리는 집어치워! 내가 한번이라도 그렇게 해 달라고 한 적 있어?”

“선배가 원하는지는 둘째 문제야. 선배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한 일이니까.”

“그걸 당당하게 시인하는 것도 나한테 필요한 거였어…?”

“아니, 내 욕심. 선배한테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아.”

“…으으윽!”

시호는 벌떡 일어나서는 병실 사람들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병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빛나는 다급히 소리쳤다.

“지금 이서희한테 가서 선배가 뭘 해줄 수 있는데! 애초에 선배가 자기 앞에 나타나길 원하지도 않을 걸?”

“그런 건 상관없어. 서희의 곁에 있어 주는 게 필요하다고 내가 제멋대로 생각하는 거니까.”

“선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호는 빛나의 논리를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시호가 문을 열고 복도로 나온 그때였다.

“…간병인이 환자를 유기해? 너 제정신이야?”

시호의 눈앞에는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 중 최강의 무력을 지닌 여자가 티셔츠에 수면바지 차림으로 팔짱을 낀 채 버티고 서 있었다. 세수도 안 하고 왔는지 눈꺼풀에는 눈곱이 그대로 있었다. 시호는 재빨리 병실 문을 닫고 등지고 섰다.

“오랜만이네. 어떻게 알고 왔어? 빛나가 얘기했을 리는 없고.”

“그건 네 알 바 아니고, 빨리 원위치로 돌아가. 나 화나게 하지 말고.”

주희는 하찮은 것을 쳐내듯 휙휙 손짓했다. “…지금 농담할 때 아냐!” 시호는 주희를 밀치고 복도로 달려 나가려 했지만, 어느새 쫓아온 주희가 시호를 뒤에서 끌어안고는 주저앉아 다리로 하체의 움직임까지 봉쇄했다.

“누나, 이거 놔!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고나 있는 거야?”

“너보단 잘 알고 있지. 몸도 성치 않을 텐데 용쓰지 마라.”

주희는 시호의 발버둥을 별 힘도 안 들이고 제압하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삼십 분 전, 늦은 오전까지 단잠을 자던 주희의 휴대폰이 울려댔다. 발신자는 변조된 음성으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었다.

-이서희의 희생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으면 당신이 정시호를 막으십시오. 단 거친 방법은 쓰지 마십시오. 그는 아직 실밥도 못 푼 환자입니다.

곧바로 주희는 씻지도 못한 채 ㅅ병원까지 택시를 타고 달려왔고, 아슬아슬하게 시호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젠장, 왜 다들 하나같이 제멋대로야! 내 주변에는 남 얘기 들을 귀 따윈 애저녁에 떼어낸 벽창호들밖에 없는 거야?”

시호는 체념한 듯 팔다리의 힘을 풀고 토해내듯 내뱉었다. 무리하게 힘을 쓰는 바람에 다시금 꿰맨 곳이 쓰라렸다. 주희는 여전히 시호의 사지를 봉쇄한 채 말했다.

“넌 서희와 빛나를 탓할 자격이 없거든?”

“뭐?”

“정시호, 딱 한번만 말해줄 테니까 잘 들어.”

“…?”

“네 우유부단함과 이기심이 저 아이들을 몰아세운 거야.”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적어도 저 아이들은 자신의 의지로 행한 일들에 변명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왔어. 네가 이도저도 확실히 안하고 저 아이들의 호의에 무임승차하고 있던 동안 말이야.”

“…”

시호는 아무 반박도 하지 못했다. 주희는 계속해서 말했다.

“어중간하게 발을 걸치지 말고 이만 선택해.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여. 아무도 상처 주지 않으려는 사람은 결국 모두에게 상처를 주는 법이야.”

“…”

“하나만 약속하마.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들은 여전히 내 친구야. 그걸 잊어버리면 언제든지 몸으로 일깨워 주마. 알겠냐?”

주희의 말은 엄격하면서도 다정했다. “…힘들면 낮에는 내가 돌봐줄 수도 있어. 너 약만 먹고 제대로 안 쉬면 상처 덧난다?” 주희는 바닥에서 일어서며 시호를 일으켰다. 마침 점심시간인지 반대편에서 식당 직원이 식판 카트를 밀며 오고 있었다. 시호는 고개를 저었다.

“빛나는 퇴원할 때까지 내 손으로 돌봐줄 거야. 이건 나 자신에 대한 약속이기도 하니까.”

“…알았어. 열심히 해봐.”

주희는 뒤돌아서서 유유히 걸어갔다. 악역을 자청하는 사람의 위악은 누군가가 그를 이해함으로써 완성된다. 그러나 거기에 대고 위악의 정체를 떠벌리는 순간 그 의미는 다소 퇴색되고 흐려진다. 시호는 주희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외로워 보였다.

‘…미안해. 정말 고마워, 누나.’

시호는 주희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배웅하고는 병실로 돌아갔다.      



 

수원인디퍼레이드 본선이 열리고 있는 ㄱ아트센터 야외극장 대기실에는 어느새 한 팀만이 남아 있었다. 레인드롭스 멤버들은 제각기 흩어져서 긴장을 푸는 중이었다. 윤아는 눈을 감고 무릎에 손을 모은 채 명상을 하고 있었고, 은수는 스트레칭, 루나는 벽에 머리를 기대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세미는 기타 가방 앞주머니에 우겨넣어온 수학 문제집과 씨름하고 있었다.

오늘이 지나면 향후 반 년 동안 레인드롭스는 무대에 서지 않는다. 결선에 진출한다고 해도 기권할 것이다. 이를 강력히 주장한 건 다른 사람도 아닌 은수였다. ‘그래도 결선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적잖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텐데 괜찮겠냐’는 윤아나 루나의 물음에 은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건 내년에 더 강해진 레인드롭스로 얼마든지 탈환할 수 있어. 지금 제일 중요한 건 세미가 목표를 이루는 거잖아?

그러자 세미는 결의에 찬 눈으로 “응, 내가 언젠가 언니들을 잠실경기장 무대에 세워 줄게.”라 말했다. 세 언니 중 아무도 그를 웃어넘기거나 핀잔을 주지 않았다. 이루지 못하는 꿈은 있어도 불가능한 꿈은 없다. 단지 그를 위해 중간에 잠시 쉬어가거나 다른 루트를 모색할 뿐이다. 네 사람은 손을 맞잡으며, 말을 하지 않아도 같은 마음을 품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똑똑 하는 소리와 함께 대기실 문이 열리자 네 사람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레인드롭스 여러분들께 누가 퀵서비스로 선물을 보내주셨네요.”

선물 상자를 든 스태프가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다시 나갔다. 네 사람은 테이블에 모여 상자를 보았다. 보라색 한지로 포장된 상자가 파란 리본으로 봉해져 있었다. 리본 밑에 끼워진 카드에는 ‘To Raindrops’라고 정갈한 필기체로 쓰여 있었다. 카드를 뽑아 뒷면을 보아도 보낸 사람의 이름 같은 건 적혀 있지 않았다.

“와, 벌써 우리한테 팬이 생긴 거야? 바로 뜯어보자!” 말과 동시에 리본을 풀려는 세미의 손을 윤아는 턱 하고 붙잡았다.

“기다려, 뭐가 들어 있을지 몰라. 경쟁 팀 중 누군가가 보낸 함정일수도 있어.”

은수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래서 안 열어 보고 버릴 건 아니잖아?” 하면서 거침없이 포장을 뜯었다. 루나와 윤아가 만류할 새도 없이 은수는 안에 있던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와…”

루나를 제외한 세 명의 입에서 동시에 감탄사가 나왔다. 상자 안에는 유명 브랜드의 한방 화장품 세트, 입욕제, 숙면 오일, 클렌징 폼, 핸드크림, 선크림, 쿨 스프레이 등의 일상용품들, 그 위에 꽃다발 하나가 있었다. 평소 돈이 모자라 번듯한 화장품 살 기회가 거의 없는 윤아와 세미가 자기들보다 최소 열 살 이상 많은 연령대에게 수요가 있는 한방 화장품에 해맑게 기뻐하는 사이, 은수는 꽃다발을 집어 들어 잠깐 보더니 루나에게 건넸다.

“네 거야.”

꽃다발을 받아든 루나는 마로니에 꽃과 데이지 꽃 사이에 있는 카드를 발견했다. 카드에는 ‘To Lunar’라고 쓰여 있었다. 루나는 그것만으로 선물을 보낸 사람의 정체를 직감했다.

‘오지 않을 거면 이런 거 보내지 말라고… 이 얼간아.’

루나는 애달픈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꽃다발을 꼬옥 끌어안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은수도, 마냥 기뻐하던 윤아와 세미도, 말없이 그를 보며 숙연해졌다.

마로니에의 꽃말은 ‘하늘이 내린 재능’.
데이지의 꽃말은 ‘순수한 마음’.

그것은 다른 누구보다도 시호가 할 법한 서투르고도 올곧은 응원과 찬사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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