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새벽 1시 무렵, 샤워를 마친 지수는 곧바로 메이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오늘은 좀 이른 특근을 해야 했다. 어쩌면, 아주 낮은 확률이지만 오늘이 마지막 출근이 될 지도 몰랐다.
처음 시호의 집에 들어갈 때부터 지수는 이 날이 올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책상 앞 카메라 영상의 시호는 금요일 저녁 8시 1분에 누군가와 통화하고서 8시 29분에 자릴 비운 후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금요일 밤에 시호가 만날 만한 사람은 빛나 말고는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그랬다면 자전거조차 없는 시호 대신 빛나가 오토바이를 타고 시호의 집으로 오는 게 훨씬 타당하다. 혹시라도 시호가 빛나의 집에서 밤을 샐 생각이었다면 애저녁에 지수에게 연락했을 것이다. 그저께 시호는 지수에게 분명히 이렇게 말했으니 말이다.
-내일은 토요일이지만 얼굴 좀 봐요. 슬슬 지수 씨의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봐야겠어요. 외국어로 번역이 가능하다면 통역도 조금만 신경 쓰면 무난하게 할 수 있을 테니, 우선은 앞으로 토요일마다 동시통역 연습을 시켜줄게요.
저번에 빛나가 시호를 떼어놓고 지수와 일 대 일 담판을 지었을 때처럼, 시간 약속에 칼 같은 시호라면 변동 사항이 생기는 대로 지수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토요일 하루 종일 기다려보았지만 시호에게선 전화나 문자 한 통 없었다.
시호를 불러내어 발을 묶어둘 수 있는 사람, 그를 통해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낼 만한 사람은 지수가 아는 한 단 한 명 뿐이었다. 그리고 애써 추론할 필요도 없이 몇 시간 전, 자신이 모르는 번호로부터 문자 한 통이 와 있었다.
-신지수 학생, 기말고사를 날리면 쓰나요. 가정 방문 중이니 속히 귀가해서 성적표를 받아가도록 하세요.
“…정말이지 강의평가 만점 준 게 아깝지 않은 사람이야.”
지수는 챙겨 둔 가방을 메고는 현관에서 구두를 신고 열쇠를 챙기고 문득 뒤돌아서서 방 안을 돌아보았다. 반겨 주는 사람 하나 없이 순전히 필요에 의해 머무르던 을씨년스러운 공간이지만 오늘따라 괜히 정감이 갔다. 지수는 양 뺨을 가볍게 찰싹 때리고는 짐짓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대체, 여긴 어디지?’
몇 시간 전, 경미한 두통과 함께 잠에서 깬 시호는 정체 모를 기와집 마루 위에 자신의 손과 발이 청테이프로 묶인 채 몸이 옷가지로 덮여 있는 걸 확인했다. 갈색 털이 묻은 익숙한 여성 정장 상의는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주동자 내지 최소 관련자가 누구인지 버젓이 가르쳐 주고 있었다.
“빛나야, 듣고 있지? 대체 무슨 일이야?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해 줘!” 라고 아무리 외쳐도 묵묵부답이었다. 차분히 앉아서 자신이 빛나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일을 떠올려 보면, …지난 십팔 년 동안 신세만큼은 무지막지하게 지고 있었다. 빛나가 자신에게 해 온 것의 반의 반이나마 빛나에게 헌신적이었나 복기해보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고 나니, 놀랄 정도로 마음이 평온해졌다. 십팔 년 동안의 유대에 비추어 볼 때 빛나가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을 해코지할 사람도 아니거니와, 이유가 있어 자신을 해한다 해도 시호는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단 하나 신경이 쓰여 참을 수 없는 게 있다면 의식을 잃기 전 들은 빛나의 마지막 말이었다.
-선배는 걱정할 거 없어. 내가 있는 이상 아무도 선배를 건드리지 못해. …그 메이드 코스프레나 하는 사이코도.
‘빛나는 지수 씨의 존재를 눈치 채고 있었어. …설마 지수 씨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시호는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도 자신이 아는 빛나는 결코 남을 쉽게 해칠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빛나의 입에서 지수의 존재까지 거론된 마당에, 지금 당장 지수와 연락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조바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몇 시간 전 눈을 떴을 때 어둑어둑했던 하늘이 지금은 아예 깜깜해진 걸 보니, 기껏 약속을 해 놓고 하루 종일 잠들어 있던 게 명약관화였다.
지수는 어쩌고 있을까? 여벌 열쇠를 갖고 있으니 집에 들어와 자신이 없는 걸 확인했을 것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자신에 대해 지수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뭐가 어쨌든 이런 영문 모를 곳에 묶여 있을 거란 생각까진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서스펜스 소설도 아니고 말이다.
그때였다. 대문 너머 저 멀리서 탁탁탁 하고 누군가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사람… 사람이다…!’ 시호는 배에 힘을 짜내어 크게 소리쳤다.
“저기요! 여기 사람 있어요! 사람 있어요!!! 사람!!!!!”
맞은편에서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점점 커지는 발소리는 분명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사람 있어요!!! 사람!!!!” 희망에 찬 시호는 연거푸 소리쳤다. 이윽고 문간에 들어선 사람을 확인하자 시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선생님, 무사하셨군요!”
“…지수 씨?”
시호가 놀랄 새도 없이 지수는 메이드 복장을 입은 채 뛰어와서는 마루 위로 도약했다. 그러더니 품에서 잭나이프를 꺼내 능숙하게 시호를 결박한 테이프를 끊었다. 손발의 자유를 만끽하는 것도 잠시, 시호는 지수의 두 손을 붙들고 폭포수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어떻게 내가 여기 있는 줄 알고 온 거죠? 아니, 그 전에 여기가 혹시 어딘지 알아요? 누군가 지수 씨에게 여길 알려준 건가요?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어요?”
“선생님, 진정하세요. 여긴 고등학생 때까지 제가 살던 집이에요. 그리고, …!”
(피융!)
지수가 뒤로 공중제비를 돌며 점프하는 거의 동시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더니, 방금 전까지 지수가 앉아 있던 마루에 총알이 박혀 한 줄기 연기를 냈다. “…아무래도 더 이상 둘이서 태평하게 해후의 기쁨을 누릴 때가 아니네요.”
시호가 뒤돌아서서 본 것은 5m 거리의 안방 문턱에서 잔뜩 독이 오른 표정으로 권총을 들고 있는 빛나였다. “…역시 평범한 대학생은 아니었나, 신지수.”
“황빛나 박사, 이게 대체 무슨 경우지요! 자칫하면 선생님이 맞을 수도 있었어요!”
“…!?”
한 번도 서로 소개해 준 적 없는 두 사람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주고받는 것에 깜짝 놀라면서도 시호는 우선순위를 망각하지 않았다.
“자, 잠깐잠깐! 두 사람에게 묻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우선!”
시호는 두 팔을 벌려 빛나의 앞을 가로막다시피 하며 지수를 감쌌다.
“빛나, 너 그 권총은 어디서 난 거야! 그런 거 갖고 있으면 안 돼! 어서 나한테 줘!”
“…선배는 빠져 있어. 난 지금 저 녀석에게 볼일이 있으니까.”
빛나는 위압적인 태도로 시호 등 뒤의 지수를 겨냥한 채 공이치기를 당겼다. 긴장한 시호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도 짐짓 언성을 높여 보였다.
“내 파트너를 총구 앞에 내놓을 순 없어! 무엇보다, 네가 총을 들고 누군가를 해하려는데 내가 어떻게 안 말려!”
“선배… 지금 그런 답답한 소리를 할 때가…”
“황빛나, 총 내려! 안 그러면… 절교하겠어!”
“으읏…!”
“설마, 설마 했지만 그래도 그럴 리 없다고 믿었어!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의도적으로 누굴 다치게 할 리가 없다고! 지금까지 내 앞에선 전부 연기라도 했던 거야? 어? 말해 봐!”
‘빛나야, 용서해라…’
시호는 빛나를 제압하기 위해 자신에 대한 그의 마음을 볼모로 이용했다.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짓인지 알면서도, 유혈 사태를 막겠다는 일념 하나로 시호는 기꺼이 악역을 자처했다. 과연 본바탕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평범한 여자일 뿐인 빛나는 독기를 유지하지 못한 채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총을 든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지수는 시호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시호가 가로막고 있는 범위 바깥으로 나가며 말했다.
“선생님, 저 사람 말이 맞아요. 저 사람과 저는 오늘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어요.”
“지수 씨, 지금 나오면 안 돼요!…”
“걱정 마세요, 선생님 앞에서 비명횡사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지수는 7m 거리에서 빛나와 마주보았다. 빛나는 대놓고 지수의 머리를 겨냥하고 있었다.
“…나강 리볼버라, 취향 참 별나네요. 설마 소음기 때문에 굳이?”
“흥, 권총 이름 따위 알 게 뭐야. 선배를 여기까지 옮겨 준 놈들이 수면제에 덤으로 제멋대로 나한테 팔았을 뿐이야.”
‘…역시 뒷세계의 조직이었나. …근데, 빛나 네가 어떻게 그런 놈들을…?’
시호는 빛나가 용역을 시켜 자신을 수면제로 잠재우고 여기까지 납치해 왔다는 것보단, 빛나가 그런 자들과 모종의 연결이 있었다는 사실에 더욱 비통해 했다.
“나강이 다른 리볼버보다 탄환 장전이 불편한 건 알아요? 방금 전 한 발을 빼면 이제 여섯 발밖에 안 남았는데 괜찮겠어요?”
“…너를 끝장내는 데는 충분해.”
지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손목 엄청 아프죠? 몇 발만 더 쏘면 손목 나갈 텐데. …그 사람들도 참 양심이 없네. 생전 처음 총 쏴 보는 민간인에게 저런 걸 줘?”
빛나는 순간 흠칫하면서도 정신을 놓지 않고 총구를 지수에게 계속 조준했다. 시호는 긴장한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지수의 표정은 어디까지나 평온해서 섬뜩할 지경이었다. 명백히 여유가 없는 건 총을 든 빛나 쪽이었다.
“신지수, 허세부리는 건 거기까지야. 난 네 정체를 밝혀냈어!”
“…”
“네가 신촌역에서 남자 두 명을 때려눕혔을 때 동영상을 찍은 건 나야. 한 명이라도 네 정체를 말해 주길 바랐는데, 다들 네 무술 실력을 칭찬하기 바빴지.”
“역시 당신이었군요. 그 동안 사이트들 돌아다니며 댓글 확인하느라 고생이 많았겠어요.”
지수가 비꼬자 빛나는 이를 뿌드득 갈며 으르렁거렸다.
“나도 참 등잔 밑이 어두웠어. ‘그날’ 네 모습을 보고 왜 눈치 채지 못했을까, …물리학과 20학번 신지수 학생?”
시호의 눈이 동그래졌다. ‘지수 씨가 내 후배라고?’ 지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야 난 원체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그날’도 당신에게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고요.”
“…말하는 꼴을 보니 이미 각오를 한 모양이네.”
“착각하지 마세요. 각오 같은 건 선생님을 만날 때부터 하고 있었으니까요.”
빛나의 애처로운 위세는 지수에게는 조금도 먹혀들지 않고 있었다. 지수는 시호를 돌아보았다.
“선생님, 이것만은 약속드릴게요. 제가 제 입으로 뱉은 말 중에 거짓말은 추호도 없어요.”
“허튼 소리 하지 말고 당장 전부 벗어!”
전혀 위압적이지 않은 빛나의 고함은 신경도 안 쓰고 지수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머리에 손을 갖다 댔다. 생머리 가발이 마루 위로 툭 떨어지고 찰랑거리는 보브컷이 드러났다. 시호는 그저 멍하니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지수는 메이드 복장의 리본을 하나하나 풀고는 등의 지퍼를 내렸다. 어깨 밑까지 드러내고 팔을 내리자 원피스 형태의 옷이 걸리는 것 없이 스르르 내려갔다.
“…!!!!!!”
시호는 눈앞의 광경에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빛나의 표정은 마치 혐오스러운 것을 본 양 여과 없이 경멸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수의 표정은 어디까지나 여유로웠다. 하얀 피부는 얼굴에서 시작해 흉터가 남은 목을 타고 내려가 쇄골로, 그리고 가슴에서 배까지 ‘평탄하게’ 이어져 있었다. 그 사이 굴곡은 어디까지나 핑크빛의 조그마한 새싹 두 개에 불과했다. 삼각팬티로 가려진 하복부와 서혜부 사이에는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묵직한 생체 기관이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여자한테 그런 시선을 받으면 나도 스스로를 장담할 수 없어요, 황 박사?”
무감정하게 농담을 던지는 지수의 목소리는 시호가 매일 들어온 것보다 확연히 낮은,
───마치, 소년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지수 씨, 그럼 지금까지──”
“짐승 같은 변태 새끼. 여장까지 하고서 뻔뻔하게 지금까지 선배 옆에 착 붙어 있었던 주제에,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고?”
빛나의 입에서 나오는 거친 표현들에 시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난 선생님에게 늘 도움이 되기를 바랐고, 내 모든 걸 바쳐 선생님에게 필요한 일들을 해 왔어요. …내가 여장을 해온 것과 이 사실들이 조금이라도 충돌할 여지가 있나요?”
지수의 당당한 대답에 빛나는 기가 찼다.
“그럼 왜 처음부터 남자 모습으로 접근하지 않았지? 네가 한번이라도 여장을 하고 수업에 들어온 적이 있어? 넌 남자 주제에 선배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의도적으로 여자의 모습으로 다가간 거야, 아니야?”
“마음에 둔 사람과 가까워지고자 그가 좋아할 만한 모습을 하는 것의 어디에 문제가 있죠? 설마, 내 성별을 걸고넘어질 셈인가요? 본인은 선생님과 헤테로가 가능한 여자라는 헤게모니의 이점을 취하고?”
“…궤변을 늘어놓지 마!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선배가 받을 상처는 처음부터 생각도 안 한 주제에!”
한편 시호는 이제야 서서히 상황이 파악되었다. 서희와 똑 닮은 외모로 한눈에 시호의 시선을 사로잡고, 글쟁이의 자아를 드러내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호의로 자신을 집에 데려다 줬다 싶더니 억지로 범했단 거짓말로 슈퍼 을로서 집에 눌러앉고, 번역에 관한 탁월한 영감과 센스로 시호를 감탄하게 하고, 종종 보여 주는 소녀의 얼굴로 시호의 마음을 설레게 한…
…지수는, 남자다.
돌이켜보면 의심할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평범한 성인 여성을 훨씬 상회하는 식사량, 탁월한 운동 신경, 그리고 성인 남성을 단번에 제압하는 완력까지. 게다가 방금 전 총알을 피할 때의 반사 신경과 총을 겨누어지면서도 전혀 겁먹지 않는 담력은 이미 일반인의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시호를 제쳐둔 채 두 사람의 설전은 계속되었다.
“그게 당신의 한계야, 황빛나.”
“…뭐? 이 새끼가…!”
“나 따위한테 상처 받을 깜냥이 아니라고, 선생님은!”
“…!”
“…선생님의 곁에 있고자 이 모습을 선택했지만, 난 한 번도 선생님을 독차지할 욕심을 부린 적은 없어. 선생님은 그 누구에게도 속박되지 않을 때 가장 재기 넘치고 아름답고 완벽한 존재거든. …선생님을 언제까지고 새장 안에 가둬 두고픈 당신은 이해 못하겠지만.”
“닥쳐! 너 같이 제멋대로 선배를 뒤흔들어 놓고 무책임하게 떠날 연놈들이 뭘 알아!”
빛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기를 가르며 총알이 지수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지수는 고개를 홱 기울여 총알을 피했다.
“빛나야, 그만 둬! 이러다 정말 살인난다고!”
시호는 빛나에게 달려들어 권총을 든 양손을 꽉 쥐었다. “놔! 오늘 저 새끼 여기다 묻어버릴 거야!” 빛나는 눈이 뒤집혀서 손을 빼고자 마구 몸부림쳤다.
“선생님, 놓으세요! 그러다 선생님이 맞는다고요!” 지수 역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차라리 내가 맞는 게 나아요! 지수 씨, 빨리 도망가요!”
“그럴 순 없어요! 오늘 저 정신병 걸린 여자에게서 선생님을 못 구해내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요!”
“으아아아아아아아!”
빛나가 지른 괴성에 시호의 주의력이 흐트러진 틈을 타, 빛나는 권총을 쥔 양손을 높게 쳐든 다음 개머리판으로 시호의 머리를 내리쳤다. 시호는 그대로 빛나의 손을 놓치며 픽 쓰러졌다.
“미안해, 선배. 잠시만 얌전히 있어.”
빛나는 중얼거리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지수의 눈에는 명백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왜, 화났어? 네가 좋아하는 사람 다치게 해서?”
“…”
“잘 들어! 선배가 또 다시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라면, 난 선배의 팔다리도 부러뜨릴 수 있어! 내가 선배의 수족이 되어 주고, 유일한 말벗이 되어 주고, 원한다면 선배의 분신도 세상에 남길 테니까! 아, 자궁도 없는 너한텐 불가능하지?”
“…후우.”
지수는 한숨을 쉬었다. 빛나의 눈에는 더 이상 이성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거기에 있는 건 오직 광기와 집착뿐이었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해! 선배가 만에 하나라도 혼자가 될까 두려워한다면, 난 기꺼이 내 팔다리를 자르고 선배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속삭여 줄 거야, ‘나는 여기 있다’고, ‘결코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너한테 이런 각오의 반의 반이라도 있을까?”
“…불쌍한 사람.”
빛나를 보는 지수의 눈에는 동정과 연민이 가득했다. “…뭐라고?” 빛나가 권총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당신은 누구보다 예쁘지만 조금도 아름답진 않고, 누구보다 똑똑하지만 조금도 비범하진 않아. 그래서 줄곧 선생님의 뒤를 좇을지언정 한 번도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간 적은 없었지.”
“닥쳐!!!”
날아오는 총알을 지수는 옆구르기로 피했다. 남은 총알 네 발, 빛나와의 거리 5m.
“당신이 이진아를, 이서희를 원망하는 마음의 정체는 흔한 여자로서의 질투야. 당신은 그들처럼 선생님에게 진정한 의미의 상처를 남길 정도로 영혼의 교감을 나눈 적이 없거든. 당신이 진정 경계하는 건 선생님이 다치는 게 아니라, 또 다시 선생님의 영혼에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는 거지.”
“죽어어어!!!”
또 다시 날아오는 총알을 지수는 점프로 뛰어넘었다. 남은 총알 세 발, 빛나와의 거리 3m.
“당신은 이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그래서 당신이 택한 포지션은 ‘후배이자 가장 친한 친구이자 섹스파트너’였지. 결코 단순한 친구는 아니지만, 결코 연인도 될 수 없는 사이. 아주 절묘한 판짜기지. 몸을 섞고 있는 한 선생님은 부채 의식 때문에라도 당신을 외면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분명히 말하자면, 선생님에게 당신은─”
“뒈져어어어어!!!!!”
거의 코앞에서 격발된 총알을 지수는 상체를 홱 눕히며 피했다. 남은 총알 두 발, 빛나와의 거리 1m.
총구는 어느새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으읏!” 빛나의 손목은 이미 한계가 온 건지, 부들부들 떨며 총을 들고 있는 것도 고작인 듯 했다. ‘이겼다…’ 지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 달려들어 손을 수도로 내려치면 빛나는 제대로 저항도 못 하고 총을 떨어뜨릴 것이다. 지수는 있는 힘껏 몸을 날렸다.
“당신은 그저 성능 좋은 몸종일 뿐이야!”
“…잡았다!”
공중에 뜬 지수는 빛나의 눈이 요사스럽게 빛남과 동시에, 빛나가 무릎을 굽히며 총구를 올리는 것을 보았다. 도저히 빗맞힐 수 없는 거리와 각도였다.
‘설마… 이걸 노리고 일부러…! 방심했어!!!’ 지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두 사람 다 적당히─”
(푸욱!)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방심한 지수의 몸이 관성에 의해 걷잡을 수 없이 앞으로 쏠리고, 어느새 자세를 숙이고 총을 고쳐 잡은 빛나가 방아쇠를 당김과 거의 동시에, 기절해 있는 줄만 알았던 시호가 양팔을 뻗으며 몸을 날려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고─
─지수와 빛나는 시호의 배에서 선혈이 튀는 걸 눈앞에서 목격했다.
시호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선생님!!!!!!!!!” 지수는 다급히 시호의 상태를 살폈다. 배에서 기세 좋게 나온 피는 금세 셔츠를 거의 다 적셨다.
“선생님!!! 정신 차리세요, 선생님!!!”
“선… 배… 아… 아아…”
빛나는 정신이 반쯤 붕괴한 채 총을 쐈던 자세 그대로 입에서 신음 소리를 내며 온몸을 떨고 있었다. 자신의 손에 시호가 죽을 리가 없다. 이건 꿈 중에서도 아주 질이 나쁜 개꿈이 틀림없다. 이런 걸 계속 보고 있으면 꿈에서 깨고 나서도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빛나는 일 초라도 빨리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 총구를 자신의 턱밑에 대었다. ‘…깨어나는 대로 선배 얼굴을 보러 가야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빛나는 방아쇠를 당겼─
(뻐어어억!)
늦지 않게 지수의 카포에라 킥이 빛나의 손에 작열했다. “아아악!” 손에 힘이 풀려 놓친 권총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지수의 구둣발 끝이 빛나의 뒤통수를 내리찍었다. 빛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혼절해 버렸다.
지수는 시호가 마음껏 날개를 펼칠 수 있게 전력으로 지원해 왔다. 빛나는 시호가 고통 없이 안식할 수 있게 전력으로 지원해 왔다. 그를 위해 그들은 때로는 극단적인 수도 서슴지 않았다. 마치 거울의 양면처럼 둘은 닮아 있었다.
-당신은 누구보다 예쁘지만 조금도 아름답진 않고, 누구보다 똑똑하지만 조금도 비범하진 않아. 그래서 줄곧 선생님의 뒤를 좇을지언정 한 번도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간 적은 없었지.
‘…그래, 마치 나처럼.’
-당신은 그들처럼 선생님에게 진정한 의미의 상처를 남길 정도로 영혼의 교감을 나눈 적이 없거든.
‘…그래, 정확히 나처럼.’
지수는 실린더를 꾹 누르며 자신이 빛나에게 한 말을 곱씹었다. 빛나의 번민과 갈등을 지수가 꿰고 있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아니었다. 빛나가 왜 유독 자신을 경계했는지도 지수는 잘 알고 있었다.
-당신은 그저 성능 좋은 몸종일 뿐이야!
‘…이런 가시밭길을 반생 동안 걸어오다니 존경스러워, 황빛나.’
둘 다 시호를 좋아하지만, 둘 다 시호의 진정한 연인은 될 수 없기에.
비슷한 시각 Y대 부속 ㅅ병원 20층에 있는 200병동, 소위 VIP 병동의 한 병실 문턱에서 서희는 고개를 내밀고 복도 끝 엘리베이터를 주시하고 있었다. 오늘 하루 종일 동태를 살펴봤지만 상시 선글라스를 쓴 건장한 보안요원 두어 명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으니 조금도 돌파할 틈이 보이지 않았다. 서희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겁게 짓누르는 눈꺼풀도 또 다른 난관이었다.
날이 밝으면 퇴원 수속을 밟아야 한다. 수납을 마치는 대로 학과장은 장정들을 대동해 서희를 집에 데려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국을 뜨기 전까지 가택에 연금되어 있는 건 물론이고, 서희가 몇 달 동안 준비해 온 폭탄을 터뜨릴 수도 없게 된다.
금요일 밤을 계기로 서희는 완전히 결심을 굳혔다. 그날 오후, 브라우니를 먹어치우고 치명적인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 자신이 정신을 차렸을 땐 ㅅ병원 응급실에서 산소마스크를 끼고 있었고, 곧 200병동으로 전동되었다. 스트레처 카에 실려 가는 와중 서희는 경황없는 사이 위세척을 하며 뒹굴던 기억과 더불어 학과장이 주희를 세워놓고 마구 윽박지르는 모습까지 하나둘 떠올랐다.
병동에 올라와 딸의 손을 붙잡고 완연한 아버지의 얼굴로 바라보는 학과장에게 서희는 “전부 다 내려놓고 둘이서 시골 내려가서 손에 흙 묻히며 살자”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러나 학과장은 완고했다.
-내가 평생을 걸고 지켜 온 학계와 문단을 유기할 순 없어. 조금의 틈이라도 보이면 그놈들은 나는 물론이고 너까지 도매금으로 물어뜯으며 같잖은 앙가주망을 발휘할 거야.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 꼴은 못 보지.
그 말을 들은 서희는 비로소 ‘…내 손으로 아빠에게 안식을 줄 수밖에 없어.’라 다짐했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채 지금까지 한숨도 잘 수 없었다. 빛나가 증거 자료를 들고 있는 걸 확인한 이상 서희는 서둘러야 했다. 이번에는 자신의 목숨을 건 도박으로 막아낼 수 있었지만, 시호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빛나는 그것을 손에 들고 주저 없이 학과장과 싸울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병원 바깥에는 서희가 고용한 사설탐정이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이날 아침 서희는 메일을 통해 그에게 두 개의 지시를 내렸다.
1. 동이 트기 전까지 ㅅ병원 지하 주차장에 잠복해 있다가 의뢰주인 자신의 신병을 확보하여 피신시킬 것
2. 1이 실패할 경우 일주일 이내에 언론과 검・경에 지금까지 정리한 이문기 관련 문건을 대대적으로 유포할 것
만약 지금 탈출하지 못하더라도 탐정이 스캔들을 대신 터뜨려주기만 하면 참고인으로서 임의 동행하는 형식으로 집에서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딸의 신고로 경찰이 체포영장을 들고 집에 찾아오는 일을 겪는 학과장의 얼굴을 눈앞에서 봐야 한다. 서희에게 차마 그럴 용기는 없었다.
병실에 딸린 욕실에서 세수를 하며 각성을 꾀하고 온 서희는 엘리베이터 앞에 아무도 없는 걸 발견했다. 이때다 싶어 서희는 가방을 들고 발걸음을 죽인 채 복도를 걸어 간호사실 앞을 통과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버튼을 누르자 1층에서 올라온다는 램프 표시와 함께 ‘띵동’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베이터가 5층까지 올라왔을 때였다.
“거기 누구시죠?”
서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직원용 화장실 맞은편에 있는 자판기 뒤쪽에서 보안요원 한 명이 상의 주머니에 휴대폰을 집어넣으며 나오고 있었다. 요원이 걸어오는 사이 서희는 재빨리 핑계거리를 만들어냈다.
“선생님, 이 밤중에 어딜 가시는 거죠? 보호자께서는 내일 퇴원할 때까지 외출을 엄금했는데요.”
“어휴, 죽다 살아났더니 몸에서 알코올을 달라고 난리네요! 밖에 편의점에서 조금만 마시고 오려고요!”
서희는 실실 웃으며 등 뒤로 가방을 감췄다. 선글라스 너머로 앳된 티가 나는 보안요원은 지그시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보호자의 동의가 없이는 나가실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얌전한 수단으로는 나가기 힘들겠다고 판단한 서희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태세를 전환해 플랜 B를 시동했다.
“이봐요, 우리 아빠가 입원 동의서에 사인했으면 내 보호자예요? 나 성인이고, 신용 보장된 유명 작가예요. 행정 명령으로 입원한 것도 아니고, 정신병으로 입원한 것도 아니고, 내일 퇴원하는 마당에 절대안정 오더도 없어요. …그쪽이 뭔데 내 외출을 제한하는 거죠?”
“하지만…”
“뻔하죠, 차트에 남기지 않는 버벌verbal 오더로 떨어졌겠죠. 내일까지 나 한 발짝도 여기서 못 나가게 하라고. 이해해요. 여러분들이야 지시대로 할 뿐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근데 어쨌든 난 내일 퇴원하는 대로 이걸 대대적으로 문제 삼을 거예요. 한국에서 기업이나 병원 등의 조직이 그런 사안에 휘말릴 때, 그를 무마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
“당신, 성함과 직책이 어떻게 되죠?”
서희가 다그치자 요원은 아무 말도 못하고 제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오자 서희는 그를 한번 흘겨보고는 타려 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요원은 황급히 서희의 앞을 막아섰다.
‘글렀네…’ 서희는 속으로 혀를 찼다. 간호사는 의사가 지시를 번복하지 않는 한 외출을 허락할 리가 만무했다. 사회 초년생으로 보여서 조금만 겁을 주면 고분고분하게 말을 들을 거라 생각한 게 오산이었다.
“그럼 같이 가실까요.” 요원이 간호사실로 서희를 에스코트하려고 할 때였다. 엘리베이터 옆 직원 전용 문의 잠금장치가 철컥 열리더니 선글라스를 쓴 중키의 보안 요원이 나타났다.
“아, 안녕하세요.”
서희가 그의 옆얼굴을 보고 눈을 크게 뜨는 한편, 방금 전까지 실랑이를 벌이던 요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홍 주임님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한 시간만 대타 좀 서 달라는데요?”
“예? 그래도 되는 거예요…?”
“괜찮아요, 괜찮아. 저도 보안직 오래 해 봤어요. 이런 유도리라도 없으면 못 해먹어요. 혹시 일한 지 얼마나 됐어요?”
“아, 전 이제 두 달 됐습니다.”
자신과 같은 복장을 입고 갑작스럽게 나타난 업계 경력자에게 신참 요원의 경계심은 눈 녹듯 사라지고 있었다. 중키의 요원은 자신보다 머리 하나가 큰 업계 후배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젊은 시절에 잠깐 색다른 경험 한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정신만 바짝 차리고 있어도 중간 이상은 가는 일이니까.”
“감사합니다.”
“음, 근데 이 환자분은 무슨 일로…?”
중키의 요원이 자신을 바라보자 서희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신참 요원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중키의 요원은 잠깐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그럼 제가 모셔가서 500ml 맥주 한 캔만 드시게 할게요. 딱히 의사가 금지한 게 아니면 괜찮을 거예요.”
“어… 그래도 스테이션에 한번 물어보는 게…”
“거긴 명색이 의사 오더 받는 간호산데 긍정적인 얘기를 하겠어요? 애초에 200병동은 비용도 비싸고 환자분들도 바깥에서 한 가닥씩 해서 이런 자잘한 요구에 응대하는 것도 일이에요. 그래서 두 명이서 근무하는 거고요.”
“그렇군요…”
“그럼 금방 갔다 올게요? …가실까요, 선생님?”
중키의 요원은 빙긋 웃으며 서희를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다녀오십시오.” 꾸벅 인사하는 신참 요원에게 마주 인사하며 중키의 요원은 말했다.
“알죠? 정신만 바짝 차리면 문제없어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하자, 빛나는 입을 열었다.
“…이런 건 지시사항에 없었어요. 대체 무슨 생각이죠?”
“죄송합니다.”
중키의 요원, 아니, 사설탐정은 상단의 CCTV를 신경 쓰며 표정과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대답했다.
“제3자의 개입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세 시간 전 대기 중이던 저에게 다가와서는 자신이 도와주면 고객님의 신병을 확보할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무시했더니 자신이 직접 고객님을 데리고 오겠다며 막무가내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려고 해서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걸 막고자 공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3자라고요?”
“그 사람은 진작부터 저와 고객님이 접촉하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고객님의 의뢰 대상도 알고 있었고요. 지금 변장을 하고 잠입하는 것도 원래는 그 사람이 하겠다고 한 걸 겨우 말려서 제가 온 겁니다.”
“…최대한 조심해서 나쁠 것 없죠. 위에 있는 저 친구처럼 막판에 방심했다가 전부 망쳐버릴 수 있으니까요.”
“아뇨…, 고객님의 일에 훼방을 놓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직원용 열쇠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마침 잠시 내려온 보안요원을 당수로 기절시켜서 뺏는 걸 보고… 위에서도 똑같은 짓을 할까봐 불안해서 그랬습니다.”
“…!”
그를 들은 서희는 엘리베이터가 지하에 도착하기도 전에 제3자의 정체를 깨달았다. 어둑어둑한 복도를 지나 주차장에 들어서자 저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의 여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서희는 일순 화색이 되었다가, 곧바로 의기소침해져서는 고개를 숙이고 주저주저하며 다가갔다.
“…언니.”
“…”
“…다 알고 있었구나.”
“…후우우우우우우우─”
주희는 크게 소리를 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서희를 돌아보았다.
“서희야. 하나만 물어 보자.”
“…”
“무얼 위해서 이런 일을 하는 거야? 시호와 빛나에 대한 부채의식? 아니면 네 아빠에 대한 앙갚음?”
“그런 게 아니야.”
서희는 틈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사설탐정은 몇 발자국 떨어져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럼 뭔데?” 주희의 질문에 서희는 확신에 찬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대답했다.
“한국 문학계의 미래, …그리고 아빠의 영혼의 안식을 위해서야.”
“네가 받을 풍평피해도 만만치 않을 거야. 감당할 수 있겠어?”
“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해야 되는 거야.”
“서희야….”
서희는 코끝이 찡해지는 걸 간신히 억누르고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 그동안 신세 많이 졌어, 언니.”
주희는 짠한 표정으로 서희를 바라보더니 그를 품에 끌어안았다. “…무정한 년. 하루아침에 예고도 없이 나타나서, 하루아침에 예고도 없이 떠나?”
“…”
“홀가분해지면 언제든 돌아와. 근데 되도록 빨리 돌아와야 돼. 너 갑자기 없어지면 금희 그것이 또 토라져서는 한동안 밥도 잘 안 먹고 농성할거란 말이야. 걔 이제 완전 할아버지야. …무슨 말 하는지 알지?”
“…응.”
사설탐정은 독촉하고자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가, 서희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고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 끌어안고서 또 다시 다가온 이별의 순간을 아쉬워했다.
몰려드는 고통에 의식이 돌아온 시호가 눈을 뜨고 처음 본 것은 형광등이 켜진 낯선 천장이었다. 빗소리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렸다. 살짝 고개를 들려고만 했을 뿐인데 처음 느껴 보는 욱신거리는 감각이 배를 짓눌렀다.
“으으음…!”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자신의 배를 보자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수술을 위해 척추 마취를 했는지 배 아래로는 감각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병실인가 싶었지만 방 안은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몸 아래 깔려 있는 건 시트가 아닌 사제 이불 패드였고, 누워 있는 침대와 대각선 방향으로 컴퓨터 책상이 있었다.
컴퓨터 모니터 왼쪽에는 기시감이 있는 사이트의 페이지가 떠 있었다. 오른쪽은 무언가를 찍고 있는 캠 화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를 찬찬히 보던 시호는 서서히 경악하기 시작했다. 의자며, 뒤의 침대며, 벽지까지 자신의 방의 모습과 빼다 박아 있었다. 만약 정말로 자신의 방이 찍히고 있는 거라면, 책상 앞에 앉은 자신의 모습, 침대에서 자는 자신의 모습은 물론이요, 빛나와 장난치며 놀고 알몸으로 뒹구는 모습까지도 노출된 건 불 보듯 뻔했다.
시호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와중, 조심스럽게 방문이 열렸다.
“아, 깨어나셨군요. 아직 무리해서 몸을 일으키시면 안 돼요.”
시호는 방 주인의 정체를 확인하자 까무러칠 뻔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건 메이드복을 입은 지수였다. 몸이라도 닦아 주려는 건지 손에 든 쟁반에는 젖은 수건이 올려져있었다. 시호는 뒤로 주춤하며 지수를 향해 삿대질했다.
“…대체, 당신 정체가 뭐예요! 나한테 뭘 원하는 거죠!?”
시호는 이제 지수에게 공포감마저 들었다. 성별을 속이고 여장을 한 채 반 년 가까이 자신과 한 지붕 아래서 일하며, 제멋대로 남의 작품을 대패질해서 올리는 것도 모자라, 침실을 도촬까지 하고 있었다니! 어지간한 스토커도 이렇게는 안 할 것이다.
“누우세요, 기껏 봉합한 상처가 다시 벌어진다고요.”
지수가 손을 뻗자 시호는 다급히 그를 쳐내고는 곧바로 ‘아차’ 싶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옆에서 묵묵히 자신을 도와 준 사람인데 너무 차갑게 반응한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건 몰라도 도촬만은 도를 넘은 행위가 분명했다. 빛나까지 말려들었을 것을 생각하니 좀처럼 용서가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빛나는 어떻게 됐지? 분명 굉장히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텐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시호는 다그치듯 지수에게 물었다.
“빛나 어떻게 했어요? 내 기억이 맞으면 한 발 남아 있었을 텐데! …설마!”
지수는 고개를 저으며 앞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소음기가 달린 나강 리볼버였다.
“쓸데없는 짓 하려고 해서 바로 기절시키고 뺏었어요. 선생님 렌트카에 태워 올 때 119에 신고해 줬으니, 인근 병원에 누워 있을 거예요.”
“렌트카에 태워서 오다니, 지수 씨 운전할 줄 알았…, 아니, 그럼 정작 다친 나는 병원을 안 가고 여기로 데려온 거예요?”
지수는 대답 대신 시호의 몸을 침대 가운데로 끌어 눕혔다. 시호도 안심했는지 이번에는 손길을 받아들였다. 지수는 오른쪽 손부터 젖은 수건으로 닦으며 입을 열었다.
“뱃속에 총알이 박혔으면 당연히 병원으로 갔을 거예요. 피부를 찢으면서 복직근腹直筋을 살짝 긁은 정도라 소독하고 봉합하는 정도로 끝낼 수 있었어요.”
시호는 대번에 지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응급실에 실려 온 외상 환자의 배에서 총알이 나온다면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일이 아닌가.
“…”
시호는 복잡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빠졌다. 번역가이자, 운동과 무술의 달인이자, 물리학도이자, 간단한 외과 수술까지 할 줄 아는 사람이 주변에 있던가? 만약 있다면 그 다재다능함의 이유는 둘 중 하나가 아닐까. 뭐든 건드리는 족족 중급의 경지까지 올라가는 영재과거나, …살면서 별별 일을 다 겪었거나.
그리고, 그런 사람이 대체 왜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집착한단 말인가? 지수가 말하는 것처럼 그저 작가에 대한 유난스러운 팬심일까? 아니면 설마…
“지수 씨. 혹시 내가 좋아요?”
“네, 물론이죠.”
즉답이었다.
“아…” 시호는 왼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런 것이었다면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지수는 얕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람으로서, 작가로서 좋아한단 뜻이에요. 무슨 생각하시는 거예요?”
“아니, 그럼 도촬은 왜 한 거죠?”
“제가 처음 본 선생님은 언제 방에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으니까요. 여차할 때 도와드리려고 설치했어요.”
“…”
시호는 지수의 말을 의심하진 않았다. 분명 지수를 만날 당시의 자신은 비만에 혈압까지 높은 주제에 줄담배를 태우던 시한폭탄 몸뚱이였으니까. 그러나 여전히 기분이 개운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지수에게서 처절함과 안쓰러움까지 느껴져서 참을 수 없었다.
대체 이 자에게 자기애란 건 있는 걸까? 어떻게 남을 섬기기 위해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자신을 내던질 수 있단 말인가? 지키고 싶은 자신만의 소중한 것은 없는 걸까?
“지수 씨. 말해 줘요. …대체 당신은 어떤 인생을 살아 온 거죠?”
시호의 등을 닦던 지수는 순간 손을 멈추었다. “…에이, 별 게 다 궁금하시네. 대한민국 남자 인생이 다 거기서 거기죠.”
“저번에 분명히 나한테 말했죠? 내 글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
대답 없이 묵묵히 자신의 등을 마저 닦는 지수에게 시호는 재촉했다.
“지수 씨의 과거를 알고 싶어요. 내 영감을 위해서.”
“…외통수네요. 선생님도 꽤 짓궂으신데요.”
지수는 시호의 등근육 사이의 곁을 짚어 꾹 눌렀다. “흐읍!” 시호는 고통에 비명을 지를 뻔했다. 지수는 눈을 살며시 감고, 가장 오래된 기억의 편린을 더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