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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Sep 28. 2024

피그마리온의 눈물 (12)

상아빛이 나는 벽에는 한 점의 커다란 풍경화, 그리고 사람 키만큼의 간격을 두고 익명의 중세 시대 귀족 여인을 그린 초상화가 두 점 걸려 있었다. 단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하얀 문에서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나더니 연미복을 입은 웨이터가 조심스럽게 주전자와 찻잔 두 개가 든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주문하신 마리아쥬 프레르입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누가 들어오든 아랑곳 않고 시종일관 노트북에 시선을 맞추고 있던 서희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목례했다. 웨이터는 절도 있게 인사하고는 발소리를 내지 않고 다실 문을 조용히 열더니, 한 번 더 허리를 숙이고 문을 조용히 닫았다.

서희는 노트북 우하단의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2시 57분. 메일에 적은 약속시간까진 단 삼 분 남아있었다. 자신이 아는 그라면 이미 아까 전에 근처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심지어 1층에 앉아 올라올지 말지 한창 망설이고 있을 공산이 크다. 서로 물리적으로 멀어져 있던 시간만큼 마음의 거리도 멀어졌음을 서희는 새삼 실감했다. 만나면 무슨 말을 할 지 서희가 다시 한 번 정리하고 있던 그때였다.

(똑똑)

이번에 들린 노크 소리는 방금과는 명백히 달랐다. 다소 희미하고, 망설이는 기색이 가득했다. 서희는 한번 심호흡을 하고는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오세요.”

몇 초가 지나서야 서서히 문이 열리고 시호가 어색함을 감추지 못한 채 다실에 들어섰다. 서희는 시호가 오른손을 들며 “오… 오랜만이야.” 하고 인사하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테이블 맞은편으로 걸어와 의자를 꺼내 앉는 것까지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서희는 주전자를 들고 찻잔을 채워 시호에게 건네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잘 지냈어? 머리 길렀네.”

“…응.”

“이십대 애들 같네. 잘 어울려.”

“…그래? 처음이네. 머리 칭찬받는 거.”

서희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인사말을 건넸다. 시호는 눈앞의 서희를 그저 아련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지금의 지수 나이 때까지도 가득하던 앳된 티가 많이 사라졌지만, 장난을 좋아하는 아이와도 같은 눈동자만은 그대로였다. 그것만큼은 지수의 속을 알 수 없는 투명한 눈동자와는 분명히 달랐다.

“그나저나 웬 찻집이야? 커피랑 달리 설탕도 못 넣는다며 안 마셨잖아.”

“네가 다 마셔. 난 향만 즐길 거야.”

“아무튼 못 말려… 근데 색깔 참 곱네. 무슨 차야?”

시호는 쟁반에 함께 딸려 온 카탈로그를 펼쳐보았다. “Mariage Frères?”

“형제끼리 결혼한다잖아, 배덕감이 느껴져서 골라 봤어.”

“마리아쥬 가 형제겠지. 무슨 명사끼리 도치하고 있어.”

“번역을 오래 하긴 했네. 농담을 못 받는 거 보니.”

웃고 있는 입가와 달리 서희의 눈에는 애잔함이 깃들었다.

“넌 아직도 안 늙었네. 난 아저씨가 다 됐는데.”

“회광반조야. 몇 년 후에 앞자리 바뀌면 신나게 늙어갈 거야.”

“걱정 마. 네 정신연령은 절대 나이를 안 먹을 테니까. 3학년 5반 이서희 어린이.”

“…오랜만에 만났는데 여전히 분위기 깨는 말만 하는구나.”

‘차라리 침을 뱉고 저주했다면 당장은 아프더라도 금새 개운해졌을 텐데.’

서희는 짐짓 실망한 척을 하면서 속으로는 온몸을 채울 정도의 감사와, 서 있기 힘들 정도로 밀려드는 미안함을 느꼈다. 모르는 사람에겐 그저 놀림으로 들리는 ‘○학년 ○반 이서희 어린이’는 자신의 치기와 고집을 받아줄 때 시호가 애칭처럼 부르던 표현이었다. 사 년간의 일방적인 응석까지 그는 진작 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과거에 발이 묶여 있을 순 없지 않겠니. 너도, 나도…’

시호는 차를 한 모금 머금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맹세컨대, 서희가 사무치게 그리울지언정 원망스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그리움도 대부분 희석된 지금 서희에게 남은 감정은 옛 연인에 대한 향수를 넘어서지 않았다.

“역시 나도 마실까, 잠깐 아래층에서 설탕 좀 구해올게.”

“그만둬. 벌써부터 사장한테 핀잔맞는 소리가 들리네…”

서희는 필사적이었다. 일상적인 대화도, 시답잖은 농담도, 모두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참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시호의 얼굴을 보는 건 오늘로 정말 마지막이니까. 하지만 마지막인 것처럼 굴면 시호 역시 슬퍼할지도 모르니, 끝까지 태연하게, 마치 내일이라도 장난스럽게 눈앞에 나타날 것처럼 헤어져야 하니까.

“방금 전까지 신작을 쓰고 있던 거야? 여전하네.”

시호는 서희의 노트북을 가리켰다. “아, 딱히 그런 거 아냐.” 서희는 황급히 노트북을 닫고 가방에 집어넣었다. 이런 자리에서는 꺼내놓지 말았어야 했는데, 생각이 짧았다고 서희는 생각했다. 시호는 서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서희야. 내가 좋아했던 건 뭔가에 열중하는 너의 눈이야. 네 옆에서 그걸 볼 수 있어 행복했고, 앞으로도 먼발치에서라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

서희의 동공이 흔들렸다. 울컥해지려는 걸 참으며 서희는 내뱉었다.

“그만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 누구한테도 구속받지 말고, 휩쓸리지도 말고…”

“그만!!!”

서희는 손을 빼며 버럭 소리쳤다. 시호는 서희의 얼굴을 보고 흠칫했다. 어느새 붉어진 서희의 눈가에서 비죽비죽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왜 나 같은 년을 위해 그런 말을 하는데? 너한테서 열중할 때의 눈빛을 빼앗은 게 누군데! 끝끝내 희망고문만 당하다가 젊은 날을 소진하게 한 게 누군데!”

“서희야…”

“차라리 욕을 해…!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다’고, ‘너를 만나는 바람에 평생 방구석 글쟁이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사실은 그 말을 하고 싶잖아!”

말했다.

결국은 말해버렸다.

오랫동안 축적된 서희의 죄책감은 어느새 말의 칼날이 되어 내뱉은 장본인을 난도질했다. 그것은 시호에게는 통쾌하기는커녕 씁쓸하고 안타까운 기분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아니야, 서희야. 내 인생은 망가진 적이 없어. 난 충분히 행복해. 괜히 억측으로 스스로를 조여들지 마.”

“그렇지만…!”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년 남성을 위시하여 선글라스를 낀 건장한 장정들이 우르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돌아본 두 사람의 얼굴엔 각각 놀람과 경멸이 드리웠다.

“옳은 말일세. 자신의 행복은 자신이 규정하는 거지, 어떻게 남이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 수 있겠나? 안 그런가, 정 석사?”

“…그렇습니다, 학과장님.”

학과장이 고개를 뻣뻣이 세운 채 거만한 말투로 말하자 시호는 빈정거리고 싶은 욕구를 애써 참으며 정중히 대답했다. 서희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했다.

“아빠, 설마 날 미행한 거야…?”

“서희 너…, 귀국해서 집에 들어오지도 않더니 기어이 이 녀석을 또…!”

“대답해! 언제부터야! 설마 시호한테도 미행을 붙인 건…!”

“너 설마, 이 녀석 데리고 가려고 온 거야?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학과장과 서희는 서로 노려보며 대화라고 할 수 없는 일방적인 말들을 던졌다. “후우…” 시호는 한숨을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희야, 차 잘 마셨어. 난 이만 가 볼게. 조심히 들어가고…”

그러자 학과장은 장정들에게 눈짓을 했다. 두 사람이 문 앞에 서서는 뒷짐을 졌다. 시호는 미간을 찡그리며 적의 가득한 말투로 내뱉었다.

“지금 뭐하시는 거죠?”

“자넨 여기서 나하고 얘기 좀 하지. 이서희, 넌 얌전히 집에 돌아가 있어.”

“아빠, 제정신이야? 시호가 아빠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래!”

“나도 너 아니었으면 이 녀석 볼 일도 없었어! 잔말 말고 나가지 못해!”

서희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시호를 바라보고는 이내 학과장을 째려보았다.

“시호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아빠 탓으로 간주할 거야. 평생 내 얼굴 보기 싫으면 알아서 해.”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두 사람이 서희에게 길을 터 주자, 서희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이윽고 문이 닫히자, 학과장은 서희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아 등을 기대고는, 손도 안 댄 찻잔을 들었다.

“서희는 차를 안 마시는데 여태 모르고 여기로 불러낸 건가?”

“불러낸 건 서희입니다. 다실에서 만나기 위해 꼭 차를 마실 필요는 없죠.”

“서희는 안 마시지만 네놈은 못 마시는 걸 텐데. 이게 얼마나 비싼 차인지는 아나?”

“모릅니다. 서희가 샀으니까요. 하지만 서희는 가격을 보고 이런 곳을 예약해서 차를 주문하진 않았을 겁니다. 그 녀석에게 제일 중요한 건 새로운 경험이니까요.”

“…되는 대로 떠드는군, 건방진 새끼가.”

학과장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주변에 서 있던 장정들은 당장이라도 불호령이 떨어질까 숨을 죽였다.

“할 얘기가 있으면 빨리 하십쇼. 나도 놀고먹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서희가 없어지니까 바로 말이 짧아지는군, 양아치 새끼. 너의 그런 본성을 진작 알아봤어.”

“서희가 있어서 그나마 남아있지도 않은 존중을 짜내 드린 겁니다. 당신이 서희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내가 아는 체라도 했을 것 같습니까?”

“글도 변변찮은 놈이 인성까지 빠그러져서는. 그래서 널 인정하지 않은 거다.”

“겨우 내 말투 따위로 인성론을 들먹이며 인과관계를 호도하지 마십쇼. 당신이 날 싫어하게 된 건 석사 논문에서 당신 작품을 비판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나 원, 서로에 대한 건전한 비판 하나 용납하지 못하는 학계 문단이라니…”

순간 시호의 얼굴 옆으로 찻잔이 날아들더니 벽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학과장은 시호를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세상 어느 천지에 자기 연인의 아버지를 비판하는 논문을 쓰는 대학원생이 있어!”

“당신이 아니라 당신 작품을 비판한 겁니다. 논문이니까 그 정도였지, 평론이었으면 그보다 더한 표현도 했을 겁니다. 미사여구만 줄줄 늘어놓고 정작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눈 씻고 찾아도 안 보이는, 문필가 이문기 인생의 치명적인 오점이라고!”

 “이놈아, 그래서 학생들 앞에서 내 딸의 작품까지 난도질한 것이냐! 글 쓰는 놈이 펜으로 세상과 자기 자신을 상대하지 않고 헤어진 연인에 대한 하찮은 분풀이나 하다니!”

“엄연히 강의실 안에서 지성의 이름으로 행한 토론을 강의실 밖으로 가져와 메신저를 들먹이며 폄훼하는 건 고귀한 짓입니까! 당신이 학과장이라도 강사의 수업 내용까지 미주알고주알 따지고 들 순 없는 겁니다!”

시호는 질린 듯 말했다. 학생들 앞에서 한 토론 내용을 학과장이 알고 있다는 게 무슨 의미겠는가? 문득 시호는 빛나가 대체 어떤 취급을 당하며 학교에서 버티고 있는 건지 눈앞이 아득해졌다. 학회장은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흥, 박사도 아니고 문단에서의 변변한 활약도 없는 네까짓 놈이 무슨 말을 하든 아무 힘도 없다. 네놈도 그걸 알기 때문에 그때 네 딴에는 회심작을 문예지 공모전에 투고한 게 아닌가?”

“상을 타서 서희 앞에 소설가로서 떳떳이 서고 싶었을 뿐입니다. 당신처럼 학계나 문단에서 허상이나 다름없는 권위를 빌려 두르고 다닐 생각을 단 일초라도 했겠습니까?”

“그 권위의 파편조차 쥔 적 없는 놈이 무슨 배짱으로 고고한 척이냐. 그동안 해온 것처럼 번역질이나 하고 영문 모를 여자를 집안에 끌어들여서 놀기나 해라… 하지만 또 다시 서희를 만나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해 주마.”

“오지랖 그만 부리십시오. 이제 와서 서희에게 연인으로서의 미련은 없습니다. 다만 그 녀석이 행복하게 자신의 삶을 누리길 바랄 뿐이고, 그러다가 힘들 때 저에게 의지하려 한다면 전 매몰차게 내칠 수 없습니다. 저의 몇 안 되는 소중한 친구니까요. …불만이시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출판사에 압력이라도 넣어서 제 밥줄을 끊으신다면 다른 일을 하며 살지요.”

“쓸개 빠진 놈… 푼돈이나 만지는 번역질 끊어서 무슨 의미가 있나?”

학회장의 얼굴에 비열한 웃음이 떠올랐다.

“황 박사가 실적이 좋고 평판도 좋아. …아주 여러모로 말이야. 아마 다음 학기엔 부교수가 되겠지. 내가 잠자코 있다면 말이야.”

“…!”

“나로선 학부 시절부터 제자였던 황 박사의 앞길을 굳이 막고 싶지 않지만…, 황 박사가 누굴 위해 그토록 몸과 마음을 불살라가며 출세하고 싶은지 생각할 때마다, 그 싹을 밟아버리고픈 충동을 참기가 힘이 들거든…”

시호가 벌떡 일어서자 장정들은 곧바로 그를 에워쌌다. 살기등등한 기세로 시호는 학과장을 노려보았다.

“빛나가 도대체 당신에게 뭘 잘못했다는 거야! 우리 둘은 서희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단짝이었어! 나한테 원한이 있으면 나만 건드려!”

“네가 서희 앞에 나타나 내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 될 일이다. 그러면 황 박사가 너를 위해 무엇을 대가로 어디까지 올라가든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순간 시호는 어리둥절해졌다. ‘무엇을 대가로’? 대체 빛나가 무슨 대가를 치렀다는 말인가? 학과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서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난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내가 한 말을 똑똑히 마음속에 새겨라.”

머릿속이 공황 상태가 되어 그저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호를 내버려둔 채 학과장은 장정들을 이끌고 방에서 나갔다.     



   

욕실 문을 열고 나서자 방 안이 싸늘했다. 바스 타올을 두르고 나온 빛나는 서둘러 책상 앞에 앉아 전기스토브를 켰다. 시간이 어느새 밤 11시를 넘기고 있었지만 빛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심사위원회에 새로 발탁된 ◇교수의 논문들도 훑어봐야 하고, 내일 강의 준비도 해야 한다. 연구자로서의 실적과 학생들과의 약속, 어느 쪽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시호의 안위였다. 그것에 대해서도 빛나는 만반의 대비를 해 놓은 상태였다. 단지 시호가 입을 마음의 상처를 최소화하고자 기회를 엿보고 있을 뿐이었다. 빛나는 갑자기 머리 앞에서부터 눈을 거쳐 코까지 찌릿 하고 욱신거림을 느꼈다. 이어서 콧속이 살짝 얼얼해지더니 피가 흘러 가슴에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쏟아진 코피는 하늘색 바스 타올을 금새 붉게 물들였다.

빛나는 코를 쥔 채 세면대에 가서 입가에 묻은 피를 씻고는 휴지를 뭉쳐 콧구멍을 막았다. 문득 거울을 보니 얼굴은 누렇게 뜨고 눈가엔 기미가 껴서 못 봐줄 정도였다. 여러 가지 일들을 동시에 하느라 지난 몇 주간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못 잤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고자 살짝 머리를 비틀자 콧속에서 뜨거운 게 인후를 타고 내려오는 게 느껴졌다. 빛나는 살짝 얼굴을 찡그리고는 그걸 입에 모아 변기에 퉤 뱉었다. 노오란 가래에 피가 섞인 목불안견의 물질이 변기 물에 떨어졌다. 입속을 헹구어 똑같은 곳에 뱉은 다음 물을 내리고는 빛나가 욕실 밖으로 막 나왔을 때였다.

띵동 하고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빛나가 놀람 반 기대 반으로 인터폰 화면을 켜자 시호가 렌즈를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빛나는 휴지 뭉치가 안 보이게 콧속으로 밀어 넣었다. 문을 열어주자 시호는 한 손에 발렌타인 30년산을 들고 서 있었다. 빛나는 재빨리 뒤돌아서서 방으로 향하며 말했다.

“선배,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심지어 위스키까지 들고?”

“선물이야.”

시호는 싱크대에 대충 병을 올려두고는 안으로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나 잠깐 옷 좀 갈아입고 올게.” 빛나는 옷방 문을 닫으며 말했다. 문득 시호는 빛나가 뒤돌아서기 전 눈에 들어온 모습의 위화감을 기억해내고는, 옷방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빛나는 타올을 막 벗은 상태였다. “아잉~ 암만 볼 거 다 봤어도 그렇지, 옷 갈아입을 때 보는 건 가족 아니면 창녀한테나 하는 거야~!” 대수롭지 않게 농담을 건네며 타올을 뒤로 숨기는 빛나의 손을 시호는 확 잡아챘다.

“아이, 선배! 뭐 이렇게 걸신들렸어!”

“…너 이거 뭐야.”

시호는 타올을 들어 올려 피로 붉게 물든 부분을 펴 보였다. 뒤이어 시호는 빛나의 코 양 옆을 쥐어 왼쪽 안에 이물질이 눌리는 느낌을 확인했다. “으윽…” 빛나는 가볍게 신음을 흘렸다. 시호는 화난 눈으로 말했다.

“…너 요즘 하루에 몇 시간 자?”

“아이, 왜 그래 무섭게? 잘 만큼 자. 어쩌다 코피 날 수도 있는 거지…”

“건강 좀 챙겨. 너도 이제 마냥 젊은 나이 아냐.” 시호는 이마에 주름을 지으며 말했다.

“와, 나이 얘기 하는 거 봐! 안 그래도 요즘 신경 쓰이는데!” 빛나는 너스레를 떨며 시호를 방 밖으로 내보내고는 문을 닫았다.

“…하긴 내가 그런 말 할 자격이나 있나…” 시호는 빛나가 들을까 봐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 낮에 시호는 지수를 집에 남겨둔 채 수원에 석사 시절 선배를 만나러 갔다 왔다. 작년까지 Y대에 출강하다가 올해 봄 학기부터 더 이상 재계약이 안 되어 수원 A대에 출강하게 된 그는 대학원 시절 시호와는 일절 교류가 없었다. 경박하고 입이 싼 데다 무엇보다 빛나에게 마음이 있으면서 당당하게 가까워지려고 하기는커녕 남자 후배들과 함께 음담패설의 대상으로 삼기나 하니 시호는 그와 친해질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빛나가 어떤 고초를 겪고 있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알고 싶던 시호는 그의 연락처를 수소문해 오늘 A대에 갔다 왔다. 대학원 때도 학과장의 뒷담화를 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던 그는 시호의 예상대로 “이문기 교수님도 건강하시겠죠?” 란 말 한 마디에 불같이 화를 내며 학과장의 민낯에 대해 장장 세 시간을 열변했다.

만남이 거의 끝나갈 때쯤, 자신의 이야기에 취해 있던 그는 시호 앞에서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황 박사 같이 예쁜 여자는 좋겠어. 나 같이 뒷배도 없는 놈은 평생을 월 백 짜리 시간강사로 썩는데, 같은 박사라도 문단 원로한테 몸을 팔고 웃음을 팔면 이 레드오션에서 서른 중반에 덜컥 교수 임용도 되고 말이야. 결국 힘없는 남자는 남은 생을 가랑이 사이에 달린 고추를 한스러워하며 살 뿐이다, 이거야.


그 말을 들은 시호는 벌떡 일어나서는 그대로 자리를 떴다. 뒤에서 선배가 소리 지르며 불러 세웠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자의 얼굴을 봤다간 주먹이 나가는 것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의 말을 전부 믿지는 않았다. 원래 사람은 책임질 일이 없을 때 자신이 보고 겪은 것보다 더 부풀려서 이야기를 장황하게 만들고픈 욕구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비슷한 처지의 시간강사조차 빛나를 저런 눈으로 보고 있다면 학계와 문단 권력자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빛나도 썩어빠진 현실을 모른 채 희희낙락하며 대학원에 오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호가 이문기 학과장의 작품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석사 논문을 내고 뛰쳐나갈 때, 그는 빛나가 이후 어떤 고초를 겪을지는 거의 염두에 넣지 않았다. 당시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서희 앞에 글쟁이로서 당당해지는 것이었기에, 빛나가 학교에서 어떤 일을 겪는지 관심을 기울이거나 학과장에게 찾아가 혹여나 빛나에게 분풀이를 하지 말아달라고 빌거나 하는 생각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내 무심함이 네 청춘을 망가뜨렸구나, 빛나야.’  

그새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빛나는 찬장 깊숙이 있던 위스키 잔 두 개를 꺼냈다. 발렌타인의 뚜껑을 따자 향긋하면서도 독한 냄새가 올라왔다. 잔을 채우며 빛나는 물었다.

“온더락?”

“아니, 스트레이트.”

“…여기서 자려고 작정하고 왔구나?”

“뭐 어때, 킹사이즈 침대 좋잖아.”

술이 결코 세지 않은, 오히려 술찌에 가까운 시호는 희석 안 된 발렌타인을 두어 잔만 마셔도 똑바로 걷지 못한다. 평범한 여자의 완력을 지닌 빛나가 인사불성이 된 평균 성인 남성을 웃도는 체격의 시호를 이고 4층 계단을 올라가는 건 불가능했다. 빛나는 시호에게 잔을 건네며 장난스레 말했다.

“이 시간에 비싼 술을 사 들고 여자 혼자 사는 집을 방문하는 건 식자로서 좀 그렇지 않나 싶어~”

“괜찮아, 난 스스로 식자라고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어.”

“스스로 식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식자일 리 없잖아요, 정시호 식자님?”

“이거, 이거… 영광입니다. 황빛나 식자님.”

실없는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두 사람은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시호가 한 모금을 마시자 과연 뱃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따뜻한 덩어리가 온몸을 타고 다니며 온기를 전달하는 게 느껴졌다. 숨을 후우 뱉자 벌써부터 뜨끈함이 인후를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빛나는 잔을 입에 대지도 않고 책상 한편에 올려놓았다.

“난 딱 자기 전에 마실게. 지금 마시면 일하기 싫어질 것 같아.”

“그 정도 논문이면 심사하는 입장에서 맨 처음 읽을 수 있다는 데에 황송해야지. 뭘 더 고칠 게 있다고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상대는 그렇지 않은가 봐.”

우주의 너스레를 빛나는 혀를 살짝 내밀며 받아쳤다. 우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없겠지?”

“우리 대 식자님께 어찌 이런 하찮은 일로 수고를 끼치겠어~”

“사람이 하는 일에 하찮고 귀한 게 따로 있겠어? …야식이라도 만들어 줘?”

“됐네요~ 먼저 자고 있기나 하세요. 선배도 내일 일해야지.”

빛나는 곧바로 책상으로 몸을 돌려 노트북에 눈을 돌렸다. “…다 끝낼 때까지 지켜볼게.” 시호의 말에도 빛나는 반응 하나 없이 어느새 논문에 집중하고 있었다.

‘넌 묵묵히 내 곁에 있어 주었는데, 난 한 번도 널 돌아보지 않았어…’

짠한 눈빛으로 빛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호는 남은 잔을 단숨에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빛나의 등 뒤로 다가가 천천히 어깨를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빛나는 처음엔 놀랐지만 이내 묘한 신음 소리를 흘리며 시호의 손길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오늘 너무 다정한데? 자꾸 이러면 나 오히려 불안해?”

‘선배, 진아 언니와 이서희를 좋아했으면, 내가 선배에게 얼마나 힘을 얻고 있는지 알잖아.’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끝내고 자기나 해.”

‘널 복마전에 내버려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

“…누구 씨가 재워 줘야 잘 수 있는데.”

‘다정한 말 한 마디, 손길 한 번이면 나는 충분해.’

“그런 말은 식자로서 좀 그렇다.”

‘빛나야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누구보다 서로 가깝고, 서로를 위하며, 한 번도 연인이었던 적 없는 두 사람의 밤이 조용히 깊어갔다.     




광택이 나는 대리석이 깔린 복도를 네글리제 차림의 여자는 저벅저벅 맨발로 걸어갔다. 여자의 손에는 계간 문예지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비서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슬리퍼를 발치에 놓아 주었지만 여자는 무시했다. 방문 앞에 서자 비서는 “아가씨,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 주무시고…” 라 운을 띄우며 만류했으나 여자는 들은 체도 않고 문을 두 번 두드리고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열었다.

스탠드의 불빛에 의지해 돋보기를 쓰고 독서 중이던 년의 남자는 고개도 들지 않고 “그래도 집이 어딘지는 잊지 않은 모양이구나.” 라 말했다. 여자는 담담히 대답했다.

“날 연인에 빠져 가족을 팽개치는 철부지로 만들지 마.”

“그래, 시집 간 것도 아니고, 한국을 떠난 것도 아니고, 지방에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닌 딸이 삼 년 넘게 전화 한 통 없는 건 가족을 팽개치는 게 아니지.”

“비꼬지 마. 어떻게 사는지는 다 전해 들었을 텐데?”

여자의 눈가에 힘줄이 살짝 돋았다. 남자는 책상을 쾅 내리쳤다.

“그 연놈들의 햄스터 우리 같은 집을 전전하는 게 그렇게 좋아? 왜, 그냥 혼인신고 해 버리고 집 한 채 떡하니 사서 들어가서 아빠 가슴에 대못을 박지 않고!”

“아빠, 내 소중한 사람들을 그렇게 부르지 마. 그리고 난 분명히 말했어. 아빠가 축하해주지 않는 결혼은 안 하겠다고.”

“그래서 한다는 짓이 시위고 농성이야? 너 당장 아빠가 죽으면 어떻게 할 거야? 평생 그렇게 살 거야?”

“안 죽을 거잖아, 쓸데없는 협박 하지 마.”

남자는 “흥!” 하고는 애꿎은 책을 노려보며 시선을 돌렸다. “말장난 하러 온 거 아냐.” 여자는 계간지를 책 위에 던지다시피 올려놓았다. 남자는 천천히 여자를 올려다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게 뭐 어쨌다는 거야?”

“시호의 작품이 투고하는 족족 낙선하는 거, 아빠 짓이지?”

“…하, 감정에 매몰돼서 이젠 눈에 뵈는 게 없어? 그 녀석이 시비만 걸 줄 아는 속 빈 강정인 줄 여태 몰라?”

“내가 시호 거랑 당선작들을 전부 안 읽어 봤을 것 같아? 그 사람들, 제대로 평가했으면 다 한 계단씩 내려가야 돼.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남자는 몇 년 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연구실을 나가는 청년의 모습을 떠올렸다.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며 인사하는 그 얼굴은 논문 심사 때 그를 작살내고자 손수 자신의 측근으로 꾸린 위원단의 공격을 하나하나 맞받아칠 때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오래 전, 늘 자신보다 재능도 뛰어나고 사람들에게 인기도 많던 한때 제일 친했던 친구의 얼굴과 똑 닮았다.

그때 남자는 결심했다. 저놈만큼은 이 세계에 발을 못 들이게 하겠다고. 자신이 이룩한 왕국에서 쌀 한 톨도 수확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기에 스스로 확증편향에 빠진 얼간이들이 지망생이라고 날뛰는 바닥이야. 엊그제까지 물리학도였던 녀석이 석사 이 년 다녔다고 필력이 일취월장이라도 했을 것 같아?”

“시호는 중학교 때부터 소설을 썼어. 내가 읽어봤거든. …중학생의 섬세함과 지식수준이 아니었어.”

“네가 그 녀석을 아무리 예찬한들 당선될만한 실력이 아니면 아닌 거야! 왜? 그 녀석이 너에게 징징거리기라도 했어? 날 물고 늘어지라고?”

“시호가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부탁하러 온 거야!”

“난 모르는 일이야! 무엇보다, 내 얼굴에 똥물을 뿌린 주제에, 내 딸의 인생을 볼모로 잡고 있는 놈! 갈아 마셔도 시원찮아!”

여자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그걸 마음에 두고 있는 거야? 대체 아빠가 잃은 게 뭔데? 겨우 석사 한 명의 논문이 그렇게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일이야?”

“글은 뭐든 용서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

“그놈은 선행자들에 대한 존경도 예의도 없어. 가볍고 재간 있는 문장으로 얼간이들을 눈속임할 수 있어도 나는 속이지 못해. 그 녀석이 세상에 알려지면 문단은 크게 동요할 거야. …그러니 너도 이만 정신 차려! 내가 그런 놈팡이랑 놀아나라고 홀로 널 아득바득 키운 게 아니야!”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는 여자의 양 어깨를 붙들었다. 남자의 눈에 깃든 질시와 증오를 본 여자는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곧바로 확신했다. 그리고 자신이 연인의 곁을 지키고 있는 한 그가 작가로서 제대로 평가받을 일은 요원하다는 것도. 이 집에 들어오기 전 염두에 둔, 떠올리는 것조차 싫었던 선택지를 골라야 할 때가 왔음도.

“…내가 영영 시호를 떠나면 되지?”

“…뭐?”

그에게 의논하면 보나마나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이상 그가 헛된 희망고문을 계속하게 둘 순 없다. 제대로 평가만 받는다면 그는 분명 세상을 놀라게 할 소설가가 될 것이다. 거기에 자신의 존재가 장애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면서 뻔뻔하게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순 없다.

“내일 아침을 여기서 먹고 바로 공항에 갈 거야. 국제선 중에 제일 빨리 탈 수 있는 거 탈 거야. 휴대폰은 내 방에 두고.”

“…한국을 뜨다니!? 자취 한 번 안해 본 녀석이 해외에서 어떻게 혼자 살겠다는 거야! 난 허락 못해!”

“내 걱정의 반의 반 만큼이라도 시호를 연민해 줘. 내가 이렇게까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아마 그는 적잖이 힘들어 할 것이다. 실의에 빠질 그의 모습을 생각만 해도 단장의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자신이 아는 그는 그 아픔조차도 전부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천상 글쟁이다. 분명 언젠가 그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멋진 삶wundervolles Leben을 살았다’고 스스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시호를 놔줄 테니까, 아빠도 그만 시호를 놔줘.”

‘시호야…, 빛나야…, 언니… 미안해…’

여자의 눈에선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서희는 저벅저벅 슬리퍼를 신은 채 복도를 걸었다. 옆에 따라붙는 비서는 없었다. 네글리제 위에 숄을 걸친 모습에선 예전에 이 집에 살 당시에는 보이지 않던 요염함이 뿜어져 나왔다.

연마한 지 오래됐는지 더 이상 윤기가 나지 않는 대리석과 군데군데 벗겨진 벽지와 갈라진 몰딩은 저택의 연식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서희는 잠깐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다시 포커페이스로 돌아왔다. 사 년 전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운명을 크게 바꾼 방 앞에 선 서희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문을 똑똑 두드렸다.

“아빠, 나야.”

“…”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러나 분명 학과장은 안에 있을 터였다. 서희는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불이 꺼진 방 안에서 학과장은 창밖의 달을 보고 있었다.

“호언장담은 다 하더니, 결국 그놈을 보고 싶어서 돌아온 거냐?”

학과장의 말투는 딸에게 실망한 아버지의 그것보단 연인에게 배신당한 남자의 그것에 가까웠다. 서희는 주먹을 조용히 꽉 쥐며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이유였다면 진작 돌아왔거나 영영 안 돌아왔어. 시호와 손잡고 아빠와 싸울 것도 아니면서 내 감정 하나 절제하지 못했을까봐?”

“그럼 지금은, 나와 싸우기라도 하겠다는 거니─”

“내가 질문할 차례야. 왜 시호를 괴롭히는 걸 멈추지 않은 거야?”

“…”

학과장은 그제야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원숙해진 서희의 모습은 이제 완연히 그의 요절한 안사람의 자태를 하고 있었다. 한 발짝, 한 발짝, 서희에게 다가간 학과장은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놈이 펜을 꺾지 않는 한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야.”

서희는 자신의 손을 쥔 힘이 점점 세지는 걸 느꼈다.

“아빠…”

“그놈의 문체는 투박하고 거칠기 그지없지. 애초에 문체를 칼처럼 벼리는 덴 관심도 없는 놈이니까. 그렇기에 어느 독자든 거부감 없이 끌어들여버리고, 이윽고 놈이 짜놓은 세계관에 제 발로 침잠하게 하지. …하지만 그런 글은 결코 상업주의를 벗어나지 못해! 하나의 경지로서의 소설의 길을 일관할 수 없다고!”

“그…건…”

그래서 학과장은 시호가 습작이라며 가져온 원고들을 보고 속으로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처음 읽는 글일 텐데도 불구하고 오래된 기시감이 머릿속을 괴롭혔다. 이런 식으로 쓰는 사람을 그는 단 한 명밖에 알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의 글이 당시 자신의 은사와 몇몇 원로들에게 칭찬을 겨우 들을 때, 그의 글은 연일 또래들의 화젯거리였고, 그 무리엔 훗날 자신의 아내가 되는 여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놈이 이 나라 문학 사조에 사문난적질을 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다. 혹여나 놈이 유명세를 얻어 버리면, 그를 본 수많은 지망생들은 생각하겠지. ‘대충 팔리게만 쓰면 된다’고 말이야!”

“…시호…의…소설은…결코…그렇…게…가볍지…않아! …설령…정말…그렇다…고…해도…그것…도…문학…이야!”

학과장의 악력을 애써 참아가며 서희는 반박했다. 학과장은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인지하지 못한 채였다.

“아니, 가벼워! 놈의 글도, 놈 자체도! 그렇지 않고서야 명색이 대선배이자 네 애비인 나를 그런 허섭스레기 같은 논문으로 엿 먹일 리가 없어! …알고는 있는 거냐? 네가 떠나자 놈은 자기 후배이자 네 후배이기도 한 황 박사와 붙어먹었어! 그런 엉덩이가 가벼운 놈에게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린 거냐?”

“아…빠… 나…아파…제발…!”

서희의 얼굴에서는 어느새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제야 학과장은 황급히 서희의 손을 풀어주었다. 피가 안 통할 정도로 강하게 쥐어진 서희의 손은 파랗게 변색되어 있었다. 서희는 손을 뒤로 숨기고는 의연한 얼굴로 차분히 말했다.


“난 시호의 재능에 반했고, 지금도 그 재능을 사랑해. 그래서 시호를 지켜주고 싶었고, 내가 없을 때 시호를 지켜준 빛나에겐 미안함과 감사한 마음뿐이야.”


그 말을 들은 학과장은 테이저건을 맞은 듯 그 자리에서 한 뼘도 움직이지 못한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눈앞의 서희의 모습이 흐려지더니 이내 자신과 첫날밤을 치르던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평생 잊지 못할, 진정 연모하던 사람을 머릿속에 그리던 그의 한 마디도.     


-전 그이의 재능에 반했고, 지금도 그 재능을 사랑해요. 그래서 그를 평생 지켜주고 싶었어요. …당신은 친구면서, 왜 그를 지켜주지 않았죠?     


“…넌 내 딸이야.”

학과장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서희는 미처 듣지 못했다. “…뭐라고 했어?”

“넌 내 딸이야! 내 목숨보다도 귀한 하나뿐인 가족이라고! 널 위해 난 어떤 오명도 감수하며 이 자리까지 올라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다! 근데 너는… 한 번… 단 한 번이라도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지도 못하는 거냐!”

60대 년의 울먹이는 소리가 온 저택에 쩌렁쩌렁 울렸다. 서희는 다리에 힘이 풀리려는 것을 간신히 정신을 다잡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건 더 이상 위엄 있는 Y대 국문학과장이자 국내 유수의 문인협회의 중책이자 이서희의 다정한 아빠가 아닌, 영문 모를 부의 감정으로 얼룩진 채 승인을 갈구하는 추레한 년 이문기였다.

다음 순간 학과장은 자신의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는 사색이 파래져서는 잠옷 차림으로 서둘러 방 밖을 나갔다. 서희는 그제야 털썩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열린 방문으로 들어온 빛에 차츰차츰 방 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책상과 바닥 여기저기에 책과 종이가 어지러이 흩뜨려져 있었다. 창문에는 손자국과 새똥 자국이 조금도 닦이지 않은 채 뒤덮여 있었다. 비서가 있을 땐 결코 본 적이 없는 광경이었다. 학과장이 자신의 방은 비서든 서희든 절대 건드리지 말라며 결벽적일 정도로 손수 청결을 유지했었으니.

“우리 아빠… 많이 아프구나…”

부친에 대한 측은함에 서희는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이날 서희는 자신의 선택이 주변에게 준 상처가 상정 이상임을 다시금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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