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뉘엿뉘엿 기울 무렵, 하천가의 제방은 아무도 없었다. “오, 타이밍 좋고.” 소년은 비포장된 길에서 조심스럽게 비탈을 내려와 비교적 완만한 턱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방에서 원고지 뭉치를 꺼낸 소년은 다리 위에 가방을 받치고는 원고지를 올려놓았다. 작성 중이던 지면까지 넘기고는 교복 상의 주머니에서 연필을 꺼냈다.
학교에서는 여자 두 명이 수시로 귀찮게 굴어 좀처럼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한 명은 꼭 뒤통수를 때리며 나타나선 학교 공부를 게을리 하면 안 된다고 잔소리를 했고, 다른 한 명은 앞으로의 내용을 떠올리고자 으슥한 곳에서 니코틴의 힘을 빌리려 하면 어떻게든 자신을 찾아내선 담배의 해악에 대해 일장연설을 해 끝내 다시 주머니에 넣게 만들었다.
두 사람을 생각하다 보니 벌써부터 뒷골이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초가을에 접어들고서 해가 기울면 슬슬 하복 차림으론 몸이 쌀쌀한 탓도 있을 것이다. 소년은 바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바닥을 툭툭 쳐 한 개비를 꺼냈다. 입에 물고 불을 붙여 한 모금을 빨자 시야가 아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고등학교 입학 이후에는 사실상 이 시간이 등교 시간 외에 혼자서 몰래 일탈을 즐길 수 있는 유이한 시간이 되어서 그런지, 갈증 끝에 먹는 물 한 잔처럼 에쎄 아이스 한 모금이 무척이나 달게 느껴졌다.
변변한 오락실도 없는 동네에서 소년은 집에 오락기는 고사하고 TV도 없는, 반에서 유일한 학생이었다. 그렇다고 축구나 공놀이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니 그야말로 또래 남자애들과 접점이랄 게 없었다. 그저 번역가인 아버지의 서재에서 책을 꺼내다 읽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고, 그러다가 소설을 쓰기 시작하며 취미를 하나 더 늘렸다. 중학교 3학년이 되던 어느 날, 아버지가 외출한 틈을 타 재떨이에 있던 덜 피운 꽁초를 피운 것을 시작으로, 그의 담배 서랍에서 주기적으로 한 갑씩 훔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소년의 가장 위험하고 일탈적인 취미가 생겼다.
좁은 동네에서는 중학교 친구가 고등학교 친구가 될 확률이 높았고, 이는 달리 말하면 중학교 때 외톨이는 고등학교 때도 외톨이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었다. 또래 평균보다 머리 하나만큼 큰 키와 옆을 지날 때마다 은은하게 풍기는 담배 냄새 덕분인지 괴롭힘을 당하는 일은 없었으나 친근하게 다가오는 일도 없었다. 중학교 때부터 알던 평지풍파 마이페이스 한 사람과 고등학교 2학년 때 알게 된 요조숙녀 한 사람을 제외하면 말이다.
학교에서 우등생으로도 소문이 자자한 두 미소녀가 옆에 붙어 다닌다는 사실은 소년에게는 오히려 혼자만의 시간이 줄어드는 불만 요소에 가까웠다. 두 사람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학교에 있을 때 단 오 분도 혼자 있을 시간을 주지 않는 걸 달가워할 순 없었다. 그러니 오늘도 이곳에서 글씨가 안 보일 때까지 원고를 쓰다가 갈 것이다. 어차피 소년의 아버지는 그가 집에 일찍 돌아오든 늦게 돌아오든 별 신경도 안 쓸 것이다.
한창 열중하고 있는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뒤통수에 알싸한 충격을 느낀 소년이 돌아보자 교복을 입은 작은 체구의 소녀가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또 담배 피우며 딴 짓하고 있는 거야?”
“아잇!… 상관하지 마! 하루 이틀 피운 것도 아닌데 언제까지 그렇게 타박할래?”
소년은 얼얼한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항변했다.
“그리고, 너처럼 위험한 짓은 안 하거든? 고2가 오토바이라니 제정신이야? 오늘은 또 왜 안 타고 왔데?”
“미안한데, 나 생일 지나서 125cc 미만 스쿠터는 몰 수 있거든? 그리고 너 잡으러 오는데 스쿠터 엔진 소리를 내며 오겠니? 너 도망가게.”
소녀의 말에 소년은 반박할 수 없었다. 굳이 비포장된 하천 길을 고른 건 출력이 낮은 스쿠터로는 속력을 낼 수 없는데다가 하천 쪽으로 내려가면 쫓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번에 본 모의고사 결과표 오늘 나왔어.”
“아, 그래? 혹시 챙겨준 거야?”
소녀는 책가방에서 결과표를 꺼내 소년의 코앞에 들이밀며 떽떽거렸다.
“너, 이번 모의고사 330점도 못 맞았어! 그래놓고 무슨 배짱으로 공부도 안 하고 여기서 원고지나 붙들고 있어? 대학 안 갈 거야?”
“야, 왜 내 걸 네 마음대로 봐! 그리고 누가 대학 안 간대? C대 국문과 갈 점수는 방어하고 있으니까 그만 좀 쪼아. 정신 산만하게 진짜…”
결과표를 확 채 가며 소년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소녀는 입에서 “에휴…” 하는 소리를 내며 옆에 털썩 앉았다.
“나는 뭐 시간 남아돌아서 너 잡으러 다니는 줄 알아? 해야 할 집안일도 산더미인데…”
소녀가 어쩐지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있어 소년은 살짝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내 알 바냐.’ 하고 넘기며 다시 지면에 눈을 가져가려 할 때였다. 소녀는 툭 던지듯 말했다.
“난 이번에도 380점대 지켰어. 세상 일 어찌 될지 모르는데 이 정도는 유지해야지.”
“축하해. 춘부장께서도 학교에서 딸 얼굴 보실 수 있어 좋아하시겠네.”
“우리 아빠는 딱히 그런 거로 좋아하는 사람 아니거든?”
소년의 대답을 소녀는 한심하다는 듯 받아쳤다. 소녀의 아버지는 Y대학교 물리학과의 전임교수였다. 그리고 소녀의 대입 목표는 Y대학교 물리학과였다. 수학과 물리학을 좋아하는 소녀는 그 두 학문만큼은 이미 고등학생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시골 학교 교사 수준을 상회하는 안목을 지닌 소년과 소녀의 담임은 그에게 ‘한번 유럽이나 일본 쪽 학부 진학을 생각해 보라’는 식으로 진지하게 권유하기도 했지만, 소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소년은 내심 헤어질 일이 없어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겉으로는 마음에도 없는 말만 남발했다.
“나 같으면 외국어 되겠다, 전공 실력도 있겠다, 집에 돈도 있겠다, 굳이 이 나라에서 공부하려고 수능이나 붙들고 있지 않을 텐데. 너도 참 이해할 수 없다.”
“바다보다 깊고 넓은 여자의 마음을 이해하려 들지 마렴.”
그렇게 말하고 소녀는 무릎을 세우고 팔뚝에 얼굴을 묻은 채 흘러가는 시냇물을 무료한 듯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잠시 얼음.” 이라 말하며 서서히 소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기 시작했다. 소년은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면서도 몸을 피하거나 비트는 일 없이 순순히 어깨를 내 주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일단은 그 나잇대 소년다운 일말의 허세는 부려 보았다.
“피, 피곤하면 집에 가서 누워. 여기서 자면 입 돌아가.”
“…”
소녀는 대답 없이 한동안 소년의 어깨에 기댄 채 있었다. 반대편 뭍에 새 한 쌍이 서로의 깃털을 골라 주고 있었다. 그를 본 소녀는 넌지시 말했다.
“우리 동네에 두루미가 있었네. 예쁘다… 쟤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죽을 때까지 그렇게 둘이서 끝나지 않는 여행을 하겠지….”
“…”
“시호야. 일 년만 더 열심히 하자, 응?”
“…”
“난 네가 내 옆을 지켜줬으면 좋겠는데, 넌 아니야?”
“진아야…”
소녀가 말하는 내내 대꾸가 없던 소년이 고개를 돌려 소녀를 쳐다보았다. 불과 10cm 앞에 있는 소년의 진지한 눈빛에 소녀는 낯간지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피했다. 그러자 소년은 두 손바닥으로 소녀의 머리를 잡았다. “어… 저기…” 소년에게 시야가 고정된 소녀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어버버할 뿐이었다. 잠시 후, 소녀가 침을 꼴깍 삼키고는 살며시 눈을 감으려 할 때였다.
소년은 소녀의 머리를 하천 맞은편으로 돌려 방금 전 ‘두루미’ 한 쌍을 보게 했다. 그리고는 웃음을 참는 목소리로 귀에 속삭였다.
“저건 Ardea cinerea란 학명을 가진 새로 한국에선 왜가리 내지 으악새라고 불러. 잘 봐, 정수리가 하얗고 목에 세로무늬가 있지?”
“…!”
“그리고 왜가리는 일 년마다 배우자를 갈아치워. 실로 할리우드 스타일이라 할 수 있지. …물리랑 수학만 너무 열심히 해서 이런 건 잘 모르는구나?”
“으으…!”
“괜찮아~! 이런 것까지 잘 알면 너무 인간미가 없지 않겠어? 가끔 이렇게 터지는 허당 끼가 또 이진아의 매력 아니겠…”
“이 바보 등신아!”
소녀가 있는 힘껏 어깨를 밀친 탓에 소년은 발랑 뒤로 나자빠졌다. 소년의 무릎 위에 있던 원고지 뭉치도 덩달아 흩어져버렸다. “아, 뭐하는 거야!” 소년은 역정을 내며 흩어진 원고지를 주우며 기어 다녔다.
화가 안 풀린 소녀는 팔짱을 낀 채 소년의 등에 대고 말했다.
“일 년만 원고지 내려놓고 입시 공부하라는 말이 그렇게 고까워? 누군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물리학을 공부하든 소설을 쓰든 학벌로 평가받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난 딱히 상관없어. 애당초 소설은 대학교 안 가도 쓸 수 있는 거고.”
“물리학은 아닌 줄 알아? 좀 못 이기는 척 따라 주면 안 돼? 나하고 같이 캠퍼스 활보하는 게 싫어?”
“애초에 무리니까 싫고 좋고를 따지는 게 무의미해.”
“왜 벌써부터 무리라고 단정 짓는데…!”
“안 그래도 거기 국문과가 전통적으로 강세여서 입결도 높은데 내 점수로는 인문계열에서 제일 낮은 학과도 못 들어가. 어찌어찌 조금이라도 올려서 관심 없는 전공 배워봤자 사 년 동안 정신만 괴로울 뿐이고.”
“그건…”
“내년에 삼학년 되면 재수생들도 모의고사를 볼 거고 그럼 점수 올리기 더 힘들어질 거야. 집 근처 C대도 아슬아슬해질 거고. 난 그런 현실을 받아들였으니까, 괜한 무리했다가 좌절로 끝나고 싶진 않아. 너도 받아들여.”
소년의 단호한 태도에 소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굴렀다. 소년은 한번 물끄러미 돌아보고는 다시 원고를 줍는 데 열중했다. 소년이 마지막 한 장을 줍고 일어서서 흙을 탈탈 털고 있을 때였다. 소년의 뒤에 다가온 소녀가 주저주저하며 쥐어짜듯 말했다.
“그, 그럼 이렇게 해! 만약 네가 나하고 같이 학교를 다니게 된다면 상을 줄게!”
“어휴, 끈질기네. 네가 나한테 무슨 상을 줄 수 있다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년의 앞에 선 소녀는, 소년의 멱살을 잡아당겨 눈높이를 맞추고는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틀어 소년과 얼굴을 직각으로 맞댄 채 혀를 내밀어 소년의 입 안을 서툴게 애무했다. 뒤통수까지 관통하는 듯한 달콤한 쾌락에 소년은 거부하는 일 없이 그대로 소녀에게 몸을 맡겼다. 이윽고 소년 쪽에서도 반격을 개시, 우월한 피지컬로 소녀의 목젖까지 몇 번이고 혀끝으로 왕복했다. 몇 분이나 그러고 있었을까, 먼저 입술을 뗀 건 소녀 쪽이었다. 소녀와 소년의 입술 사이엔 걸쭉한 침이 다리처럼 늘어졌다.
둘 다 쾌락에 온몸이 늘어졌지만 더욱 진이 빠진 건 소녀 쪽이어서 그대로 소년의 품으로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소년만 들을 수 있게 작게 속삭였다. 흥분으로 소년의 동공이 미처 줄어들지 못한 그때였다.
“지금 둘이 뭐하는 거야아아!!!!”
두 사람이 비탈 위를 올려다보자 교복 차림에 늘씬한 키의 소녀가 못 볼 걸 본 마냥 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다른 손으로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스쿠터도 자전거 보관소에 내버려둔 채 두 사람 다 말없이 사라진 걸 온 동네를 떠돌며 겨우 찾았더니 아무도 없는 하천가에서 설왕설래나 하고 있으면 그야 소리를 지를 만했다. 소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는 두 사람을 향해 씩씩거리며 내려갔다.
“거기 딱 기다려. 오늘 두 사람 앉혀 놓고 해 질 때까지 설교할 테니까!”
“아, 큰일 났다! 너 때문이니까 빛나 좀 달래 줘! 그럼 난 이만!”
소년의 등을 툭 밀며 소녀는 징검다리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야, 이진아! 같이 즐겨 놓고 혼자 도망가기야?”
“…방금 한 약속이나 잊지 마! 그럼 내일 보자!”
“같이 즐겨어어!? 약속은 또 뭐야아아!! 좀 학생답게 절도 있게 사귀란 말이야!!”
오던 방향을 꺾어 도주자를 쫓으려는 소녀의 몸을 소년은 간신히 붙들었다. 펄펄 뛰는 소녀를 어르고 달래며 소년은 소녀가 속삭인 말을 떠올렸다.
-이 다음은 같이 손잡고 입학하는 날 하는 거야, 알았지?
이듬해 소녀가 봄을 맞지 못하고 뇌염으로 세상을 뜨기 사 개월 전의 어느 날이었다.
5월을 맞기 전 마지막 토요일 오후 8시 50분, 홍대입구역 9번 출구 앞. 양복 차림의 시호는 벽에 기댄 채 문고본을 읽고 있었다. 책 제목은 시마오 도시오 작가의 『죽음의 가시』. 일본의 현대 소설가로 초현실주의surrealism적인 문체로 컬트적인 팬층을 보유한 시마오의 단편들을 엮은 작품으로, 히스테리컬한 아내의 집착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작가인 화자의 모습이 퍽 인상적이라고 시호가 생각하던 그때였다.
“선생님!”
시호가 책에서 눈을 떼자 검은 양복 차림의 지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 든든히 먹고 왔죠? 오늘 밤엔 내내 서 있을 거예요. 방방 뛰기도 할 거고.”
“걱정 마세요. 체력은 자신 있어요.”
시호는 지수의 복장을 위아래로 지그시 보았다. 지금까지 몇 번인가 사복 차림을 본 적 있지만, 오늘 갈 곳의 성격을 생각하면 제일 안 어울리는 드레스코드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시호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고, 적어도 동행인으로선 이보다 어울릴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 드레스코드 아주 마음에 들어요. 역시 우린 최고의 파트너예요.”
시호는 지수의 오른쪽에 서서 왼쪽 팔목을 살짝 벌렸다.
“선생님도 멋있어요.”
지수는 오른팔로 시호의 왼팔에 팔짱을 꼈다. 두 사람은 홍대 거리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시호는 간밤에 루나가 그려 준 약도를 슬며시 꺼내 길을 다시 확인했다. 공연 시작은 10시부터니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지만 적어도 이십 분 전부터 분장하랴 점검하랴 정신이 없을 테니 차분히 지수를 소개하려면 다른 데 한눈 팔 새가 없었다.
라이브 하우스 밀키웨이의 무대 옆 대기실, 서로 꾸며주기 여념이 없는 윤아와 세미를 대신해 은수는 거울 앞에 앉은 루나의 분장을 고쳐 주고 있었다. 루나는 투 사이드 업에 파란 브릿지 염색을 한 자신의 머리가 영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도 복장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루나가 목 아래로 신경을 안 쓰려고 오만상을 짓는 걸 본 은수는 “포기해, 이것아. 예쁘기만 하구만.” 하고 등짝을 탁 쳤다.
이날 오전 최종 연습 때 루나는 긴팔 가죽 잠바와 가죽 바지를 들고 왔었다. 시작 전 무대 의상으로 갈아입을 때 하얀 티셔츠 위에 잠바를 걸치려는 루나에게 은수는 제동을 걸었다.
“너 혼자 꽁꽁 싸매면 어떡해? 집에 크롭티 없어?”
“…없는데? 급한 대로 하나 사올까?”
그러자 그를 보고 있던 윤아가 충격적인 제안을 했다.
“그럴 필요 있어? 안에 아무 것도 안 입고 단추 하나만 잠그면 되지. 우리도 이제 네 명인데 두 명은 슴골 까는 게 보기 좋지 않아?”
“오, 황윤아 나이스 아이디어!”
“나이스는 무슨! 절대 안 돼!”
루나는 한사코 말렸지만 은수가 “민주적으로 거수로 결정하자”고 제안해 버렸고, 결과는 3:1로 루나의 노출이 결정되었다. 세미는 루나의 간곡한 눈빛에도 불구하고 생글생글 웃으며 전자에 손을 들었다. “아이, 너무 싫어하지 마~ 분명 인기 많아질 걸?” 세미는 루나의 원망 어린 시선을 회피하며 놀리듯이 말했다.
“오늘 아저씨도 올 텐데 창피해서 어떡해…”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루나는 울상을 지으며 볼멘소리를 계속하고 있었다. “합죽이.” 은수는 검붉은 립스틱을 루나의 입술에 갖다 대며 말했다.
“잘 됐네. 그동안 어린애로만 봤을 텐데 오늘 부왁 하고 코피 한번 내 주자고.”
루나는 가슴팍에 하나 잠근 단추 부근을 만지작거렸다. 가슴골 같은 건 생겨나지 않았다. 별로 크지 않은 가슴인데 모아 주는 것도 없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헐렁한 잠바 안에 아무 것도 안 입은 채 단추 너머를 상상하게 유도하는 것, 그리고 시원하게 배가 노출된 것만으로 충분히 에로틱한 복장이었다.
“근데 삼십대 남자가 저 모습을 보고 코피를 흘리면 위험한 취향 아냐?”
“세미야, 비주얼은 크게 중요하지 않아. 정말 자극적인 건 띠동갑인 남자에게 여자로 보이고픈 소녀의 갸륵한 몸부림이거든.”
“그런 거 아니거든!”
윤아와 세미가 서로 속삭이는 소리에 루나는 가볍게 딴죽을 걸었다. 시호의 얼굴을 한번 떠올리고는 루나는 심호흡을 했다.
‘하긴, 그 더럽게 둔감한 사람한텐 이런 자극이라도 줘 봐야겠지.’
루나의 눈빛에 전의가 깃드는 것을 은수는 놓치지 않았다. 은수는 피식 웃으며 분장을 마무리하고는 루나의 얼굴 옆에 자신의 얼굴을 나란히 대며 말했다.
“그나저나 그 잠바 두꺼워?”
“아니, 애초에 의상 용도라서 방한 기능은 없다시피 한 얇은 건데…”
“잘 됐네. 공연 중에 쓸리거나 텐션 올라가면 뭐… 알지?”
“미쳐가지고 진짜.”
루나는 쿵 하고 가볍게 박치기를 하며 은수의 성희롱을 제재했다. 그때였다. 대기실 문이 열리며 이주가 고개를 내밀었다.
“루나야, 손님 왔어!”
루나와 은수가 돌아보는 동시에 이주의 뒤에서 시호와 지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앗, 아저씨 오셨어요?” “어서 오세요, 아저씨! 여기 봐 봐요! 언니 오늘 예쁘죠?” 윤아와 세미가 일어나 시호를 맞는 순간, 루나와 은수처럼 그들도 지수를 보고 일순 동작이 멈춰버렸다. “그럼 얘기들 하세요, 레인드롭스는 준비 다 되면 바로 무대로 올라가고.” 이주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문을 닫았다.
“오오, 다들 멋있는데요! 저번보다 더 기합이 들어간 것 같아요!”
시호는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모두의 시선이 지수를 향해 있는 걸 보고 “아차…!” 하며 이마를 쳤다.
“이쪽은 제 업무 관련 동료예요. 저한테 필요한 것들을 옆에서 서포트해주는 수족과도 같은 분이죠. 자, 지수 씨.”
“신지수라고 합니다. 오늘 공연 정말 기대하고 왔어요. 열심히 하세요!”
지수가 꾸벅 인사하자 은수와 윤아와 세미도 “아, 예…” “좋은 시간 되세요…” 하며 제각각 쭈뼛쭈뼛 인사했다. 상체를 숙인 지수에게서는 루나가 아주 잘 아는 향기가 나고 있었다. 루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시호는 루나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주며 말했다.
“한루나의 음악을 다시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루나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 시호의 눈길을 살폈다. 기대와 환희에 찬 그의 눈빛은 오직 루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루나는 문득 그들이 처음 제대로 마주친 날을 떠올리고는 어느새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아, 참… 이 사람은 애초에 내 음악의 팬이었지. …난 뭘 기대한 거지….’
루나의 눈에서 빛이 사라지려는 찰나, 은수가 시호의 팔을 덥석 붙들었다.
“기회가 없어서 이제야 고맙단 말을 하네요. 루나 덕분에 우리의 음악은 보다 완벽해졌어요. …고마워요.”
은수는 시호를 올려다보며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낯간지러운 말을 했다. “하하…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예상치 못한 은수의 행동에 시호는 얼굴을 긁적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오늘 뒤풀이에 합석해요. 알았죠?”
은수의 눈빛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시호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지수를 돌아보았다. “그건 반가운 얘기지만, 보다시피 오늘은 일행이 있어서… 아야야야!”
말을 마치기도 전에 시호는 자신의 팔을 붙든 은수의 악력이 거세지는 걸 느꼈다. 한편 시호의 시야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 윤아와 세미는 안 그래도 스모키 화장으로 진해진 이목구비로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지수를 노려보았다. 상황을 눈치 챈 지수는 시호의 어깨를 쓸며 말했다.
“기껏 권유해 주셨는데 저 때문에 거절하는 건 경우가 아닌 것 같아요. 전 혼자 집에 들어갈 테니까 선생님은 마음껏 즐기세요.”
“그치만…”
“그렇게 하세요. 그래야 저도 마음이 편해요.”
시호는 난처한 듯 눈가를 찡그렸다. “…미안해요.” 지수는 온화한 표정으로 시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은수는 시호의 팔을 놓고는 윤아와 세미를 보며 말했다.
“좋아, 우리들은 먼저 올라가서 사운드 체크하자!”
““오케이!!””
윤아와 세미는 곧바로 무대로 통하는 문을 열고 뛰어올라갔다. 관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대기실까지 들렸다. 은수는 루나의 어깨를 탁 쳐 주고는 두 사람 뒤를 따라갔다. 루나는 은수의 뒷모습을 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겨우 참아내고는 시호를 돌아보았다.
“오늘 와 줘서 고마워요. 근데 한 가지만 정정할게요.”
어리둥절해 하는 시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루나는 말했다.
“한루나의 음악이 아니에요…, 록 밴드 레인드롭스의 음악이에요.”
시호는 잠시 멍하니 있더니, 입가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는 지수를 보며 공손히 목례하고는 뒤돌아서서 문 너머로 걸어갔다.
무대에 오르자 세 사람은 이미 제 위치에서 각자의 악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은수는 입을 가리고 루나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괜찮아?”
“…문제없어.”
루나의 비장한 얼굴을 본 은수는 씨익 웃었다. 두 사람을 본 윤아는 객석을 보며 마이크를 켰다.
“아, 아, …오늘 밤 라이브 하우스 밀키웨이를 찾아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록 밴드 레인드롭스입니다, 반갑습니다!”
윤아의 MC에 관객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루나는 양 뺨을 손바닥으로 탁 때렸다.
‘그래, 지금은 우리의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에게, 그리고 내 오랜 팬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자.’
“원, 투, 쓰리, 포!”
‘아저씨, 들려줄게… 나의…, 아니, 우리의 음악을…!’
새벽 1시의 밀키웨이에는 단 여섯 사람이 남아 다 같이 청소를 끝내고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다. 레인드롭스 4인은 앵콜용 맨투맨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은수가 맥주잔을 들고 건배를 유도하자 나머지 레인드롭스 멤버들과 이주 그리고 시호가 따라서 잔을 들었다.
“완전체 레인드롭스의 탄생을 기념하며, 건배!”
“건배!”
시호는 모두와, 그리고 옆자리의 루나와 잔을 부딪치고는 기분 좋게 맥주를 들이켰다. 은수는 이주와, 윤아는 세미와 각각 잔을 마주 댔다. “자, 여기 집중!” 별안간 윤아는 모두의 주의를 끌더니 방금 빈 맥주병을 테이블에 눕혔다.
“술자리에서 이거 안 하면 섭하죠?”
“와, 어떻게 이건 옛날이랑 달라진 게 없죠?”
학부 시절 기억이 떠오른 시호는 진저리를 쳤다.
“근데 세미한테 걸리면 어쩌게? 벌주는 줄 수 없잖아.”
루나는 혼자서 앞에 쿨피스와 콜라를 놓고 있는 세미를 보며 말했다. 윤아는 씨익 웃었다.
“말 꺼낸 사람이 마셔 주면 되지 않을까?”
“나도 찬성!” “나도!”
윤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은수와 이주는 곧바로 손을 들며 외쳤다. “아니, 이건 아니지! 난 오늘 의상도 센 거 입었는데!” 루나는 황급히 저항했지만 이번에도 세미는 루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손을 들었다. “세미야… 내가 살쾡이 새끼를 키웠구나.”
“어허, 만만한 막내 들볶기 없기!”
윤아는 낄낄거리며 위스키와 맥주와 소주를 저그잔에 부어 폭탄주를 만들었다.
“자,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세미의 벌주는 루나 언니가 마시기로 했으니까, 세미야. 침묵은 금이다?”
“그런 게 어딨어! 흑장미는 한 번만 허용이야. 그 뒤는 걸리면 무조건 말해! 알았지!”
은수는 세미를 보며 으름장을 놓았다. 시호는 루나를 슬쩍 보고 미소를 지었다. 이주는 이 모든 것을 그저 자애로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윤아는 병을 쥐고는 가볍게 손목에 스냅을 주며 놓았다.
윤아의 손을 떠난 병이 뱅글뱅글 돌더니 서서히 멈추었다. 주둥이는 시호를 가리키고 있었다. 은수와 윤아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고, 세미는 관심 없는 듯 고개를 숙인 채 과자를 집어먹고 있었고, 루나는 긴장한 채 침을 꿀꺽 삼켰다. 그동안 자신이 경험한 윤아는 은수에 비해 남의 말을 들을 줄 알지만 이런 놀이에서 뒤가 없는 건 오히려 더했다.
“자, 우리의 헤드헌터 아저씨. 질문 들어갑니다.”
“헤드헌터 아닌데…”
“이 중에 여자로서 반한 사람이 있다, 없다?”
“윤아야아아아!”
시호의 정정은 가볍게 무시한 채 날린 윤아의 폭탄 질문에 루나는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시호의 눈에는 일순 당황한 기색이 비쳤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은 시호는 “있다.” 하고 대답했다.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뜬 루나와 세미를 제외하면 나머지 두 명은 “흐응…” “…솔직하네.” 식으로 태연한 반응이었다.
“으응, 그렇구나! 아, 누굴까? 여기 전부 미녀들밖에 없어서 감이 안 잡히네! 누군지는 다음번에 걸리면 한 명씩 까 보죠!”
윤아는 실실 웃으며 병에 손을 댔다. 그때였다. 시호가 빠르게 손을 내밀어 윤아의 손을 움켜쥐었다. 윤아는 순간 “힉…!” 하고 입에서 소리를 냈다. 시호는 진지한 눈을 하고 윤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윤아는 척 봐도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참, 아저씨가 돌릴 차례죠? 나도 참…”
“너야.” 시호는 얼굴색 하나 안 바꾸고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윤아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손을 빼려 했지만 시호는 놔 주지 않았다. 좌중은 긴장한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 그렇게 속살을 다 보여주면서 끼를 부리는데 남자들이라면 열이면 열 똑같은 생각을 한다고. ‘저 여자, 침대에선 어떨까?’하고.”
“사, 살려줘!”
윤아의 목소리는 반쯤 울먹이고 있었다. 세미가 벌떡 일어난 와중에 이주는 여전히 태연하게 지켜보고만 있었고, 은수는 재미없다는 듯 하품을 하며 말했다.
“아저씨, 장난 그만 하자. 슬슬 뇌절이다.”
“그러게요? 그만 하죠.”
시호가 원래의 목소리로 분위기를 일신하며 손을 놔 주자 윤아는 황급히 손을 빼고 자리에 앉아 몸을 움츠렸다. 세미도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이주는 시호를 보고는 벌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선생님, 거짓말하셨으니까 드셔야죠.”
“그렇네요. 그럼…”
시호는 주저 없이 저그잔을 들고 벌컥벌컥 비우기 시작했다. 루나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시호를 바라보았다. 잔을 한 번에 비운 시호는 곧장 술기운이 올라왔는지 눈이 풀린 채 고개를 꾸벅대더니 이내 쿵 하고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저씨! 괜찮아요? 정신 차려 봐요!”
루나는 다급히 시호의 몸을 흔들며 상태를 살폈다. 이주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걱정 마, 걱정 마. 아무리 술찌여도 그 정도론 사람 안 죽어.”
“저 아저씨 방금 전에 왜 그런 거야!? 무서워 죽는 줄 알았네!”
그제야 윤아는 시호를 향해 삿대질하며 방금 전 일을 호소했다. 은수는 오징어를 씹으며 말했다.
“네가 잘못한 거야. 너도 끝까지 장난에 어울렸어야지.”
“장난이 아니었으면 어떡하라고? 진짜 날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으면 큰일 나는 거잖아!”
“윤아야. 남자들은 대개 그런 눈으로 널 볼 거야.”
루나의 말에 순간 윤아는 자신의 귀를 믿지 못했다. “…언니, 그거 진심이야?”
“너도 무대 위에서 느끼잖아. 네 모습은 남자들에게 어마어마한 섹스어필을 전달한다고. 그런 네가 그런 장난까지 치면 도발의 끝이고. 막연하게 ‘이 사람은 나한테 감히 들이대지 못 하겠지’ 생각하며 성적으로 곤란한 질문을 하는 건 교만한 짓일 뿐이야.”
“언니,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 돼? 내가 정말 이 아저씨한테 끼라도 부리려고 그런 장난을 쳤겠냐고!”
흥분한 윤아는 루나로서는 거의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애초에 여자에게 초대받은 남자가 다른 여자를 끼고 나타나는 건 무슨 똥 매너야? 알고는 있는 거야? 언니가 이 아저씨 좋…”
“그만. 그 이상 하면 나 화낼 거야.”
루나는 노기 띤 목소리로 윤아를 진압하다시피 침묵시켰다. 혹시라도 옆의 시호가 들을까봐 조마조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차라리 타인의 입을 빌려서라도 전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괜히 윤아에게 화풀이를 한 것 같아 심사가 안 좋았다.
공연은 무사히 마쳤지만 앵콜까지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오자마자 본 것은 지수가 홀로 귀가하는 것을 못내 걱정하는 시호의 모습이었다. ‘대체 그 사람과 어떤 관계냐’, ‘왜 자신과 같은 향수 냄새가 그 사람에게서 나는 거냐’는 질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이내 자신 역시 시호와 팬과 음악가 그리고 이웃 주민 외에 내세울 관계가 없다는 걸 환기하고는 속에 쓴물이 올라왔다.
이주가 테이블을 똑똑 두드리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어휴, 이건 뭐 술 게임하며 놀 분위기가 아니네. 내가 이 얘길 아껴 두길 잘했지.”
“…?”
모두의 시선이 이주에게 집중되었다. 이주는 “흠, 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이야기를 꺼냈다.
“6월 초순에 수원인디퍼레이드 본선이 열리는 거 알고 있지? 아, 루나는 아직 인디퍼레이드가 뭔지 모르지?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름 그대로 국내 인디 밴드들이 모여 경합을 벌이는 거야.”
“그거랑 우리가 무슨 상관이야? 우린 3월에야 네 명이 모여 데뷔 공연하고 실질적으로는 어제 데뷔한 거나 다름없는데.”
은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윤아와 루나는 어느새 이주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상관이 있지. 예선 합격 팀인데, 본선 안 갈 거야?”
“뭐어어어!?!?!?”
은수와 윤아가 놀라 자빠질 듯 소리를 질렀다. 세미의 얼굴에도 놀라움과 당혹감이 비쳤다. 그리고 놀라움보다 당혹감이 더 짙게 드리운 것을 루나는 놓치지 않았다. 은수는 이주의 팔을 붙들고 닦달하듯 물었다.
“왜, 왜 우리가 예선 합격인데? 난 응모한 적이 없는데? 언니가 해준 거야? 대체 언제?”
“루나가 구원 투수로 투입되어 처음으로 같이 한 공연하고 너희들 연습하는 거 적당히 찍어서 보냈더니 오늘 통지가 왔어. 너희들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말 안 하고 있었지.”
“언니 고마워! 언닌 정말 우리 은인이야!”
은수와 윤아가 이주의 어깨를 붙들고 기뻐서 방방 뛰는 와중에도 세미는 주먹을 꾹 쥔 채 입을 다물고 앉아 있었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세미를 바라보던 루나는 살며시 다가가 손을 꼭 쥐어 주었다. 세미가 자신을 돌아보자 루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서 뭐해? 우리가 본선에 진출했다니까? 그날 유수 인터넷 방송 업체들도 라이브 중계하는 거야! 레인드롭스를 세상에 알릴 수 있는 기회라고!”
윤아가 두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주는 세미의 괴로워하는 표정을 보자 “전달도 했겠다, 난 먼저 퇴근할게. 알아서 놀다가 문단속 잘 하고 가. …네 사람이면 저 아저씨 어떻게든 들고 갈 수 있겠지?” 하고는 열쇠를 은수에게 건네고 도망치듯 떠나버렸다.
은수는 그제야 세미의 심상찮은 모습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강세미…,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파?”
세미는 눈을 감고 후우 하고 심호흡을 했다. 이윽고 결심이 선 듯 눈을 번쩍 뜬 세미는 멤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언니들, 나 할 얘기가 있어.”
이주를 배웅하고 돌아온 윤아가 어리둥절해하며 다가왔다. 루나는 말없이 애꿎은 테이블을 노려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은수는 걱정 반 의아함 반으로 세미를 바라보았다.
“나, 입시 준비해서 음대 가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