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프랑스 너무 좋다! 또 프랑스 가요!
스위스 제네바로 이사를 온 뒤로 우리는 한동안 자동차 없이 생활을 하였다. 뭔가 큰 지출을 하기에는 아직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 지인들은 차가 있으면 프랑스로 장 보러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였는데, 당시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뭐 굳이 장 보러 프랑스까지 국경을 넘어가야 할까? 생각했었다. 물론 프랑스라 해봐야 제네바에서는 어느 위치에서 출발하든 10~15km 정도만 달리면 도착할 수 있는 옆 동네다. 제네바는 불어를 사용하기에 프랑스로 넘어가도 불편함이 없다. 물론 나는 당시 불어를 못 했었다. 하지만 말을 못 했기에 극도로 발달하게 된 나의 눈치는 이제 백 단을 넘어 초고수의 반열에 올라가고 있었기에 당시 프랑스에 가더라도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던 중 지인의 행정적인 도움을 받아 중고차를 구입하게 되었다. 우리의 첫 차는 폭스바겐 골프 왜건이었다. 제네바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 세탁기와 냉장고를 사러 매장에 갔다가 배송비를 보고는 당시 렌트한 차에 싣고 트렁크를 열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 꼭 차는 왜건으로 사겠다 마음을 먹었는데. 다행히도 그 기억을 잊지 않고 웬만한 식탁까지는 실을 수 있는 놈으로 골랐다. (2화 참조)
자 이제 프랑스로 가볼 차례다. 얼마나 차이가 나길래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지? 딸을 데리고 그 유명한 Carrefour와 E.Leclerc를 방문하여 주자창에 들어갔는데 여기가 스위스인지 프랑스인지 구분이 안 간다. 스위스 차량 번호판이 반, 프랑스 차량 번호판이 반이다. 주차를 한 후에 들어갔다. 신세계를 보는 듯했다. 큰 차이가 없는 제품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20%에서 많게는 반값에 판매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특히 딸이 좋아하는 과자와 젤리, 사탕 같은 달달구리는 차이가 꽤 났다. 예시를 하나 소개하자면, 보통 스위스에 여행 오셔서 한국 분들이 많이 사 가시는 스위스 과자인 Kambly가 좋을 것 같다.
왼쪽은 스위스에서 판매하는 Kambly 과자다. 가격은 CHF 4.40이다 (오늘 환율로 7,000원이다). 그런데 동일한 과자가 프랑스에서는 EUR 1.87 (2,900원)이다. 스위스에서 판매하는 것과 프랑스에서 판매하는 것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격 차이는 상당하다. 겉포장의 디자인이 약간 다르지만 내용물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똑같다.
이 장면을 목격하였을 때 우리는 속고 살아온 것 같았다. 나는 딸에게 외쳤다. “오늘 먹고 싶은 거 다 담아라!” 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맨날 장 보러 가면 “그거 비싸서 안 돼! 하나만 사.” “어~! 그거 맛없을 것 같은데?” (더 싼 걸 골라주면서) “이게 훨씬 맛있어 보인다.”라고 했던 아빠가 다 담으라고 하니 이상하게 볼 만도 하다. 나를 한 번 쳐다보고 과자를 한 번 쳐다보더니, 딸이 말한다. “진짜요? 아빠 진짜예요?” 응! 진짜야~ 먹고 싶은 거 다 담아! 딸은 신이 나서 담다가도 슬쩍 나를 한 번 보고 또 담는다. 그렇게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장을 봐서 돌아왔다. 차 안에서 딸이 말한다. “아빠! 여기 진짜 좋다! 여기 맨날 오고 싶어요!” 그래, 자주 오자~
그로부터 얼마 후, 장모님이 처음으로 스위스를 방문하셨다. 바로 그, 3화에서 한국어를 못하는 스위스 현지인과 한국어로 소통하시는 초능력을 보여주셨던 장모님이시다. 장모님을 모시러 취리히까지 운전해 갔다. 제네바에는 없는 직항이 취리히에는 있어 그곳으로 오시기로 하셨다. 장모님과 나는 너무 잘 맞아서 한국에서도 함께 다니면 엄마와 아들이 다니는 것으로 사람들이 착각할 정도였다. 오랜만에 만난 장모님과 나는 차 안에서는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며 제네바로 돌아왔다. 장모님은 “조서방! 물가가 그렇게 비싸다던데, 뭐 잘 먹고 지내는 거 맞나?”라며 걱정하시길래, “네! 장모님, 스위스 물가가 비싸긴 하지만 이제 차가 있으니 프랑스에 가서 장을 볼 수 있어서 괜찮아요. 스위스와 프랑스는 물가 차이가 좀 나거든요. 걱정 마세요!”라고 답해드렸다.
그러고는 그다음 날부터 나는 장모님이랑 윗동네 프랑스, 옆 동네 프랑스, 온 프랑스를 다 돌아다니며 쇼핑을 하기 시작했다. (쇼핑이라 해봤자 다 먹거리였다.) 장모님이 뭔가를 들었나 놓으면 나는 “장모님 그거 사도 됩니다! 안 비싸요!” 하면서 다 담았다. 장모님은 “조서방, 진짜 괜찮나? 돈 너무 많이 쓰는 거 아이가?” 말씀하셨지만, 나는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장모님도 오셨겠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장모님! 걱정하지 마시고! 장모님 옷도 좀 사시고! 예? 신발도 좀 사시고! 예? 괜찮습니다!” 그렇게 장모님과 나는 온갖 음식 재료들을 집으로 사다 날랐고 덕분에 매일 아침부터 시작하여 삼시 세끼를 맛있게 챙겨 먹을 수 있었다.
거기에 더 용기를 낸 우리는 장모님을 모시고 제네바를 떠나 약 550km 떨어져 있던 파리를 시작으로 스트라스부르, 꼴마르,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유럽을 다녔다. 나는 약 3000km를 운전했지만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너무나 행복한 시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장모님이 가실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급우울해졌다. 한국에 전화해서 장인어른께 장모님 좀 더 있다가 가시면 안 되냐고 아내 몰래 전화도 했다. 타지에서 장모님과 쇼핑하고 맛있는 거 해 먹었던 시간들이 너무나 행복했던 것 같다. 아내는 “도대체 내 엄마가 가는데 자기가 왜 더 힘들어하는 거야?”라고 물었다. 나도 모르겠다.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장모님을 보내드리려고 다시 취리히 공항으로 갔다. 장모님께서는 계속 “조서방, 정말 수고가 많네… 고맙네 내가 내년에도 꼭 올 테니 너무 힘들어하지 말게” 하시며 떠나셨고, 나는 겨우 울음을 참고 돌아서서 모든 재산을 날린 사람 같은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 체...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카드 명세서였다. 명세서를 보는 순간 꿈에서 깨어 현실에 온 것 마냥 정신이 맑아졌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금액이 청구되었다. 금액을 보는 순간 내가 딸이랑 장모님과 함께 신나게 쇼핑카트에 담았던 수많은 물건들이 뚜렷하게 그려지기 시작한다. 내가 이렇게 돈을 많이 썼나? 이상하네... 그리고 아내의 음성이 들린다. “자기야~ 우리 엄마 몇 번만 더 왔다가는 파산하겠다. 그렇지?”
미안해 여보.
현실로 돌아온 순간, 또 하나의 교훈을 배웠다.
물가가 비싼 나라에 살든 저렴한 나라에 살든,
긴장하지 않고 살면 돈은 샌다. 그것도 많이.
-에라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