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친구를 더 예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고요...
이전 에피소드에서 (7화) 딸이 인종차별을 당한 사건과 학교의 배려와 적절한 조치를 통하여 어려움을 극복한 이야기를 적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며, 이해를 돕기 위하여 먼저 7화를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인종차별에도 불구하고 스위스 학교의 적절한 조치를 통해 딸은 행복한 학교생활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많은 친구를 사귀었고, 담임 선생님을 좋아하며, 학교에 가는 것을 항상 즐거워하였다. 스위스의 공교육은 만 4세부터 시작되며, 처음에는 집중하기, 가만히 앉아 있기, 조용히 하기 등의 기초적인 교육에 중점을 둔다. 초반에는 숫자조차 배우지 않는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노는 시간이 많았고, 집에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즐거웠던 것 같다.
학교가 마치는 시간이 되면, 정문 앞은 아이들을 기다리는 부모들로 가득했다. 나는 불어도 서툴렀고, 스위스에서 더 내향적으로 변해버린 성격 탓에 혼자 멀리 떨어져 딸이 나오기만 기다리는 일이 많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부모들과 기본적인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어색함이 사라지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어느 날, 항상 밝은 표정으로 하교하던 딸의 얼굴이 어두웠다. 선생님도 딸의 뒤를 따라 나오셨다. 딸은 고개를 푹 숙이고 나에게 다가왔고, 선생님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딸이 이야기해 줄 것이니 나중에 다시 면담을 하자고 하셨다. 처음으로 선생님께 개별 면담 요청을 받은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집으로 가면서 여러 가지 상상을 해보았다. 사고를 칠 만한 아이는 아닌데, 무엇 때문일까?
집에 도착한 우리는 책가방을 놓자마자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딸에게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 보라고 했다. 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나는 뒤로 넘어질 뻔했다. 딸의 고백은 다음과 같았다.
오늘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라이아니콜 (가장 친한 친구)랑 암마니 (7화에 등장하는 같은 어린이집 출신 친구)랑 함께 놀다가 암마니 얼굴을 하얀 분필로 칠했어요. 그래서 암마니가 울었고, 나랑 라이아니콜은 선생님께 불려 가서 혼이 났어요.
뭐 어떻게 애들끼리 놀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쉽게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암마니는 피부색이 검은 친구이기 때문이다. 내 딸이 흑인 친구의 얼굴을 하얀색 분필로 칠을 한 것이다. 이것은 충분히 인종차별적인 행동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은 하얘졌다. 암마니라는 친구도 문제지만.... 친구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암마니와 내 딸은 같은 어린이집 출신이다. 당시 나는 불어로 소통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무슨 일이 있을 때면 암마니의 어머니가 영어로 통역을 해주며 선생님과 대화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셨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딸에게 물어보았다. “왜 그랬어? 도대체 왜?”
'아니 나는... 암마니 얼굴이 우리 반에서 제일 검어서... 그래서 다른 친구들처럼 조금 더 하얀색으로 되면 더 예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라이아니콜이랑 이야기하다가... 우리가 하얀색 분필로 칠해주면 조금 하얀색으로 바꿀 수 있을 것 같아서... 암마니 보고 앉아보라고 한 다음에, 라이아니콜이랑 칠한 거예요.'
나는 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로 그런 행동을 하면 안 돼! 그건 정말 잘못된 거야.” 나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딸은 묻는다.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이에요? 친구 생일 파티에서도 얼굴에 그림을 그려주잖아요.”
“그거랑은 완전히 다른 거야!” 나는 답했다.
사실 딸의 행동은 인종차별 의도가 전혀 없는, 순수한 장난이었다. 그러나 당한 아이와 부모님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불쾌하고 충격적인 사건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양한 예를 들어가며 딸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장난으로 하는 행동이라도 상대방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딸이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결국 딸도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딸이 다시 묻는다. “아빠,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암마니랑 암마니 엄마도 많이 슬플 것 같은데요?” 나는 딸에게 말했다. “내일 학교에 가서 암마니와 암마니 어머니께 진심으로 사과하고,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약속해.”
다음 날, 우리 부부는 학교로 불려 갔고, 선생님께서는 암마니 어머니의 입장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셨다.
“암마니의 어머니는 이 일이 아이들끼리 장난으로 일어난 일이라 생각하고, 아이들이 혼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학교 차원에서도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아직 아이들이 어리기 때문에 의도적인 행동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우리는 선생님께 죄송하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생각했다. 만약 내 딸이 흑인이었고, 다른 친구들이 하얀 분필로 내 딸 얼굴을 칠했다면 나는 과연 이 일을 쉽게 넘어갈 수 있었을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며칠 후, 나는 암마니의 어머니와 마주쳤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그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괜찮아요! 별일 아니에요. 놀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라며 나를 위로해 주었다. 암마니의 어머니는 이 사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로 결정하였고, 다행히도 우리 모두는 예전과 같이 웃으며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 이제 중학생이 된 딸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너 그때 암마니 얼굴에 하얀 분필 칠한 거 기억나? 왜 그랬어?”
딸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정말 왜 그랬을까? 지금 내가 그랬으면 바로 잡혀갔을 텐데 말이야.ㅎㅎㅎ”
당시에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사건이었지만, 이제는 우리 가족에게 하나의 추억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암마니는 잘 지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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