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제가 가서 가지고 갈게요! 배송하지 마세요...
전날 저녁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출발해 600km를 달려 스위스에 도착했다. 아내가 구해놓은 아파트는 크지는 않았지만 리모델링을 거쳐 깔끔한 집이었다. 제네바에서는 집을 구하기가 무척 어렵다. 계약금을 먼저 거는 사람이 입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몇 가지 필수 서류를 구비하여 부동산에 제출하면 부동산에서 서류가 정확한지 확인한 후 집주인에게 전달한다. 최종 결정은 집주인이 하게 된다. 그렇다 보니 내가 지금 얼마나 급하게 집을 찾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편지를 첨부해서 보내기도 한다. 월세가 워낙 비싸다 보니 조건이 좋은 집에는 수십 명에서 백 명 넘는 지원자가 몰린다. 우리는 다행히 좋은 위치에 괜찮은 가격으로 집을 구할 수 있었다고 아내가 말했다.
아침 햇살이 우리를 깨운다. 날씨는 너무나 화창하고, 공기도 좋다. 물 맛도 예술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동네 풍경도 아름답다. 감동도 잠시, 집을 둘러보니 가구가 없다. 세탁기와 냉장고도 없다. 이렇게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렌터카를 반납하기 전에 빨리 세탁기와 냉장고부터 사러 가야 한다. 아내가 스위스에 전자제품을 파는 매장이 있다고 하는데, 그리 멀지 않다고 한다. 한국의 하이마트와 비슷한 곳으로, 여러 제품을 보고 비교할 수 있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한국식 사고를 하고 있었다. 매장에 가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고 결제하면, 당일 혹은 늦어도 다음 날에는 배송과 설치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 생각이 헛된 것임을 깨닫는 데에는 몇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내가 스위스는 배송비가 많이 비싸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비싸 봤자 얼마나 비싸겠어?’ 생각하며, 어제 힘들게 운전해서 왔으니 웬만하면 배송을 시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선 가서 보고 결정하기로 하고 매장으로 출발했다. 독일에 계신 삼촌은 스위스에서 운전할 때 딱지 떼이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여러 번 당부하셨다. 특히 30km, 50km 제한구역을 지날 때는 표지판을 잘 보라고 하셨다. 최대한 조심하며 전자제품 매장에 도착했다.
냉장고는 삼성 제품 중 그리 비싸지 않은 걸로 골랐다. 세탁기도 3인 가족이 쓸 작은 것으로 결정했다. 이제 배송비를 물어볼 차례다. 배송비가 얼마인지 묻자, 직원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감사하게도 영어로… (제네바는 불어를 쓴다.)
“두 가지 옵션이 있습니다. 하나는 집까지 배송해 주는 것, 다른 하나는 집까지 배송하고 설치까지 해주는 것입니다.” 직원은 이렇게 안내해 주었다.
가격을 듣는 순간, 우리는 처음에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었다. 약 10년이 지난 지금도 이 가격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더 놀라운 건, 냉장고와 세탁기를 배송시키면 배송비를 하나만 내는 것이 아니라 각각 따로 결제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가격을 들은 우리는 아무도 “힘드니 배송을 시키자”라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두 번에 걸쳐 트렁크에 냉장고와 세탁기를 싣고, 트렁크가 닫히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트렁크를 닫지 못한 채 천천히 운전하고 있는 차들이 눈에 띄었다. ‘저 사람도 물건 사서 가는구나…’
‘우리만 이렇게 사는 게 아니네? 그래도 다행이다. 이제는 이런 것쯤 익숙해져야겠지?’ 그래서 여기 사람들이 트렁크가 큰 왜건 차량을 많이 타고 다니는 거구나 싶었다. 후에 우리도 왜건 차량을 구입했다. 이렇게 또 하나를 배웠다. 스위스에서는 사람에게 일을 시킬 생각을 하지 말고 무조건 몸을 써야 한다는 것을.
이렇게 나의 두 번째 스위스에서의 하루가 지나갔다. 그래도 이렇게 가족과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저희의 이야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