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장벽을 넘는 법 : 3살 딸과 장모님에게 배운 교훈
어마무시한 스위스 전자제품 배송비 때문에 온라인 주문을 포기하고, 매장을 방문해 세탁기와 냉장고를 직접 구입해 트렁크에 실어 아파트로 가져왔다. 엘리베이터까지 가는 길에 계단이 있어 올리느라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이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이전 에피소드를 참고해 주세요.) 가구는 물론 빨래건조대도 아직 없지만, 냉장고와 세탁기를 보며 마치 부자가 된 기분이다. 이제 시원한 물도 마실 수 있고 냉동실도 사용할 수 있다. 옷도 세탁해 입을 수 있다. 감사할 것들이 멀리 있지 않음을 새삼 느낀다.
이제 아내는 출근을 해야 한다. 아내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하다. 요리를 하지 못하는 남편과 세 살짜리 딸을 두고 회사로 가야 하니 얼마나 막막했을까? 미안해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편한 마음을 가진 채 출근하는 아내를 보니 내 마음도 편치 않다. 나는 이제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 여기는 키즈카페도 없다. 외식은 너무 비싸서 엄두도 낼 수 없다. 주변 마트에서 무엇이든 사서 요리해 딸을 먹이고, 나도 먹어야 한다. 모든 것이 아직 낯설다. 하지만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추억을 쌓을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가? 생각하며 딸을 향하여 웃어본다.
아빠와만 놀던 딸이 심심해졌는지 놀이터에 가고 싶어 한다. 놀이터에 가자는 말에 두 가지 걱정이 스친다. 첫 번째는 누군가가 나에게 불어로 말을 걸어오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 두 번째는 밝고 성격 좋은 딸이 놀이터에서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말하며 뛰노는 아이들을 보고 주눅이 들어 집으로 가자고 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다. 주춤거리다가 더는 미룰 수 없어 딸을 데리고 집 앞 놀이터로 나갔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일부러 아이들이 없는 회전의자 쪽으로 딸을 데리고 갔다. 그런데 저 멀리서 장난기 넘치는 남자아이가 우리를 향해 달려온다. 속으로 “제발 여기로 오지 마라”라고 외쳤지만, 그는 정확히 우리 앞에 멈춰 섰다. 무언가를 빠르게 불어로 말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다. 아무 말을 못 하고 서 있으니 갑자기 딸아이를 살짝 밀치고 올라탄다. 남자아이가 소리를 친다. !$%!%!! 알아들을 수 없다. 영어로 대화를 해보려고 했지만 소통이 안된다. 당황스러운 나와 달리 딸은 "뭐라는 거야? 말을 똑바로 해야지!" 라며 말한다. 전혀 밀리지 않는다. 다시 남자아이가 소리친다. 정확하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략 "너는 이거 못 돌려~ 나와!"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자 딸은 씩씩하게 다시 말한다. "네가 돌린다고? 알았어 그럼 네가 돌려!" 그러고서는 자리에 앉는다. 남자아이가 힘껏 돌리기 시작하자 속도가 꽤 빨라진다. 그러나 딸은 "아니! 그렇게 돌리면 내가 어지럽잖아. 살살 돌려줘!"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자기 옆자리에 있던 과자봉투 쓰레기가 눈에 거슬렸는지 손으로 잡아서 밖으로 던지다. 그러나 남자아이가 또 뭐라 뭐라 소리친다. 딸이 다시 말한다. "아니 쓰레기야, 쓰레기라고, 괜찮아~"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남자아이가 돌려주는 회전의자를 즐겼다. 이때 저 멀리서 언니들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나는 “이제 그만 가자!" 라며 딸을 안아 다른 곳으로 향했다.
외국어를 잘 알아듣지 못해도 상황을 파악하며 자신의 할 말을 하는 딸의 모습이 부러웠다. 그 당당한 태도는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에 있지 않은가?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은 게 당연하다. 언어를 배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자신감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이 아이는 자라면서 현재 4개 국어를 구사하게 되었다. 언어에 관한 더 많은 에피소드는 다음에 다루겠지만, 새 단어나 표현을 들으면 집에 와서 혼자 중얼거리며 반복하던 딸의 모습은 잊을 수 없다. 특히 친구와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동기부여를 받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시간이 좀 흐르고 장모님께서 스위스를 방문하셨다. 장모님은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중에 한 분이다. 따뜻한 언어를 사용하시고 다른 사람들의 감정도 잘 헤아려 주신다. 스위스에 도착하신 장모님을 붙잡고 손녀가 불어를 가르친다.
"할머니, 여기 스위스에서는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이 아주 중요해요 불어로 '봉주흐'라고 해요. 따라 해 보세요!
할머니가 따라 한다. '봉주르' 딸이 깔깔깔 웃으며 '봉주르가 아니고 봉주흐예요! 봉주흐' (참고로 흐 발음은 한국인들이 따라 하기 어려워하는 발음이다.)
몇 번을 시도하다가 도저히 할머니가 봉주흐가 안 되는 것 같으니 "그럼 그냥 봉주르라고 하세요" 하면서 넘어간다. 그리고 이어서 가르친다.
"할머니 그리고 감사합니다! 도 잘해야 돼요. 불어로는 메흐씨보꾸 에요. 메흐시보꾸 따라 해 보세요!"
할머니가 묻는다. "뭐라고? 멸치볶음이라고?"
딸아이의 웃음이 빵 터지며 멈추지 않는다. 몇 번 더 시도해 보더니 결국, '할머니, 그냥 멸치볶음이라고 하세요. 그래도 알아들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이 세상에 이렇게 행복한 언어 수업이 또 있을까? 딸의 불어 강습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러고는 다 함께 산책을 나섰다.
산책 중에 화장실을 다녀오신 장모님이 갑자기 보이시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 현지인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모님이 보인다. 놀래서 가보니 장모님이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대화를 마치신 장모님이 우리 쪽으로 오신다. 나는 "장모님, 뭐 하셨어요?"라고 물었다.
장모님이 말씀하신다 "아니 저 할머니가 다리가 너무 불편해 보이고, 힘들어 보여서 가서 다리를 어떻게 하시다가 이렇게 다쳤나고 물어봤지~ 그랬더니 할머니가 저기서 오다가 넘어졌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괜찮냐고 물어보니깐 괜찮다고 하시네! 그래서 힘내시라고 손을 꼬옥 잡아드리고 왔지~"
나는 다시 질문한다. "장모님 그럼 그 이야기를 한국말로 하신 거예요?
장모님이 말씀하신다 "그렇지! 근데 다 알아들어~ 이게 다 통하게 되어있어! 한국말로 해도 돼~" 이 말을 듣는데 딸과 처음 놀이터에 갔을 때 있었던 일들이 오버렙이 되었다. 아... 우리 장모님의 손녀네... ㅎㅎㅎㅎ
3살 딸과 장모님 덕분에 언어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딸은 ‘멸치볶음’ 같은 엉뚱한 단어도 자신감만 있으면 불어로 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고, 장모님은 ‘한국어로도 진심만 있으면 통한다’는 것을 직접 증명하셨다. 물론 이 말은 공부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누구나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 실수를 많이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과정을 극복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감을 가지고 시도하는 것이다. 결국 언어에서 중요한 것은 완벽한 발음이나 화려한 단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마음이다. 이 자신감은 우리가 언어를 빠르고 즐겁게 배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오늘도 깨달음과 웃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저희의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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