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 성격이 다 다르듯이, 여행 스타일도 다른 게 어찌 보면 당연하다. 느긋하고, 게으르지만, 호기심이 많은 내 성격대로 나는 여행에서도 좋아하는 곳은 많이, 관심 없는 곳은 쿨하게 지나치는 편이다. 그래서 누군가 정해놓은 명소를 가보지 않은 적도 꽤 많다. 뭐, 가도 내 취향이 아닐 것을 여러 번의 경험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여행을 하면서 나에 대해서 많이 알아갔다. 아직도, 여전히 알아가는 중이다.
여행지에서의 나는 내 일상과는 조금 다르다. 어떤 부분에서는 부지런해진다. 일정이나 계획을 세우는 것 말고, 요리를 하는 것에 말이다. 매끼마다 뭘 사 먹을지 고민하는 것도 찾아보는 것도 지칠 때는 그냥 마트에 가서 조금씩 사 와서 후다닥 해 먹는다. 평소 같았다면 그게 더 귀찮겠지만, 여행지에서의 마트 구경을 좋아하기 때문에 요리에 있어서는 부지런해진다. 또, 짐 정리하는 것에도 부지런해진다. 3일 이상 머물 숙소라면 배낭의 물건을 다 빼서 마치 집처럼 원하는 위치에 물건을 다 늘어놓는다. 떠날 때 또 사는 게 귀찮을 법도 한데, 3일간의 안정감이나 익숙함이 여행지에서만큼은 더 중요하다.
반면에 게을러지는 것도 생긴다. 그중 하나가 지도보기. 길을 다닐 때 지도만 보는 것보다 주변 건물로 외우면 더 빨리 외울 수 있다. 길을 다닐 때 두리번두리번거리면서 다니는 편이라 그때 외운 건물들로 길도 찾는 편이다. 그래서 구글 지도를 대충 건물 기준으로 외우고, 안 보고 다닌다. 정확도가 아주 높지는 않다. 어느 정도 그 동네가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니까 초반에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경우가 잦았다. 그러면서 가까운 슈퍼도 알아놓고, atm기의 위치도 파악한다. 지도가 가라는 대로 따라만 가면 주변을 잘 못 보니까 더 안보는 것도 있다. 게으름에 대해 말하다 보니, 가장 게으르게 여행했던 여행지가 궁금해졌다.
거의 대부분의 여행을 게으르게 해왔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게을렀던 여행지는 어디일까. 아마도 스페인일 것이다. 사진첩을 쭉 내리면서 보니까, 스페인이 확실하다. 숙소에서 찍은 사진이 많고, 음식도 자주 해먹은 것이 밖을 잘 안 나갔다는 증거다. 스페인은(내 생각이지만) 도시마다 어느 정도의 봐야 할 것이 정해져 있고, 먹어야 할 것이 정해져 있는 나라라서 정보가 많이 않아도 ‘나 스페인 와봤다.’ 정도가 가능한 나라이다. 그래서 그것들을 보고 느끼면 뒤도 안 돌아보고 숙소로 돌아왔다. 물론 한여름의 스페인이라 우릴 더 게으르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여름의 따가운 햇빛을 좋아하기 때문에 낮에 다니는 건 좋지만, 노을을 보는 게 힘들었다. 노을 시간이 늦으니까 그전까지 잠깐 숙소에서 쉬다 나오자. 해서 들어간 숙소에서 잠들어 새벽에 깬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목적지를 가다가 공원에 누워 시간을 보내느라 목적지에는 결국 가지 못한 경우도 빈번했다. 이런 여행도 나쁘지 않았다. 충분히 쉬고, 보고 싶은 것들만 보았으니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
사실 게으르게 여행한 이유는 많다. 원하는 여행 스타일이기도 했지만, 계절을 핑계 댄 적도 있고, 피곤함을 앞세운 적도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언젠가 또 오면 되지.라는 마음이 가장 컸다. 돌아가서 정 아쉬우면 또 왔을 때 가면 되는 일이고, 아쉽지 않았다면 우리를 게으르게 했던 이유를 찾아 다시 오면 될 일이니까. 더위에 찌드러 들어온 숙소 건물에서 도시 풍경, 잠시 쉰 공원에서 만난 강아지, 가고 싶었던 타파스바 대신 숙소와 가까운 와인바를 간 날, 지도 안 보고 가다 발견한 밀크티집. 다시 돌아가도 그 자리에 있을 것들이 빡빡한 일정들보다 훨씬 소중하다. 안타깝게도 당장은 힘들게 되었지만, 언젠가 스페인을 다시 갈 수 있다면, 똑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 게으르게 스페인을 볼 날이 멀리 있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