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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Aug 16. 2020

초상(肖像) 박 춘자 9

9화 / 유화 4

유화 4


지선은 남편의 해외 출장 길에 가끔 동행했다. 나이 40을 바라볼 무렵, 지선은 빠리의 오르세이(Orsay) 미술관에서 고호를 만났고, 모네와 마네도 만났다. 고갱이 소개한 아이티 여자들의 매력적인 다갈색 피부색에 감탄하기도 했다. 지선은 네델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프랑스의 아를지방으로 고호를 쫓아다녔다. 오슬로에서 뭉크를 만났다. 뭉크의 그림은 노르웨이의 색깔을 그대로 말해주는 듯했다. 오슬로의 한 공원에서 구스타프 비겔란트를 만난 후 인생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바람을 맞으며 햇빛을 쬐며 공원에 나앉은 비겔란트의 조각품들은 인생의 모든 단면들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지선은 비겔란트가 조각가가 아니라 철학자라는 생각을했다.  


헨의 렌바흐하우스(Lenbachhaus)에서는 칸딘스키의 색채와 선에 빠져들었고, 빠리의 뽕삐두 센터에서는 마티스와 조우했다. 지선은 마티스가 대담하게 그린 여자들의 초상을 좋아한다. 테두리를 확실히 칠하지 않으면 그림이 흐리멍텅해 보여서 안심이 안 되던 자신의 어린 시절 때문에 지선은 마티스의 뚜렷한 선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뽕삐두 센터에서 모딜리아니의 목이 긴 여자도 만났다. 가끔씩 빠리를 오가며 지선은 고야, 고갱, 로뎅, 까미유 끌로델... 누구나 다 만날 수 있었다. 로마에서 만난 미켈란젤로나 라파엘, 밀라노에서 만난 레오나르드 다빈치...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세살배기 아이가 제가 뱉은 말이 신기해서 자꾸 또하고, 또 하고 중얼거리는 것처럼, 지선은 자기가 본 그림들에 취해서 자꾸 또 보고, 또 보고 그렇게 두루두루 미술관들을 돌아다녔다.

지선이 알고 있는 모든 색채들이 한꺼번에 뒤섞여 암흑으로 지선을 가두었고, 지선이 보아 온 모든 빛들이 한꺼번에 뒤섞여 텅 빈 흰색으로 지선을 휘감았다. 지선은 현기증에 휘청거렸다. 잠자던 자아가 기지개를 켜고 깨어났다.


간간히 식탁 위에 진식의 스켓치북을 펴 놓고 뎃상을 하곤 했다. 식칼, 주전자, 포크, 명태, 배추, 빗자루, 한 웅큼 쏟아놓은 커피 콩, 남편의 골프채, 유정의 레이스 란제리, 진식의기타...  지선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사랑의 빛깔을 띠고 있었다. 비너스, 쥴리앙, 아그립바, 숱한 사람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심호흡을 하며 그려대도그 숨 한 모금도 옮겨지지 않는지 여전히 생명없는 석고로 남아 있는 그것들 보다는 부엌의 식칼이 훨씬 더 친근했다. 딸의 란제리에서는 온기가 느껴졌고, 아들의 기타에서는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남편의 골프 채에서는 이제는 주저없이 웃어제치는 그의 호탕한 웃음 소리가 들려나왔다. 지선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들이 갑자기 생명을 얻고 피돌기를 시작했다. 지선은 그 모든 것들을 다 사랑했다.  


준호는 운전기사를 고용했다.  거래처를 옮겨 다니며 차 속에서 다음 방문할 곳의 상담에 대비해야 했고, 잠시라도 짬이 나면 달리는 차 속에서라도 잠을 자야 했다.  점심을 먹는 것도, 저녁을 먹는 것도 업무의 일부였다. 준호가 바삐 움직이는 속도대로 아들 진식은 성큼성큼 넓은 보폭으로 앞서갔고, 유정은 종종 걸음으로 쫓아와 준호의 뒷목에 징징거리며 매달렸다.  지선은 가끔 정겨운 투정을 하기도 했다.

“준호씨, 경고합니다. 당신을 한참 안 봐도 보고 싶어지지가 않네요. 그냥 잊어 버리려나봐요.”   

지선은 몇 번 더 경고를 했다.

“이제 나는 하숙집 아줌마에서 세탁소 아줌마로 바뀌었어요.”  

장난삼아 시체말을 끌어대며 한 말이었지만 지선이 자신을 세탁소 아줌마로 명명한 스스로에게 짜증이 났다. 남편을 돌아보니 그는 중후한 신사였다. 부드럽고 따뜻해 보였다. 너그럽고 이해심이 많아보였다. 누구나 기대고 싶어하는 포용력 있는 남자로 보였다. 단단한 어깨와 넓은 가슴을 가진 그에게서는 성공한 40대 후반의 남자가 갖는 매력이 풍긴다.  


준호는 출근할 때나 귀가할 때 현관에 서 있는 지선을 꼭 안아준다. 지선이 부엌에서 일할 때에도 가끔 드나들며 아내를 등뒤에서 꼬옥 껴안아 주는 다감한 남편이다. 아내의 생일에는 목걸이를, 결혼 기념일엔 장미 백 송이를 잊지 않고 보내는 남편이다.


그들은 떫은 풋매실 맛의 십대 후반기를 함께 보냈고, 솜털이 보송보송한 복숭아빛 뺨이 솜털을 벗으며 반질반질해지던 20대의 문을 함께 열었다.  그 무렵 준호는 설익은 시로 배를 채웠고, 지선은 준호의 사랑에 감염되어 열병을 앓았다. 준호에게 구체적인 것은 온몸으로 느끼는 가난과 방금 열꽃이 피어 오르기 시작한 지선뿐이었다. 무엇 하나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는 것이 없는 가난한 20대의 십년을 준호는 지선의 손 하나 꼬옥 잡고 넘어왔다. 지선은 가끔 준호가 불러 주는 노래에 취해 비틀거리며 그에게 기대었고, 그가 쪽지에 적어 주는 시 한편에 가슴이 벅차 시장기를 잊고 그를 따라 나선 20대의 한 세월을 보냈다.  시장기가 오래가면 허기진다. 그들이 허기질 때마다 신은 그들에게 신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을 내려줬다. 유정이가 태어나고, 그 애를 키우며 준호는 자신의 허기를 딸에게 물려줄 수 없다고 온 몸을 던져 일했다. 그 달음질이 힘에 겹고 지쳐갈 무렵 진식이 새로운 선물로 그들에게 왔다.  


남편이 된 후로, 아버지가 된 후로, 준호는 경주마처럼 달렸고, 그는 갈채와 환호를 받으며 목적지에 입성했다. 준호만 바라보던 다섯 동생들은 대학 졸업식이다, 박사 학위 수여식이다, 하며 준호를 불러다 사각모를 씌우고 자신의 가운을 벗어 입혀주며 사진을 찍었다. 승진했다고 식구끼리 식사나 함께 하자고, 집을 넓혀 갔다고 집들이한다고 불러댔다. 가난의 때를 벗은 어머니의 얼굴에도 인자한 노인의 너그러움이 감돌았다. 검은 천으로 가린 경주마의 눈 밖에는 많은 것들이 있었다. 벌써 몇 바퀴나 돌고 돈 세월의 더께가 그들의 살림에 끼어 있었다. 철따라 옷을 갈아입는 나무들이 있었고, 그 나무들이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계절병에 시달리는 아내가 있었다. 이제는 준호 대신 아내가 노래를 불렀고, 아내가 시를 썼다. 준호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다. 시가 아니어도 사랑스러운 유정이와 진식이의 모습을 활동사진으로 담아낼 수 있었다. 시가 아니어도 아내의 배를 채워줄 수 있었고, 그 자신 또한 시가 아니어도 유채색의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학교 둔덕에 핀 클로바 꽃을 엮어서 반지를 만들지 않아도 그는 아내에게 반짝이는 반지를 줄 수 있었다. 그가 허리를 휘청거리며 힘주어 노래 부르지 않아도 파바로티의 오 솔레 미오를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아내에게 들려줄 수 있었다. 담배갑의 속종이 은박지에 쪽지 시를 써주지 않아도 아내에게 엘리옷이 육성으로 녹음한 황무지를 들려줄 수 있었고, 그 황무지에 등장한 뮌헨의 슈탄베르그 호수에서 아내가 배를 타도록 해 줄 수 있게 되었다.


지선은 동화책이 아니어도 알프스의소녀 하이디가 살던 집을 볼 수 있고, 프랑다스의 개에 나오는 레오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루벤스의그림을 직접 볼 수 있게 되었다. 에디트 삐아프의 노래를 들으면서 세느강을 상상하고 빠리의 카페를 그려 보지 않아도 세느 강가에 이젤을 받쳐놓고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빠리의 카페에 앉아 까페오레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준호는 아직도 바쁘다. 밧데리가 다 닳기 전에 미리미리 갈아 넣어 잠시도 쉬지않는 시계처럼 준호는 쉬임 없이 돈다. 첫 아이를 품에 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날이 저만큼 뒤에 있다. 한달음에 달려온 길 앞에 자신의 첫아이는 배불뚝이가 되어 뒤뚱거리며 산달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 이제 유정이 출산 준비를좀 해줘야지.”  

“그래야죠. 유정이랑 알아서 할께요.”  

“자, 이거, 쇼핑할 때 써요.”

준호는 출근길에 쇼핑할 돈을내놓고 갔다.


지선의 가슴은 유정의 아기를 맞을 생각에 설레이기 시작했다. 유정이와 진식이를 잉태하고 출산하면서 느꼈던 신비로운 감정이 되살아났다. 머리 속으로 신생아용품들을 이것저것 생각하는 지선의 입가엔 저절로 미소가 돈다. 마침 유정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래, 유정이구나. 너 이제 출산용품 사놔야지.”  

“그러잖아두 엄마, 영식씨가 엄마랑 같이 쇼핑 가라구 했어요. 배가 더 불러지면 쇼핑하기두 힘들 거라구. 오늘 갈까 엄마?”

“배불러서 힘든 거보다도 그런 건 미리 준비해 둬야지. 아이를 예정보다 빨리 낳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엄마는 너랑 같이 안 갈 거야. 이서방이랑 함께 가거라.”

“엄마, 바쁘세요? 영식씨랑 가려면 주말에 가야 하는데 주말엔 백화점이 너무 복잡해서 짜증나요. 그리고 엄마가 가야지 필요한 거 안 빼놓고 다 챙겨서 사지요.”  

“주중 오후에 잠깐 시간 내라고 그래. 너희들끼리 가서 마련해 봐. 그것도 다 재미야.”  

“예, 그럴께요. 엄마. 그럼 영식씨랑 시간 맞춰서 갈게요.”  


유정의 전화를 끊고 지선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은 후 백화점으로 갔다. 신생아용품 코너에 선 지선은 이것저것 진열된 물건들을 신기한 듯 둘러보았다. 손바닥만하게 작은 보드라운 배냇저고리, 손톱으로 상처낼까봐 손을 봉해 두는 신생아 장갑, 그렇게 앙증맞고 작은 아기옷은 한번도 구경해본 적이 없는 것처럼 신비롭기까지 했다. 커다란 인형에게는 오히려 아기 옷이 작아서 입힐 수가 없을 정도였다. 신생아를 감싸는 보자기는 어쩜 그리도 보드라운지 새털구름 같은 느낌이었다. 지선은 신비감에 사로잡혀 정신이 몽롱해지는 듯했다. 빨리 아기를 봤으면 하는 기다림에 갑자기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유정이랑 함께 왔으면 그 애는 얼마나 이것저것 만지며 신기하다고 참 앙증맞다고 재잘거려 댔을까 생각하니 유정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바로 곁에 있는 듯했다.


지선도 딸을 데리고 함께 오고싶었다. 딸을 곁에 두고 배냇저고리는 몇 개가 필요하며, 아기 베개는 도너츠처럼 가운데가 뚫린 것을 사야 하고, 기저귀 카바는 사용하지 말아야 하고, 우선 바지는 필요 없으며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가운이 더 편리하고, 모유를 먹이게 될지 어떨지 아직은 모르니 미리 우유병을 준배해 둬야 하고, 그렇게 해줄 이야기도 많았다. 할머니가 되는 지선으로서 처음으로 그럴듯하게 한번 어른노릇을 하며 딸에게 사랑을 베풀고 싶기도 했다. 자신이 구경만 하고 사지는 못했던 이것저것들을 딸에게는 거리낌 없이 선뜻 넉넉히 마련해주고 싶은 마음을 붙잡아두기가 힘들었다. 당연히 함께 갈 줄 알고 전화를 걸었던 유정에게 거절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지선이 딸을 데리고 앞장서서 출산준비를 하러 다니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른 것이다. 그런 행복한 순간들을 딸이 제 남편과 함께 보내도록 한 배려였다. 유정이 태어날 때는 겨우 배냇저고리 셋과 기저귀 한필, 아기 이불, 그렇게 없어선 안 될 것들만 마련했던 지선이었다. 지선에겐 준호와 함께 쇼핑센터에 진열된 앙증맞은 아기옷들을 구경하며 행복감에 젖은 추억이 없다. 혼자서 손을 뻗어 만져보는 것조차 삼가며 눈으로 구경만 했었다. 남편과 함께 한 보따리 가득 사 가지고 즐겁게 돌아가는 다른 임산부들에게 자리를 비켜줘 가며 그냥 구경만 하곤했었다. 그때 살 수 없었던 것들을 이제는 서슴없이 사 보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지선은 그런 행복을 유정과 영식 부부에게 직접 누리게 해줘야 한다고 자신의 욕구를 꽁꽁 붙들어 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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