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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Aug 16. 2020

초상(肖像) 박 춘자 8

8화 / 수채화 4

수채화 4


여자는 클라이네 샤이덱에서 내린다. 기차 길옆으로 밀어 붙인 눈이 여자의 키를 훨씬 넘는다. 여자는 눈 속을 헤집고 휘저으며 거기 파묻힌 것들을 찾는다. 옛날 남자 친구의 노래가 튀어나온다. 얼음 속에 신선하게 보관됐던 노래는 서서히 녹아 공중에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목련 꽃 그늘 아래서 벨텔의 편질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불꽃을 밝혀준다, 아,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여자는 생각한다. 4월에 나는 무엇을 했었지? 베르테르는 편지를 뭐라고 썼을까? 이 노래가 왜 여기에 묻혀 있는 걸까?  눈 속에 묻힌 목련, 눈 속에 묻힌 베르테르의 편지, 눈 속에 묻힌 생명의 불꽃, 눈 속에묻힌 무지개 계절...  여자의 생각은 끝이 없다. 여자는 다시 눈 속을 헤집는다.  손이 시리다. 따뜻한 것이 그립다. 여자가 그렸던 꽃들이 살포시 수줍게 피어난다. 이미 개화하기 시작한 그것들은 부끄러운 줄 모르고 활짝 되바라지게 피어난다. 한 무더기의 짙은 주홍색 서양 양귀비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여자는 손을 녹인다. 따뜻하다. 아이리스꽃의 잉크 빛이 질투처럼 끼어든다. 갑자기 고독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그러다가 여자는 노란 난초를 생각하고 헤집어 놓은 눈더미를 다독거린다. 다음 기차로 여자는 산을 내려온다.


호수엔 눈이 쌓이지 않는다. 그러나 여자는 다 알고 있다. 얼마나 많은 눈이 호수 속으로 숨어들어가 숨죽이고 있는지를. 옛날 남자 친구는 말했었다. “바다속에는 몇 개의 창고가 있는데 그 중 하나에는 눈이 가득가득 쌓여 있고, 또 다른 곳에는 비가 꽉 차있고, 소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그 동안 자기가 던진 심술과 욕보따리도 거기 있고, 또 어디 한 군데 창고에는 여자에게 주려고 모아둔 사랑도 가득 채워져있다”고 남자 친구는 말했었다. 여자는 호수에도 그런 창고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가득찬 창고는 아마 오늘 넘쳐 올라 호수 위로 떠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베란다에서 실내로 들어간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다. 바스타월로 몸을 닦는다. 그리고 이번엔 그의 로브가운을 입는다. 그를 느낀다.


남자는 이젤 위에 걸쳐 있는 여자의 마지막 그림을 본다. 온통 블루로 그린 수채화가 싸늘한 냉기를 품으며 남자를 맞는다.  얼핏, 여자가 오렌지 색의 꽃 그림을 즐겨 그렸었다는 생각이 난다. 그러나 여자가 남기고 간 그림은날 선 칼끝에서 번쩍 빛나는 청색이다. 그림은 실루엣으로만 그려져 있다. 여자가 비를 맞고 있다. 어깨에 늘어뜨린 긴 머리와 코트 자락의 허리 선이 약간 들어가고 긴 코트의 아랫단이 살짝 나풀거리는 느낌으로 그 실루엣이 여자임을 안다. 화폭속에 같은 모양의 실루엣 여럿을 색깔의 농담과 크기를 구분하여 원근으로 표시한 아주 단순한 그림이다. 물의 양을 가감하며 청색 한 가지 색깔로만 그린 맑은 수채화다. 그 실루엣 위에 비가 쏟아지고 있다. 구멍난 깡통에 물감을 담아 뿌려댄 잭슨 폴록의 그림처럼 파란색 빗방울이 그림 속 여자의 실루엣을 훑어 내리고 있다. 남자는 톡톡톡에게 말을 건다.

“톡톡톡, 이 여자에게 우산을 씌워 줘야겠구나.”  

“멍멍멍.”

톡톡톡이 꼬리를 바쁘게 흔들며 대답을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진학하여 떠날 때 준호는 춘자를 한번 만났었다. 가람 문학회에서 마련한 송별회 자리였다. 행사 때마다 협조해 준 미술반과 함께 송별회를 했다. 힐끔힐끔 춘자를 곁눈질해 봤으나 춘자는 전혀 서운한 기색이 없는 표정이었다. 준호의 가슴만 돌덩이에 묶여 바다로 걸어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서편에달이 호숫가에 질 때에, 저 건너산에 동이 트누나, 사랑빛에 잠기는 빛난 눈동자에는 ~ ~ 친구 내 친구 편히 가시오.”  송별의 노래를 부르는 마지막 시간에 준호는 자꾸만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곧 쏟아질 것만 같아서였다.


송별회는 밤 열시 가까이 끝났다.

“어이, 같이 가요.”  

앞서 가는 춘자를 불러 세웠다.

“방향이 다르잖아.”  

춘자의 답은 담담했다.

“거기, 무섬탐 많이 하잖아. 내가 데려다 줄게.”  


둘은 한참 동안을 말없이 걷기만했다. 침묵을 깬 건 준호였다.

“이제 우린 만나기 어렵겠지?”  

“동창회를 하면 언젠가 보겠지 뭐.”  

“그렇구나. 그런데 내가 여길 자주 내려올 수 없을 거야.”  

“나두 서울로 가.”  

“아니, 뭐라고?  거기가 서울로 간다고?”  

“응, 나 취직됐어. 작은 출판사야.”

“왜 그런 얘기 아직까지 안 했어?”  

준호가 화를 버럭 냈다.

“내가 왜 그쪽한테 말해야 하는데? 자기가 뭔데 내가 왜 내 신상을 다 말해야 해?  그쪽이 뭐 내 애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왜 그래?”


둘이는 그렇게 이름도 못 부르고, 너니 네니 해라도 못하고, 거기니 그쪽이니 그런 대명사로 호칭을 대신하며 반말을 하는 사이였다. 졸업할 때까지도 그렇게 지냈다.   “뭐 내 애인이라도 되는 것처럼”이란 말이 준호의 가슴을 후벼팠다. 아팠다. 더 아픈 것은 목구멍을 밀치고 기어 나오려는 뜨거운 덩이를 꿀꺽 삼켜야 하는 아픔이었다. 준호는 마구 목구멍을 밀치고 나오려는 뜨거운 불덩이를 간신히 가슴 밑바닥까지 찍어 누르고 담담히 말했다.

“그래 미안해. 애인도 아니면서…  취직이 돼서 잘됐구나. 잘 됐구나.”   

멋적어진 준호가 고개를 들어 바라본 하늘엔 별이 몇 개 반짝이고 있었다. 어둑한 하늘에 다섯 동생들의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였다. 준호에게 한번도 갈 길을 강요하거나 갈 길을 막지 않은 아버지의 얼굴도 어둠을 뚫고 비쳤다. 그건 무관심이 아니라 끊어버릴 수 없는 질긴 신뢰의 포승줄인 것을 준호는 알고 있었다. 교육대학이나 가야지 어떻게 감당하려고 네가 일을 저질렀냐고 한숨 쉬던 어머니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가난한 집 장남의 멍에, 열 아홉의 나이에 준호는 춘자를 향한 마음을 착착 접어서 가슴 밑바닥 깊은 곳에 감춰둘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아주 오래도록 박춘자를만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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