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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Aug 16. 2020

초상(肖像) 박 춘자 6

6화 / 수채화 3

수채화 3


여자는 베란다로 나가 호수를 내려다 본다. 몇 해 전 여름, 함께 온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호수 위에 떠다닌다.  여자는 제법 큰 얼음 조각 사이사이로 떠다니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를 만지려고 손을 내민다. 물은 여자의 손이 닿지않는 곳에 있다. 여자는 물에서 눈을 뗀다. 산이 있다. 청회색 빛을 띤 산이 손 닿을 듯 가까이 있다. 여자는 기차역으로 간다. 내일 새벽엔 산에 오르리라. 스피츠에서 인터라켄으로 간 후 라우터부룬넨을 거쳐 융프라우에 오르는 기차표를 산다. 내려올 땐 클라이네 샤이덱 쪽으로 내려오리라. 작은 기차역은 한산하다. 몇몇 아는 사람들이 비밀처럼 간직하고 지키는이 동네에서 여자는 한번도 동양인을 본 적이 없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여기가 유명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아무도 여기가 좋다고 말하지 않는다. 비밀이다. 찾는 이들 모두에게 이곳은 그 사람만의 숨겨놓은 성이다. 문은 언제나 닫혀 있고 이 성의 영주인 그 사람만이 문을 열 수 있다. 귀한 곳이다.


산은 구름을 거느리고 있다.  그 구름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는 산 위의 날씨를 점칠 수 없다는 것을 여자는 잘 안다. 하늘의 쪽빛과 산의 검은 녹색빛에 취해 산에 오른 여자는 안개에 갇혀 여기가 절해고도라고 생각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절해고도는 바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자는 잘 안다.  밀도 높은 안개에 겹겹이 포위된 산이 그렇고, 서울의 한강변 고층 아파트의 베란다에 놓인 정원의자도 절해고도인 것을 여자는 잘 안다. 산이 절해고도일 때 여자는 생각했다. 절대고독은 신이 내린 사랑의 축복이라고. 베란다 의자가 절해고도인 것을 느꼈을 때 여자는 생각했다.이 의자는 저주의 섬이라고.


머리 위로는 구름밖에 보이지않는 날씨다. 구름 위의 세상은 땅에서 감히 알 수가 없다.  여자는 이번이 몇 번째인가 속으로 꼽아가며 융 프라우 요크에 오른다. 산은 찬란한 햇빛에 부끄러운 줄 모르고 모든 것을 드러내고 있다. 드러내야 할 곳은 의기양양하게 당당한 기품을 자랑하고, 은밀한 곳은 수줍은 듯 신비한 그늘에 묻혀 있다. 여자는 생각한다. 이건 산, 그 자신의 몸짓이 아니라 신이 만든 몸짓이라고. 신이 여기 이 산을 지배하고 있다고. 산 그림자가 휘익 지나간다. 무엇이 움직인 걸까. 여자는 골똘히 생각한다. 구름이 움직인 것도 같고, 산이 움직인 것도 같고, 해가 움직인 것도 같다.  여자는 바람을 느낀다.  숙명처럼 계곡 사이를 쉬임 없이 떠돌아다니는 바람, 거부할 수 없이 순응하는 구름, 고집스럽게 제 자리를 가는 태양, 그들이 만들어낸 산 그림자, 그러한 집적거림에도 아랑곳 않고 심호흡으로 버티는 산, 그 모두를 지배하는 신. 여자는생각한다. 신은 있다. 그는 힘이 세다. 그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  여자의 전신을 휘감고 지나가는 그림자까지도 그가 지배한다.


혼자 서성거리기엔 집안이 너무 넓다고 남자는 생각한다. 남자는 눈높이로 단정히 걸려 있는 여자의 그림들을 본다. 섬세한 레이스 테이블 보 위, 흰색의 데이지 꽃이 꽂힌 다갈색 항아리에 반지르르 윤이 흐른다. 여자의 들뜬 목소리가 데이지 꽃그늘 사이를 떠돈다.   “나는 꽃나무 잎새가 초록색인 게 너무 고마워. 이 항아리 색깔한테도 고맙고.”   흰색 테이블 보 위에 같은 흰색의 데이지 꽃을 그리는 건 초록색의 잎새와 다갈색의 항아리 색깔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 여자의 말이었다. 그래서 그 색깔들한테 너무 고맙다고. 식탁 옆에 걸린 작은 액자에 남자의 눈길이 멎는다. 아래 쪽 삼분의 일쯤은 샛노란 색, 그 위의 나머지는 쪽빛의 색종이를 오려붙인 단순한 작품이다. 노란 물감을 쭈욱 끼얹은 듯한 유채밭의 표현이다. 그와 똑같은 구성으로 바닥의 색깔이 샛노랑 대신 진주홍으로 하늘거리는 거만한 양귀비를 나타낸 것이 옆에 있다. 그런 식의 작은 액자가 네 개나 식탁 옆 벽면에 걸려 있다. 무섭게 검은 녹색이 삼분의 이 정도 아랫 부분을 차지하고그 위로 역시 옆의 것과 같은 쪽빛, 녹색과 쪽빛 사이에 한 줄 쭈욱 그어져있는 검은 빨강 색의 작품이 땅과 하늘의 경계에서 붉게 타오르는 듯한 붉은 수수밭을 보여주고, 흰색 종이 바탕에 장난처럼 회색 종이 가늘게 오린 것이 불규칙하게 세로로 몇 개 붙어있는 소품의 액자가 꽃보다 더 고운 흰 눈으로 뒤덮인 설원, 보석처럼 빛나는 상고대를 말해주고 있다. 여자가 본 독일이다. 어느날 저녁, 여자는 단숨에 이 네 작품을 만들었다.  벽에 한 손을 짚고 서 있는 남자는 잠시 여자가 있는 유럽으로 떠난다. 네 개의 액자 속에 갇힌 색깔들을 따라 남자는 유럽의 풍경을 더듬는다.  단숨에 유럽의 사계절을 훑고 지나온 남자는 긴 여행에서 돌아온 피곤한 몸짓으로 식탁 의자에 앉는다. 톡톡톡이 슬쩍 다리를 건드린다. 남자는톡톡톡을 내려다본다. 그래, 우리 얘기하고 놀자.


“톡톡톡! 네 주인님은 지금무얼 하고 있을까?”  

톡톡톡이 남자의 무릎으로 기어오르려고 두 뒷발을 힘껏 바닥에 버티고 곤두 서 있다. 마치 사람이 서 있는 형상으로. 남자는 톡톡톡을 자신의 무릎 위로 끌어 올려 준다.

“톡톡톡, 네 주인님은 옛날의 나만 사랑하는 거니?  지금의 나는 미워하는 거야?  내가 옛날로부터 너무 멀리까지 와 있는 걸까?”    

남자의 시선은 먼 곳을 더듬는다.


가람 문학회의 모임이 거듭되면서 습작에 열심인 준호는 선배들로부터 인정받는 문학회 회원이 되었다. 일학년 가을 문학의 밤에는 준호가 처음 순서에 자작시를 낭독했다. 3학년 선배들이 입시 준비에 바빠 특활반이나 서클은 주로 2학년들이 맡아서 운영하였다. 착실히 출석하고 작품 발표도 부지런히 하는 준호는 2학년이 되어 가람 문학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두 달 후에 치르게 될 시화전을 준비하는 것이 준호의 책임이었다. 회장이 된 준호는 시만 전시하던 그 동안과는 다르게 수필을 쓰는 회원들의 작품도 함께 전시할 기획을 했다. 원고지 15매 정도의 수필은 전지 한장에 읽기 편한 글씨로 쓰기가 어려웠다. 준호는 수필을 원고지 10매 안으로 짧게 쓰도록 요구했고, 소설을 쓰는 회원들에게도 수필을 한 편씩 출품하라고 권했다.

가난한 소외계층 가정 출신인 준호는 어떤 것에서도 소외당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을 막고 싶었다. 같은 문학회 회원들이면서 시를 쓰는 회원들만 참여하는 시화전에 수필을 함께 전시한다는 생각은 누구도 소외당하면 안 된다는 준호의 단호한 생각이었다. 이렇게 해서 시화전에 출품할 작품들이 예년보다 곱절로 늘어났다. 미술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준호는 특활이 끝난 미술반에 직접 찾아갔다. 춘자가 반장이 되어 있었다. 그 무렵 준호는 가끔 복도에서 춘자와 마주치면 눈동자를 마주 바라볼 수도 있을만큼 변해 있었다.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기도 할 정도였다. 남녀 공학 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의 부끄러움은 없어졌다. 미술반 학생 몇몇이 춘자와 함께 흩어져 있는 이젤이며 의자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  웬일이에요?”

복도에 서 있는 준호를 발견하고 춘자가 먼저 아는 체를 했다.

“이번 우리 시화전에 협조를 부탁하려고 왔어요.”  

“당연히 할 걸로 알고 있어요.”  

춘자가 다른 쪽의 이젤을 접으며 대꾸했다.

“그런데 이번엔 일이 좀 많아. 그림도 그렇지만 글씨를 많이 쓰게 될 테니까 누구 글씨 멋지게 쓰는 친구좀 동원해 줘요.”  

“걱정말아요. 며칠 준비하면 되지 뭐.”  

“이번엔 수필도 전시할 거야. 글씨 쓰는 일이 작년보다 몇 곱절로 늘어났어요.”

“수필을?”  

춘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요. 수필도 시화전에 올릴거야. 일이 많아서 좀 미안하지만…”   

준호가 머뭇머뭇 대꾸했다.

“걱정 말아요. 모두들 장시만 써냈다고 생각하면 되지 뭐. 하하…”    

춘자가 재미 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녀의 웃음 소리에 준호의 마음이 갑자기 설레이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를 언제까지라도 자기 곁에 잡아두고 싶다는 충동이 솟구쳤다. 처음 목소리를 들었던 날부터 간직해온, 그러나 절대로 싹이 트면 안 될 일로 꼭꼭 감춰 두고 있었던 꿈이었다.


“그럼 중간고사 끝나는 대로 바로 시작하자구. 우리가 종이랑 물감, 매직팬 같은 건 준비할 테니까, 거기서 특별히 필요한 재료들은 직접 사서 쓰고 <가람>에 청구해요. 우선 중간고사 시험이나 잘 보자구.”  

준호는 자신의 가슴 속을 엿보일것 같은 불안감에 그걸 덮어볼 양으로 그답지 않은 긴 말을 했다. 그런 준호의 속을 이미 들여다 보고 다 알기라도 한다는 듯 춘자는 조용히 미소를 띠고 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이는 그때까지도 서로 대하는 말투가 정해지지 않고 반경어와 반말을 섞어가면서 말했다. 그 무렵엔 다른 남녀 학생들 간에도 그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연애를 한다고 소문이 난 정도의 남녀친구들이나 서로 다정히 반말을 했지, 보통은 함부로 말을 놓지 않았었다.


준호는 시화전 준비 기간 내내 행복했다. 고등학생이 된 그 때까지 자신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 기억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저녁 늦은 시간까지 북적거리며 시화전 준비를 하며 그녀와 같은 교실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준호는 자신의 운명이 새롭게 열린 기분이었다.  전지에 글자만 빼곡히 들어차게 되는 형상이 될까 봐 염려하던 수필은 춘자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뜻밖에 쉽게 쓸 수가 있었다. 춘자는 수필 쓰는 회원들에게 원고를 굵은 사인펜으로 써오라고 주문했다. 원고지에 쓰든지 색도화지에 쓰든지 마음대로 정해서 하고, 글씨체도 평소대로 쓰든지 멋을 내서 도안체로 쓰든지 각자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했다. 그렇게 가져온 원고를 전지에 낱장으로 흩어지게 배열하고 한껏 멋을 부린 선으로 서로를 연결해주는 방법으로 일을 간단히 끝냈다. 약간 짧은 수필은 직접 켄트지에 매직펜으로 도안 글씨를 쓰기도 했다.  


그해 시화전에서는 파스텔톤의배경이 주조였던 전례를 깨고 다양한 배경색을 쓰고, 각종 자료를 사용한 꼴라쥬로 꾸민 것이 특징이었다. 관람객들이 이번 전시회가 가람 문학회 주최냐, 미술반 주최냐는 말을 할 정도로 시화 작품들의 변화가 컸다. 전시회 전날까지도 준호의 시는 꾸며지지 않았다. 준호의 시를 받아든 춘자가 이건 자기가 직접 하겠다며 가방에서 책을 하나 꺼내어 책갈피에 넣는 모습을 보고 준호의 가슴은 마구 두근거렸었는데 바로 전시회 전날까지도 춘자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 시는 어떻게 된 거지?”  

“아, 그거, 내일 설치할 때까지 다 완성되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춘자는 대수롭잖게 답을 하곤 곧 다른 일에 손을 댔다.


완성된 시화를 설치하는 날은 한바탕 법석을 떤다. 모든 설치가 끝나고 총점검을 하며 준호는 울렁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해야 했다. 가람 문학회 회원들의 작품 하나하나가 모두 자신의 혈육처럼 느껴졌다. 준호는 마지막까지 볼 수 없었던 자신의 작품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찾아다녔다. 액자에 넣은 것은 주로 8절지의 소품이고, 액자없이 만든 것은 작은 것이 4절, 그리고 대부분이 2절지나 전지를 사용한 것인데 준호의 시는 뜻밖에도 공책을 뜯어낸 자국을 다듬지도 않은 채 펜글씨로 시를 적어 넣은 것이었다.


“ ~ 내 손은 언제나 문을 연다. 너에게로가는 문을 연다.

내 마음은 늘 문을 닫는다. 너에게로 향한 문을 꽁꽁 걸어잠근다~ ”  


준호는 자신이 여학생에게 한눈이나 팔 처지가 아님을 잘 알았다.  어둑어둑할 때까지 밭에서 땀에 절어 사는 부모님과 올망졸망한 다섯 동생들의 모습만이 가슴에 가득 자리잡고 있었다.  열 일곱의 나이, 그 나이에 준호는 여학생 따위가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마음의 빗장을 단단히 걸어 잠그느라 애써야 했다.


준호의 시 <문(門)>은 보통 수업시간에 필기할 때 쓰는 대로 시만 달랑 써넣었다. 시를 쓴 나머지 한 귀퉁이에는 낙서까지 해놓았다. 자세히 보니 스케치할 때 쓰는 4B연필로 ‘바보’라고 쓴 후에 잘 지워지지 않는 지우개로 지저분하게 지운 흔적을 남겨두었다. 준호는 머리 속이 갑자기 텅 비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건 무슨 뜻일까, 아무리 궁리해도 춘자의 속뜻을 읽을 수가 없었다.


시화전은 성황리에 끝났다. 공책 찢은 종이에 쓴 준호의 시가 오래도록 학생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시화전 이후로 무표정한 춘자와는 달리 준호는 가슴에 뜨겁고 둥그런 불덩이 하나를 품게 되었다. 그 불덩이가 화끈거리며 그 존재를 알릴 때마다 준호는 춘자의 모습을 찾아 교정 여기저기를 헤매곤 했다. 간혹 걸음을 멈추며 자작시를 웅얼거리기도 하는 준호였다. “ ~ 내 마음은 늘 문을 닫는다. 너에게로 향한 문을 꽁꽁 걸어 잠근다~ ”  그러면서도 다시 발길을 떼어 미술실쪽으로 향하는 준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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