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rgen Aug 16. 2020

초상(肖像) 박 춘자 5

5화 / 유화 2

유화 2


미연, 정자, 순실, 성주, 영숙, 영애, 그네들은 문화센터의 연구반에 등록하는 대신 선생님을 모셔다가 그룹 렛슨을 받기로 결정했다. 기초 1반 3개월, 기초 2반 3개월을, 그리고 중급반에서 함께 서툰 그림 보여줘가며 부끄럼없이 지내던 친구들이니 지선이 그 그룹에 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볼일이 있으나 없으나 화방에 늘 드나들던 정순실이 화방 미(美)에서 변화백을 만나 수단좋게 섭외를 한 덕에 그들은 변화백을 선생으로 모셨다. 지도 선생이 변화백이라는 말에 지선도 선뜻 응했다. 그는 서울을 주제로 수채화 전시회를 열었었다. 지선은 그 전시회의 그림 중 몇 가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녹색 물감을 쭉 끼얹은 곳에 진주홍색의 크고작은 점 몇 개로 꽃을 피운 한강 고수부지, 황금색으로 한강에 떠있던 63빌딩, 보랏빛으로 서늘하던 겨울 북한산, 생선 비린내가 묻어 있는 흑석동의 좁은 시장 골목, 복숭아 색깔이 아련히 피어나는 우이동의 봄, 변화백의 그런 그림 몇 점을 기억하고 있는 지선이었다.     


모임이 거듭될수록 그림 외의 일들로 분주해졌다.  오전 레슨이 끝나고 김정자가 점심으로 자장면을 산 이후부터 돌아가며 점심을 내게 되었다.  강성주는 항상 이태리 식당으로 회원들을 끌고 갔다. 그리곤 피렌체에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들에 대해 끊임없이 설명했다. 특히 마르티니의 <수태고지>에 대한 이야기를 매번 꺼내곤했다. 금빛을 주제로 붉은 색과 감색으로 정리한 그림이 너무 좋다는 이야기를 하면 회원들은 모두 언제한번 유럽 미술관 순례 여행을 떠나자고 의견을 냈다. 미술품 관람을 위해 여행을 가자는 둥, 스케치 여행을 가자는 둥, 여행 이야기가 나오면 회원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이곳저곳의 지명을 갖다대곤 했지만, 여행이 구체적으로 계획된 적은 없다.


햇빛이 좋은 날은 빛이 아름다와서 야외로 나갔다. 처음엔 덕수궁으로 나가 미술 대회에 나온 아이들처럼 설레이는 붓질을 했다. 청평으로 호수를 그리러 갔다. 태안으로 바다를 그리러 갔다. 어느 땐가는 경부선을 타고 내려가면서 창밖의 풍경을 손빠르게 스케치북에 옮겨 담기도 했다. 물감은 떨어지기도 전에 필요 이상으로 사들였고, 점심도 자장면에서 해물탕으로, 숯불 갈비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변화백의 아뜨리에는 점점 수선화의 멤버들에게 점령당해 갔다. 수채화를 그리고 난 그 뒷처리를 서로 다투어 하던 그네들은 그림 그리기가 끝난 후 와서 청소해 주는 도우미를 불렀다. 누구의 집에 가든지 같은 모양의 그림들이 거실에, 식당에, 현관에 걸려 있었다. 남편들은 그런 아내들을 자랑스러워 했다. 1년 남짓의 시간을 그런 수선스러움으로 보냈다.  


“이봐 순실씨, 미에 가서 전시회 준비 좀 알아봐.”  

“초청장만 만드나요?  화첩은 어떻게 하죠?”  

“아휴, 화첩이라니?  그런 거까지 만든다면 난 안 할거야.”  

“지선씨가 그렇게 말하면 우린 어쩐다누?”  

“화가도 아닌 아마츄어들이 작은 전시회 하면서 화첩은 무슨 화첩...?”  

“그나저나, 정자 형님네 사장님께 너무 고맙다. 빌딩 로비를 빌려 주시고, 정말 외조가 대단해!”  

“무슨 소리야? 나는 어젯밤에도 그이한테 야단야단을 했구만. 어디 화랑 한 군데 잡아 주지 못하고 로비가 뭐야?  어수선하게.”  

“아이구 형님! 우리 그림 생각해보우. 화랑에 떡하니 걸어놓고 정색을 하고 서서 찬찬히 들여다보면 오히려 큰일 아니요?  그냥 로비에서 휙휙 보면 그만이지.”  


변화백은 완성도가 떨어진 그림들에 끝마무리 붓질을 하느라고 여자들의 말에 끼어 들 틈이 없었다. 방금 마친 그림이라고는 하나 이미 물마른 수채화를 손질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일은 변화백의 몫이었다. 그러나 변화백이 무조건 모든 그림의 끝마무리를 해주는 건 아니었다.  본인이 직접 손질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지켜 보다가 한 두 번 정도 직접 손을 댔다. 그렇게 한 두 번정도만 변화백이 그림에 손을대면 신기하게도 그림은 손을 떼도 좋을 완성품이 되었다. 모두들 전시회 준비로 바빴다.


순실은 집에 바쁜 일이 있어서 서둘러 가고 지선은 혼자 지하철을 탔다.  퇴근시간으로는 약간 이른 시간이어서 지하철 안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지선은 문 쪽으로 세워진 쇠기둥에 몸을 기댄 채 가지고 다니는 계간지를꺼내 읽었다. 도란도란 여자들의 이야기 소리가 지선의 귀에 들어왔다.

“자기 집에 새로 들여놓은 그림 있잖아, 그거 꽤 괜찮더라. 누가 그린 거야?”  

"그림"이라는 말에 지선의 귀가 본능적으로 열렸다.

“음, 비싸게 주고 산 거야.”  

“그래? 그렇게 비싸 보이진 않던데. 유명한 화가 그림이야?”  

“아니, 명수 아빠 친구 와이프가 지난 달에 백화점 갤러리에서 전시회했거든. 요새 그이랑 그 친구가 회사일로 좀 얽혀 있어서 인사차 갔다가, 인사로 그림 하나 사 온거야.”  

“얼마나 주고?”  

“몰라, 그 친구 자존심 살려주느라고 왕창 비싸게 매겨서 샀다나봐, 얼만지 말도 안 해. 회사에서 돈 낸 거니까 신경 쓸 거 없대. 요새 백화점 갤러리 같은 곳에서 그런 전시회 많이 하더라구. 부잣집 마나님들 이야기지.”

“맞아, 붓글씨 조금 쓴다 하면 서둘러 전시회 열고, 그림 그리기 시작했다 하면 금세 전시회 열고, 자비로 시집을 출간하고 무슨 출판 기념회는 그리도 뻑적지근하게 하는지. 아,나도 한가하게 그림이나 그리며 살면 좋겠다.”  

“우리도 문화센터에서 뭐 하나 골라 배워볼까?”  

“아직 나는 안돼. 내가 문화센터 다닐려면 애들 뭐 하나라도 더 가르쳐야지. 명수 엄마는 하고싶은 대로 해도 될 형편이니 좋겠다.”  

“자기가 뭐 어때서 형편 찾고 그래? 우리 다음달부터 붓글씨 배울까?”  


지선은 그들의 대화를 한 마디도 놓치지 않았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 와그르르 소리까지 내며 무너지고 있었다. 백화점, 문화센터, 전시회, 회사거래, 비싸게 주고 산 그림, 자비 출판, 뻑적지근한 출판기념회, 부잣집 마나님들…   토막난 말들이 낱개로 흩어져 제멋대로 바닥에 뒹굴며 지선을 어지럽혔다.  


 


작가의 이전글 초상(肖像) 박 춘자 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