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rgen Aug 16. 2020

초상(肖像) 박 춘자 11

11화 / 유화 5-1

유화 5  


김정자의 검은색 롱 스커트가 낭창낭창하니 몸에 휘감겨 부드러운 실루엣을 만들어낸다. 롱 스커트 자락이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 휙 쏠려간다.  

"아무래도 어수선하지?  어디 실내를 얻을 걸 잘못했나 봐."

입구에서 꽃바구니들을 정리하고있는 지선에게 다가오며 한 마디 건넨다.

"괜찮은데요. 생각보다 손님들이 많아요. 이렇게 몰려올 줄은 몰랐어요."

"근데, 지선씨, 별로 기분 안 좋아 보인다. 좀 어수선하고 떠들고 그래서 그런가?"

"아니에요, 아니에요. 이 아이리스 좀 봐요.예쁘죠?"


로비에 마련한 전시장 입구는각종 꽃바구니로 가득 찼고, 그 꽃바구니들 마다에 보낸 사람의 이름이 적힌 리본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전시장은 수선화 회원 각자의 초대 손님들, 변화백의몇 몇 제자들, 건물 내에서 근무하는 사무원들로 북적거린다. 가끔 남자들의 굵직한 웃음소리가 공중에 떠오른다. 초면인 남편들끼리 통성명하며 명함을 주고받는 모습이 눈에 띤다. 제일 분주한 사람은 김정자다. 남편이 사장으로 있는회사 건물 로비에서 전시회를 하니 직원들이 오며가며 들락거린다. 김정자는 응용미술을 전공했지만 결혼후 30년 넘도록 그림에서 손을 뗐다가 근래에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그림은 수선화 회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고 품성도 유해서 회원들이 잘 따랐고 자연히 그녀는 수선화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녀는 수채화를 시작하기 전에 한 미술 애호가 클럽에 들었었는데 일년을 넘기지 않고 곧 탈퇴했다. 미술 작품 컬렉션을 위해 감상하는 법을 배우고, 클럽 회원들이 함께 해외의 유명 미술관을 방문하여 작품 감상도 하고, 알음알음으로 연줄이 닿는 화가들의 그림을 매입하기도 했다. 그 때 김정자도 장안에서 내노라하는 화가의 그림 몇 점을 구입했다. 친정에서 받은 유산이 제법 많아 값 나가는그림 몇 점은 쉽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김정자에겐 한 가지 콤플렉스가 있었다. 미대 출신으로 그림 보는데 아주 숙맥은 아니고 남들이 부러워하는작품을 척척 살 수 있는 재력도 있고, 남편도 대기업의 사장으로 있어서 어느 축에서나 빠질 이유가 없다. 다만, 김정자가 가진 콤플렉스란 남편이 오우너가 아니라 고용 사장이라는것, 그것이었다. 몇 명 안 되는 회원이지만 그들은 손꼽히는재벌가의 안 사람들이었다. 오직 김정자의 남편만이 발령에 따라 기업 내에서 이 회사 저 회사로 옮겨다니는고용 사장이었다. 자신의 그런 처지가 미술 감상과는 무관했지만 일년여 지나는 동안 김정자는 자신이 있을곳이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남편이 근무하는 회사의 그룹 회장 가족이 끼어 있는 것이 주 원인이었다. 남편의 몇 달치 월급이 되는 그림 한 점을 구입할 때에도 회장 가족에게 마음이 쓰였다. 말 한 마디,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다 자유롭지 못하고 스스로 제약을 받았다.


그 후로 문화센터에 등록해 붓을 다시 들고 그림 그리는 일에 재미를 붙였고, 수선화의 구심 멤버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김정자는 수선화의 막내 이미연을 마치 어린 동생 대하듯 예뻐한다. 나이 40이 다 돼가는 미연이지만 김정자의 눈에는 미연의 티없이 맑은 모습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다. 미연의 남편이 김정자 남편과 같은 회사의 차장이라 혹 미연이 자기를 어려워할까 봐 김정자가 오히려 먼저 조심을 하곤 했다. 미연은 남편들의 그런 위치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김정자를 수선화의 맏형님으로서 대했고, 그 중 어리다는 핑계로 응석 비슷한 애교도 부리곤 했다. 김정자는그렇게 맑은 미연이 부러웠다. 미술 애호가들 그룹에서 김정자 자신이 회장 가족에게 가졌던 부담을 미연은 전혀 느끼지 않는다. 그런 미연의 성격이 부러웠다.  


문화센터에서 만난 그들이 별도의그룹을 만들어 나온 후 1년여 동안 그들은 열심히 그림을 그렸고, 몇몇의 작품은 아마추어들의 작품으로서는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수준에 올랐다. 문화센터에서 중급반까지 끝낸 후, 연구반 대신에 시작한 수선화의 활동은 일 년이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사람도 있고,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왔던 사람도 있으니 취미삼아 붓을 처음 잡아본 사람들의 일년하고는그 발전 속도가 달랐다. 여름에서부터 전시회를 하자는 의견이 나돌았다.


"형님, 우리도 전시회 해 볼까요?"

난데없이 전시회 얘기를 꺼낸것은 평소에 별 말이 없는 한영애였다. 회원들의 중간쯤 나이인 영애가 굳이 누구를 지칭하여 말을 건넨 것은 아니고, 형님,으로 운을 뗀 후 갑자기 전시회 얘기를 꺼낸 것이다.

"전시회요?"

미연이 재빠른 반응을 보였다.

"갑자기 웬 전시회야?  우리들이 전시회를 열자는 얘긴가?"

김정자가 나섰다.

"예, 그런 목표가 있으면 우리가 더 열심히 그리게 되고, 또 그 동안 그려온 것을 점검도 해볼 수 있고, 그렇잖아요?"

"그렇지만 우리가 이렇게 그림 그려온 지가 아직 2년도 안됐어.  그 만큼 하고서 무슨 전시회를 한다는 거야?"

"사실은 저 지난 토요일에 우리 친구 서예 전시회에 갔었거든요."

모두들 영애 주위에 모여 귀를기울였다.

"우리 고등학교 동창인데요, 그 친구가 자기 붓글씨 전시회를 한다고 얼마전에 초청장을 보냈더라구요.  그래서 지난 토요일에 동창들하고 거길 갔었어요.  난 그 애가 붓글씨 쓴다는 얘기를 들어보지도 못했었는데 글쎄 어느 결에 그렇게 글씨를 배워서 전시회까지 하더라구요."

"그래, 작품은 어땠어? 좋았어?"

"예, 멋지게 잘 썼더라구요.  사실은 내가 글씨를 제대로 볼 줄이나 알아야죠 뭐.  그런데 그 친구가 글씨를 오랫동안 써온 것도 아니라네요 글쎄.  배우기시작해서 2년 동안 썼대요."

"와아, 그럼 글씨 2년 쓰면 전시회 할 수준이 되는 건가 보다."

"개인전이 아니구요, 가르치시는 선생님 문하생 열 명이 동인전을 열었어요.  어떤 사람은 한 오 년 동안 쓴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3년, 그렇게 다  다르대요. 본격적으로 글씨 쓰는  사람들은  개인전을  연 사람들이 많구요,  취미삼아 쓰는 사람들 몇몇을 함께 모아서 동인전으로 연 거래요. 우리 동창이 제일 초보에요. 그래도 하객들이 화려하던 걸요."

"아, 그랬구나."

"그래, 거기 가 보고서 영애씨도 전시회 좀 해보고 싶어진 거야?"

"예, 뭐 우리라고 못할 것도 없겠다 싶어서요."

"글쎄, 못할 거야 없지. 이제부터 그렇게 목표를 세우고 준비를 하면 우리도한 일년 후쯤에 전시회쯤 할 수 있겠지."

"뭐 일년 후까지 갈 게 있어요?  그동안 그려 둔 것들도 여러 점 있고, 이제부터 몇 작품 해 보면 이 겨울이라도 할 수 있겠네요."

"아니, 이번 겨울에?"

"못할 게 뭐가 있어요. 하면 되지."

여자들은 전시회 이야기로 한나절을 보냈다. 한영애가 들려준 동창의 서예 전시회 이야기는 수선화 회원들의 내부에 다소곳이 숙이고 있던 무엇인가를 뾰족이 고개 들게 하는 힘이 있었다. 모두들 눈빛을 반짝이며 전시회를 곧 열 것처럼 서둘러댔다.    


변화백의 작업실은 각자 가져온 작품들로 가득했다. 그동안 그렸던 작품들을 모아서 우선 변화백과 회원들이 검토를 해본 다음에 전시회를 하든지 포기하든지 결정하기로 했다. 각자 대여섯 개의 작품들을 가져왔다. 강성주는 무려 열 개의 작품들을 가져왔다. 50여 작품들을 일일이 살펴본 변화백이 전시회에 내걸어도 될 만한 작품들이라고 평을 하자 모두는 전시회를 열기로 결정하고 작업에 들어갔다. 김정자의 주선으로 그 남편이 있는 회사 빌딩의 로비를 전시장으로 정했다.  B빌딩은 누구나 찾기 쉬운 위치에 있으며 지하 주차장도 넉넉하여 관람객들이 오기에 편한 곳이었다. 빌딩이 큰 만큼 로비도 훤하고 넓었다. 작품을 전시할 곳은 출입구에서 제법 떨어져 있어서 로비라고는 하나 그리 산만하지는 않았다.  양쪽으로 꺾어진 모서리 벽면이 아늑하고 맞은 편으론 통로를 사이에 두고또 벽이 있어서 작품을 전시하기에 지장이 없었다. 몇 번씩이나 우르르 몰려가 현장답사를 하고 벽면의 폭을 재면서 작품 설치 구성을 한 후에 20여 작품을 전시하기로 했다. 몇몇은 두 작품을, 몇몇은 세 작품을 출품하고, 변화백의 작품 한 점을 전시하기로 정했다.


“우리 이번에 작품을 판매할까요?”  

애초에 전시회 이야기를 꺼낸 한영애가 의견을 냈다.

“아니, 뭐라구요?  판매까지?”

“예, 기왕에 전시하는 거 아예 판매도 하자구요.”  

“누가 우리 그림을 산대?  화가도 아닌 우리가 그린 그림을?”  

“요즘은 가정집에 인테리어로 미술작품을 구입하는 일이 흔해졌어요. 화가들의 대작보다는 오히려 우리들 그림이 편하지요.”  

“판매까지 할 게 뭐 있어요?  아는 사람들 초대해서 그 동안 우리 이런 일했다고 보여주기나 하면 됐지. 작품에 대한 반응도 좀 살펴보고.”  

“연말도 되고 했으니 작품 판매해서 이웃돕기 성금으로 내놓으면 우리 전시회가 더욱 뜻있는 일이 될 것 같아서 내 본 의견이에요.”

“그 의견은 좋은데, 작품 안팔아도 우리 그냥 이웃돕기 성금은 내자구.”

“듣고 보니 괜찮은 생각인데요. 이웃돕기에 우리 작품을 기부하는 셈이네요. 그럼 우리 작품 판매해요.”  

이런저런 의견이 오간 후에 이번 전시 작품을 판매하기로 정했다. 값은 붙이지 않고 구매자가 정하는 대로 팔기로 했다. 판매대금을 사용할 곳도 미리 다 정해두었다. K구청에 등록된 독거노인들의 양식과 겨울나기 난방용 연료를 마련해 주기로 했다. <수선화 동인회 작품전>이 <이웃돕기 기금마련 수채화 작품 전시회>라는 긴 타이틀로 바뀌었다. 자신들의 작품이 정말 팔릴지, 그렇다면 얼마나 값이 나갈지, 어떤 사람이 사갈지, 회원들은 궁금증이 많은 어린아이들의 마음이 되었다.


전시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다녀갔다. 김정자의 남편은 점심 시간과 퇴근 시간에 꼭 들려서 회원들을 격려했고, 다른 회원들의 남편들도 퇴근 시간이면 전시회장으로 와서 남편들끼리 함께 저녁도 먹고 그랬다. 전시된 작품보다 더 크게 눈에 띠는 화환을 남편들의 번듯한 사업 거래처에서 세워두고 간 것이 즐비했다. 누가 화가도 아닌 우리들의 그림을 사겠느냐는 생각은 기우일 뿐, 그림은 토요일을 넘기지 않고 다 팔렸다. 작품의 제값이라기보다는 이웃돕기 기부금의 성격을 띤 가격들이었다. 아이들도 친구들을 여러 명씩 대동하고 나타나 자신의 엄마를 자랑스럽게 소개하곤 했다. 지선의 작품도 예외없이 비싼 가격에 팔렸다. 첫날에 유정이 부른 배를 앞세우고 뒤뚱거리며 영식과 함께 왔다. 제가 엄마의 작품 <서울 야경>을 맡아야 한다며 판매를 알리는 빨간 장미 코사지를 그림 아래에 붙여두었다. ‘엄마 사랑해요’라고 쓴 카드도 그림 옆에 함께 붙여두었다. 지선이 출품한 또 하나의 작품 <고양이>는 토요일 오후까지 판매되지 않고 있었다. 일찍 퇴근을 하고 온 준호와 점심을 걸른 회원들 몇몇이 늦은 점심겸 이른 저녁 식사를 하고 오니 지선의 <고양이> 그림 아래에 빨간 장미 코사지가 붙어있었다.


“여보, 당신 이 고양이 그림도팔렸군.”  

정수기에서 찬물을 따르는 지선에게 준호가 넌지시 일러준다.

“글쎄 말예요, 누가 그런 그림도 사가긴 하네요. 이웃돕기 한다니까 그냥 사준 거겠죠 뭐.”  

“아니, 그림이 좋으니까 산걸 거야, 틀림 없어요.”  

“맞아요. 아까 오신 남자분께서 이 그림 앞에서 한참 동안 서서 바라보고 화가 이름이 누구냐며 묻기까지 하던 걸요.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사야겠다고 했어요.”  

전시장을 지키고 있던 성주가 쪼르르 쫓아오며 준호의 말을 거든다.

“그봐요, 당신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산다고 했대잖아. 이제 우린 그만 들어가도 되겠지?”  

“그럼요. 두분 먼저 들어가세요. 여긴 이렇게 여럿이 있는데요 뭘. 걱정말고 들어가세요.”  

운전석 옆에 앉은 지선이 흘깃 손목 시계를 본다.

“지금 여섯시니까, 우리 백화점에 잠깐 들렸다 가요. 문 닫으려면 아직 한 시간 넘게 남았으니까.”  

“그러자구. 뭐 살 거 있어?”  

“으응, 그냥 가서 구경해 보고.”   


백화점 주차장에 차를 대고 준호가 운전석 의자를 뒤로 젖힌다.

“당신 갔다와요. 나는 차속에서기다리고 있을게.”  

“피곤해서 그래요?  잠깐 같이 가요. 자기가 뭐 운전기산가. 나 쇼핑하는 동안 차속에서 대기하고 있게. 같이가요.”  

“그러지 그럼.”  

지선은 앞장 서서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바로 다음 칸에 탄 준호가 지선의 허리에 팔을 두른다. 지선이 슬그머니 준호의 팔을 떼어낸다.

“여보, 여긴 서울이에요. 빠리가 아니라구.”

지선이 앞장 서서 간 곳은 유아용품 판매 매장이다.

“아니, 당신 지난번에 유정이랑 출산 준비물 안 샀어? 난 준비가 다 된 줄 알았는데.”  

“다 준비했어요. 걱정마세요. 유정이랑 이서방이랑 같이 샀대요.”  

“당신이 같이 안 가고?”  

“응, 내가 좀 바빠서. 그런데 나도 할머니니까 뭔가 좀 사 줘야지.”  


지선이 이것저것 고르는 동안준호도 곁에서 연신 감탄사를 연발하며 입을 다물지 못한채 이것저것 손으로 만져보고 신기해 했다. 점원이 재미 있다는 듯이 웃는다.

“이봐, 이건, 아니 이렇게 작은 것이 있어, 이게 아기한테 맞는 거야? 이 양말 좀 보우, 이건 뭐지, 아니 모자가 이렇게 작아, 내 주먹에 맞네.”     

준호는 갑자기 사탕가게에 들어선 어린아이처럼 생기가 돌았다. 그런 준호를 곁에서 지켜보는 지선의 눈에 엷게 물기가 배었다. ‘여보, 난 유정이를 낳을 때도 이런 행복을 가지고 싶었었어.’ 지선은 목구멍을 간지럽히는 말을 꿀꺽 삼켰다.  


작가의 이전글 초상(肖像) 박 춘자 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