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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Aug 23. 2020

아니쉬 카푸어 - 큰 나무와 눈

비전문가의 미술작품 감상

감상鑑賞이 아닌 감상感想입니다.


Anish Kapoor - Tall tree and the eyes

https://www.guggenheim-bilbao.eus/en/the-collection/works/tall-tree-and-the-eye

Stainless steel

13×5×5 metres  구겐하임 뮤제움/빌바우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만든사람이 누구인지, 작품의 제목도 아무것도 모른채 이 조형물을 보는 즉시 느끼는 첫인상이 무엇일지 참 궁금하다.


이 작품은 아니쉬 카푸어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를 읽고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이다. 시는 “거기 나무가 솟아올랐노라 오 순수환 솟구침이여” 이렇게 시작된다.


작품의 제목이 <큰 나무와 눈>인데 이 작품에서 나무나 눈이 느껴질까? 이게 무슨 나무를 상징하냐고 어이없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건 정말 나무와 같다고 공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나무와 같은 모습을 찾아본다. 나무는 우뚝 서있다. 높이 올라간다, 가지가 자꾸 생긴다. 이렇게 나무의 특징을 생각해보면 이 작품이 나무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는 것이 이해된다. 여러 개의 공이 위로 뻗어가는 형태로 우뚝 서있으니 나무와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나무 가지는 길고 뽀족한데 이 작품은 둥근 공으로 쌓여져있다. 둥근 공에 관심을 가져본다. 작품 제목이 <큰 나무와 눈>이다. 눈과 무엇이 같다는 것일까? 눈을 생각해본다. 둥글다, 반짝인다, 앞의 사물이 비친다. 이러면 스테인레스틸로 만들어진 이 작품에서 눈을 유추해낼 수 있다.


1954년에 인도에서 태어난 아니쉬 카푸어는 1973년에 영국으로 이주한다. 영국에서 본격적인 미술교육을 받고 초기에는 인도의 안료에 매료되어 피그먼트 작품을 만든다.

인도와 유럽의 정체성을 모두 갖춘 카푸어는 브론즈, 사암, 대리석, 유리섬유 등 재료에 대한 깊은 이해로 다양한 조각작품을 제작하고, 이 작품처럼 스테인레스로 만든 작품들도 많다.

작가는 구스타프 융, 폴 니구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원형적 이미지와 제의적 과정으로서의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예술적 기교를 최소화한 작품 제작에 몰두한다. 기하학이나 유기적 형태로 작품을 제작하는 아니쉬카푸어는 예술적 기교의 최소화, 무정형적, 원형적이며 심층적인 소통방식의 개념을 다룬다.


릴케의 시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는 19세기 요절한 무용수 베라 오우카마 크노프에게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바치는 노래이다. 신화속 오르페우스가 뱀에 물려죽은 에우리디케를 이승으로 되살려 내려고 애쓰는 이야기이다. 시의 화자가 릴케 자신이고, 또 오르페우스이다. 오우카마 크노프를 에우리디케로 대상화한다.

릴케가 종이에 시 원고를 썼다면 카푸어는 공간에 시를 쓰며 그 자신이 릴케이며 오르페우스가 된다.

오르페우스는 전설적인 리라의 명연주자이다. 그가 리라를 연주하면 숲속 동물들 뿐 아니라 나무들 바위들까지도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신화가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으로 넘나들듯이 릴케의 시는 현실과 신화의 대립적인 영역을 넘나든다. 아니쉬 카푸어는 그 시를 읽고 정형화된 활자와 무정형의 공간을 넘나들면서 이런 조형물을 만들었다. 현세와 저승의 구분없이 모호한 내용으로 이어지는 시에서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은 76개의 구체들로 이루어졌다.

시의 첫 연은 "거기에 나무가 솟아올랐노라 오 순수한 솟구침이여" 로 시작하는데 이 조형물도 전시실이 아닌 예상치 못한 공간에 나무처럼 우뚝 솟아있다. 작품을 이룬 둥근 공들은 마치 나무가지가 뻗어나가듯이 증식되어가고, 서로 반사하면서 왜곡된 이미지들을 보여준다. 서로 이웃한 둥근 구체들이 빛이 반사되는 밝은 표면과 어두운 틈으로 경계와 경계없음의 한계를 흐릿하게 지운다.  

빛과 그늘, 부피와 공간의 복잡한 구성을 통해서 이 작품을  보는 이들은  보이는 세계의 불안정성을 느끼게된다. 카푸어의 많은 작품들은 주위 환경을 반영하면서 형태와 공간에 대한 관계를 인식하게 해준다. 릴케의 시 오르페우스에 바치는 소네트는 활자로 쓰여져있지만 그 시에서는 오르페우스가 연주하는 아름다운 리라소리가 들리고, <큰 나무와 눈>은 조형물인데 이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은 그 앞에서 시를 읊는다.

작품자체가 공간에 쓴 詩다. 이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은 리듬을 더하는 운율이다. 작품과 관람객의 몸이 함께 함으로써 <큰 나무와 눈>이라는 시가 완성되었다.


사진출처 http://anishkapoor.com/391/tall-tree-and-the-eye 삼성미술관 리움 야외전시.


인터넷에서 오르페우스를 검색하면 수많은 조각 작품들이 나타난다. 여러 미술가들이 신화를 조각품으로 만들었는데 로댕도 오르페우스를 조각했다. 그 시기는 릴케가 로댕과 함께 일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릴케는 로댕의 완성된 작품으로 오르페우스를 봤을 것이다. 재미있는 건, 시인 릴케가 조각가 로댕의 작품을 봤고, 시를 썼고, 조각가 아니쉬 카푸어는 시인 릴케의 작품을 보고 이런 조각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이 작품은 여러 예술가들의 영감을 느끼게되는 작품이다.


아니쉬 카푸어는 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내가 항상 좋아했던 그의 소네트 오르페우스 이미지의 결합이며, 이 작업은 이미지를 끝없이 반영하는 일종의 눈입니다.”


나는 삼성미술관 리움의 아니쉬 카푸어 작품 <큰 나무와 눈> 앞에 서면 늘 이런 생각을 한다. 릴케의 시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에서는 오르페우스의 리라 소리, 청각을 통한 감상이 이뤄지는데, 카푸어는 그 청각과는 관계없는 <큰 나무와 눈>이라는 시각적인 단어를 썼다. 왜일까?

어쨋든 나는 늘 <큰 나무와 눈>앞에서 청각과 시각을 다 동원하여 감상에 젖어든다. 오르페우스의 리라 연주도 듣고, 릴케의 시를 읊고, 카푸어의 조형물을 바라본다. 젊어서 한때는 시인 릴케에 빠져있었는데...


사진출처 https://www.economist.com/books-and-arts/2009/09/24/

courtyard of the Royal Academy, London 자신의 작품 앞에 서있는 아니쉬 카푸어. 이코노미스트 인터뷰 기사 사진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집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참고 ; 소네트는 14행으로 쓴 시의 한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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