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문가의 그림 감상
감상鑑賞이 아닌 감상感想입니다.
Jackson Pollock, Male and Female
예전엔 카드를 직접 만들기도 했었다.
커다란 종이에 각 색으로 바탕색을 칠하고, 붓에 먹물을 묻혀 바탕 종이 위에 툭툭 뿌려준다.
종이를 약간 기울여 방울진 먹물이 이리저리 흐르게도 하고, 그 방울에 바짝 엎드려 입으로 호호 불면서 선을 이동시키기도 한다. 다음엔 카드의 대지보다 약간 작은 크기로 잘라 불에 녹인 촛농을 입힌다. 이걸 대지에 붙이면 끝.
고등학교 시절 멋모르고 만든 카드였다. 짙은 청색바탕에 검은 먹물의 방울과 흐름은 제법 분위기를 돋궈 주었었다.
이제 생각하니 그도 또한 드립 페인팅이요 액션 페인팅이었는데 그 땐 액션 페인팅이 뭔지도 모르던 나였다. 뉴요커들에게 싸이코 화가로 회자되던 잭슨 폴록이란 화가가 있었다는 것도 까맣게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 잭슨 폴록이 영화를 통해 새로 태어났다. 미국 영화배우 에드 해리스가 보여주는 폴록은 그의 그림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사진출처 https://www.philamuseum.org/collections/permanent/69527.html
Male and Female, 1942 ; Oil oncanvas, 73 1/4 x 49 in; PhiladelphiaMuseum of Art
추상화 앞에 서서 첫눈에 ‘아하!’하고 그림 제목을 이해할 수 있다면 행운이다. 사실은 제목을 그림 속에서 찾아내려는 노력이 얼마나 촌스러운 짓인가. 그래도 문외한인 나는 그림 속에 제목이 들어있어야 안심이 되니 어쩌랴.
우선 남자와 여자가 보이니 추상화 읽기에 성공한 셈이다. 그런데 이 촌사람의 눈에는 <Male and Female>이 우리의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으로 보이니 폴록이 깜짝 놀랄 일이다. 그림의 양쪽에 장승처럼 버티고 선 남자와 여자. 남자의 몸엔 왜 숫자를 써 넣었을까? 남자가 더 계산적이냐 여자가 더 계산적이냐는 논쟁이 가끔 있는데, 폴록은 남자에게 숫자를 그려 넣었다.
숫자는 세상살이를 대변하는 기호라고 할 수 있다. 그림 속의 남자에게 세상살이의 방법인 숫자를 그려 넣을 때 자유분방한 폴록의 마음은 슬프고 쓸쓸했을 것이다.
<어린 왕자>에서는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고 슬퍼한다. 셍떽쥐베리는 <어린왕자>를 1943년에 발표했고, 폴록은 <Male and Female>을 1942년에 그렸다. 그러니 폴록이 <어린왕자>에서 언급하는 숫자를 염두에 둔 건 아니리라. 다만 감상자인 나의 마음이 장승처럼 버티고 선 남자의 검은 몸에 써있는 숫자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을 뿐이다.
전문가들은 그림의 윗 부분에 검정 노랑 빨강 흰색의 물감을 흩뿌린 것이 그 후에 나타나는 드립페인팅-액션페인팅 기법을 예고한다고 말한다.
나는 폴록이 그림의 남자 몸에 숫자를 써넣으며 숫자를 알게된 성인 남자에 대한 슬픔에 복받친 몸짓인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
여자의 몸에 아기집을 그려 넣으며 폴록은 다시 슬퍼졌을 것이다. 알콜 중독까지 치달은 자신의 예사롭지 않은 삶을 생각할 때 ‘생명의 근원’을 그려 넣는 마음에 아련한 슬픔이 번져오지 않았을까…
이 그림에서 숫자를 지우고 아기집을 지운다면 이 그림은 생명없는 그림, 죽은 그림이 된다.
폴록은 갔다. 그를 정점으로 액션 페인팅의 기법도 은근히 물러섰다. 그러나 오늘 내 마음 속에 한 가지 실험충동이 부풀어오르니, 그것은 바로 폴록의 흉내를 한번 내보는 것이다.
고무 풍선에 물감을 넣어 천장에 매달아 놓는다. 색색의 물감이 든 풍선을 향해 총을 쏜다. 그리곤 그 쏟아지는 물감을 바닥에 놓인 화폭에 받는다.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일 아닌가. 물감을 내가 홈빡 뒤집어써도 좋고.
잭슨 폴록은 그의 그림에 색채를 쏟아 부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혼을 쏟아 부은 것이다. 나도 어딘가에 나의 혼을 쏟아 붓고싶다.
남자의 머리 속에서 모든 숫자를 다 지워주고싶다. 숫자에서 해방된 남자를 그리고 싶다. 그리하여 마주선 여자의 아기집엔 숫자를 모르는 아기가 잉태된다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