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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Aug 24. 2020

오색 물감을 풀다 - 미술 1

북아트 <풀다>

오색 물감을 풀다 - 미술 1


물이 담긴 컵에 물감 한 방울 떨어뜨려 보았는가? 그 자유로운 유영을 보았는가?

그런 자유로움이 참 부럽다.

물 속에 물감이 번져나가듯이 퍼져나가듯이 풀어지듯이 자유롭고 싶다.

작품도 생활도, 생각도 몸도, 자유롭고 싶다.


작품

<사계,  여름 가을 겨울>  

봄은 아코디언 북으로 들판에 피어나는 꽃들을 수채화로 그림.

여름은 상자 뚜껑에 바다를 그리고(아크릴) 상자 속에서 그물과 조개 돌들이 쏟아져나온 설치. 녹말로 만든 넓은 인조조가비에 여름 시를 썼다.

가을은 플랙북 스타일로 단풍잎 모양으로 자른 색지에 가을 시를 썼다.

겨울은 터널북 형식으로 흰눈 쌓인 숲속을 페이퍼 커팅했다.



<WOMAN’S LIFE> “여자의 일생” 이런 진부한 표현은 이제 쓰지 않는다. 유명한 모파상의 소설도, 심금을 울리는 이미자의 노래도, “여자의 일생” 그런 말은 꼰대들이나 하는 말이 되었다. 그래도 표현하고싶어서 이미지로 만들었다.

별북 스타일로 탄생부터 노년까지를 이미지화했다.


<Woman’s Life> 관련 


<못난여자의 변(辯)>  

도련님, 서방님, 아가씨, 이건 집에서 부리는 종들이 주인댁 자제들에게 썼던 호칭이었다. 며느리는 시집 식구들을 그 호칭으로 부른다.

우리나라 여자들이 결혼 후에도 자기의 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성까지 바꾸는 서양 여자들보다 여권이 앞선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겉으론 서양 사람들에게 그렇게 설명하고 다니지만, 내 속에선 "아니올시다"라고 쓴웃음을 짓는다.

서양에선 결혼하면 성을 함께 쓰는 동등함이 보장되고, 우리는 며느리에게 자기네 성을 함께 쓸 수 있도록 절대로 허가해주지 않는 것이다. 종들이 쓰는 호칭을 쓰는 여자가 감히 어떻게 주인 댁 성씨를 넘보나?


나는 이미 반세기 넘도록 살아왔다. 너무 거창한가…

그 반세기 동안 내가 "여자"임을 의식하며 산 세월은 얼마나 될까?


10대 이전, 전쟁이 끝난 후 폐허가 된 잿더미 속에서 어른들이 '먹는 입' 말고는 딴 생각할 겨를이 전혀 없던 암울한 시절, 다행히 고아가 되지 않은 특권(?)을 누리며, 갈고리 손을 하고 목발을 집고 다니는 상이군인 아저씨들을 무서워하며 보냈다. 아마, 우리나라 여자들은 이 시기부터 생활전선에 남자나 다름없이 본격적으로 뛰어든 게 아닌가싶다. 물론 아주 옛날부터도 잡일이나 농사일로 가족을 부양하기는 했었지만.

그때 나는 "청년 리승만" 이라는 영화(남자)를보기도 했지만 "유관순 누나" 라는 영화(여자)도 봤다.


10대, 대학생 오빠들이 길거리에 나가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에 나는 다시 6.25가 터진 줄 알았다. 4.19였다. 서울역 앞에서 갈월동에서 탱크가 서있는 것을 보기도했다. 중학교 입학 시험에 '혁명공약'을 외우는 것이 면접시험이라고 그걸 딸딸 외웠다. 한 울타리 안에서 학교를 다니던 사범대학 오빠 언니들이 툭하면 삼삼오오 모여 나라걱정을 했다.

남녀 공학에서 중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나는 남자와 여자가 뭐 특별히 다른지 잘 모르고 지냈다. 아무도 내게 '여자'이기를 강요하지 않았고, 사범대학의 학생들은 여자도 많았다.

적어도 배우는 것에 있어서 만은 남자 여자의 차별을 몰랐다. 그러나 여자들은 아무 학과든 다 들어가는데 남자들은 가정학과 유아교육과 간호학과에 들어가지 않았다.

20대, 장충 체육관에서 대통령이 뽑히고(?), 위수령이 내린 교문 밖에서 내 애인은 전사가 되어 투쟁하고, 그는 반강제로 입대하고, 우리 친구들은 투옥되고, 유신체제, 그 겨울의 춥고 캄캄하고 긴 터널을 우리들은 온 몸으로 부딪치며 건너왔다.
여자는 이걸 외치고, 남자는 저걸 외치는 시대가 아니었다.

여자도 남자도 구분 없이 한 목소리로 '민주' '자유' '정의' 이런걸 외치고 거기에 목숨을 걸었다.

딸이 내게 "엄마는 20대 때 여권운동 안하고 뭐했냐?"고 묻는다면 나는 분명히 대답하리라. "엄마는 그 때 감옥에 갇힌 남자들을 위해 밥을 했고, 그 남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고.

툭하면 파출소에 끌려가고, 빛이 있으나 없으나 그림자가 늘 뒤따르는 이상한 나라를 피해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었다. 내 애인이 감옥 대신 군대를 택하기를 애원하던 나는 얼마나 비겁했던가. 왜 다시 눈물이 흐르는 걸까... 가끔은 살도 찢기고 가끔은 가슴도 갈갈이 찢기며 나의 20대는 피비린내를 풍기며 흘러갔다.   '여권'이 뭐에 필요하며 '남녀평등'이 인간의 평등보다 뭐 그리 중요하다고 외칠 수 있었단 말인가!


30대, 그 문턱을 넘으며 '아, 정말 봄이 왔구나!' 희망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내 30대의 문을 그렇게 아름답게 열어주지 않았다. 그 때 봄이 왔었던가? 그 봄에 땅은 사람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세상을 향해 겨우 첫발을 내디딘 내 남편은 다시 암흑 속을 더듬어야 했다. 이번엔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정을 위한 산업전선의 투사가 되어야 했다.

나는 그 투사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며, 세 아이를 품에 안은 주부가 되어있었다. 딸 아들 아들, 이렇게 셋은 내게 다 똑같은 자식이었다. 딸은 여자, 아들은 남자, 이런 개념은 없었다. 내 남편은 남자라는 이름을 걸고 우리를 부양하지 않았다. 나는 여자라는 이름을 걸고 밥을 하진 않았다. 돈버는 일은 그에게, 아이 낳고 젖먹이는 일은 나에게 잘맞는 일이었다. 나는 전업주부로서 30대 전반을, 취업주부로서그 후반을 보냈다.


40, 아이들은 쑥쑥 커나갔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에겐 학교에서  아니라 집에 와서도 재잘재잘  얘깃거리가 많았고 그걸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나는 직장에서 다시 가정으로 돌아왔다.

가정부, 가정교사, 친구, 언니, 누나, 사설 비서, 이 모든 역할을 한 몸으로 다 때워보고자 나는 '아내 전문직' '엄마 전문직'에 도전했다. 두 가지의 전문직 역할을 충실히 해낸 나의 40대였다.

그 시기에 나는 가끔 '여권'을 부르짖는,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권리'가 아니라 '평등'을 부르짖는 여자가 되기도 했다. 고등학생인 내 딸에게 1000원, 국민학생인 내 아들에게 20,000원을 주는 시어머니에게 항거해야 했다.
가족들이 모이면 술 마시고 노닥거리는 남자들, 술상 차리느라 동동거리는 여자들의 차이가 너무 억울해서 혁명을 시도했다. 그래서 나의 40대 후반은 편안했다. 장정인 우리 아들들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우리 다섯 동서 여자들은 차를 마시고 과일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만약 내 아들이 아니고 동서네 아들이라면 내가 나서서 이렇게 시키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50대, 내가 딸에게 아들보다 덜 해준 것은 없다. 집안 일은 오히려 아들들이 더 많이 했다. 더 힘이 세니까. 내가 남편에게 치어서 내 권리를 빼앗긴 적도 없다.(의식 없는 여자로서 남자에게 권리 주장할 필요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누구랄 것을 따질 것도 없이 서로에게 더 적합한 일을 나눠서 했다.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에 대한 대우도 다를 게 없다. 피붙이라고 친정에 더 마음 쓰고, 남이라고 시집에 마음 덜 쓴 것도 없다.
우리 막내 아들은 남자로서의 기득권을 전혀 못 느꼈다. 병역문제에 직면한 그 애는 오히려 피해의식이 있었다. 자기 군대 갔다 오는 동안 같이 출발한 여자 애들이 먼저 박사학위 딸 거라고 초조해하고 안달을 했다.

'남녀 평등'을 주장했다. 남자들의 군복무 기간을 여자들과 함께 반씩 나누자고 떠들어댔다. 군대 일 중에 여자의 신체로도 감당할 수 있는 많은 부분을 여자가 맡고, 육체적으로 남자에게 더 맞는 일은 남자가 맡아서 하면 될 거 아니냐고. 그래서 공평하게 남녀 모두 의무를 하자고. 그러면 내 딸은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해도 좋을 거라고.

우선 의무부터 동등하게 나누면 부수적으로 권리도 동등하게 나눌 수 있게 되려는지…?
우리 아들 딸이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떠들 때, 나는 정말 비겁하다. 거기 끼어들어서 뭐라고 말해야 좋을 지를 모르겠다. 아들 말이 옳은 것도 같고, 그러나 50년 동안 부지불식간에 "여자"의 물이 흠뻑 들었을 내가 아들 말이 옳다고 손을 들어주지는 못하니 말이다.

세상은 바뀔 것이다. 아주 조금씩 바뀌어왔다.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삶을 내던진(아니,그것이 자신의 삶이겠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때문에 교통체증이 있다고 짜증내고, 빨갱이라고 몰아부치는 사람들도 있었다.(실제 빨갱이도 끼어있었겠지.)


그 때, 우리 사회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다만, 끊임없는 투쟁으로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조금, 눈에 띠지 않을 정도로 아주 조금 바뀌었을 뿐이다. 그렇게 조금 바뀌었고 계속 바뀌고 있다.
어머니의 세대가 여권을 위해 뭘 했느냐고 따지면 크게 내세울 게 없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여권보다는 인권을 먼저 생각했다고. 그래서 인권의 평등을 위해 우리 어머니들은 딸들에게 공부할 기회, 배울 기회를 아들과 동등하게 줬다고. 확실한 '여권'을 손에 쥐어주지는 못했지만, '여권'을 찾을 길을 열어주었다고. 그 길로 힘차게 나가기를 바란다.

딸들보다 적게 배운 엄마들이 논리에 무식하고 의식이  깨이고 그래서 생활에 안주하고 있었다면,  많이 배운 딸들이 그걸 타파해야 한다.

내딸! 내가 쩔쩔매는 논리를 너는 완벽하게 만들 수 있고, 내가 엉거주춤 주저앉은 여자의 자리에서 너는 확실한 네 자리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추서- 글이 끝난 후 또 한 세월이 흐른 후.

지나온 세월 동안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나와 맞지 않음을 불평했고, 그들의 변화를(나와 같이 생각하는) 기다렸고, 그들을 바꿔보려고 많이 애썼다.

환갑을 지나면서 나에게 작은 변화(어쩌면 놀라운 변화일지도…)가 찾아왔다. “내가 변하면 되지, 왜 상대방이 내게 맞춰서 변하기를 기대했었을까, 참 어리석은 짓이었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고, 가능하면 내가 상대방에게 맞추도록 조금 씩 아주 조금 씩 변화하고 있다.


<도시의 얼굴>  도시의 낮과 밤을 표현했다(아크릴 그림). 아코디언 스타일로 양면에 모두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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