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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Aug 25. 2020

오색 물감을 풀다 - 미술 2

북아트 <풀다>

<비아 돌로로사> 

예루살렘에는 '비아 돌로로사'라는 길이 있다. 이 길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했던 법정에서부터 골고다에 이르는 약 8백미터되는 길. '비아'는 '길'을 뜻하고, '돌로로사'는 '슬픔, 또는 고난'을 뜻함. '비아 돌로로사'는 고난의 길을 말함. 예수님이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성밖으로 나가 골고다로 가신 십자가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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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끄럽지 않은 한지에 아크릴 검정물감으로 예수 마지막 십자가의 길을 표현했다.


<십자가의 길14곳>

 무심코 써본 유성 사인펜의 선명한 색감에 놀랐다. 십자가의 길은 어두운 터널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 아니다. 궁극의 빛으로 다가가는 길이니 밝고 명료한 색깔로 표현했다. 전체를 다 펼치면 벽걸이로 걸어둘 수 있다.



<익명의 사람들>

<익명의 사람들> 작가 노트

인간에 대한 아이러니-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숨어들기를 좋아한다.

자신을 알아주면 어깨가 우쭐 올라간다. 몰라주면 시무룩해진다.

SNS시대, 노출증 환자이다시피 모든 것을 다 드러낸다. 자신을 숨긴 채 황당무계한 글을 쓴다.


거리를 걷노라면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스쳐 지나간다.

나에겐 세상의 종말같은 시간에도,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그들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여전히 각자 모두들 가던 길을 태연히 가고 있다.

그 모두들에게도 세상의 종말같은 시간, 반대로, 환희에 벅찬 시간일 수 있겠지.

그런데 그 시간이 나의 시간은 아니다. 그들의 시간일 뿐.


하던 일을 멈춘 채, 다시 손에 잡지 못하고 오랜 시간을 보냈다. 큰 오빠가 떠난 후,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진공같은 시간이었다.

하늘이 회색빛이거나 젖은 날에는 우울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렸고, 하늘빛이 눈이 멀도록 푸르른 날에는 햇빛에 노출된 벌레처럼 고통스러웠다.

내게 필요한 몇 권의 책을 읽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가장 어려운, 힘든, 불편한, 괴로운, 갈등의 상황에서는 책 읽기가 그중 나은 방법이다.

그것도 가장 기본에 충실한 책, 더디 읽혀지고,무겁게 느껴지지만 느리게 읽는 것이 맞다. 머리속에든 가슴 속에든 꾹꾹 무게를 쌓아두는 책을 읽는 것이 힘든 상황에서는가장 좋은 방법이다, 내게는!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4권 다 읽었고,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를 읽었다. 이번이 몇 번 째인지는 꼽아보지 않았다. 독서에 몰입한 후 나의 숨쉬기는 한결 편안해졌다. 거리에 나가 사람들속에 섞여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오늘 나는 다시 한 사람으로 익명의 사람들 속에, 익명의 사람들 곁에 서있다.

흐릿한 나의 모습이 익명의 사람들 속에 끼어있다.


<4계절>

나무의 4계절 변화를 어코디언 북으로 만들었다.


나무를 그리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는데,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는 모두가 다 무지에서 나온 용감한 이야기로 알면 된다.미술에 대해 아는 사람이 들으면 피식 웃음이 나올 이야기들이다.
교회에서 십자가에 그림을 그리면서 처음으로 아크릴 물감 칠을 해봤다. 그 때 아크릴의 매력을알게 됐다. 그 매력이란 수채화와 달리 개칠을 해도 흉하지 않다는 것이다. 화이트를 쓰지 않고 농담으로만 색을 내던 투명 수채화보다 편한 것은 흰색을 섞어서 쓰는 것이었다. 수채화에서도 과슈에서는 흰색을 사용하지만 투명에서는 흰색을 안 쓴다.

아크릴 그림을 한 번 그려봤다. 순전히 일하기 싫어서, 일은 하기 싫고 그냥 빈둥빈둥 있을 수는없으니까 그림이라도 그려본 것이다. 어머니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오방난장, 도깨비 쓸개같이 해놓고도 태평한 사람이다.

마치 재활용품 수거하는 장소처럼 떠벌려 놓은 상황에서 그림 그릴 생각이 나다니…

나무! 나무를 그렸다.
나무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순전히 편할 것 같아서 선택된 소재이다. 쉬울 것 같아서 나무를그렸다. 나무란 원래가 자유로운 형태 아닌가. 스케치한 선밖으로 붓이 나가면 ‘원래 나뭇가지가 굵기도 하고 가늘기도 한 것이지 뭐’하면서 넘어가고, 붓질이 거칠게 드러나면 ‘원래 나무는 이렇게 결이 있는거야. 매끄러우면 그게 유리지 나문가’ 이렇게 또 넘어간다.
색깔도 멋대로이다. 나무가 뭐 정해진 색이 따로 있나?
그리면서 나의 나무에게 말도 건다.
“야, 나무야, 너는 무슨 색깔이고싶니? 말해봐. 네가 원하는 대로 칠해줄께.”
무슨 색으로 칠하든 틀린 색은 아니다. 그래서 신난다.
형태는 또 어떤가. 그것도 내 멋대로 휙휙 그어댄다. 나뭇가지가 하늘을 찌르건 땅바닥을 기건 아무러면 어때, 그래도 틀린 건 아닌데 뭐.
이렇게 나의 나무는 완성되었다. 4그루의 나무가 책상 위에 나란히 놓여있다.
커피를 마시면서 색칠을 했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붓을 커피잔에 헹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애매한 나무에게 마구 화를 내버렸다. “야, 너! 나무기둥! 너는 왜 하필 색깔이 커피랑 같은 색이니?” 붓을 헹구던 물과 마시던 커피의 색깔은 똑같았다.
나무 그리기가 생각만큼 자유롭진 않다.

가지가 제멋대로 뻗어도 정해진 공간 안에 여러 가지들과 서로 어울려야 하고, 색깔이 아무리 멋대로라도 한 공간 안의 다른 색들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아무리 개칠을 해도 되는 아크릴 물감이지만 떡칠이 된 게 다 표가 난다. 사람이 외양을 매끄럽게 잘 포장해도 엉망진창인 속이 다 비치기 마련인것처럼.


A4 사이즈에 갇힌 나무 한 그루가 마치 우리네 인생과 똑같이 생각된다. 자유는 보장되지만 안하무인이면 안되고, 정해진 공간에서 한 군데 몰려 있어도 안되고, 튀는색도 멋있지만 다른 색과 어울리지 않을 땐 멋이 아니라 시각공해가 된다. 나뭇가지 마다 햇빛도 서로 나누어야 하고, 하늘도 서로 바라봐야 하고 바람도 함께 맞아야 한다.


공존하는 것들(생물이든 무생물이든)에게 방해가되지 않는, 곁에 있는 이들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 참 평안하고 멋진 자유에 대해 생각해본다.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코디언 접기 방식. 배경이 되는 도시 건물과 사람 실루엣의 두겹 어코디언 형식이다.

사람들 실루엣은 반투명 플라스틱에 아크릴로 그림. 좀더 투명했으면 좋았을 것을...

어렴풋이 건물이 비쳐보이기를 기대했었는데 반투명 플라스틱이 기대에 어긋나고 말았다.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어디 있지?

그는 어디 있지?

모두들 어디로 가고 있는가?

공간을 지나 

시간 속으로

시간 속으로

가고 있는 나

또는 그

그들.


<오색 물감을 풀다 - 미술> 끝.

다음 글은 

<궁금증을 풀다 - 탐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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