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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Sep 09. 2020

내 인생은 무슨 색깔일까?

파리 미술관 기행문

파리 기행문 중에서 미술관 부분만 발췌.


파리에 간 사람들은 미술관을 우왕좌왕하며 돌아다니느라고 바쁘다. 하루에 미술관을 두 군데 이상 돌아보는 관광객들이 예사로 많다. 그것도 더구나 루브르와 오르세이 두 군데를 하루에. 안에 들어가면 우선 압도적으로 많은 물량에 놀라 허둥대며 유명한 그림을 골라 눈도장 찍고 나오기에 바쁘다.
아이들은 모두 루브르의 고전 그림들에 흥미가 없지만, 한번쯤은 순서대로 봐둬야한다는 나의 고집으로 루브르 - 오르세이 - 뽕삐두로 이어지는 프로그램을 짰다. 클라식으로 시작해 모던 아트로 이어지는 순서를 밟았다. 전시되지 않은 그림들을 거리에서 만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순서. 몽마르뜨는 마지막 날에 구경했다.
박물관에 갇힌 예술품들의 정적인 표정과 달리 박물관 밖의 예술품들은 바람의 냄새가 묻어있어서 좋다. 야생화를 더욱 야생화답게 출렁이게하는 바람의 냄새가 몽마르뜨에 퍼져있다.
작년에는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고호의 마지막 쉼터 오베르 쉬르 와즈에 간 것이 파리의 다른 어느곳보다 특히 기억에 남는 여행이었다.

파리의 로댕 박물관에서 까미유 끌로델의 조각과 로댕의 조각들을 보며 끌로델의 슬픈 사랑과 어두운 인생을 생각했다. 고통스런 운명은 왜 명이 길기도 할까. 내가 여자라서 그런지 나는 끌로델 편에 선다. 로댕의 작품에는 매력을 느끼지만 인간 로댕에게서는 비정함을 느낀다.
마른 가지의 나무들이 춥게 서 있는 정원 여기저기에 옷벗은 조각품들이 외로워 보였다. 아이들은 그 조각상이 취하고 있는 포즈를 그대로 흉내내며 사진을 찍었다.
파리의 조각가들은 벌거벗은 조각품들을 만들었고, 화가들은 통통한 나부를 화폭에 가두었다. 파리엔 벌거벗은 사람들이 조각으로 그림으로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파리의 패션 디자이너들은 사람에게 이 옷, 저 옷, 옷을 입히는데 열정을 쏟아붓는다. 역시 또 이중적인 매력이다. 옷을 벗기는 파리, 옷을 입히는 파리.
로뎅 박물관의 쓸쓸한 겨울정원. 담넘어로 앵발리드의 금빛 지붕이 우뚝 솟아 보였다. 나폴레옹은 영웅인가?


오랑주리 미술관도 빼놓을 수 없는 파리 방문 코스이다.

방은 자연 채광이 되는 유리 지붕이다. 태양의 흐름과 세느강을 따라 파리의 순환축 중 하나인 서쪽에서 동쪽으로 배열된다. 타원형 방은 무한의 표시를 연상시키고, 그림은 하루의 빛의 순환을 전개한다. 모네는 방문객이 그림에 완전 몰입하기를 원했는데 이 방에 들어서면 그림에 빠져들 수 밖에 없다.

방1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늘과 초목이 비친 모습을 보여주는 네 가지 구성을 모아 전시했다.

방2는 물가에 가지를 늘어뜨린 버드나무 그림들을 전시했다.

아래 사진들은 오랑주리 공식 싸이트에서 가져온 타원형 방 1에 전시된 모네의 수련 그림이다.

 https://www.musee-orangerie.fr/fr/article/visite-virtuelle-des-nympheas 

수련 - 구름, 200X1275Cm, 방1 북쪽 벽
수련 - 석양, 200X600Cm, 방1 서쪽 벽
수련 - 녹색 반사, 200X850Cm, 방1 동쪽 벽
수련 - 아침, 200X1275Cm, 방1 남쪽 벽

사진으로  부분만 보아왔던 모네의 수련을 오랑주리에서 보았다. 둥근 벽을 가득 채운 수련의 푸른 색조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있다.
화가가 피를 토하며 수년에 걸쳐 완성한 그림을 걸어지나가며  몇초 동안 본다는 것이 미안하다 못해 죄의식까지 느낄 정도이다. 인생을  바쳐서 완성한 작품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지나칠  있단 말인가.그러나 여행객은 그림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일 형편이  된다. 역시 거기에서도 각자의 취향에 맞는 선택을   밖에. 나는 슬슬 전체를 훑어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부분을  자세히 보는 편이다.
대개는  작가의 그림들은 같은 방에 전시해둔다. 그러면  작가가  그림은  살에,  그림은  살에 그린 것인가를 비교해 보며  화가의 그림이 해가 거듭거듭 지나는 동안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살핀다. 초기에 그린 것과 붓질에 한창 물이 오를  그린 , 노년에그린 , 같은 사람이 그려도 그림은  다른 느낌을 준다.
그가 활동하던 시대에 누구를 만났는가도  사람의 그림에 영향을 주는 것을 느낄  있다. 물론 어느 곳에 살았는가도  영향을 준다.
남부 프랑스를 자동차로 여행하면 우리는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거기서 만난다. 그림틀을 떠난 고흐의 삶을 거기서 만난다. 프랑스의  들녘을 지나노라면 모네를 만난다. 서양 양귀비 꽃이 만발한 언덕을 지나며 모네의 뽀삐를 본다.
파리의 미술관에서 그림 감상만 하여도 프랑스 전역의 풍경을    있다. 화가들은 자신이 몸담고있던 자연을 화폭에 그대로 옮겨두었기 때문이다.

오르세이는기차역이었던 것을 개조하여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거기에서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보다가 ', 여기 기차가 지금도 있다면 아를로 달려가고 싶다' 생각을 문득 하게된다.  고갱의 그림에선 타히티의 여인을 만난다. 한번도  보지 못한 타히티가 멀지않게 느껴짐은 왜일까.


미술관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그림 말고 또 있다. 나는 전시관 건물을 자세히 살펴본다. 모두들 그림에 넋이 팔려 그림 따라 빙빙 도는 그 전시관의 천장이며 전체적인 구조들도 살펴보고, 자연 채광을 위한 창문들도 눈여겨 본다.
런던의 내셔날갤러리는 천장에 자연채광을 위한 유리장치를 했지만 불행히도 런던의 햇빛은 갤러리의 그림에게까지 미치지 못한다.
또 어떤 방법으로 전시했는가도 생각해본다. 칸딘스키의 그림들이 한몫 단단히 하는 뮌헨의 렌바흐 하우스에는 화풍이 비슷한 화가들의 그림을 나란히 나란히 함께 전시해 놓았다. 그 전시실에 들어서서 언뜻 다 한 사람의 작품이려니 생각하고 있다가 자세히 보면 화가의 이름이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오르세이는 시대별로 크게 분류한 후에, 유화 수채화 파스텔화 등 그림의 소재별, 인상파 등 미술사조별로 나누기도 하고, 화가별로 나누기도 한 복합적인 전시를 해놓았다.


암스테르담에는 고흐, 오슬로에는뭉크, 이렇게 화가의 이름을 건 미술관들이 곳곳에 있다.
오르세이에 가면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이 그림들을 다른 전시관에 걸어두었다면 어떤 반응을 얻었을까를.
고흐가 아를에 가지 않고 시베리아에 가 있었다면 그는 해바라기를 그리지 않았겠지, 그는 어떤 흰색으로 시베리아를그렸을까, 이런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아를의 강렬한 태양이 해바라기 밭을 만들었고, 해바라기가 고흐의 마음을 노랗게 색칠했고, 바람에 출렁이는 해바라기가 고흐의 붓을 휘둘러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그 그림이 동남아의 작은 나라, 한적한 곳에 전시되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그림에 끌려서 외진 그곳까지 발걸음을 했을까. 어리숙한 질문을 던져본다. 파리의 오르세이에 걸려있어서 그 그림은 더 유명해 진 것인지, 그 그림이 유명해서 사람들은 파리의 오르세이로 모이는 것인지, 어리석은 질문이다.


유명한그림들이 유명해지기까지엔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화가가 그리기 시작하여 우리의 눈에 비치기까지의 과정에서 어떤 이유로든 유명해질 이유가 있다. 작품성의 뛰어남, 비평가들의 호평, 콜렉터의 선택, 전시장의 유명세, 관광객들에게 퍼진 입소문…….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것은 역시 훌륭한 작품성이어야 한다. 여러 이유로 유명한 그림이 되었다해도 감상자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취향에 맞는지 안맞는지, 그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사물을 표현한 화가에게 개성이 있듯이 감상자에게도 개성이 있으니까.

미술관을 순례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꼭 봐야한다고 생각하는 몇가지 작품들이 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밀레의 만종,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고호의 해바라기, 미로의 비너스,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지옥의 문)…
프랑스에 이태리에 흩어져있는 이 작품들은 유럽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구경거리이다.
오르세이에 가면 밀레의 만종, 루부르에선 비너스… 이런 식으로. 이런 미술관 순례가 감상자들에게 어떤 감동과 만족감을 줄지 궁금하다.

오르세이의 제1번 방에는 우아한 여자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그 여인은내 남편의 영원한 애인이다. 그이는 그녀를 보러 가끔 오르세이를 찾는다. 물론 나는 그를 질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위해 그 초상화의 복사사진을 사다준다. 그렇게 우아하고 부드러운 여인을 만난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https://www.musee-orsay.fr/en/collections/index-of-works/notice.html?no_cache=1&zsz=5&lnum=&nnumid=3661 

Franz-Xaver Winterhalter(1806-1875),  Rimsky-Korsakov, 1864, 90X117Cm


우리 큰 올케는 무엇에 홀렸는지 제정신이 아닌듯 그 여인이랑 나의 젊었을 때의 이미지가 비슷하다나? 그러나 그건 어림도 없는 말. (나는 결혼 전에는 평균 이하로 말랐었고, 결혼 이후엔 평균 이상으로 뚱뚱하다.)
오르세이에는 이미 유명해진 어떤 작품들보다도 내 마음이 끌리는 작품들이 많이 전시돼 있다. 그림 구경을 좋아하는 나는 미술관에서 하루종일 살아도 실증이 안난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매일 이곳저곳 미술관을 다니며 그림과 조각들을 보았지만 얻은 것은 그림에 대한 견문이 넓어졌다는 것보다는 '인생에 대한 다양한 색깔'을 느끼게 된 것이다.
여러 화가들이 한 나무를 보고 그렸어도 그 나뭇잎의 색깔이 그들이 나무를 보는 각도와 거리와 또 빛이 어떻게 그 나무를 비춰주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색깔들로 표현이 된다. 그처럼 우리의 인생도 화가들이 그린 나뭇잎의 색깔보다 훨씬 더 다양한 여러가지 색깔로 표현되고 있다.
나는, 내 인생은 무슨 빛깔일까?


파리의 미술관들을 다니며 내 인생은 어떤 형태로 캔바스에 옮길수 있을까, 무슨 색깔일까, 명암은 어떨까… 이런 생각들을 많이 했다. 세느강변에서, 몽마르뜨에서, 미술의 거리 곳곳에서 풍경이나 초상을 그리고 있는 수많은 거리의 화가들. 그들을 보며 그들이 처음에 붓을 들기 시작했을 때 꾸었을 꿈들을 내가 대신 그려보곤 했다.

화가들, 그들이 제일 처음에 그렸을 그림은 화폭에 그린 형태와 색깔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꿈이었겠지. 처음엔 꿈을 그렸었겠지… 그 꿈을 접은 사람들, 아직도 꿈을 꾸고있는 사람들이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https://www.musee-orsay.fr/en/collections/index-of-works/resultat-collection.html?no_cache=1

 Henri Fantin Latour,   An Atelier in theBatignolles (마네의 아뜨리에) 1870,273.5X204Cm


오르세이에서 몇가지 그림들을 마음에 담아두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마네, 르노아르, 모네가 그림속에 들어있다. 화폭 앞에서 붓을 들고 있는 사람이 마네.
윗줄에 에밀 졸라도 서 있다. 한 시대를 살며 각자들 자기들의 예술혼을 불태웠던 사람들이다. 함께 모여 인생을 논하고 예술을 논하며 시대를 풍미한 그들. 모여있어서 외롭지 않은 듯하나 각자의 가슴에 독특한 외로움을 지닌 사람들이다.

파리 기행기를 쓰다보면 미술관 순례기가 되고만다. 그러나, 미술관은 그야말로 눈으로 직접 작품을 감상하는 곳이지 글로 읽는 것만으론 미흡하다. 물론 거리의 풍경들도 그렇지만.
콩코드 광장에서 개선문에 이르는 샹젤리제 거리만을 묘사한대도 보통의 솜씨로는 듣는이에게 그 분위기를 그대로 상상시키기가 어려울 것이다. 역사의 현장에서 숱한 사연들을 다 담고 흘러왔던 세느강의 출렁거림과 그 위로 흐르는 샹송의 리듬, 구르몽의 시처럼 낙엽이 뒹구는 상젤리제 거리의 가을색깔을 어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파리>라면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할까? 에펠탑, 개선문, 루브르, 몽마르뜨, 노틀담사원, 그리고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숱한 예술가들, 또 나폴레옹, 드골…
우리도그 범위를 특별히 초월한 사람들이 못되어 유명 관광지를 둘러보았고, 유명인들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물론 에펠탑에도 올라갔다.


(이 글에서는 미술관 부분 이야기만 했다. 파리 여행의 다른 부분은 생략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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