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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Jan 18. 2021

확률, 통계, 평균


확률, 통계, 평균


 사람이 총을 쏴서 날아가는 새를 맞추기로 하였다.    사람이  총알은  보다 왼쪽으로 1M 빗나갔다.    사람이  총알은  보다 오른 쪽으로 1M 빗나갔다.    사람은 총을 쏘지도 않고 명중했다.
쏘지도 않고 명중했다  말도  되는 말이 틀림없이 맞는 말이다. 왜냐면 왼쪽 1M, 오른  1M 오차의 평균을 내면 되니까. 그래서    사람은 총을  필요가 없이, 그냥 명중한 걸로 치기로 하였다.
이것이 바로 확률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통계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평균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툭하면 앞세워 정확성을 증명하려는 수치라는 것이다.

10  중에  명이 걸리는 병에   명만 벌벌 떨고 나머지는 잊어버린  편안하면  것을 10  모두가 벌벌 떨어야하는 안타까움(내가   명은 아닐 거라는 보장과 확신이 없으니까).
100 중에 99% 당첨되는데 내가 100 명중에    당첨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불행.
 대학에 지원자의 100% 합격한 고등학교의    지원자.  대학에 50%밖에 합격자를 내지 못한 160 지원에 80명이 합격한 고등학교. 이러한 수치를 접하고보면 완전히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고,  것도 아니라고 무시할 수도 없게된다.

평균 수명이 발표되면 나는 마치 그 나이까지 꼭 살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인생의 계획을 슬며시 그 나이에 맞춰서 짜기도 한다. 주변을 둘러보자. 평균 수명을 훌쩍 넘기고 여전히 살아있는 지인들이 많다. 나도 당연히 그 대열에 끼어있다고 자연스럽게 믿는다. 숫자가 나를 가지고 논다.

옛날엔 외우던 전화번호도 이제는 외울 필요도 없게 되었는데, 그래서 편해진 것 같기는 한데, 그 숫자 한 가지 외우지 않는다고 숫자로부터 편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전에 잘 알지도 못하고 지내던 무슨무슨 수치들이 우리 곁에서 마구 협박을 하고 있는 현실이다. 12시간 굶고 피검사를 하면 가지가지 숫자들이 주르르 나열되어 내 건강을 평가한다. (병원마다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혈압 ...최저 90, 최고 140 이하
혈당 ...공복시 70 ~ 99, 식후 140미만
콜레스테롤 ...HDL은 40이상, LDL은 129 아래

중성지방... 199이하
간수치 AST(SGOT) 40이하, ALT(SGPT) 40이하
혈색소(Hb) 12~16

기타 등등. (위 모든 수치의 단위는 생략)

이런 기준의 수치를 넘거나 모자라는 것은 우리 몸에 직접 가하는 협박이 되는 것이다. 협박을 당해서 경각심을 갖는 사람도 있고, 그래도 태평인 사람도 있지만 누구든지 그 수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 숫자에 매어서 달달 떨며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건강 뿐만 아니라 몸의 아름다움도 수치로 표현된다. 가슴, 허리, 엉덩이가 수치로 평가된다. 눈으로 보아서 보기 좋은 것이 다가 아니다. 부위별 수치에 잘 맞아야 멋진 몸매가 되는것이다. 정해진 수치에 맞추기 위해 굶기조차 해야한다.



요즘 우리 국민이, 아니 전 세계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수치가 있다. 코비드 19 펜데믹 시대를 살고있는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 이 숫자에 매어있다. 수시로 재난경보가 울리는 전화기를 끼고 살면서 마치 전시의 공습경보같은 느낌이다. 맞다. 전시, 전쟁중이다. 만만치 않은 상대와 싸우고 있다. 언제쯤이면 이 숫자판을 안 들여다봐도 될는지...


피켓을 들고 앞장서서 거리로 나가고 싶을 지경이다. "지키자! 지키자! 감염병 예방수칙!"

나의 건강만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타인의 건강까지 해칠 수 있다. 코로나19에 걸리면 피해자가 가해자로 변하는 것은 한 순간이다. 어느 순간 내가 감염되는 피해자가 될 수도 있고, 곧바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옮기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예방 수칙을 잘 지켜야 한다.(이거 글이 너무 계몽 글로 흐르고 있는 것 같지만)

나는 작년 4월에 첫 진료를 본 의사의 얼굴을 아직도 모른다. 그동안 4번을 만났는데 단 한 번도 그가 마스크를 벗은 적이 없고, 나 역시 마스크를 쓴 채였으니 우린 서로 얼굴도 자세히 모른다. 환자와 의사가 얼굴은 알아야할 것 아닌가.


옆지기와 함께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중에 현재의 우리들 모습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먼 훗날 어떤 영화에서 옛날 모습(현재의 모습)을 그리려면 거리의 시민들이 모두들 마스크를 쓴 채로 다니는 화면이 되겠지. 그렇겠지. 아니, 그 때는 어쩌면 아예 어항같은 것을 쓰고다니지 않을까. 이번에 코로나를 이겨낸다 해도 또 다른 바이러스가 공격해 올 지도 모르잖아. 그러니 그 때 사람들은 아마 우주복같은 보호복을 입고 다닐지도 몰라.

이런 대화가 하나도 재미가 없다. 그냥 우울한 시간을 죽이려고 헛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한 것이다.




코비드 19의 숫자, 코로나 수치는 잠시 잊어버리자. 펜데믹이라는 말도 잊자.


수치에 대한 기억이 참 억울할 때도 있다.
내가 그릇을 깨면 어머니의 덧셈은 10년 전 쯤부터로 거슬러 올라가 누적 더하기를 하신다. 누구나 다 깰 수도 있는 거라고 말하고 넘어가려하면 ‘난 한 두 번 밖에 안 깼다’고 하신다.
일년에 360일 그릇 만지는 사람이 2년에 두개, 일년에 닷 새 그릇 만지는 사람이 하나의 그릇을 깼다면 누가 더 그릇을 잘 깨는 사람일까?

머리카락이 단 한 올 남은 사람이 이발사의 실수로 그 한 올 머리를 잃고 ‘내 머리를 다 뽑았다’고 펄펄 뛸 때, 이발사는 ‘난 하나 밖에 안 뽑았는데’하면서 억울해 할 것이다. 누가 더 억울한 것일까? 전부와 단 하나의 수치 사이에서.(머리 한 올 남으신 분을 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와 전부를 예로 든 것일 뿐입니다.)


코로나 확진자 수치를 보면서 우울한 기분을 벗어나려고 쓴 글, 발행않고 저장해뒀다가 다시 꺼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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