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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률, 통계, 평균

by morgen


확률, 통계, 평균


세 사람이 총을 쏴서 날아가는 새를 맞추기로 하였다. 첫 번 째 사람이 쏜 총알은 새 보다 왼쪽으로 1M쯤 빗나갔다. 두 번 째 사람이 쏜 총알은 새 보다 오른 쪽으로 1M쯤 빗나갔다. 세 번 째 사람은 총을 쏘지도 않고 명중했다.
‘쏘지도 않고 명중했다’는 이 말도 안 되는 말이 틀림없이 맞는 말이다. 왜냐면 왼쪽 1M, 오른 쪽 1M 오차의 평균을 내면 되니까. 그래서 세 번 째 사람은 총을 쏠 필요가 없이, 그냥 명중한 걸로 치기로 하였다.
이것이 바로 확률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통계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평균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툭하면 앞세워 정확성을 증명하려는 수치라는 것이다.

10만 명 중에 한 명이 걸리는 병에 단 한 명만 벌벌 떨고 나머지는 잊어버린 채 편안하면 될 것을 10만 명 모두가 벌벌 떨어야하는 안타까움(내가 그 한 명은 아닐 거라는 보장과 확신이 없으니까).
100명 중에 99%가 당첨되는데 내가 100 명중에 단 한 명 당첨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불행.
모 대학에 지원자의 100%가 합격한 고등학교의 단 한 명 지원자. 모 대학에 50%밖에 합격자를 내지 못한 160명 지원에 80명이 합격한 고등학교. 이러한 수치를 접하고보면 완전히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고, 별 것도 아니라고 무시할 수도 없게된다.

평균 수명이 발표되면 나는 마치 그 나이까지 꼭 살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인생의 계획을 슬며시 그 나이에 맞춰서 짜기도 한다. 주변을 둘러보자. 평균 수명을 훌쩍 넘기고 여전히 살아있는 지인들이 많다. 나도 당연히 그 대열에 끼어있다고 자연스럽게 믿는다. 숫자가 나를 가지고 논다.

옛날엔 외우던 전화번호도 이제는 외울 필요도 없게 되었는데, 그래서 편해진 것 같기는 한데, 그 숫자 한 가지 외우지 않는다고 숫자로부터 편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전에 잘 알지도 못하고 지내던 무슨무슨 수치들이 우리 곁에서 마구 협박을 하고 있는 현실이다. 12시간 굶고 피검사를 하면 가지가지 숫자들이 주르르 나열되어 내 건강을 평가한다. (병원마다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혈압 ...최저 90, 최고 140 이하
혈당 ...공복시 70 ~ 99, 식후 140미만
콜레스테롤 ...HDL은 40이상, LDL은 129 아래

중성지방... 199이하
간수치 AST(SGOT) 40이하, ALT(SGPT) 40이하
혈색소(Hb) 12~16

기타 등등. (위 모든 수치의 단위는 생략)

이런 기준의 수치를 넘거나 모자라는 것은 우리 몸에 직접 가하는 협박이 되는 것이다. 협박을 당해서 경각심을 갖는 사람도 있고, 그래도 태평인 사람도 있지만 누구든지 그 수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 숫자에 매어서 달달 떨며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건강 뿐만 아니라 몸의 아름다움도 수치로 표현된다. 가슴, 허리, 엉덩이가 수치로 평가된다. 눈으로 보아서 보기 좋은 것이 다가 아니다. 부위별 수치에 잘 맞아야 멋진 몸매가 되는것이다. 정해진 수치에 맞추기 위해 굶기조차 해야한다.



요즘 우리 국민이, 아니 전 세계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수치가 있다. 코비드 19 펜데믹 시대를 살고있는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 이 숫자에 매어있다. 수시로 재난경보가 울리는 전화기를 끼고 살면서 마치 전시의 공습경보같은 느낌이다. 맞다. 전시, 전쟁중이다. 만만치 않은 상대와 싸우고 있다. 언제쯤이면 이 숫자판을 안 들여다봐도 될는지...


피켓을 들고 앞장서서 거리로 나가고 싶을 지경이다. "지키자! 지키자! 감염병 예방수칙!"

나의 건강만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타인의 건강까지 해칠 수 있다. 코로나19에 걸리면 피해자가 가해자로 변하는 것은 한 순간이다. 어느 순간 내가 감염되는 피해자가 될 수도 있고, 곧바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옮기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예방 수칙을 잘 지켜야 한다.(이거 글이 너무 계몽 글로 흐르고 있는 것 같지만)

나는 작년 4월에 첫 진료를 본 의사의 얼굴을 아직도 모른다. 그동안 4번을 만났는데 단 한 번도 그가 마스크를 벗은 적이 없고, 나 역시 마스크를 쓴 채였으니 우린 서로 얼굴도 자세히 모른다. 환자와 의사가 얼굴은 알아야할 것 아닌가.


옆지기와 함께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중에 현재의 우리들 모습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먼 훗날 어떤 영화에서 옛날 모습(현재의 모습)을 그리려면 거리의 시민들이 모두들 마스크를 쓴 채로 다니는 화면이 되겠지. 그렇겠지. 아니, 그 때는 어쩌면 아예 어항같은 것을 쓰고다니지 않을까. 이번에 코로나를 이겨낸다 해도 또 다른 바이러스가 공격해 올 지도 모르잖아. 그러니 그 때 사람들은 아마 우주복같은 보호복을 입고 다닐지도 몰라.

이런 대화가 하나도 재미가 없다. 그냥 우울한 시간을 죽이려고 헛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한 것이다.




코비드 19의 숫자, 코로나 수치는 잠시 잊어버리자. 펜데믹이라는 말도 잊자.


수치에 대한 기억이 참 억울할 때도 있다.
내가 그릇을 깨면 어머니의 덧셈은 10년 전 쯤부터로 거슬러 올라가 누적 더하기를 하신다. 누구나 다 깰 수도 있는 거라고 말하고 넘어가려하면 ‘난 한 두 번 밖에 안 깼다’고 하신다.
일년에 360일 그릇 만지는 사람이 2년에 두개, 일년에 닷 새 그릇 만지는 사람이 하나의 그릇을 깼다면 누가 더 그릇을 잘 깨는 사람일까?

머리카락이 단 한 올 남은 사람이 이발사의 실수로 그 한 올 머리를 잃고 ‘내 머리를 다 뽑았다’고 펄펄 뛸 때, 이발사는 ‘난 하나 밖에 안 뽑았는데’하면서 억울해 할 것이다. 누가 더 억울한 것일까? 전부와 단 하나의 수치 사이에서.(머리 한 올 남으신 분을 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와 전부를 예로 든 것일 뿐입니다.)


코로나 확진자 수치를 보면서 우울한 기분을 벗어나려고 쓴 글, 발행않고 저장해뒀다가 다시 꺼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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