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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Jan 25. 2021

이신구-헤세, 토마스만 그리고 음악 1

책리뷰 (시작과 헤르만 헤세 부분)

<헤세, 토마스 만 그리고 음악>

이신구 지음, 전북대학교출판문화원 2020.


책 제목이 내 눈길을 끌었다. 익숙한 작가들 이름에 음악이 추가된 책이라니 망설임 없이 읽기 시작했다.

독일의 대문호,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헤르만 헤세와 토마스 만의 소설을 역시 독일의 손꼽히는 음악가들의 음악에 견주어 살펴본 내용의 책이다.

1부는 헤르만 헤세 소설을 파헤쳐본 “음악, 그 유일무이한 숭고함이여”라는 제목으로 헤세의 삶과 음악, 헤세 소설의 음악 형식적 구조, 헤세 소설과 소나타 형식, <유리알 유희>와 바흐의 푸가에 관하여 썼다.

2부는  토마스 만을 다룬다. “음악, 그 비극적 유토피아여”라는 제목 아래에 토마스 만 소설과 음악, 토마스 만 소설과 바그너 음악, 두 독일 현대 작가의 마법의 세계, <마의 산>에 흐르는 클라식 음악, <파우스트 박사>의 음악을 기록했다.


헤세의 작품들은 인간의 영혼을 치유하면서 보다 높은 세계를 열어주는 힐링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10쪽)고 작가는 말한다. 토마스 만에 대하여는 자신의 모든 소설을 하나의 교향곡이며, 대위법으로 구성된 하나의 작품(10쪽)이라고 말한다.

책머리에서 작가는 자신의 음악적 식견을 드러낸다.

헤세는 <유리알 유희>를 음악의 아버지라고 칭송하는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구조에 담았다. 11쪽.

토마스 만의 <부텐브로크가의 사람들>을 바그너의 음악극 <니벨룽의 반지>에 비교하는 작가는 <토니오 크뢰거>는 바그너의 라이트모티프 기법을 시도했다고 기록한다.

소설을 음악적 구조에 비교하는 작가는 여러 음악가들을 소환한다.

토마스 만은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아다지에토로 흐르는 사랑과 죽음의 유혹’이라는 제목으로 말러의 교향곡 5번과 비교하며 설명했다. (12쪽)


이 책의 저자는 독자들이 헤르만 헤세와 토마스 만의 작품들을 이미 읽고 알고있는 것을 전제로 글을 쓴듯하다. 수시로 등장하는 두 문학가의 작품을 읽지않은 독자는 이 책을 이해하기가 아주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헤세나 토마스 만의 작품을 모른다고해서 이 책 읽기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저자는 필요한 모든 문장을 인용문으로 옮겨놨으니 글을 읽다가 막힐 염려는 없다. 다행히 나는 제시된 책들중에서 여러 권을 이미 읽었다.


왼쪽 - 독일문학책 소설부분 , 헤세, 토마스만, 괴테  오른쪽 - <헤세, 토마스만 그리고 음악>


이 책을 읽으면서 옛날, 아주 옛날에 읽었던 여러 책들을 다시 꺼내봤다. <유리알 유희>를 들춰보다가, <데미안> <환상동화집>을 뒤적이다가, <게르트루트> <브덴부로크가의 사람들>을 찾고,  <마의 산> <파우스트 박사>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그리고 <토니오크뢰거>를 책장에서 하나씩 꺼내어 다 다시 훑어봤다.

헤르만 헤세의 여러 책들과 토마스 만의 책들은 읽은지가 정말 오래된 책들이다. 이미 작고한 작가들의 작품은 다 옛날에 읽었던 것이고 신간은 발행되지 않으니 자연히 눈에서 멀어졌던 게 사실이다. 이신구 작가의 <헤세, 토마스 만 그리고 음악>을 읽으며 책에 언급된 부분들을 잘 이해하기 위해 묵은 책들을 꺼내어 참고될 부분들을 다시 읽어보게 되었다. 예전의 기억이 되살아나기도 했고, 어떤 부분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 생소한 부분도 있었다.


노벨 문학상을 탄 독일의 두 작가 헤르만 헤세는 니체와 쇼팽을 우상으로 삼았고, 토마스 만은 니체와 바그너를 청춘시절의 우상으로 삼았다. 작품에는 우상으로 삼은 사람들의 그림자가 자연스레 드리워져있다.

헤세는 쇼팽의 서정 음악을 통해서 많은 창조적 자극을 받았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그 모티프가 쇼팽 음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고백했다. 쇼팽의 <왈츠> <자장가> <발라드> <야상곡>에 의한 영혼의 나래침을 시인의 자유로운 비유적 심상언어와 리듬을 수단으로 노래한 서정시로는 <쇼팽> <화려한 왈츠> <대 왈츠> <자장가> <발라드> 등이 있다. 26쪽


헤세는 음악을 '고전음악'과 '낭만적 음악'으로 구분하고, '낭만적 음악'의 대표자를 바그너로 보고있다. 28쪽

청춘시절에 헤세는 바그너를 열광적으로 좋아했으나 후에는 경건성과 명랑성이 깃들어 있는 순수 음악과는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에 거부했다. 29쪽

낭만주의 음악을 거부하면서 헤세는 베토벤 이후에 시작된 이러한 데카당스의 징후를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그 시대의 오류로 돌려 시대 비평적인 면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33쪽


마성적이고 현혹적인 바그너를 거쳐 헤세는 모차르트에 심취하게 된다.  모차르트 음악에는 명랑성과 순수함이 깃들어 있다고 느낀 헤세는 <황야의 이리>를 모차르트에 반영한다.  <황야의 이리>에서 모차르트를 하리 할러(Harry Haller)의 "청춘 시절의 신이며 사랑과 존경의 목표"라고 표현했다.

할러가 가장 좋아한 <마술피리>에는 '불멸의 아름다움'이 내재되어 있어 마음의 고향과 평화를 찾지 못해 무질서한 혼돈에서 방황하는 헤세에게 정신의 안식처가 되었다. 35쪽

헤세는 모차르트 음악을 통하여 위기에 있는 영혼을 구원받은 후 바흐와 헨델의 종교 음악을 통하여 종교의 경지로 들어갔다. 37쪽

헤세의 음악적 탐구는 몇몇의 음악가들을 거치며 점점 더 깊어지기도 하면서 다른 방향으로 변화하기도 한다. 바흐에 이르러는 종교적 경지를 느낀다.

바흐 음악은 베토벤과 바그너처럼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신적 형상인 것이다. 바흐에게 있어서 미학과 신학은 동일하다. 헤세가 바흐 음악을 들었을 때 별, 빛, 질서와 조화, 천상의 미를 연상하는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39쪽

헤세를 휘어잡는 음악은 항상 양극석을 띠고 있다. 우리가 클라식이라고 칭하는 바흐, 모차르트, 헨텔은 헤세의 현실 도피처가 된다. 헤세는 그에 머무르지 않는다. <황야의 이리>에서는 재즈음악을 받아들인다.  이신구 작가는 헤세의 음악에 대한 양극성을 이렇게 묘사한다.

불협화음과 협화음은 두 주제의 대립과 조화에서 오는 수직적 화성과 수평적 선율의 특징을 지니게 된다. 서로 다른 두 선율의 대위와 그 대위된 선율의 변증법적 발전이 푸가와 소나타 형식의 특징이다.  ~ 이러한 두 형식이 헤세에게는 소설 창작의 중요한 기법이 된다. 45쪽


헤세의 자전적 또는 자전적 요소가 짙은 <게르트루트>는 오페라 작곡가의 삶을 노래한 음악 소설이다. 헤세는 <게르트루트>를 현악 3중주에 담았다. 우리나라의 초기 번역 제목은 <사랑의 3중주>였는데 이 작품이 마치 모차르트의 실내악을 듣는 듯해서 붙인 번역 제목이었다.  헤세에게 음악은 생명이며 삶을 지탱하는 근원적 힘이었다.

<데미안> <황야의 이리>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소나타 형식으로 지었고, 그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유리알 유희>는 바흐의 푸가 형식을 따랐다.

헤세는 음악을 '고전적 음악'과 '낭만적 음악'으로 구분하고, 고전적 음악이 건축학적이고 대위법적이라면 낭만적 음악은 회화적이고 채색적이라고 말했다.49쪽


헤세 소설은 소나타 형식을 닮았다. 소나타 형식은 제시부, 발전부, 재현부의 3부 형식이다. 이러한 3단계 과정에 있는 인간을 헤세는 '이성형'과 '경건형'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이성형은 세계를 이성화시키고 체계에 몰두하지만 경건형은 세계를 신화화하고 신화에 몰두한다. 이성형이 교양과 지식을 사랑한다면 경건형은 자연과 예술을 사랑한다. 헤세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정신적 체험은 이성과 경외심의 끊임없는 화해, 즉 그 위대한 대립을 서로 동등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하고 했다. 이것이 헤세의 근본 사랑인 단일 사상, 혹은 함일 사상이다. 65쪽


헤르만 헤세의 소설은 교양소설, 발전소설(성장소설)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그 소설 속 주인공들은 양극을 자신 속에서 협주곡으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정신적 인간이다.  <유리알 유희>같은 대작을 쓰기도 했지만 시와 단편은 물론 동화를 쓰기도 했다. 동화에서도 음악은 주인공의 삶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파리의 꿈> <아이리스>는 대표적 음악동화이다. <아이리스>의 주인공 안젤름에 대해 <헤르만 헤세 전집>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종종 안젤름은 눈과 귀, 후각과 촉각이 섬세하고 다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고 기뻐 놀라움에 빠졌다. 아름다운 찰나적 순간에 음색과 소리와 문자가 서로 비슷하고, 빨강과 파랑, 딱딱함과 부드러움이 같다는 것을 느꼈다. (헤세 전집 6권 114쪽 재인용). 78쪽

이 책에는 폴커 미헬스가 편집한 <헤르만 헤세 전집>의 인용글이 많이 나온다. 읽는 책에 인용된 책들을 구해서 다시 살펴보는 나로서는 이런 부분이 너무 황당했다. 왜냐면 한국에서는 번역하지 않은 책이기 때문이다. 독일 작가가 편집한 독일어 책에서 인용을 하다니, 한국 독자들은 어쩌라고??? 홧김에 독일의 헤세전집을 사봐? 그럴 능력없어서 그냥 조용히 지나가기로.

<아이리스>를 훑어본다. 제시부는 낙원에서의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이야기한다. 발전부에서는 낙원에서의 이탈을 그린다. 재현부에서 다시 낙원으로 회귀한다. 동화 속에서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고 자연과 정신이 종합을 이루며, 그것을 통해 게시를 받는다는 노발리스의 동화 이론을 반영한 전형적인 음악 동화다. 88쪽


아마도 한국의 독자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헤세의 소설은 <데미안>일 것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몸부림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는 구절은 <데미안>을 안 읽은 사람들까지도 알고 적절한 때 인용하는 문장이 되었다. 이런 일은 아마도 <햄릿>에서 가장 많이 일어나는 것같다.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툭하면 끌어다쓰는 문장, 그 번역과 해석이 맞든 틀리든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인용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실제로 햄릿을 읽은 사람 손들어보세요^^

<데미안>은 니체 사상이 진하게 드러나는 책이다. 옛 것은 끝나고 새로운 신과 새로운 도덕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한 줄로 니체 사상을 요약할 수 있겠다. 니체뿐 아니라 분석심리학자 융도 소환한다.

<데미안>은 융의 분석심리학의 산물이다. 주인공 싱클레어가 걷는 길은 융의 '개성화 과정'이며, 싱클레어의 꿈과 데미안의 그림 분석,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인 피스토리우스가 언급한 집단 무의식과 개인 무의식 이룬, 영지주의와 종교적 신비주의도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90쪽

<데미안> 역시 음악으로 보자면 소나타 형식이다. 이 책에서 펼치는 소나타를 감상해본다.

싱클레어의 가정에서 풍기는 밝은 세계는 ~~ 참회, 용서, 사랑 등의 성경말씀이 잇는 기독교적 빛의 세계이다. 그것은 으뜸조를 띠고있는 소나타 제1주제라고 할 수 있다. ~~~ 죄와 악을 상징하는 제 2주제 ~ 91쪽

싱클레어는 데미안, 즉 무의식 속에 깊이 숨어잇는 마성의 음에 의해 인류의 원초적 어머니와 일치하여 자기완성을 이루게 된다. 원조에서 이탈된 소나타의 상반된 두 주제의 조성은 많은 전조를 거쳐 다시 원조로 귀환해 최상의 신적인 화음을 이루었다. '어머니 神' '아들 데미안' '성령'이라는 삼위일체의 성스러운 화성이 성립된 것이다. 103쪽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살펴본다. 사실 나는 <데미안>에서 유명한 "새는 알을 깨고~ "보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 나오는 이 대사를 더 좋아한다. "사랑하는 친구여, 우리 둘은 태양과 달이며 바다와 육지다. 우리의 목표는 서로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식하고 서로가 가지고 있는 것을 서로 보고 존경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나르치스가 골드문트에게 한 말이다. 이 역시 헤세 소설중에서 많이 인용되는 문장이다.

이 책 역시 소나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제시부에서는 나르치스에로의 의존과 이탈을, 발전부에서는 자유와 방랑의 시기를, 재형부에서는 귀환과 정착, 성숙과 결실의 시작을 그린다.

<헤세, 토마스만 그리고 음악>에서는 종결부의 코다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보통 회상부라고도 하는 코다는 소나타 형식 악장의 중요한 부분으로 재현부 끝 다음에 연상되는 그 무엇을 언급하는 곳이다. 골드문트의 에필로그는 나르치스의 가슴에 불꽃을 타오르게 하면서 나르치스의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고 있다. 121쪽.

저자는 조형예술의 한계성과 음예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정신의 언어를 조형 예술로써 표현하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유형의 실체인 조형 예술은 가시의 세계이며 현실의 세계라 할 수 있는 공간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예술로서는 가능하다. 음악은 토마스 만이 언급한 것처럼 예술 중에 가장 신비적이면서 마성을 지닌 세계이고, 동시에 가장 질서 정연한 정신의 언어이다. 122쪽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헤세의 두 심성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이면서도 지식인이라는 문학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드러낸 것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고 생각한다. 문학가는 어떠해야 하고, 예술가는 세계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 것인가를 두 인물을 통하여 표현한 것이다.

<헤세, 토마스 만 그리고 음악>에서 저자 이신구작가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헤세가 시도한 단일사상을 조형예술로 표현하는 것에 실패했고, <유리알 휴희>에서 음악을 통하여 단일사상을 실현한다고 썼다. 특히 바흐의 <푸가>를 통하여.


<헤세, 토마스 만 그리고 음악>은 354쪽으로 편집되어 그리 두꺼운 책은 아니다. 단순히 이 책만 읽으면 하루 이틀이면 끝나는 분량이다.

그러나 그 내용에는 헤세와 토마스 만의 작품들이 여럿 들어있어서 한 번의 리뷰로 끝내기는 무리이다. 이 책에서 거론한 그들의 작품은 낱개의 개별 작품 리뷰로도 장문의 글이 될 것이다. 다행히 거론된 작품들을 이미 읽었지만 온전히 다 기억하고 있지는 못해서 <헤세, 토마스 만 그리고 음악>을 읽으며 여러 번 읽기를 중단하고 이 책에 등장한 작품들을 다시 들춰보곤 하였다.


다음 발행에는 헤르만 헤세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유리알 유희>를 바흐의 푸가 구성과 비교한 내용을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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