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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Feb 02. 2021

미용실에 다녀왔다.

나의 70번 째 생일에.


머리를 잘랐다. 두 달 만이다.

미용실에 안가고 두 달 씩이나 버틴 것은 겨울모자 덕분이다. 단골 미용실에 지난 일년간 한 번도 가지 않아서 오늘 불쑥 거기로 가기가 좀 쑥스러웠다. 뭐 이런게 다 쑥스럽기까지! 망설이다가 다른 미용실로 갔다. 처음 가는 집이다. 마침 헐거워진 안경도 조일 겸 안경집 바로 옆 미용실로 갔다.


손님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바로 의자에 앉아 마스크를 쓴 채로 커팅을 하기 시작했다. 안경은 거울 앞에 벗어두었다.

“머리 자른 지 두 달 되었거든요. 그동안 길어진 만큼 잘라주세요.”

“예, 많이 길었네요. 저희 미용실에 처음오셨죠?”

“예, 그동안은 병원에서 잘랐어요.”


지난 일 년 동안은 심장내과 진료 때문에 다니는 대형병원의 미용실에서 머리를 잘랐었다. 그러다가 오늘 처음으로 동네 미용실에 간 것이다. 미용사는 염색도 안하고 펌(파마?)도 안한 내가 궁금한 모양이다.

“얼굴에 주름이 하나도 없네요.”(미용사들은 으레 손님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애쓴다.)

“그래도 나이가 70을 넘었다오.”

내 나이 70살은 참 길다. 길다니, 나이가 길다니? 그렇다. 70살이 된지가 일년이 넘는다. 음력 1950년 12월 생이라 띠로는 호랑이 띠. 양력은 그 해를 넘겨 이듬해 2월. 이러니 내 나이는 음력, 양력, 만 나이, 이런 식으로 몇 가지 나이를 가지고 있어서 처음 시작한 나이가 일년이 넘어갈 때도 있으니 참 우습다.


“그런데 이렇게 염색도 안 하시니까 나이가 훨씬 더 들어보이잖아요. 이제 70이신데.”(어어 어? 이거봐라. 더 늙어보인다구?)

늙었어도 여자인지라 나이가 훨씬 더 들어보인다는 말에 그만 빈정상하고 말았다.

“늙어가면서 골빈 사람될까봐 머리 속 채우느라 바쁜데 뭐 머리카락까지 신경쓸 여유가 있나요?”(머리카락에 힘주는 미용사에게 한방 날렸다.)

미용사는 완전한 엇박자 대화를 이어갔다.

“저도 그전에 병원에 환자들 머리 잘라주는 봉사 많이 다녔어요. 봉사라고 해도 사실은 연습하는 거지요.”(이 말이 지금 왜 필요한거야???)

“요양원 할머니들은 서로 자기 머리를 더 예쁘게 잘라달라고 해요.”(왜, 요양원 할머니들 얘기까지???)

어쨌든 내 머리는 2개월 자란 길이만큼 잘려나갔고, 깔끔해졌다.


“다 끝났어요. 먼저번에 머리를 안 예쁘게 잘라서 좀더 신경써서 잘랐어요.”(그래 좋다. 여기까지는그런대로 들어준다.)

“그래서 돈주고 제대로 잘라야 한다니까요.(뭐? 돈 주고? 나 돈주고 자른 머리다. 거금을 주고.)

미용사는 몇 번이나 자기 혼잣말을 이어갔다.


“얼마에요?”

“만 삼천원요.”

난 만 오천원을 주며 수고했다고 말했다. 미용사는 얼른 다시 2천원을 내 손에 쥐어준다.

“병원에서는 공짜로 자르셨을텐데 이렇게 돈내고 자르시는데 더는못 받아요.”:

(~~~ 그런거였었어? 내가 병원에서 잘랐다고 했더니 이발봉사  사람에게 공짜로 자른 머리인  알았었던거야? 여기  천원이라구?  병원에 들어와있는 ㅇㅇㅇ미용실에서 25,000원주고 잘랐는데.)

기어이 미용사의 손에 2천원을 더 쥐어주곤 미용실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참 많은 생각들이 얼기설기 엮이며 드나들었다.

미용사의 고정관념, 모든 미용사들이 아니고 아까 그 미용사의 고정관념; 병원에는 미장원이 없다. 병원에는 미용봉사하는 사람들이 무료로 환자들 머리를 깎아준다. 공짜로 깎은 머리는 돈내고 깎은 머리보다 안 예쁘다. 이렇게 자기가 아는 것이 그것 뿐인 고정관념으로 나를 대했던 것이다.


집으로 절반쯤 오면서 내 생각은 미용사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왔다. 생각해보니 나 스스로가 너무 웃긴다. 교만하고 오만하다. 누구든지 나를 알아줘야하고 내 가치에 상응하는 대접을 해줘야 한다는 특권의식이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가치를 무엇으로 남들이 판단한단 말인가? 판단할만한 가치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

미용사가 나를 그렇게 대한 것이 나는 왜 어처구니없다는 것일까? 미용사는 아무 잘못이 없다. 굳이 한 가지 꼽자면,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자신의 고객에게 나이보다 더 늙어보인다는 말을 한 것은 좀 매너없는 짓이기는 하지만.


하루 종일 영업시간 내내 단정히 하려고, 보기좋게 가꾸려고 드나드는 여자들을 숱하게 봐오면서 미용사의 눈은 사람보는 눈이 좀 뜨였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나를 대했을 때도 척 알아보는 감이 있었을 것이다.

머리 염색도 안한 할머니, ‘뽀골이 파마’조차도 안 한 할머니, 내 행색은 그런 모습으로 평가되었던 것이다. 나에 대한 그런 평가를 나는 왜 어처구니없어 했는가? 오만이다. 타인을 하찮게 평가하는 사람은 그 미용사가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이다.



별로 가꾸지 않고 다니는 나의 행색 때문에 겪는 일은 미용실에서 뿐 아니다. 카페에서도 그렇다.

식사를 배부르게 한 경우엔 식후 커피가 부담스러워 에스프레소를 마실 때가 있다. 카운터에서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면 꼭 이런 설명을 듣는다.

"그거 아주 쓰고 쪼끔 나오는 건데요."(알아, 안다구!)

어느 곳 한 군데서 겪었던 일이 아니다. 몇 군데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시킬 때마다 겪는 카운터의 설명이다. 왜일까? 내 행색이다. 머리 전체를 뒤덮은 흰머리와 하나도 빛날 게 없는 차림새인 할머니가 에스프레소를 주문할 리가 없다. 에스프레소가 뭔지 잘 모르고 주문했는데 막상 쓰디 쓴 물 쬐끔 주면 따지고 덤벼들 것 같아서 사전예방을 하는 것같다. 아니, 뭣도 몰라보이는 나에게 베푸는 친절일 것이다.

이런 대응에도 사실은 어처구니없어 할 일은 아니다. 카페 카운터의 알바생이 나를 그런 사람-에스프레소도 모르는 할머니-로 취급하면 왜 안된다는 건가? 나를 몰라준다고? 나를 알아봐달라고? 이것 역시 어처구니없는 사람은 오히려 나 자신이다.



미용사의 단편적인 생각과 대응을 생각하다가, 카페 카운터 담당자의 에스프레소 설명을 생각하다가 인간의 "고정관념"을 파고 들었다. 우리는 많은 고정관념을 지니고 산다. 고정관념이라는 것은 "그것 밖에 모른다"는 말일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고정관념을 하나 예로 들어보자.

화장실의 남녀 표지판이다.

화장실 표지판을 현재 사용되는 상징과 다르게 표현한다. 바지를 입은 여자 -댄디 룩의 여자와 스코트랜드의 전통의상 킬트 -체크무늬 미니 스커트를 입은 남자를 화장실의 남녀 표지판으로 붙여놓는다면?
어디가 여자 쪽이고 어디가 남자 쪽인지 혼란을 일으키는 사람은 나처럼 어리석은 사람들 뿐일까? 잘나고 똑똑한 많은 사람들도 덩달아서 혼란을 일으킬 것이다. 멋쟁이 모자로 남녀쪽을 구분하는 표지도 있는데 그 색깔을 남자쪽을 빨강, 여자쪽을 까망으로 한다면 역시 또 혼란이 올 것이다. 모자의 남성형 여성형의 모습보다는 먼저 눈에 띠는 색깔 때문에 혼란을 겪을 것이다.
고정관념의 작은 틀을 하나 깨는 것, 이것에도 우왕좌왕하는 것이 삶의 실체인 것 같다.
그 동안 지니고 있던 부정적인 생각들의 고정관념들을 새해를 맞아 모두 깨어버리고 긍정적인 눈으로 다시 보아야겠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편견의 담장도 무너뜨리고 좀더 폭넓은 시각으로 모든것을 수용해야겠다.



오늘은 나의 70번째 생일이다. 만 나이로 꽉 찬 70이다. 음력 양력 만 나이 어떤 것을 대입해도 모자라지 않는 70이다. 자식들이 장성한 이후로, 며느리들과 사위가 생긴 이후로, 손주들이 바글바글 늘어난 이후로, 오늘은 처음으로 한가한 생일을 보냈다. 코로나 덕분에 이 편안하고 한가한 생일을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으로 채웠다. 육신이 쇠하는 만큼 영혼의 깊이가 깊어지면 좋겠다. 고깝게 생각지 말고 넓은 포용력을 지니면 좋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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